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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25

       

       

       붉은 문을 통과하니 짧은 복도가 나왔다.

       

       콘크리트와 골조가 그대로 드러난 벽과, 꺼져있는 조명. 마력이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고, 구로베 교수가 작게 불빛을 띄워 앞을 밝혔다. 

       

       짧은 복도가 지나자 복도는 두 갈래로 갈라졌다. 벽에 부착된 표지판을 구로베 교수가 읽어보고는 말했다.

       

       『한쪽은 아넨에르베 연구소, 다른 한쪽은 내부시설 확장 공사중이라고 쓰여있군.』

       

       가야 할 곳은 당연히 아넨에르베 연구소 방향이었다. 까뜨린느-방숙자도 연구소 방향에서 영혼 에너지가 느껴진다고 말하고 있었다. 

       

       『연구소 쪽으로 가 보죠.』

       

       나는 주변의 기척을 주의하며 앞장섰고, 구로베 교수는 우리 주변으로 방어막 겸 소리 차단 역장을 유지했다. 

       

       아넨에르베 극동 제3지부 연구소. 

       

       지하임에도 불구하고 꽤 규모가 넓어 보였는데, 이곳저곳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지만 아침이 되기 전에 돌아가야 하는 우리로서는 그럴 시간은 없었다.

       

       최우선 목표는 ‘령입자흡인기’의 확인과, 가능하다면 그 생산 시설을 파괴하는 것. 

       

       엊그제 학교에서 령입자흡인기들이 숨겨진 지도를 발견하고도 바로 파괴를 감행하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었다. 부숴봐야, 근본적인 생산시설을 파괴하지 않으면 어차피 새로 들여올 테니까.

       

       이 지하 연구소의 생산 시설만 파괴하면, 이제 학교는 교내의 령입자흡인기가 파괴되어도 더 이상 새로 들여놓지 못하게 되리라.

       

       『까뜨린느는 이쪽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저 복도 끝에 뭔가 있는 것 같다네요.』

       

       한쪽 방향으로 이어진 긴 복도. 우리는 긴 복도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연구소 복도 내에는, 이런저런 시제품이나 전쟁무기의 사진이나 그림이 포스터처럼 벽에 걸려 있었다.

       

       철도 위에 올려진 커다란 열차포, 

       

       영국 깃발이 달린 전차를 깔아뭉개는 집채만한 전차,

       

       스텔스 전투기처럼 세모꼴로 생긴 전투기,

       

       우주를 배경으로 납작하게 생긴 비행기,

       

       공중을 날아오르는 로켓……

       

       그런 사진들을 보며 송병오 녀석이 흥분해서 외쳤다.  

       

       “허어, 대단하군! 땅크며 로켓트를 이렇게 크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과학기술이 대단하긴 대단한가보이!” 

       “이걸 전부 이 지하에서 만들어냈단 말이오?”

       

       이유하도 조금 놀라며 물었고,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그건 아닐걸. 독일 본토에서 개발중인 것들이겠지.  여기는 그림만 걸어둔 거고……. 아니, 이건 또 뭐야. 뭔 UFO처럼 생긴 것도 있네.”

       “유에포……?가 무엇이오?” 

       “그런 게 있어. 이건 뭐라고 읽지? 브이-세븐, 레이치……”

       

       구로베 교수가 말했다. 

       

       『파우-지벤 라이히스-플루크-샤이버(V-7 Reichsflugscheibe). 일본어로 번역하면, 제국비행원반인가. 하우네부라는 명칭이 붙어 있군.』

       

       아니, 무슨 UFO같은 것도 만들어? 독일 놈들도 진짜 별에 별 이상한 것들을 다 만들고 있구나. 이쯤 되자 나도 지금 세계에서의 독일의 과학기술력에 대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이 쪽이 진짜배기였어. 대동아공영회의 기술은 독일로부터 빌려온 것들이겠구나.’ 

       

       아무리 방공협정이니 추축국이니 하며 동맹이라고는 해도, 기술적으로는 독일이 더 뛰어나겠지. 

       

       그런데 일본 입장에서는 독일로부터 기술을 들여오는 것이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으니, 이런 식으로 지하에 비밀 연구소를 차린 것이려나? 내막은 모르지만 아마 그럴 것 같았다.

       

       ‘그나저나.’

       

       나는 그림들에서 시선을 떼고, 구로베 교수를 흘깃 바라보며 생각했다. 

       

       ‘구로베 교수, 이 사람…… 신기하네.’

       

       아까부터 보니 구로베 교수는 독일어에 굉장히 능통해 보였다. 

       

       저번에 구로베 교수와 오해가 얽혀서 싸웠을 때에도 그 능력의 격차를 실감했는데, 마법 능력도 그렇고 독일어에도 능통하니, 역시 아군이 되니까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는 독일어를 술술 읽을 줄 아는 구로베의 도움이 크기도 했고.

       

       『독일어를 잘하시네요.』

       

       내 말에, 구로베 교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다.

       

       『대단한 것은 아니다. 젊었을 때, 독일에 유학을 다녀왔으니.』

       

       젊은 시절 독일로 유학을 다녀왔다는 구로베. 그런 얘기를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들리던 말로는 아마, 본인의 전공인 마술학 및 이계생물학을 배우러 독일에 다녀왔다고 했던가.

       

       내가 살던 세계에서도 과학과 의학, 기초과학 분야는 독일이 알아줬었으니, 지금 마술학과 이계생물학 등의 분야에 있어서 독일이 선진국인 것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구로베 교수는 그런 곳으로 유학을 갔다온 엘리트였구나. 

       

       구로베 교수는 말 없이 걷다가, 아까 했던 말에 뒤늦게 덧붙이듯이 문득 말을 꺼냈다.

       

       『아내를 만난 것도 그곳에서였지. 그녀도 나처럼 독일 유학생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긴 모꾸센.』

       『어…… 그렇군요?』 

       

       여기서 갑자기 사별한 아내 얘기를 꺼낸다고? 뭐라고 반응해야 하지? 뭐 갑자기라고는 해도, 아내를 독일 유학 중에 만났었다면 구로베 교수 입장에서는 독일 얘기가 나온 김에 죽은 아내가 떠오를 만도 했다. 

       

       ‘10년 전 죽은 아내를 아직까지 잊지 못해서 되살리려는 연구를 계속하는 사람이니까.’

       

       그나저나, 이름이 ‘긴 모꾸센’이라. 이거 아무리 봐도 한국, 아니 조선인 이름같은데? 내가 이야기를 계속해달라는 뜻으로 구로베 교수를 바라보자, 그는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짐작했겠지만 그녀는 조선인이었다. 그 당시에는 드물었지만, 나처럼 독일로 유학을 온 조선인 유학생이었지. ……그 즈음의 독일은 아름다웠고, 그녀는 독일을 좋아했다.』

       

       조선인이 맞구나. 긴 모꾸센이라는 이름이라면, 아마 우리식 발음으로는 김목선이라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일본식으로 불리는 것을 싫어해서, 나는 독일식 애칭으로 ‘작은 생쥐’라는 뜻의 ‘모이셴(Mäuschen)’으로 부르곤 했었다.』 

       『어……』

       『마인 모이셴(Mein Mäuschen)…….』

       

       그 말을 할 때의 구로베는 순간적으로 어딘지 몹시 애틋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아니, 미친.’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큰 실례였지만, 나는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미친. 상상이 안 가네.’ 

       

       이 음습하고 흉흉한 인상의 구로베 교수가 한때는 연인에게 정다운 말투로 ‘나의 작은 새앙쥐’ 따위의 말을 속삭였다고 생각하니, 이 사람에게 그런 로맨스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뭔가 인지부조화가 오는 느낌이었다. 

       

       “…….”

       

       내 옆의 이유하마저도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조금 징그럽다는 눈길로 구로베 교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유하야, 네 전공 교수님이잖아. 스승님을 그런 눈길로 바라보면 안 돼.

       

       [“……저 양반이 저렇게 말하니께 징글맞은디.”]

       

       까뜨린느-방숙자도 어딘지 꺼림찍하다는 듯한 느낌의 파장을 내뿜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엉터리 영애말투 컨셉에 잡아먹힌 네가 그러면 안 되지.

       

       아무튼 구로베 교수가 괴팍한 성격임에도 의외로 민족차별 없이 조선인 학생에게도 공평했던 이유가, 아내가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나. 의문이 하나 풀린 느낌이었다.

       

       ‘그런 과거가 있었구나.’

       

       그렇게 복도를 지나가던 중, 까뜨린느-방숙자가 문득 소리를 냈다.

       

       [“저기 말여. 저쪽에서 엄청나게 쎄게 느껴지는디 저쪽이 긴거 같어…….”]

       

       까뜨린느 방숙자는 손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우리는 방숙자의 내비게이션을 따라, 문을 열고 한 공간에 들어섰다.  

       

       얼핏 보면 뭔가의 제조시설처럼 보이는 구역이었는데, 구로베 교수가 불빛을 크게 만들어 띄워 내부의 모습이 드러나자 이유하가 작게 숨을 삼켰다.

       

       마치 전원이 꺼진 로봇처럼, 벽에 힘없이 걸려있는 수많은 마네킹들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가 열려있고 그 속이 비어있는 것을 보니, 아직 완성되지 않은 제조 단계의 자동인형인 듯 했다. 구로베 교수가 말했다.

       

       『아우토마티셰-푸퍼(automatischepuppe). 자동인형이라고 쓰여 있군.』

       

       벽에 걸린 마네킹들을 바라보던 까뜨린느 방숙자도 문득 소리를 내었다 . 

       

       [“이 마네킹들 말여, 익숙혀.”]

       “응? 익숙하다니.”

       [“그니께, 내가 원래 핵교 과학실 인체모형에 들어가 있었잖애. 그때 들어가있던 학교 인체모형이랑 뭔가…… 결?이 비슷한디……”]

       

       결이 비슷하다라. 그러고보니 전에 듣기로 여기 있는 마네킹들은 시마즈 제작소라는 곳에서 만들었다던데, 학교에 원래 있었던 과학실 인체모형도 같은 메이커 제품이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마네킹은 일본이 생산한 것이지만, 진공관에 영혼을 주입하고  마네킹에 심는 것은 독일 놈들이 만든 기술이라서 여기서 자동인형화 과정을 진행하는 듯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찾는 령입자흡인기도, 이 근처일 터. 

       

       『저곳일 듯 하군. 보게.』

       

       구로베 교수가 중얼거렸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바로 건너편의 문이었는데, 문 앞쪽에 큼지막하게 달린 문패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Achtung!]

       [Pneumapartikelsauger]

       [Seelenröhrerechnerfabrik]

       [Seelenfährdung]

       

       ……아니 시발 이걸 어떻게 읽으라고요. 난 읽을 엄두도 안 나서 구로베 교수를 바라보았고, 그는 문패를 보며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위의 아크퉁은 경고 문구고. 둘째 줄에는 프노이마-파티켈-자우거, 라고 쓰여있다. 령(靈)의 입자를 빨아들이는 것……』

       『일본식으로 말하면 령입자흡인기가 되겠군요.』

       

       나는 그의 말을 받으며 대답했고, 구로베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었다. 

       

       『그래. 또한 아래에 적힌 것은, 젤렌-뢰흐러-레흐나-파브리크…… 영혼관(管) 계산자 제작소라는 것 같군. 그 아래에 더 있는 것은 역시 경고 문구다. 젤렌-페어둥…… 영혼 재해인가.』

       

       제대로 찾아왔구나.

       

       저 안에, 아마도 교내에 숨겨진 령입자흡인기의 원본으로 추정되는 기계가 있는 것이다.

       

       덧붙여 영혼을 담는 진공관과 원시적인 진공관 컴퓨터 제작 기술도 저 안에 있는 것이다. 나는 문에 달린 조그만 원형 창문의 가림막을 들추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자네! 뭐가 좀 보이나?”

       “글쎄…….”

       

       창문은 마치 전자레인지 전면창처럼 두껍고 탁해서 내부 공간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빛.”

       

       강렬한 백색 빛이 희미하게나마 보인다는 것은 기계가 가동중이라는 뜻이리라. 영혼을 끌어당기는 그 기계가.

       

       문 너머에 나치 병사나 나치 연구원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확인하려면 당장 문을 열고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다. 

       

       ……잠깐. 너무 마음이 급해졌나? 아무리 급해도, 혹시라도 문이 열렸을 때 경보 알람이 울릴지 정도는 확인해야겠지.

       

       『구로베 선생. 혹시 이 문에 보안장치같은 것이 있습니까?』

       『마력공학 보안장치같은 것은 없는 듯 하군. 전자장비라고 할만한 것도 달려있지 않아.』

       

       마력을 이용한 기술의 대가인 구로베 교수가 없다면 없는 거다. 나는 이번에는 까뜨린느 방숙자에게 물었다.

       

       “숙자야. 네가 보기엔 어때? 문에 무슨 영혼 에너지를 쓴 수작같은게 걸려 있어?”

       [“저 안쪽에서 나오는 기운이 엔간히 쎄서 그지, 문짝에는 암것도 없는 것 같은디……”]

       

       방숙자도 문에는 위험이 없다고 증언했다. 이 문을 연다고 어떤 알람이 울리거나 적이 몰려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왔으니 더 망설일 필요는 없으리라. 충분히 대비는 했으니, 당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저 빛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것 말고는 지금 내가 해야 할 행동은 없었다. 나는 동료들을 한번 슥 둘러보고는 문고리를 잡았다. 

       

       『좋아. 들어간다.』

       

       내가 문고리를 잡고 돌리려는 그 때, 

       

       “멈추시오!”

       

       이유하가 불쑥 내 옆으로 달려들어 내 손목을 강하게 잡아채고는, 

       

       “어어.”

       

       내가 어어 하는 사이에 달려들던 그대로 나를 힘껏 껴안고 옆으로 몸을 던져, 

       

       나는 이유하와 함께 바닥을 나뒹굴게 되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1. 비밀병기나 오컬트 하면 역시 나치독일이죠.

    잡담이지만, 사실 《경성헌터》의 초창기 구상 동기 중 하나도 이것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나치독일이 상식 밖의 비밀병기를 만들거나 오컬트에 심취하는 것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창작물에서 주구장창 나오는 단골 소재인 반면,
    동시대 동아시아에서 비슷한 포지션이었던 구일본제국이 나치처럼 비밀병기나 오컬트적인 뭔가를 꾸미는 것은 의외로 잘 없었거든용.

    그래서, 그런 것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본작을 쓰게 되는데에 한몫 했어용.

    2. 누구에게나 청춘과 낭만은 있는 법……. 구로베 교수님 또한 한 명의 남자…….

    작중 구로베의 사별한 아내가 독일 유학을 다녀온 조선인 여성이라는 설정에 대해, 고증 관련해서 조금 덧붙여 봅니다. 작중 배경으로부터 10년 전이면 1920년대인데, 당시 조선인 여성이 독일 유학을 다녀올만한 환경이었는가? 라는 의문이 독자분들께 들 수도 있어서요.

    독립운동가 박승철(朴勝喆; 1897~?)이 1922년 독일 유학을 하면서 쓴 글에는, 자신보다 먼저 독일에 유학을 온 조선인이 베를린에 14명, 포츠담에 5명, 남독일에 13명 등 모두 32명이라고 적었습니다. 또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유럽에 정착해서 사는 조선인들도 있었다고 했던 것을 보면, 유럽에 유학을 간 조선인이 어느 정도는 있기는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유럽 특히 독일로 유학을 다녀온 조선인 유학생은 대부분 남성이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여성 유학생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사실 여성이 해외로 유학을 다녀온다는 것도 극소수였고 또 그 극소수 중에서 대부분은 일본 유학이 주류였지만, 유럽여행을 다녀온 나혜석이나 스웨덴으로 유학을 갔었던 최영숙(1906-1932)의 사례도 있다시피 독일에서 유학한 여성 유학생이 한명쯤 있었다고 해도 크게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3. 유하는 왜 주인공을 안고 뒹굴었을까용?

    그건…… 다음 화에서……!

    그럼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드리며, 즐거운 주말 되세용!!!!!!!!

    다음화 보기


           


Gyeongseong’s Hunter Academy

Gyeongseong’s Hunter Academy

경성의 헌터 아카데미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Artist: Native Language: Korean

I woke up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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