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6화. 뭐가 있다구요? ( 3 )
예로부터 가장 빠르게 결과물을 도출하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사람을 갈아 넣는 것.
만신전의 무수한 인재들이 연옥을 분석하기 위해 매달렸다.
새롭게 등장한 사후세계를 정의하고 토의하기 위해서!
그 결과 경이로운 속도로, 연옥에 대한 경전이 탄생했다.
그 이름도 찬란한, <연옥의 심판 : 죽음 이후 영혼이 가는 길.>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눈물을 머금은 경전이었다.
“어흐흐흑. 이제, 드디어 잘 수 있어…….”
“그, 글씨를 너무 많이 써서 손가락이 안 움직여….”
눈물의 주인은 주로 조교 사제들이었다.
무려 600페이지가량의 두께를 자랑하는 경전.
어찌나 두꺼운지 사람 머리통을 내리치면 그대로 목이 꺾여 죽을 것이 분명했다.
“……이거 정말 책 맞아요? 이스칼 사도님 방패 아니에요? 아니, 그 전에 이걸 얼마나 걸려서 완성했다고요?”
“제가 들은 것이 맞으면 아마 3개월인가, 4개월인가. 그랬을 겁니다.”
“…그게 되요?”
“하니까 되던데요.”
오죽했으면 인간의 육체를 벗어난 케니스 용사마저 이 초월적인 집필 속도에 혀를 내둘렀을까.
만신전에서는 4개월간 지옥의 마라톤을 거처 완성한 이 소중한 경전을 홀로 간직할 생각이 없었다.
배움이란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
경전의 복사본이 대륙 곳곳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반응이 온 곳은 신성로마니안 제국의 황제, 카이사르였다.
기적을 빌어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던 카이사르는 신앙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국가 단위로 종교 행사를 적극 권장하고 있으며, 본인과 아들이 직접 성도로 방문해 세례명을 받을 정도였다.
“허허허허. 어찌 이런 별세계가 있을 수 있단 말이냐?”
경전을 찬찬히 읽은 카이사르가 감탄을 뱉었다.
글로 적혀있음에도 연옥이라는 곳의 풍경이 생생하게 보이는 듯하다.
“사방 가득한 불길과 온통 가득한 노점에 신비한 먹거리! 하늘에 매달린 커다란 수레바퀴는 어떠하며 온갖 신비한 장치들이 가득하구나!”
카이사르 옆에서 열심히 일하던 재상이 퉁명스레 말했다.
“거, 폐하. 신앙 공부도 좋은데 일단 오늘 업무는 끝내고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조용히 좀 해보게. 지금 좋은 생각이 날 것 같으니까.”
카이사르는 간질간질한 영감에 골똘히 집중했다.
뭔가…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를 것 같은 기분.
“ㅡ하앗! 이얏! 하압!”
문득 우렁찬 기합 소리에 창밖을 내다보니 그의 하나뿐인 아들, 율리우스가 열심히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절로 나오는 흐뭇한 미소에 카이사르가 턱수염을 쓸었다.
‘어린 녀석이 언제 저리 컸을꼬?’
아이들은 금방 자란다.
잠시 한눈을 팔면 쑥쑥 자라는 것이 참 놀라울 뿐.
“…아니 잠깐. 아이들?”
카이사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보게, 재상. 지금 북부에 있는 몬테그로스에서 해마다 열리는 축제가 있지 않은가?”
“예, 루샨 공작의 주도하에 ‘죽은 자들의 행진’이라는 축제가 열리고 있다고 합니다.”
탄탈로스의 지옥문과 가장 가까이 있는 도시, 몬테그로스!
그곳에서는 일 년에 한 번씩 밤의 기병들이 도시를 가로지르며 행진하고는 했다.
그때 맞춰 밤의 기병이나 탄탈로스를 묘사한 온갖 예술품을 전시하는 축제가 열린다.
전시한 것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밤의 기병 대장이 몸소 가지고 간다는 소문도 있을 정도.
“축제의 인기가 어마어마합니다. 덕분에 요즘 루샨 공작의 머리카락도 다시 나고 있다고 하더군요.”
“거참.”
재상이 조금 침울하게 말했다.
카이사르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재상의 정수리를 바라봤다.
젊었을 적 여자 꽤 홀렸던 재상의 풍성한 모발은 황량하게 변한 지 오래였다.
탈모의 주된 원인이 업무 스트레스라는 것을 감안하면 황제의 탓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도 축제를 열도록 하지.”
“축제를 열 돈은 하늘에서 떨어지덥니까?”
“그냥 축제가 아니야. 연옥을 본뜬, 신을 칭송하는 축제를 여는 거야!”
재상은 말 대신 눈빛으로 대답했다.
한동안 신앙 공부에 진심이더니 드디어 성직자의 길로 가시려는 겁니까?
“눈빛이 어째 불경하군?”
“그럴 리가 있습니까?”
카이사르는 태연하게 대꾸한 재상을 한번 쏘아봤다.
“요즘 변방에서 짐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것들이 슬슬 보인다는 보고를 들었네. 괘씸하게도 말이지.”
“불경한 것들이로군요. 사냥개들을 풀까요?”
“그럴 필요까지야 있겠나. 한낱 벌레를 잡는 데 용 잡는 검을 쓸 필요는 없지.”
카이사르는 은백색 지팡이를 바라봤다. 두 마리의 사자가 하나의 보석을 물고 있는 지팡이의 이름은 사자심왕의 태양 지팡이.
신께서 직접 주신 지팡이, 이는 곧 신에게 인정받은 통치자라는 뜻이었으니.
“눈으로 직접 봐야 믿는 어리석은 자는 언제라도 있는 법. 그래서 축제를 열자고 하는 것이네. 축제만큼 제국과 짐을 화려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
“만신전에 미리 사람을 보내야겠군요. 여러 자문도 겸하고, 미리 양해도 구해야 할 테니. 얼추 틀이 잡히면 말씀드리겠습니다 폐하.”
황제는 지시하고 방향을 정해서 이끄는 사람이다.
나머지 세세한 것들은 부하들이 할 일.
카이사르와 재상을 통해 결정된 축제는 여러 유능한 인재들의 손을 거치며 체계적이고 현실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만신전에서도 몬테그로스에서 열리는 축제의 순기능을 톡톡히 맛본 참이다.
그러던 와중 제국에서 연옥의 모습을 본뜬 축제를 연다고 하니, 쌍수를 벌려 환영했다.
“딱딱하고 지루한 책과 설교만으로는 백성들에게 쉬이 다가가기 어려운 법입니다.”
“제국에서 축제를 연다면 더 친근하게 연옥을 널리 알릴 수 있겠어요.”
그렇게 축제의 규모는 점점 커졌다.
“축제, 그것도 황제께서 직접 말씀하신 축제라고? 이건… 대박의 향기가 나는데?”
“여기 사탕이 왜 있는 거야! 연옥 경전도 안 읽어봤어? 구름처럼 푹신한 간식이 있다고 하잖아. 그걸로 바꿔! …그게 뭐냐고? 그건 돈 받는 네가 알아 와야지!”
“반들반들하게 빛나는 과일이 꼬챙이에 꽂혀 있는데 무척이나 달았다…. 이건 도대체 뭔 음식이지?”
돈 냄새를 맡은 상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연옥 축제의 분위기에 맞춰 가게를 재단장했다. 경전에 묘사된 음식을 최대한 비슷하게 따라 하기 위해 일류 요리사까지 총동원됐다.
거리는 연옥 특유의 화려한 느낌으로 치장되기 시작했다
“크흐흐. 내 걸작을 세상에 드러낼 시간이 왔구나.”
“연옥과 망자의 재판…! 아아, 영감이 샘솟는다!”
“죽은 자들의 행진처럼 밤의 기병이 오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몬테그로스의 축제를 보며 군침 흘리던 예술가들이 부리나케 조각상과 그림을 가져와 전시한 것이다.
제국이라는 거인이 저력을 발하며 연옥 축제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니, 3개월 만에 축제 준비가 끝나는 기염을 발했다.
“하나 된 분에게서 직접 받은 왕홀 앞에서 짐이 선포하노니! 축제의 시작이다!”
카이사르가 태양 지팡이를 높이 들어 올리며 축제의 시작을 선언했다.
지팡이의 끝에서 눈 부신 빛이 치솟더니 거대한 반원을 그렸다. 지팡이에 깃든 권능을 퍼포먼스 식으로 사용한 것.
이에 맞춰 무구한 오색 꽃송이가 하늘을 수놓았다.
온갖 노점과 먹거리, 신비한 것들이 가득했다는 경전의 내용처럼, 거리는 온통 온통 노점과 꽃가루, 음식으로 가득했다.
축제를 즐기려는 사람까지 한가득 몰렸으니 그야말로 인산인해!
“햐. 이거 정말 장관이네.”
“그러게요. 와아. 이쪽 거리에 이런 가게가 있었나?”
루샨 공작으로부터 염탐의 임무를 맡은 프리가 공녀와 본래부터 제국 출신인 셀리나도 이 거대한 축제에 참여했다.
“아뿌부부부.”
“꺄하하하하.
“빠부! 빠뿌우우우.”
“………좋아 보이네.”
바늘 가는 곳에 실이 빠지랴.
프리가와 셀리나의 남편인 이스칼도 당연히 축제에 동행했다.
양손에는 수인 쌍둥이 딸 마리와 에리를, 가슴에는 아들 데릴을 안은 채였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이들은 온갖 색채로 가득한 거리를 보며 입을 헤 벌렸다.
“갸르르르르.”
마리가 노점상을 스쳐 지나가는 틈을 노려 꽃 한 송이를 잽싸게 가로챘다. 고양이 수인의 날랜 몸동작이 빛을 발했다.
“이 녀석 마리! 물건을 훔치면 못 써.”
이스칼이 대신 값을 치렀다. 마리는 꺄르르 웃으며 자신이 훔친 꽃을 바라봤다. 연보라색 제비꽃이었다.
“마리 쟤는 유별나게 제비꽃을 좋아하네.”
“그러게요. 나를 닮아서 취향이 우아하더라고요.”
“우아하다고? 우아한 애가 꽃을 훔쳐?”
“그 정도는 괜찮아요.”
연옥을 묘사하고 널리 알린다는 취지답게 거리에는 날개를 단 경비병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축제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려 나름 치장을 한 듯했다.
“저 앞으로 가시면 망자의 재판 공연이 있습니다!”
“연옥 축제에서만 먹을 수 있는 황천 맛 붉닭구이 팔아요!”
“삶의 굴레를 표현했다는 인생의 수레바퀴 타고 가세요! 5살보다 어린아이들은 반값!”
삐걱거리며 돌아가는 망아지 수레바퀴!
아이들은 망아지 모형에 올라타 빙글빙글 돌아가며 환호성을 터뜨렸다.
“돌려어! 취이익! 더 돌려!!”
경전에서 나온 것처럼 혼자 돌아가지는 않았다. 대신 웃통을 벗어 던진 오크 일꾼 여럿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구를 미친 듯이 돌려댔다.
프리가와 셀리나는 노점에서 신비하게 생긴 음식들을 정신없이 집어 먹었다.
“우음. 으음! 이것 좀 봐. 구름처럼 폭신한데 엄청 달아.”
“이건 반짝이는 과일들을 꼬치에 꽂은 거네요?”
연옥에 묘사된 음식들을 현실에 재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요리사가 밤잠 설치며 연구했는지.
비록 현실적인 요건으로 상당수의 음식은 재현에 실패했지만, 몇몇 음식은 비슷하게 흉내라도 낼 수 있었다.
“공녀님! 세상에 저기 좀 봐요.”
셀리나가 가리킨 곳에는 커다랗게 솟은 여섯 쌍 날개의 천사 조각상이 있었다. 가이에드의 조각상이었다.
“연옥의 재판을 담당하는 가이에드라는 천사님이라고 적혀있어요.”
“그 옆에 있는 작은 천사상은 뭐지? 천칭이랑 검을 들고 있네. 시종인가?”
작은 천사상은 미카에르의 조각상이었다.
막 후임으로 들어온 가이에드에게 온갖 일을 떠맡기고 미카에르가 신나게 쉬던 차에 연옥이 알려졌기 때문에 경전에는 가이에드의 비중이 조금 더 컸다.
불행한 우연이 빚어낸 착각이었다.
천사상 앞에서는 연옥의 재판을 묘사한 공연이 한창이었다.
그럴싸하게 만든 날개를 열두 개나 붙인 배우가 열연을 토했다.
“피고여, 반론하라! 그대는 부인의 자매, 의붓어머니와 동침했다는 것을 반론하라!”
“위대한 가이에드 재판장님! 억울합니다, 그녀들이 먼저 저의 침소에 들이닥쳐 저에게 술을 먹였습니다!”
아이들이 보기에는 다소 수위가 높은 공연!
어쩐지 공연장 앞에서 아이들의 출입을 막더라니, 이런 이유가 있었다.
공연은 클라이맥스로 다다른다.
“사실 저는 아직도 그녀의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의 있습니다! 피고인 부인의 의붓어머니는 엘프입니다! 나이는 140살! 이는 엘프 법령으로 아직 성년이 아닙니다! 인간으로 치면 고작 14살입니다!”
“어머어머 세상에.”
“나, 나도! 나도 볼 거야! 나도 보고 싶어!!”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이스칼은 공연장 앞에서 낙오됐다.
공연장을 벗어났더니 느닷없이 곳곳에서 차력쇼가 일어나고 있었다.
“굴려어어!!”
“취이익! 크하아압!”
웃통 벗은 사내들이 기합을 뱉으며 경사면을 따라 무쇠 공을 굴리고 있는가 하면, 뜨거운 열탕에 들어가서 오래 버티는 시합도 열리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세기말 풍경이람?”
“어……. 경전에 나왔던 형벌을 묘사한 곳이라네요.”
프리가와 셀리나는 양손 가득 달콤한 것들을 안은 채 우물거리며 축제의 거리를 걸었다.
아직도 축제의 밤은 끝나지 않았다.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요즘… 독자님들 모두 찬 공기를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감기 조심, 몸살 조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