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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29

   에린은 루시가 아카데미의 첫 방학 때 데려왔던 여우를 잘 알고 있다.

   

   루시가 자리를 비운 동안 여우의 관리를 맡았던 것이 그녀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세탁실에서 루시 알른의 옷에 몸을 비비던 여우를 잡은 후 목욕을 시킨 것도 에린이고.

   

   루시가 씻고 나서 남은 물에 머리를 처박으려 했던 여우를 막은 것도 에린이고.

   

   루시의 어린 시절 그림에 여우가 혀를 내밀려는 걸 막은 것도 에린이니까.

   

   그 때 당시 에린은 여우를 그저 동물이라고만 생각했기에 주인에 대한 애정이 깊다고만 생각을 했었다. 언제 어디서나 주인의 향취를 찾는 귀여운 아이구나하고 말이다.

   

   그렇지만 그 여우가 단순한 애완동물이 아니라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졌다.

   

   “…저기. 눈초리가 너무 사나운 듯 하다만.”

   “안 사납게 생겼습니까. 지금 여우님께서 하시던 일 하나하나가 머리를 스치고 있는데.”

   “어. 음. 그으게.”

   

   에린의 날 선 시선 아래에 있는 여우. 리나는 자연스레 무릎을 꿇고 있었다.

   

   숲의 주인으로서의 자존심 따위는 존재치 아니했다.

   

   에린이 리나가 했던 일 중 일부만 루시에게 이야기해도 어떤 참상이 펼쳐질지 훤한데 어찌 자존심 따위를 지키고 있겠는가.

   

   큰마음을 먹고서 본신의 사 분의 일에 해당하는 힘을 지닌 채 이 곳에 온 리나는 루시에게 쫓겨나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부디 본녀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겠느냐?”

   “변명은 제가 아닌 아가씨 앞에서 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본녀가 아무 생각 없이 그런 비정상적인 일을 했다 생각하느냐!”

   “네. 그런데요?”

   “아니다! 거기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존재한다! 숲의 주인인 본녀가 사리사욕을 위해 범죄를 저지를 리 없잖으냐!”

   “…당신 같은 게 숲의 주인이라고요?”

   “그래!”

   

   이전과 달리 본체의 힘을 어느 정도 빌려 온 리나는 자리에서 퍼뜩 일어나며 당당히 자신의 힘을 펼쳐보였다.

   

   “보거라!”

   

   그녀가 자신의 곰방에 불을 붙여 연기를 만들어내자 그것들이 여우의 모양으로 바뀌어 방 안을 가득 채운다.

   

   마법보다도 마법 같은 환상적인 풍경을 마주한 에린의 눈썹이 살짝 들리자 리나가 어깨에 힘을 더했다.

   

   여기까진 잘 됐다. 본녀의 대단함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핑계만 적당히 대면 돼.

   

   거기에 주술적인 힘이 존재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이 녀석도 설득할 수 있을.

   

   “…아가씨의 방 안에 담배 연기가 가득.”

   

   에린의 눈이 서슬 퍼래지는 것을 발견한 리나는 즉시 연기를 거두어들인 다음 다급히 말을 이었다.

   

   “걱. 걱정하지 말거라! 이는 본녀의 권능에 속한 연기이니! 보다시피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을 수 있다!”

   

   리나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방 안을 돌아다니며 냄새가 배기지 않았는지 확인한 끝에서야 고개를 끄덕인 에린은 여전히 짜게 식은 눈으로 리나를 바라봤다.

   

   “…아직도 본녀의 말을 안 믿는 게냐?”

   “아뇨.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딴 게 숲의 주인이라는 것이 믿기 힘들긴 합니다만. 특이한 영물이 있을 수도 있는 거겠죠.”

   

   에린의 시선에 짓눌리면서 리나는 참 기이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녀석이 루시의 사용인인 건 사실이지만 그래봐야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

   

   이렇게까지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단 말이야.

   

   헌데 이상하게도 이 녀석의 말에는 힘이 깃들어있어.

   

   도대체 왤까 생각하던 리나는 에린의 말 속에 예술 교단의 사도가 지녔던 것과 비슷한 기운이 존재함을 눈치챘다.

   

   …여신이여. 당신이 루시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설마 그녀의 사용인에게 힘을 내려 관찰하고 싶을 정도였던 것입니까.

   

   “여우님?”

   “…음? 응? 왜 그러느냐?”

   “제 말을 안 듣고 계셨군요.”

   “아니. 그. 잠시 진정 좀 해 보거라. 그래. 본녀가 마음을 써서 이 귀물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 하나를 건네주마. 그대도 루시를 소중히 여기니만큼 이런 것을 가지고 싶을 것 아니더냐!”

   “…하아. 대체 저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에린은 골이 아프다는 듯 자신의 이마를 억눌렀지만 정작 그 시선은 은근히 예술 교단의 장신구에 닿고 있었다.

   

   겉으로는 아닌 척 하지만 속은 솔직하구나!

   

   그래! 루시의 주변에 있는 녀석들이 이를 외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러지 말고 일단 보거라! 예술 교단에서 제작한 장신구에서 제일 주목해야 할 부분이 루시의 그림인 것은 맞지만 그 기능만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여기에는 그 외에도 많은 힘이 깃들어 있어!”

   

   주신의 사도이자 신의 애정을 독차지하고 있는 루시는 그 존재 자체로 성물이나 다름이 없다.

   

   그 때문에 루시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장신구 또한 평범하지 않은 힘을 지니게 되었지.

   

   주신과 여신의 신성탓에 몸이 좋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행운이 증가하며. 부정한 것이 쉬이 접근하지 못하게 되기까지 하니 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이란 말인가!

   

   약팔이마냥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던 리나는 에린이 자신의 말에 귀기울이는 기색을 보이자 한층 더 신이 나서는 목소리를 높였다.

   

   “뭣보다 좋은 것은 여기에 루시의 신성이 일부나마 깃들어 있기에 항시 녀석과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단 거지! 내가 괜히 여기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고 생각하느냐! 거기엔 다 이유가!”

   “왜 이 짐승은 날이 가면 갈수록 퇴화하기만 하는 걸까♡”

   

   뒤 편에서 들려 온 목소리에 조심스레 고개를 돌린 리나는 혐오와 멸시로 가득한 루시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온 몸을 떨었다.

   

   “그렇게나 짐승 취급을 당하고 싶은 거야?♡”

   “…그렇다만?”

   “그럼 꺼져줄래?♡ 흙내 나는 동물은 숲에 처박혀 있어야 하는 거잖아♡”

   “그것만큼은 안 된다! 제발 용서해다오!”

   “숲에서 자라나서 예절을 잘 모르나봐?♡ 사과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잖아?♡”

   

   루시의 말을 들은 리나가 땅에 머리를 박자 누군가의 발이 그 머리를 짓눌렀다.

   

   처음에는 그것이 루시의 발이라 생각하고 하악대던 얼빠여우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을 깨달았다.

   

   지금 자신을 짓누르는 발은 루시의 발치고는 너무도 크고 투박했던 것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조심스레 고개를 위로 치켜 든 리나는 자신의 앞에 있는 칼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거품을 물어버렸다.

   

   눈 앞의 잔혹한 현실은 리나가 버틸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혼미해지는 정신 속에서 리나가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루시가 키득대는 소리였다.

   

   *

   

   

   100층의 도플갱어를 처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힘 자체에서 현격히 앞서는 이상 힘들 이유가 전혀 없었지.

   

   근데 도플갱어를 쓰러트린다고 공허한 마음이 충족되는 건 아니더라.

   

   심지어 내기에서 이겼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도저히 기뻐할 수가 없었어.

   

   ‘축하해~ 귀여운 언니~ 무식하게 강해서 너무 좋겠다~ 근데 언니. 있잖아. 훈련 너무 열심히하면 키 안 큰 다더라? 푸하핳. 언니가 꼬맹이인 이유가 이거라면 언니는 평생 땅바닥에 처박혀 있어야겠네~’

   

   도플갱어가 유언처럼 남기고 간 말이 귀에서 떠나질 않았던 나는 이겼지만 졌다라는 단어가 어떤 뜻인지 절절히 체감하며 던전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나서 고민했다.

   

   어떤 식으로 칼을 처벌하면 좋을지.

   

   결론은 머잖아 나왔다.

   

   내 호위기사라는 것에 자부심을 지닌 녀석이니 분이 풀릴 때까지는 그냥 없는 취급을 하자.

   

   공기마냥 취급당하다 보면 자신이 얼마나 잘못한 건지를 알게 되겠지.

   

   나의 생각이 옳았음을 알게 되는 데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를 찾아온 칼의 표정이 매 초가 지나갈 때마다 현격하게 바뀌었으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아가씨! 이번 일은…”

   “아가씨? 왜 저를 모르는 체 하시는…”

   “죄송합니다!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제발!”

   

   문제는 내 처벌의 효과가 너무나도 좋았다는 점이지.

   

   이마에 피가 날 때까지 머리를 처박는 칼의 모습에 자연스레 이목이 집중됐거든.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체 하려던 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가는 웅성임을 견디긴 어려웠다.

   

   결국 나는 친구들을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도망치듯 내 기숙사로 돌아왔고.

   

   예술 교단의 장신구를 가지고 열변을 토하는 얼빠여우와 여우한테 홀리고 있는 에린의 모습을 보게 됐다.

   

   방금 전 일 때문에 열이 올라 있었던 나는 얼빠여우를 괴롭히는 것으로 분풀이를 했다.

   

   푸하핳. 다시 생각해봐도 웃기네. 내가 밟아주는 줄 알고 하악거리다가 상대가 칼이라는 걸 눈치채자 마자 거품을 무는 꼴이라니!

   

   다음번에는 누구로 처벌을 해줄까. 얼빠여우가 헛구역질을 할만큼 역겨운 사람이 어디 없으려나.

   

   “죄송합니다. 아가씨. 바로 알려드렸어야했는데.”

   “신경 쓰지 마. 무능력하고 허접한 게 에린의 잘못은 아니잖아?”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비꼰다고 생각할 어투였지만 내게 익숙한 에린은 내 말 뒤편에 어떤 뜻이 숨어있는지 어렵잖게 이해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있지. 허접 에린. 너도 저 변태처럼 내 그림이 그려진 걸 가지고 싶어?”

   “…그것이.”

   “흐응. 시종이란 녀석이 그런 음흉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거구나?”

   

   에린의 양빰이 살짝 붉어지는 걸 본 나는 나중에 하나 구해주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내 주변 사람이 저걸 가지고 있는 걸 보고 싶지 않지만 저렇게나 좋아하는데 마냥 가지지 말라 하긴 그렇잖아.

   

   …솔직히 말해서 슬슬 체념하는 중이기도 하고.

   

   어쩌겠어! 날이 지날수록 아카데미 안이고 밖이고 내 그림이 그려진 것들이 늘어나는데!

   

   그 유행은 내가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럴 바엔 차라리 제대로 된 물건을 준비해서 호감이라도 사는 편이 낫지!

   

   “…아가씨. 저도.”

   “허접견♡ 개 역할도 제대로 못 하는 거야?♡ 자꾸 이렇게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면 유기할 수밖에 없다구♡”

   “끼잉…”

   

   무시당하는 대신 개 취급을 받게 된 칼이 애처로운 목소리를 내자 에린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시선을 받아낸 칼은 치욕에 부들부들 떨었지만 차마 자리에서 일어나진 못했다.

   

   등 뒤에 내가 타고 있는데 어찌 몸을 움직이겠는가.

   

   “…부럽다.”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얼빠여우는 진지하게 칼을 향한 질투심을 내뿜어댔다.

   

   “부러워♡ 너도 의자 노릇 하고 싶어?♡”

   “그렇다! 몇 날 며칠이라도 하고 싶다!”

   “그치만 이건 강아지한테 주는 벌인걸?♡ 얼빠여우는 여우잖아?♡”

   “왈! 왈! 으르르! 컹!”

   “푸하하핳♡ 너~무 변태같아서 동정심이 들 지경이네~♡ 그치만 싫어♡ 안 해줄 거야♡”

   “그러어언…”

   

   꼬리를 축 늘어트린 얼빠여우를 보며 싱글싱글 웃음을 짓고 있으려니 띠링. 하는 알람음이 귓가를 스쳤다.

   

   순간 허접 주신이 무언가 변태적인 것을 바라는 게 아닐까 의심하던 나였지만 기이하게도 이번에 내 앞에 떠오른 문장은 제대로 된 것이었다.

   

   [퀘스트 발생!]

   [숲의 이상]

   [숲의 주인에게 다른 숲에 대한 이야기를 묻기]

   

   무언가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루시는 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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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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