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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3

       관객들의 함성마저 맹렬한 불꽃에 가려질 지경이었다. 타오르는 열기가 따끔따끔하게 이현의 등을 자극했다.

         

       연민하가 불의 장막을 즐겨 사용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장막을 활용해 심사관들의 시야를 차단한 후 상대를 무자비하게 농락해왔다고 했으니.

         

       도를 넘는 모욕에 치를 떨며 그녀에게 결투를 신청한 학생들이 지금까지 수십이었다. 하지만 불의 장막이 걷힐 때쯤이면, 그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처참한 꼴로 패배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심각한 부상을 입어 빈사 상태로 실려 나간 이들 또한 적지 않았다. 또한 패배한 학생들은 연민하가 온갖 결투 규정을 위반하며 자신들을 짓밟았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철저하게 꼬리를 단속하고 뒷배경 또한 대단했으니, 그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심각한 교칙 위반으로 처벌을 받은 적이 없다.

         

       하지만 연민하는 모른다.

         

       방금 스스로 제 무덤을 팠다는 걸.

         

         

       “결투를 신청하는 놈은 정말 오랜만이네. 그래도 실력은 좀 있는 모양인가 봐? 하긴, 그 정도 기본은 있으니까 추천 입학을 했겠지. 혼란 중에 어부지리로 1위를 차지하는 것도 가능했을 거고.”

         

       연민하가 이현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거기에 방출계와 순환계가 맞붙으면, 통상 순환계의 승률이 7할 정도로 더 높기도 하고 말이야.”

         

       -화악!

         

       “그래서 자신감을 얻고 덤벼들었나 본데…곧 후회하게 될 거야.”

       

       연민하의 손짓 한 번에, 그녀의 등 뒤에 이글거리는 다섯 개의 화염이 즉시 생성되었다. 입자배열기조차 압도하는 정령사의 무시무시한 마법식 작성 속도였다.

         

       이현은 지난날 봤던 보고서의 내용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보여준 마법의 속성을 바탕으로 추론했을 때, 그녀는 지금 최소 40종은 넘는 정령을 사역하고 있다고 했다.

         

       보통의 정령사들이 다루는 정령 종의 숫자가 한자리를 넘어가지 못하는 걸 생각하면, 확실히 어마어마한 재능이기는 하다.

         

       그중에서도 연민하가 특히 애용하는 건 방출계 화염 속성 계열의 마법을 매개할 수 있는 정령종이다. 제법 그 오만한 인상과 잘 어울리기도 한다. 상대에게 위압감을 줄 수 있는 효과도 있다.

         

       불에 대한 두려움은, 생명의 본능에 새겨진 원초적인 감각이니.

         

         

       “그런데 상위 수준으로 올라갈수록 방출계의 승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는 건 몰랐나 봐? 응?”

       

       이현은 예측안을 우선 3경로까지 끌어올렸다. 적당히 그녀의 실력을 가늠해 볼 참이었다. 오늘은 권능을 아예 꺼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순환계 마법사가 선공도 하지 않고 있는 거니? 아니면 뭘 꾸미고 있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이현을 보며, 연민하가 얼굴에 잔뜩 조소를 머금었다.

         

         

       “뭐, 하고 싶은 대로 잘 해봐.”

         

       연민하의 손짓과 함께, 다섯 개의 화염이 사방에서 이현을 향해 날아들었다. 단조로운 움직임이 아닌, 그가 피할 여러 경로를 미리 봉쇄하며 사방에서 움직였다.

         

       학생답지 않은 노련함과 섬세한 통제가 새삼 놀라웠다. 이현은 즉시 몸을 움직여 대련장을 두른 장막의 사각을 따라 이동했다.

         

       하지만 워낙 경로가 예리했기에, 모든 화염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글거리는 불꽃 하나가 그의 어깻죽지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곧 욱씬거리는 고통과 살이 타는 소리 또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는 그대로 블레이드를 꺼내 들고 연민하에게 달려들었다. 규정상 날을 저 얇고 하얀 목에 가져대기만 하면 그의 승리였으니.

         

       그러나 연민하는 그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콰아앙!

       

       곧 그녀의 앞에서 소용돌이치는 대류가 만들어지더니, 이윽고 거센 바람이 되어 코앞에 접근한 이현을 순식간에 날려버렸다.

         

       불의 장막 한쪽 벽이 바람에 휘청거리며 둘의 모습이 관객들에게 잠시 드러났다. 대부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고, 혹시나 하던 이들의 얼굴에도 실망감이 역력했다.

         

       어떻게 봐도 연민하의 매서운 공세에 이현이 고전하고 있는 구도였다.

         

         

       “확실히 실력이 있기는 있네. 내 첫 공격을 한 방으로 흘려보낸 사람은 지금까지 네가 처음이란다. 근데…좀 아픈가 봐?”

         

       연민하가 자신의 나쁜 성격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현은 대꾸하지 않고 다시 그대로 달려 나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거대하고 예리한 고드름 수십 개가 허공에서 빙결되더니 한 번에 날아들었다.

         

       그를 피하려 하니 단단함을 머금은 금속이 바닥에서 올라와 그의 발목을 잡아채려 했다.

         

       여전히 연민하의 매끄러운 피부에는 작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이현은 확실히 까다로운 면이 있다고 느꼈다. 정령사는 사역한 정령이 각 속성에 맞기만 하면, 자신의 속성에 상관없이 모든 마법을 다룰 수 있다.

         

       연민하는 그런 정령사의 장점을 극대화한 존재나 마찬가지였으니, 상황에 맞춰 적절하게 여러 속성의 마법을 섞어가며 그를 상대하고 있었다.

         

         

       “움직임도 너무 정직하네. 마수를 상대하는 거면 모를까, 대인전에서 그런 움직임은 최악의 선택이지. 이건 네 후원자가 가르쳐주지 않았나 봐?”

         

       하지만 그뿐인 일이다. 연민하는 이미 승부가 정해진 것처럼 신나게 떠들어댔다.

         

       이현은 대꾸하지 않고 시간을 대략적으로 가늠했다. 이제 불의 장막의 지속시간은 절반 정도 남아있는 듯했다.

         

       그간 연민하는 그 시간 안에 모든 승부를 끝내 버렸다고 했다. 그리고 자의는 아닐 테지만, 오늘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전 작업은 대략 끝내놨으니, 그는 슬슬 승부를 마칠 때가 되었다고 여겼다. 그리고 즉시 6경로까지 예측안을 끌어올렸다.

         

         

       -화르륵

         

       승부를 끝낼 생각인 건 연민하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사방의 장막은 점점 좁혀오며 갈수록 그가 마법을 피할 공간을 없애버리고 있었다. 그녀의 뒤로는 아까의 제곱인 25개의 일렁이는 화염이 다시 허공에 만들어졌다.

         

         

       “처음엔 팔다리만 자르려고 했는데, 생각이 좀 바뀌었어. 몸에 화상흉터 한두 개 정도는 더 새겨줘도 괜찮지 않겠니? 제법 남자다울 것도 같고.”

         

       “…글쎄요. 흉터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서.”

         

       싱긋 웃는 목소리에 이현이 즉각 답했다. 대련에서 그가 처음으로 연민하에게 대꾸한 말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거 유감이구나.”

         

       이윽고 스물다섯 개의 화염이 마치 탄막처럼 날아들었다. 공간이 뻑뻑하게 좁혀진 상태였기에 그 어디에도 피할 곳이 없었다.

         

       하지만 구태여 피할 생각도 없었다. 이현은 그대로 자세를 낮추고 스스로 화염의 탄막을 향해 뛰어들었다.

         

         

       “무슨…!”

         

       돌발행동을 본 연민하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의 빛이 서렸다.

         

         

       -콰앙!

         

       이윽고 그와 마법이 충돌해 거대한 폭음을 만들어냈다. 그의 방입자복은 이제 산산조각이 나 더는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폭발을 뚫고 나온 그의 몸은 거의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치익-하는 소리와 함께 고기 굽는 냄새가 사방으로 풍겼다.

         

       언뜻 강렬한 고통이 피부를 파고들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작은 성취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이는 그가 준비한 연출의 밑그림이 아주 잘 그려지고 있다는 뜻이었으니.

         

         

       “너…!”

       

       그 무지막지한 행동에 잠시 당황하기는 했지만, 연민하는 제법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금속 재질로 된 벽을 생성해 접근을 막으려 했다. 이어 돌풍으로 그를 날려버릴 준비를 했다. 허공에서는 최후의 일격을 위한 수십 개의 얼음 창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닥에서 막 금속의 벽이 돋아나던 와중,

         

       대류가 소용돌이쳐 응집되기 직전,

         

       얼음 창의 뿌리가 막 뻗어가던 찰나.

         

       이현은 어느새 연민하의 코앞에 도달해있었다.

         

         

       “무슨…!”

         

       그녀가 채 말을 내뱉기도 전이었다. 이현은 주먹을 쥐고 입자를 체내에 응집시켜 그 강도를 더했다.

         

       그리고 연민하의 배를 향해 그대로 내질러버렸다.

         

         

       “커흑…!”

         

       그녀의 복부에는 곧 아릿하고 끔찍한 고통이 찾아들었다. 그 충격에 곧 바닥에 쓰러져 몇 미터를 나뒹굴었다.

         

       평생 처음 느껴보는 강렬하고 생생한 아픔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다시 일어나 대응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연민하는, 어느새 누군가에게 목이 잡혀 허공에서 숨을 꺽꺽대고 있었다.

         

         

       “커헉…콜록…!”

       

       이현은 한 손으로 연민하의 가녀린 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아귀에 힘을 꽉 쥐어 뇌로 가는 산소를 차단해 연민하가 이성적인 사고를 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어 그의 반대쪽 손이 본능적으로 연민하의 볼과 턱을 무차별적으로 강타하기 직전이었지만, 곧 목적을 상기하고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다시 손을 내렸다.

         

       될 수 있으면 눈에 보이는 부분에는 상처를 만들지 않는 게 좋았다.

         

       대신 그가 노린 건, 의복에 가려 눈에 잘 띄지 않는 연민하의 몸통과 사지의 초입부였다.

         

         

       -퍼억! 퍽! 퍼억!

       

       이글거리는 벽 안쪽으로는, 이제 둔탁한 타격음과 누군가의 가냘픈 비명만이 들려왔다.

         

         

       -퍼억! 우득!

         

       “윽…케흑…!”

         

       이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연민하를 타격했다. 특히 노린 건 관절이나 신경이 몰려 고통이 극대화되는 부위들이었다.

         

       그는 상대에게 딱 죽지 않을 정도의 끔찍한 고통을 주는 강도와 위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호전적인 마족의 하전사가 혀를 깨물고 죽게 만든 적도 있다. 그에게 사로잡힌 인민해방전선의 어느 조직원은 채 십 분도 지나지 않아 각종 정보를 술술 털어대기도 했다.

         

       동북부에서 여러 실전을 거치며 단장과 누나들 몰래 터득한 방법이었다.

         

         

       “이…개 같은 새끼…감히…꺄흑…!”

         

       이현은 슬슬 성공이 코앞에 있음을 느꼈다. 입으로는 욕설을 내뱉어도, 연민하의 사나운 눈동자에는 어느새 두려움이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개화하기 전에는 극도로 조심하며 살았을 것이다. 불완전 개화의 위험성은 강대한 재능에 비례해 높아지므로.

         

       개화 후에는 감히 자신의 몸에 손을 댄 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천한 경험은 압도적인 재능으로 그대로 덮어버렸을 테니까.

         

       그의 생각대로, 연민하는 사냥감이 되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존재였다.

         

       최소한 죽도록 맞아본 적은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퍼억! 퍽!

         

       “쿨럭…허억…!”

         

       대련이라 부를 수 없는 상황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현은 그녀의 목을 들어 올려 땅바닥에 그대로 던져버렸다. 그 뒤 발에 힘을 실어 내장의 곳곳을 그대로 짓밟았다. 옆구리를 걷어차 갈비뼈 한두 개를 가볍게 부러뜨리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연민하의 얼굴과 사지는 여전한 매끈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퍽! 우직!

         

       “잠…깐…쿨럭…헤흑…”

         

       어느새 연민하의 악에 받친 욕설은 울음이 섞인 애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슬슬 때가 되었나 싶기도 했지만, 아직은 조금 부족한 듯도 하다. 이현은 계속해서 타격을 이어나갔다.

         

       

       -퍽! 퍼억!

       

       “…잠깐만…흐윽…”

         

       -퍽! 으득!

       

       “흑…아파…아흑…”

         

         

         

         

         

         

       “…후우.”

         

       이현은 문득 주변을 살폈다. 슬슬 불의 장막의 위쪽이 조금씩 걷혀 가는 게 보였다.

         

       말인즉, 이제 상황을 정리할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잠시 한숨을 쉰 이현이 연민하를 향해 가까이 걸어갔다. 바닥에 널브러져 흐느끼던 연민하가 그를 보고는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흑…으흑…아악!”

         

       -우득!

         

       손을 뒤로 짚으며 조금이라도 거리를 벌리려던 그녀의 시도는, 이현이 그녀의 허벅지를 거세게 짓밟음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일어나시죠, 선배님. 후배 앞에서 그렇게 계셔야 되겠습니까.”

         

       “흑…흐윽…그만해…제발…”

         

       “죄송하지만, 그렇게 떨면서 말씀하시면 뭐라고 하시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조금 크고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말해주시겠습니까?”

         

       “그만…제발 그만해…”

         

       “그럴까요? 사실 저도 조금 지치기는 합니다. 그럼 패배를 인정하시는 겁니까?”

       

       “흐윽…그건…아흑…!”

         

       즉답이 나오지 않았기에, 이현은 연민하의 배에 그대로 주먹을 한 대 먹여버렸다. 이런 걸 보면 아직은 좀 부족한 거 같기도 했다.

         

         

       “인정하시냐고 물었습니다.”

       

       “아흑…인정할게…! 인정한다고…! 제발…제발 그만해…흐윽…”

         

       됐다.

         

       이현은 그제야 안도하며 품속의 녹음 장치의 작동을 멈췄다. 향후 그녀가 말을 바꿀 경우를 대비할 필요성이 있었다. 어쨌든 공식적인 승리는 그녀의 것이 될 예정이니.

         

         

       “흐윽…아파…흑…”

         

       연민하는 자리에 주저앉아 꼴사나운 몰골로 흐느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고개는 푹 숙여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바닥으로는 눈물방울이 끊임없이 뚝뚝 떨어졌다.

         

       이현은 그런 연민하의 앞에 그대로 털썩-주저앉았다. 그의 행동에 연민하가 몸을 파르르-떨었다.

         

       이현은 손을 내밀어 연민하의 턱을 잡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들어올려 자신과 시선을 마주치게 했다.

         

       이제 그곳에 있는 건 작고 연약한 사냥감뿐이었다. 의지는 꺾여버려 더는 보이지 않았다.

         

       행여 남들이 들을세라, 이현이 그녀에게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방. 비워 놓으세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cheese crackers 님 5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또 언제나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IA1646738811262 님 6코인 후원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비공개 독자님 50 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편안한 밤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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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recting the Villainess of the Academy

Correcting the Villainess of the Academy

아카데미 악당영애 교정하기
Score 3.8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 reunited with the girl who left me when I lost every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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