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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3

       

       

       

       

       

       

       “…아가씨?”

       

       1차 대면식과 수도성으로 공무를 보러 떠나는 아버지의 배웅까지 마친 르미앙이 치장실에 앉아있었다.

       혼이 나간, 넋이 빠진 얼굴로.

       그것이 염려스러웠던 마리엔이 붉은빛 드레스를 옆에 놓으며 그녀를 불렀다.

       

       “응.”

       “어떠셨어요…?”

       

       그 누구보다 대면식을 기다렸던 마리엔이었다.

       세상에 아가씨의 존재를 알릴 성대한 대면식을.

       후보들에게 에린시아의 정체를 알릴 성대한 대면식을.

       그리고 그것이 결점 하나 없이 완벽했으면 했다.

       그리고 그것으로써 제 아가씨의 해방이 시작되었으면 했다.

       

       어땠느냐.

       많은 것이 함축된 질문을 던졌고, 거울에 비친 아가씨의 머리를 손질하며 그 안색을 살피는 마리엔.

       왜인지 원하는 바람에 반대되는 답이 들려올 듯해 불안했다.

       그 불안감이 곧 현실이 되어 닥쳤지만.

       

       “엉망이었어.”

       “네…? 왜, 왜요?”

       

       단상의 옆에서 대면식을 지켜봤었다.

       카일 공자가 눈을 뒤집으며 졸도하는 걸 보았을 때, 희열을 느꼈었다.

       사랑하는 제 아가씨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세운 파렴치한 인간의 몰락은 마리엔에게 대리 만족을 선사한 것이다.

       하여, 대면식이 성대하고 완벽한 마무리를 지으리라 믿었다.

       

       물론.

       

       며칠째 수도 없이 아가씨의 입에서 거론되고 있는 엘든 라펠리온 공자의 당당한 얼굴을 본 순간, 그 기대가 흔들렸지만 말이다.

       에린시아를 면전에 두고도 그의 얼굴은 평온했다.

       지독한 경악으로 물든 다른 후보들과 달리, 그는 찰나의 경탄만 보였을 뿐, 다시금 평온을 찾았던 것이다.

       게다가 엘든 공자와 마주한 후부터 무언가 탐탁치 않은 듯한 아가씨의 표정은 불길함을 예견했었고, 그 예견이 현실이 되어 들려온 것이다.

       

       르미앙이 거울 속 자신을 보았다.

       엘든의 물음에, 도망쳐온 자신을.

       

       “치욕스러워.”

       “뭐가요…?”

       “엘든에게 예쁨을 강요하며 집착하는 꼴이. 고백이 진심이었냔 질문에 멍청히 도망쳐온 꼴이… 치욕스럽다 못 해 스스로가 역겨울 정도야.”

       “….”

       

       드레스 등단추를 풀던 마리엔의 손이 멈췄다.

       결국 제자리다.

       성대히 치뤄진, 만백성들의 온갖 찬미 속에서 마친 대면식이었음에도, 제 아가씨는 어제와 다를 바 없는 과거에 머무르고 있다.

       마음 같아선 기권을 받아들여 엘든 공자를 보내버린 후, 나머지 후보들에게 집중하길 권하고 싶었다.

       이대로라면, 이따금씩 찾아오는 폭력의 고통에서의 해방이 아닌, 또 다른 고립이 시작될 듯 했으니까.

       

       기권을 받아들이지 못 하겠다면, 그가 보이고 있는 변화를 수용하길 바랐다.

       수용할 수 없으면, 무시하길 바랐다.

       무시마저도 할 수 없다면, 부디 포기라도 하길 바랐다.

       난제를 만나면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을 때까지 밤낮으로 매달리는 집념의 연구가임을 알지만, 제발 이번만큼은 집념을 내려놓길 바랐다.

       

       “내가 왜 이럴까? 왜 엘든 같은 인간에게 나 예쁘지 않냐며 미모를 추앙해 달라는 아양을 떤 걸까? 대체 왜 그런 추태까지 부리며 가해자에게 매달려야 하는 걸까?”

       

       르미앙의 자조 섞인 물음에, 마리엔이 다시금 단추를 풀며 조심스레 운을 띄운다.

       포기조차 할 수 없다면, 신념의 오류에 대해 고찰하길 바라며.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오래된 격언을 상기하기를 바라며.

       때론 기적이란 것이 절대적인 진리를 변화시킬 수도 있음을 깨닫길 바라며, 그리 조심스레 운을 띄우는 마리엔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가씨께서도 무의식 중에 인정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무슨 인정?”

       “아가씨께서 저번에 그러셨죠. 타고난 천성은 변할 수 없는 절대 불변의 법칙이라고요.”

       “그랬었지…?”

       “어쩌면… 그 절대 불변의 법칙조차 거스를 정도로 엘든 공자가 노력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계신 건 아닐까요?”

       “뭐…? 내가?”

       “불가능을 가능케 만드는 건, 눈물 겨운 노력이 필요한 거잖아요.”

       

       새로이 등장한 가설.

       아니.

       정확히는 이제껏 외면하고 있던 가설이었고, 그 가설을 꺼내어 입증 가능성에 대해 논하는 마리엔에, 르미앙의 눈동자가 확장됐다.

       솔직히 더 이상 세울 가설도 없었다.

       보란듯이 실패만 반복하는 가설에, 다소 지치기도 했었다.

       그 탓에 두뇌의 흐름이 정체되어버렸고, 유연한 사고가 안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탓에, 이성적인 냉정보다 감정적인 충동에 치우치게 되었다.

       

       진실을 애써 부정하고 있었던 걸까.

       진실이었기에, 그가 그토록 당당했던 걸까.

       어쩌면….

       엘든은 스스로 해낸 후회와 반성을 통해 진작 참회의 길을 걷고 있었던 걸까.

       악한 천성을 바꾸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조차 눈물 겨운 노력을 하고 있었던 걸까.

       

       마리엔이 툭 던진 말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수많은 의문이 용오름을 시작한다.

       물론 해소하기엔 한참 이른 의문들이었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그게 집착의 명분이 되진 않잖아.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매달려야 하는 이유가 되진 않잖아. 인정한다면, 그걸로 끝인 거잖아.”

       

       부정과 아집으로써 엘든 공자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 했던 아가씨였다.

       진실을 찾겠다며 감시자를 붙이고도, 그 감시자의 보고를 믿지 않고 귀를 닫아버리던 아가씨였다.

       복수심에 사로잡히지 않겠다 해놓고, 엘든 공자의 기권 직후 그것에 사로잡혀 피폐히 말라가던 아가씨였다.

       그런 아가씨가 드디어 다른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굳게 걸어잠겨있던 성문이 열리는 듯한 느낌에, 마리엔이 사근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것도 얘기하셨잖아요.”

       “…뭐를?”

       “진심으로 참회하는 자, 참회하지 않는 자, 둘 중 하나와 결혼하게 될 거라고요.”

       “뭐……?”

       “참회의 길에 스스로 발을 내딛은 엘든 공자를 결혼 상대로 점지하셔서 그런 거, 아닐까요?”

       

       르미앙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억울과 울분에 사로잡혀있던 푸른 동공에, 다른 무언가가 깃든다.

       아직은 명명할 수 없는, 해석할 수 없는 것이었고, 조금은 경멸이 섞인 듯한 무언가였다.

       

       “내, 내가 엘든 같은 인간이랑 결혼을? 마, 말도 안되는 소리 마. 그럴 리 없잖아.”

       

       당연히 아가씨가 백번이고 아깝다 생각하는 마리엔이지만, 죄질의 경중도 낮은 데다 4명 중 1명을 골라야만 한다면 엘든 라펠리온이 차악이었다.

       

       “그… 말씀드리지 못 한 게 있는데.”

       

       쓰러진 시녀 따위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넸던 엘든 공자가 ‘그나마’ 나은 선택이리라 생각하는 마리엔이 이제는 깨끗이 나은 발목을 들어보였다.

       

       “사실 이 발목, 엘든 공자와 부딪혀서 넘어졌던 거에요.”

       “…뭐?”

       “그리고 엘든 공자께서 도와주셔서 무사히 치료 받을 수 있었던 거고요.”

       “뭐?”

       

       믿기 힘든 이야기에, 르미앙이 미간을 찌푸리며 거울에 비친 마리엔의 발목을 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엘든 공자께서 쓰러진 제게 손을 건네어 주었거든요. 근데 자신의 도움을 누설하면 죽는다…라고 해서 말씀드리지 못 했어요.”

       “누설하지… 말라 했다고? 왜?”

       “기권이 승인되기 전까지 조용히 지내고 싶다, 라고 했었어요. 그땐 이해가 안 됐는데 이제 와 돌이켜보니 알 것 같네요.”

       “뭔데…?”

       “기권도 변화도, 모두 진심이었기에 그랬던 것 아닐까요?”

       

       불현듯 들려온 엘든 라펠리온의 선행.

       그것도 자신이 가장 아끼는 이의 입에서 들려온 것이었고,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을 담고 있었다.

       닫아두었던 귀가 서서히 열린다.

       감아두었던 눈이 서서히 뜨인다.

       

       똑.

       

       가슴을 옥죄이던 드레스의 마지막 등단추가 풀렸다.

       

       

       **

       

       

       “우웁!”

       “우웩!”

       

       고요한 대전에 울려퍼지는, 바람의 선율과도 같은 아름다운 소리.

       1차 식고문 때는 암시를 주기 위함이었기에, 혐오의 강도가 약한 걸로 내놓았었다.

       그만큼 반동도 약했었다.

       아쉬웠지만 본식을 위해 작은 반동에 만족해야 했었다.

       그리고.

       

       “웁!”

       “우웨엑!”

       

       혐오의 강도를 올린 요리는 현재 크나큰 반동을 보이고 있었다.

       분명 통쾌한 반동이었고, 그토록 고대했던 반응이었다.

       벌레를 먹고 토해야 했던 지난 날의 자신과 똑같이 구역질을 하는 데론과 블런드.

       고귀한 척, 고결한 척 갖은 교만을 부리던 그들이 개처럼 대전의 바닥을 핥으며 경멸을 삼켜내고 있다.

       

       허영과 권세에 찌들었던 그들이 노예처럼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날의 자신과 같았고, 그들이 그러했듯 그 비참한 꼴을 보며 배꼽을 잡고 웃어야 했다.

       

       한데.

       

       “….”

       

       웃음이 나오질 않았다.

       가만히 앉아있는, 늘 그랬듯 평온한 얼굴로 앉아있는 엘든 때문이었다.

       시선을 데론과 블런드를 향해 있지만, 그 외 모든 감각은 엘든에게 향해 있었다.

       그 시선조차 왜인지 모르게 그와 마주하기 힘들어 회피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제야 시작된 해방이건만,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건만, 해방감보다 원망과 역정만 치솟는다.

       전부 엘든 라펠리온 때문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가장 빨리, 가장 깨끗하게 먹은 이에게 포상을 내릴 테니, 다들 힘내도록 해요.”

       

       제 주둥이가 더러워지는지도 모른 채, 게걸스레 바닥을 핥는 그들의 머리 위로 조롱을 내뱉었다.

       그리고 엘든에게로 다가갔다.

       시원치 못 한 걸음으로, 불안한 표정으로.

       그렇게, 그의 앞에 섰다.

       이젠 달라져야 했다.

       엘든이 초라한 약자로, 자신이 위대한 강자로 관계가 역전되었어야 했다.

       한데, 그날들과 다를 게 없었다.

       엘든은 당당했고, 자신은 위축되어있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황당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극복하리라.

       굴복시키리라.

       그리 다짐한 르미앙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게 물었었죠? 편지로 전한 고백이 진심이었냐고요.”

       

       또 다시 의도와 다른 말이 제 멋대로 튀어나왔다.

       어째서일까.

       

       “진심이에요.”

       “예?”

       “진심이라고요. 당신을 응원했던 거, 당신을 사랑한다는 거 진심이었어요.”

       

       1차 대면식에선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이, 이상하게도 자연스레 나왔다.

       대답하는 것이 죽도록 싫어 도망쳤음에도, 이상하게도 자연스레 입이 열리고 있었다. 

       심장이 떨려왔다.

       입술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결국.

       

       

       “그러니까 나와, 결혼해 줄래요?”

       

       

       차라리 자결을 택하고 싶었던, 구역감이 차오르는 탓에 글자로 대신해야 했었던 그 고백이 참았던 것이 무색하게 불쑥 튀어나왔다.

       

       “당신이 원하는 모든 걸 준다고 약속할게요. 가문의 부흥, 명예, 권력, 용서, 사랑, 그 어떤 것이든 약속해요. 윈터펠의 이름을 걸고서.” 

       

       참전을 독려하기 위해 해냈던 거짓이었을 뿐이었고, 그래서 윈터펠의 이름을 건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었다.

       그 신성한 이름을 경멸하는 악인에게 내걸고 싶지 않았다.

       그랬는데.

       분명 그랬는데.

       너무도 쉽게 그 이름을 건 약속이 튀어나왔다.

       

       기대했다.

       고대했다.

       갈망했다.

       

       수락하기를.

       거부하지 않기를.

       윈터펠 이름까지 내건 유혹이었고, 거짓이 아닌 약속이었다.

       그리고, 최후의 통첩이었다.

       

       그런데.

       

       엘든의 고개가 숙여진다.

       허리가 접힌다.

       

       곧.

       

       “죄송합니다. 대공녀님.”

       

       또 다시 그가 거절했다.

       지난 날들과 똑같이, 매몰차게 거절한 것이다.

       해방감보다 원망만 차오르는 이 모든 사단의 원흉이 고민 한번 없이 거절해버린 것이다.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이제껏 참아온 설움이 폭발하듯, 눈물이 차올랐다.

       계획이 틀어질까 노심초사했던 마음이, 고뇌에 몸서리쳐야 했던 지난 밤들이 억울해 눈물이 차올랐다.

       지옥의 구렁텅이로 밀쳐져 철가시에 피눈물 흘려야 했던 날들이 원통해, 이제야 그것에서 해방되리란 기대를 했던 것이 바보 같아 눈물이 차올랐다.

       1차 대면식 때 차올랐던 습기가 아닌, 시야가 흐려질 정도의 눈물이 차올랐고, 곧 그것이 망울져 볼을 타고 흐른다.

       

       심장이 요동치는 만큼, 온몸이 떨려왔다.

       

       엘든이 고개를 들었다.

       

       기권 선언 이후부터 늘 순진무구한 저 얼굴이 얄미웠다.

       자존심 모두 버리고 행한 매달림을 조롱하는 것만 같아 얄미워 미칠 노릇이었다.

       그래서일 거다.

       저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고, 고백도 청혼도, 그리고 복수도 실패한 자신을 채찍질하듯 그의 뺨을 후려쳐버린 것은.

       들끓는 원망과 억울함을 어떻게 표출해야 할지 몰라 그의 순진한 얼굴에 폭력을 가한 것은.

       

       짜아악-!!

       

       수도 없이 다짐했었다.

       절대 그들과 같아지지 않겠다고.

       절대 그들을 닮지 않겠다고.

       하지만 방금, 그 다짐이 무너지고 말았다.

       

       참을 새도 없었다.

       말릴 새도 없었다.

       

       그간 참아온 모든 것들이 폭발한 반동이었고, 막을 수도 억누를 수도 없는 반동이었다.

       일순간 눈물이 메말랐다.

       떨리던 손이 멈추고, 다리가 후들거려왔다.

       

       “…아….”

       

       갈피를 잃어버린 입이 둔한 탄성을 내뱉었다.

       그것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다짐을 어기고 폭력을 사용해버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의 앞에서 한없이 위축되는 것뿐이었다.

       

       결국.

       

       털썩.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주저앉고 말았다.

       저주스러웠다.

       절망스러웠다.

       순간의 충동을 참지 못 한 자신이, 예나 지금이나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그가.

       너무도 밉고 싫고, 증오스러웠다.

       

       그렇게 르미앙은 아카데미 재학 시절과 같이 엘든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지난 날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

       

       그리고.

       

       멀뚱히 서있던 엘든은 쓰린 뺨을 쓰다듬은 뒤, 제 자리에 놓인 식기의 뚜껑을 열어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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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후피집물의 후회캐가 되었습니다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curious about what a female-oriented tragic romantic fantasy was like, so I skimmed through only the free chapters. And then… “…Ha.” I found myself transmigrated into one of the main male characters, destined for tears of regret, exhaustion, and obsession. So, the first thing that had to be done was… “I, Elden Raphelion, hereby declare my withdrawal from the competition for the betrothal of the Third Northern Duchess.” To escape this trag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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