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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3

       혈연이라는 건 태가 난다.

       

       심장이 뛸 때마다 전신을 흐르는 핏물에, 내 몸을 구성하는 세포 하나하나에, 혈육이라는 것은 낙인처럼 눌어붙어 있는 법이다. 우리는 그것을 ‘닮았다’고도 부를 수 있다.

       

       감자밭에서 돌멩이를 주워섬기는 저 남자는 나와 닮았다.

       

       우선은 이목구비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콧날의 생김새, 눈썹의 모양, 남자다움보다는 여리여리함에 가까운 날렵한 턱선. 한숨을 쉴 때 드러나는 가지런한 치아의 모양.

       

       다음으로는 푸석푸석한 검은 머리카락. 한숨을 쉴 때 도드라지는 혈관, 다소 창백한 피부색, 두 번째 마디가 유독 도드라지는 검지 같은 것들.

       

       다른 점은?

       

       누린내가 나는 것 같은 얼룩덜룩한 노란 눈동자. 눈동자에 담긴, 미래에 대한 희망 대신 과거에 붙박여 있는 찌듦. 드문드문 드러나는 짜증과 고통. 세월을 나타내는 주름, 그리고.

       

       “말 좀 묻겠어.”

       

       “아이고, 마법사님 아니십니까⋯⋯. 이번엔 다른 분이시네요. 이번에도, 데려가시려고요?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일부러 끄는 것 같은 말투에는 모래를 씹는 듯한 까끌거림이 느껴졌다.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보증을 서 달라는 학교 선배에게서.

       

       꺼림칙하다는 뜻이다.

       

       허리를 숙이며 내게 굽신거리는 아버지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사람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유 없는 충동이 머릿속을 시큰하게 찔렀다. 저 남자를 원망하고 화를 내야 할 것 같다는 충동이었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기억이 날아가도 감정은 남아 있었나 보다.

       

       오래간만에 피가 식는 기분이 들었다. 변온동물이 되는 것 같은 감각. 가슴은 차갑게, 머리는 뜨겁게. 

       

       정리하자.

       

       1) 나는 아버지에게 유감이 있다.

       2)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3) 그는 마법사에게 정기적으로 무언가를 인계했다.

       

       머릿속으로 말을 골라내었다. 알지도 못하는 감정으로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나는 자초지종을 모두 알고 싶었다. 목표는 ‘아버지로부터 정보를 캐내는 것’이다. RP를 시작할 때다.

       

       타인이 내게 기대하는 모습을 취하는 것이 기본이다. 

       

       굽신거리는 몸짓 <= 아버지는 ‘거래처’보다 명백하게 신분이 아래인 것 같다. 

       

       상대방을 낮춰 보는 말투로 이야기하는 편이 좋겠다.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 변명이다. 그는 자신의 잘못으로부터 면피하고 싶다.

       

       그렇다면 면피하게 해 준다.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다. 요새 어떻게 돌아가나 확인하러 온 거야.”

       

       “아, 그러셨군요⋯⋯. 그, 왜, 그건 잘돼 가십니까? 저번에 많이 어려우시다면서요.”

       

       이번엔 다른 분이시네요. <= 아버지는 내가 ‘이전에 온 사람’과는 다른 사람인 걸 인지하고 있었다. 굳이 ‘그건 잘돼 가냐’며 물어보는 건, 엉성한 의심의 표시다.

       

       육체적인 징후도 눈에 보인다. 눈동자가 슬그머니 돌았다. 추측건대, 아버지는 역으로 내 ‘관대함’에 의심을 품은 것 같았다. 아버지의 ‘거래처’는 보편적으로 성격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좀 더 까칠하게 구는 편이 좋겠다.

       

       “전임자에게서 뭘 들었건, 그게 네 알 바는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너한테 하나부터 열까지 보고해야 하는 입장인가?”

       

       “아이고, 아닙니다⋯⋯. 물론 아닙죠.”

       

       시골이다. 감자 농사나 겨우 짓는. 여기서 ‘데려갈 수 있는’ 거래 물품이 있다면 무엇일까. 감자는 아니겠지. 감자 씨알더러 ‘데려가겠느냐’며 넉살을 떨 만큼, 농사에 애착을 품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았으니.

       

       모든 구성 인원이 보편적으로 ‘성격이 나쁠 것’이라고 여겨지는 집단이 있다면 무엇인가. 이건 제법 결정적인 힌트였다.

       

       애초에, 나를 보고 ‘거래처’로 오인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렇게 확신하고 대뜸 말을 걸 수 있는, 선명한 증표가 있었던 거다. 내게.

       

       나는 목에 약간 힘을 주었다. 

       

       “다시 한번 묻겠다. 요새 어떻게 돌아가냐고.”

       

       “옆에 고블린 부락이 생긴 게 골칫거리죠. 그 빌어먹을 난쟁이들이 설치면, 당연히⋯⋯ 아시다시피, 생산율도 떨어지는 법 아니겠습니까요?”

       

       아버지는 은근히 간을 보는 것 같았지만, 단서는 대충 모였다. 이제는 정답을 제시할 타이밍이었다.

       

       다소 논리적 비약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내놓는 답이 틀리더라도 괜찮았다. 

       

       등 뒤에서는 착실하게, 환상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수틀리면 마법을 쓰면 된다. 그러니까 다소 투박하게 혀를 놀려도 된다.

       

       

       알고 지낸 건 끽해야 마차 여행 잠깐이지만, 제법 친밀해진 핑발레즈의 말부터 떠올려보자. 마을 초입에서 그녀는 이상하다고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 있어야 할, 당연한 반응이 없었다고.

       

       나는 그게, 고블린 부락 퇴치를 위해서 용병을 불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근차근 생각해 보자.

       

       용병들은 촌장네 집에 머물러서 농땡이를 피우고 있었다. 마을에 돈이 많았더라면, 다른 용병을 고용했겠지. 고블린 부락도 밀어야 하고, 불량 용병도 처리해야 하니까.

       

       그렇지 않았다. 적탑 마법사가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용병들의 장기체류도 꽤 시간이 흘렀다. 내쫒을 돈도 없으니 그렇게 살고 있었겠지. 정리하자면, 최근 마을에 외지인이 드나든 건 한 번뿐이라는 이야기다.

       

       “심심하게 생각하면, 외지인이 최근에 자주 드나들었다는 이야기겠군요. 그 구성원에는 마법사도 끼어 있을 확률이 높고 말입니다.”

       

       애초에 용병 무리에는 마법사도 없었다. 적탑 마법사도 마을에 들른 건 오래간만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마을 사람들은 어째서, 나와 핑발레즈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말인가?

       

       익숙해서.

       

       아버지가 나를 ‘거래처’로 오인한 이유.

       

       익숙해서. 복장이.

       

       특징적인 복장.

       

       자색 마탑의 후드가 익숙해서.

       

       

       그럼, 무엇을 거래했는가?

       

       그걸 알아보기 위한 마지막 회상이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과거, 내가 자색 마탑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나는 그 당시를 어떻게 회고했던가?

       

       판타지 세계에서 평민으로 다시 태어났다.

       상태창을 외쳤지만 뜨는 건 없었다.

       

       

       힘이 센 것도 아니고 신분이 높았던 것도 아닌 터라, 부모님 따라서 감자 농사나 지으며 생을 마감하게 되려나 싶었더니만. 놀랍게도 내게 대마법사의 재능이 있었다.

       

       

       어쩐지 암산이 잘 되더라니.

       

       

       마탑이라는 곳으로 끌려가서 마탑주들로부터 무수한 러브콜을 받았다. 

       

       ⋯⋯끌려갔다라.

       

       나는 아버지에게 툭 뱉었다.

       

       “10년 전에 팔아넘겼던 자네의 아들을 기억하고 있나?”

       

       “아, 기분 나쁜 애새끼였죠. 어른이 말을 해도 따박따박⋯⋯.”

       

       “그렇군.”

       

       충분했다.

       

       나는 준비하던 환상 마법을 뿌렸다. 아버지는 그대로 의식을 잃고 고꾸라졌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아마 오른쪽이랑 왼쪽을 자주 헷갈리게 될 거다. 50% 확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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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중에 봐!”

       

       “다시 볼 일 없거든요?!”

       

       적탑 마법사와는 간단하게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

       

       돌아가는 길에, 푸념을 뱉었다.

       

       “그러니까, 뭐⋯⋯ 안 봐도 뻔한 일이 있었겠지. 그래서 기억 찾는 건 그만두려고.”

       

       “그렇군요.”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해. 아버지가 자식 팔아먹고 다녔다는 건 알겠어. 내가 10년 전에 팔렸다는 것도. 어쩌면 마을 전체가 인신매매에 맛을 들였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하지만 말하는 투를 보면 최근까지 거래가 있었던 것 같아. 그렇지?”

       

       “예. 10년 전에 한 번 봤다고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익숙한 듯이 굴 리가 없습니다. 최근까지 거래가 있었던 건, 아마 확실하겠죠.”

       

       “⋯⋯⋯⋯.”

       

       “의심하십니까?”

       

       “둘 중 하나잖아.”

       

       1. 자색 마탑의 누군가가 / 혹은 사칭한 누군가가 꾸준히 사람을 공급받고 있다. 유나는 자색 마탑에 숨은 사악한 범인에 대해서 아직 모른다.

       

       2. 나는 자색 마탑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제법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걸 알지만, 물어보지 않고서는 버티기 힘들었다.

       

       “어느 쪽이라고 생각해? 핑발레즈야.”

       

       “2번 고르면 펑펑 울어주실 겁니까?”

       

       “웃어야지.”

       

       “그러면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군요. 저는 1번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호구 등신이 아니고서야 그 눈빛을 못 알아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자탑주가 당신 보는 눈동자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던데.”

       

       “?”

       

       “⋯⋯호구 등신새끼.”

       

       ===============================================================

       

       어느 외딴 숲에 나비가 내려앉았다.

       

       질 나쁜 용병 무리들은 건방진 마법사를 덮치고, 재미를 좀 본 다음, 마을을 빠져나가 잠적하려던 계획이 있었다.

       

       그들은 장비를 점검하고, 적당한 풀숲에서 기습을 준비하던 중에 나비를 만났다.

       

       자세히 바라보니 사람이었다.

       

       커다란 고깔모자를 푹 눌러써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옆으로 묶인 금발 트윈테일이 늘어져 살랑살랑 흔들렸다. 나선으로 꼬인 지팡이를 품 안에 꼭 안고 있었다.

       

       “형님, 저거⋯⋯.”

       

       가장 어린 용병 한 명이 손가락으로 숲 언저리를 가리켰다. 용병들은 하나둘 고개를 돌려, 작고 여려 보이는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길 잃은 아가씨라도 되는 모양인데, 어차피 이 지역 뜰 거면, 한 명 정도는 더 잡아도 되는 거 아닙니까?”

       

       “맞네, 마을 하나 집어먹으려다가 일이 틀어졌으니까. 솔직히 두 명으로는 부족하잖아요. 예? 가슴도 커 보이고.”

       

       “너는 눈이 삐었냐? 먹을 것도 없어 보이는구만⋯⋯. 그래도 얼굴은 반반해 보이니까 좋네.”

       

       “아니, 다들, 무슨 말씀 하시는 겁니까⋯⋯? 저, 저기 있는 건, 아무리 봐도 사람은 아닌 게⋯⋯?!”

       

       

       조용히 지팡이가 겨누어졌다. 용병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위기감을 느낄 수 없었다. 자색 마탑주는 한숨처럼 작게 소근거렸다.

       

       “그, 그의 손에 피를 묻히게 하고 싶지 않았어. 으, 으응. 악화될 거야.”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여기서⋯⋯ 어, 없었던 걸로 하자.”

       

       “혀, 형님들, 피해──!”

       

       “우화(羽化) -『빼기』.”

       

       지팡이 끝에서 빛이 번뜩였다. 가장 어린 용병은 소스라치면서 머리를 가리며 주저앉은 덕분에, 광선에 직격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광선은 그의 두 손만을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의 침묵.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동료 용병들은 눈도 깜빡이지 않는 채로 우두커니 굳어 있었다. 숨도 쉬지 않았다. 표정이 변하지도 않았다. 초점도 없었다. 자세히 바라보면, 그들은 이미 죽어 있는 것 같았다.

       

       살아남은 용병은 발버둥 치기 위해, 공포에 질려서 칼을 뽑아 들고자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   ‘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그럴 수 없었다. 칼은 팔을 움직여서, ‘   ‘으로 ‘  ‘잡이를 거머쥐고, 뽑아 들어야 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어?”

       

       뭔가,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람의 팔 끝에는, ‘   ‘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원래 없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면 칼은 대체 어떻게 뽑아 들어야 했던 걸까. 용병은 온갖 지혜를 짜낸 끝에, 칼 ‘   ‘잡이를 팔꿈치에 끼웠다. 불가해한 공포에 몸이 떨렸다. 뭔가가 잘못되었다.

       

       마법사는 조곤조곤 말했다.

       

       “너, 너는⋯⋯ 작지만 내성이 있구나. 자색 마탑에 왔다면, 아, 아주 잘하면⋯⋯ 우화에 닿을 수, 있었을지도 몰라. 지금은, 4급 용병일 뿐이지만⋯⋯.”

       

       “으, 우우⋯⋯ 으아──!!”

       

       비명은 도중에 끊겼다. 마법사의 광선이 그의 하관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  ‘이 없기 때문에 소리를 지를 수 없었고, ‘  ‘가 없었으므로 숨을 쉴 수도 없었다. 그는 더 이상 공급되지 않는 산소에 목을 부여잡고 온몸을 비틀며 괴로워했다.

       

       “쉿.”

       

       다시 한번 섬광이 스치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매장』.”

       

       어머니 대지가 생각할 수 없게 된 유기물 다섯 덩어리를 삼켰다. 그들은 어떤 의미도 없이 존재하다가, 생명이 끝나는 날, 비로소 썩어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어떤 숲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의 추천곡은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이랍니다!
    옛날 곡을 듣고 있으면, 가슴이 울리는 느낌이 들 때가 있지 않던가요?
    오늘도 좋은 하루 되기를 바래요, 마이 프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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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world TRPG Game Master

Otherworld TRPG Game Master

Another World TRPG Game Master, 이세계 TRPG 게임마스터
Score 8.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wizard of the Illusion Magic School and decided to create a virtual reality with illusion magic to play a tabletop role-playing game (TRPG). It was great to create a virtual reality, but I was in trouble because there were no suitable players. During that time, I received an offer to be the professor from the Royal Academy. The offer was to use illusion magic to fill the students’ lack of practical experience safely. And so, I became a professor at the academy. “Send me back, send me back to that world right now-!” “Outer god, someday an outer god will be our doom, we’ll all die!!” “I am not the bastard of the Redburn Ducal Family. I am the foremost disciple of the Great Namgung Clan, Namgung Qinghui!” But it seems there is a bit of a misunderstanding. This isn’t a spell for dimensional travel, kids. It’s 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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