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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3

       * * *

       

       

       안톤 데니킨의 남러시아 백군은 주도면밀하게 움직이며 빨랐다.

       

       마치 고토수복을 하려는 것처럼. 정교회의 수호자로서, 동로마의 계승자로서 땅을 되찾겠노라고 기세를 올리며 아나톨리아로 진입했다.

       

       

       “뭐야, 러시아 놈들이 이곳에 왜 있어!”

       “우리가 막을 수 없는 대군이다!”

       

       

       대국민의회의 군대는 절망했다.

       

       기세 좋게, 파도처럼 쇄도해 오는 저 군대를 보고 있자니 기가 질려 버린 것이다.

       

       러시아군에게 물자는 걱정이 없었다.

       

       부족한 수송선이나 식량은 협상국에서 지원해줬으며, 무기도 공산 독일에 가지 못하게 압수한 프랑스전선용 독일 무기가 차고 넘쳤다.

       

       빨갱이를 사정 없이 두들겨 잡고. 정예화된 힘을 이미 늘씬하게 두드려 맞아 방어가 최선인 대국민 의회를 노렸다.

       

       러시아에 항의하려 한 그리스는 그 백군의 기세에 눌려 감히 말도 못 하고 뒤로 물러날 뿐이었다.

       

       그리고.

       

       튀르키예 대국민의회는 죽을 맛이었다.

       

       

       “열강의 지원을 받은 러시아 백군이 아나톨리아로 넘어왔다고 합니다.”

       “어.얼마나 된다고 합니까? 그쪽도 내전이 막 끝난 시점이라 그리 많이 동원하지는 못할 텐데.”

       

       

       러시아 쪽을 걱정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너무 빠르다.

       

       내부 단속하기도 바쁜 처지에 이렇게 오는 게 말이 되나?

       

       성녀 아나스타샤와 러시아의 사정에 대해 알지 못했던 튀르키예 대국민의회는 적어도 러시아는 이 전쟁에 개입하지 못할 거로 여겼다.

       

       

       “독일 무기로 무장한 20만입니다.”

       

       

       실제 역사보다 열악한 사정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연이어가며 곧 독립할 수 있다 여긴 대국민의회였다.

       

       하지만 백계 러시아군 20만이 적군으로 나타난다는 소리에 대국민의회는 사기가 바닥을 쳤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했나?

       

       오스만제국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렇게까지 두들겨 맞고 찢겨야 하나?

       

       

       “안톤 데니킨의 러시아 백군이 삼순에서 진격을 멈췄습니다.”

       “교전도 없었겠군. 왜 멈춘 거지?”

       

       

       삼순이라면 지금 수비군이 없는지역이었다.

       

       왜 거기서 멈췄을까.

       

       물론 계속 들어온다면 안톤 데니킨의 군대도 게릴라 전에 걸렸을 테지만, 지금 당장은 승기를 잡았을 텐데.

       

       

       “혹시 함정이라고 여긴 까닭이 아닙니까?”

       “이제는 어떻게 합니까?”

       

       

       대국민의회는 혼란에 빠졌다.

       

       정말 답이 없다.

       

       20만이나 되는 병력이 적으로 더 추가되었다.

       

       그것도 상대는 늘 오스만 튀르크의 땅을 노리던 슬라브 족속들. 그야말로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케말은 이쯤 되면 스스로가 사실은 정말로 지금껏 잘해오지 않았던 걸까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솔직히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포기해도 튀르키예 역사에 길이길이 기록되지 않을까.

       

       무스타파 케말은 그런 나약한 생각을 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아직은 아니다.

       

       러시아놈들이 머릿수만으로 밀어붙이는 멍청이들이라고만 생각한다면야.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머릿수로만 밀고 오는 군대라 한들 위협적이라는 게 문제지만. 지금 아나톨리아로 들어오는 러시아군은 만만치 않은 병력이었다.

       

       

       “이뇌뉘 장군. 우리가 이길 수 있겠나?”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지금까지가 오히려 기적에 가까웠습니다. 그마저도 이탈리아가 남기고 간 물자 덕인데.”

       

       

       대국민의회의 군대는 어디까지나 대전쟁에서 달마티아를 받지 못한 이탈리아가 불만을 품고 탈주하면서 남겨둔 무기로 근근이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러시아군 20만이라니.

       

       심지어 머릿수로만 밀려온 것이 아니라 최신 무기로 제대로 무장한 군대다.

       

       어디서 얻은 건지 몰라도 독일군 장비로 쫙 빼입은 러시아군은 순식간에 아나톨리아의 일부러 밀고 들어와 자기들이 로마의 후예라고 자랑스럽게 외치고 있었다.

       

       내전이라 하나 내부의 빨갱이들을 상대로 연전연승하며 무너진 러시아를 바로 세운 군대란 말이다.

       

       

       “저들이 머릿수만 많으면 모르겠지만. 내전에서 정예화된 군대입니다. 물자도 많고. 우리가 이기기에는 많이 힘들 듯합니다.”

       “협상국에서 다시 제안이 왔다지?”

       

       

       러시아군이 참전하면서 협상국은 다시 제안을 보냈다.

       

       이탈리아가 빠지고 그리스 쪽도 새롭게 수정한 제안이었다.

       

       

       “네. 폰토스 그리스인이 거주하는 튀르키예 북부와 콘스탄티니예를 포함한 동트라키아. 즉, 제 2로마의 땅을 러시아 몫으로 넘기고 아나톨리아 중부와 남부의 영토를 보존해주겠다고 합니다.”

       

       

       러시아에 넘어가는 옛 동로마의 영토를 제외하고 국제 연맹의 공동관리에 들어갈 예정인 마르마라해 연안의 땅 ‘일부’도 신생 튀르키예의 것으로 인정하겠다고 한다.

       

       물론 에게해의 섬들이 그리스의 몫으로 넘어가고 영국과 프랑스가 떼가는 영토와 쿠르디스탄 자치령까지 생각하면 속이 쓰리지만, 기존에 분할된 것보다는 영토를 조금이라도 더 보존할 수 있었다.

       

       뭐 소리높여 웃는 것은 이제 당당히 로마의 후손이라고 외칠 러시아놈들이겠지만.

       

       이렇게 되면 사실상 튀르키예는 예전 같은 기세로 국력을 키울 수는 없게 되겠지만. 살려면 방도가 있나.

       

       땅 뜯어갈 거 다 뜯어가면 독립은 보장해준다고 하더라.

       

       

       “러시아가 군침을 흘릴 만했군.”

       “그리고 이건 러시아 측에서 직접 보낸 것입니다.”

       “러시아 측에서?”

       “황녀의 친서라고 합니다.”

       

       

       아나스타샤의 친서를 받은 무스타파 케말은 이 친서를 읽어야 하나 찝찝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아나스타샤란 황녀는 직접 빨갱이를 때려잡고 다닌 인물이다.

       

       자신과 같이 국난을 해결한 몸.

       

       그런 전장의 여신이 친서를 보냈다면 무슨 내용이겠나.

       

       아니나 다를까. 항복하란 내용-

       

       

       “아니지. 대화하자고?”

       “대화 말입니까? 러시아 황녀가 말입니까?”

       “그러네.”

       

       

       만나도 내용은 똑같을 거 같지만. 그래도 대화를 하잔다.

       

       그것도 열강들 눈을 피해서. 뭔가 그럼 타협점을 찾겠다는 거 아닌가.

       

       

       “함정입니다. 장군을 낚아내서 죽일 생각 아니겠습니까?”

       “삼순에서 보겠다는군.”

       

       

       물론 그곳에 안톤데니킨의 군대가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대화하자고 만나자는 거다.

       

       한번 그럼 만나 보는 것은 어떤가.

       

       혹시 아는가? 이쪽은 달리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 * *

       

       

       내 앞에 아타튀르크가 있다.

       

       처칠에게 미스터 갈리 폴리라는 멋진 별명을 붙여 준 인물.

       

       갈리 폴리에서 협상국 군대를 갈아버리면서 오스만의 영웅으로 등극한 인물.

       

       이렇게 현실에서 보게 될 줄이야.

       

       그것도 오스만 분할을 두고 하는 협상에서 말이지.

       

       개인적으로 1차 세계대전에서 해적 놈들답게 혐성질이나 처칠을 엿먹여서 좋아하는 인물이긴 한데.

       

       

       “전러시아의 성녀님을 뵙게 되는군요. 제가 무스타파 케말입니다.”

       “갈리 폴리와 튀르키예 독립전쟁의 영웅. 무스타파 케말 장군을 이렇게 보게 되는군요.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어 유감입니다.”

       “유감이시라면 군대를 물려주시지요. 러시아도 내전의 피해가 만만치 않은 것으로 압니다만.”

       

       

       이야 아주 독기가 어려 있군.

       

       참 그래. 그럴 만도 하지.

       

       대뜸 대군을 끌고 와 자기들을 멸망시키려고 하니까.

       

       현실에서 한국과 튀르키예의 관계는 좋은 편이긴 하지만 뭐 그 세계와 이 세계는 다르지 않나.

       

       더군다나 이 몸은 러시아 황녀고.

       

       동로마의 계승자라 할 수 있는 러시아와 동로마를 멸망시켰던 오스만의 관계가 좋을 리는 없다.

       

       특히나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더욱.

       

       

       “그러고 싶어도 무리라서요. 열강들에게 도움받은 것이 커서 이번 일로 적당히 때울 셈이거든요. 물론 콘스탄티노플도 제 몫으로 받고 싶기도하고.”

       “이스탄불입니다.”

       “오스만 튀르크가 동로마를 멸망시키고 강제로 취한 땅 아닙니까. 본디 그 땅은 신성한 로마의 땅으로서 그들을 이은 우리에게는 콘스탄티노플입니다.”

       

       

       우리에게는 콘스탄티노플이야!

       

       어딜 감히 이스탄불을?

       

       

       “과거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서 우리를 압박할 셈입니까?”

       

       

       말다툼에서 질 거 같은 케말은 말을 돌렸다.

       

       그래. 나도 본론이 중요하다고.

       

       얼른 콘스탄티노플 빼먹고 가야 한다는 말이다.

       

       

       “뭐 장군의 말대로 내전의 피해도 있고 민심 챙길 시기에 전쟁을 또 치르는 것은 도박이지요. 해서 제가 온 것이 아닙니까. 새로운 항복 제안을 받으세요.”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여기서 싸우겠다는 생각이 참 대단한 거 같은데. 아니, 뭐 그래 좋다 그거야. 최후의 한 명까지 싸우겠다. 그런 거 좋지.

       

       그런데 그것도 싸울 군대가 있어야 가능하지.

       

       심지어 무기조차도 없는데.

       

       

       “싸울 군대는 있습니까? 물자는 풍족합니까? 우리가 작정하고 영국과 프랑스와 연합해 위아래로 치면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반박하지 못한다.

       

       그래. 그렇다니까. 반박이 가능할 리 없지.

       

       

       “우리 튀르키예인 마지막 한 명까지 적들에게 맞서 싸울 겁니다.”

       “뻔하겠죠. 이대로 어떻게든 모두가 죽을 때까지 싸운다고 하면서 협상국을 질리게 만든 다음 협상할 생각이라거나 말입니다.”

       “!!”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대전쟁에서 독일을 봐주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어떻게든 당신들이라도 멸망시키려 들 겁니다. 식민제국의 자존심이 있으니까요. 영국과 프랑스가 얼마나 혐오스러운 존재인지 알지 않습니까?”

       

       

       무스타파 케말을 비롯해 그를 따라온 이뇌뉘와 대국민의회의 병사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나를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본다.

       

       왜 뭐. 우리는 동로마의 계승자라 당당히 너희에게 혐성질할 수 있다고.

       

       뭐 조금 시간이 지나 정신 차린 케말이 애써 분노를 삭이듯 말을 이어갔다.

       

       

       “항복하면 우리에게 남는 건 아나톨리아 중남부뿐입니다.”

       “그중남부라도 지킬 수 있죠. 오스만인이 모두가 죽기 전에 말입니다. 영프는 지금 케말의 항복이라는 타이틀이 필요한 겁니다. 지금까지 맞서 싸운 덕에 영프가 이 정도로 봐줬다고 생각하시면 되는 게 아닙니까?”

       

       

       살려달라고 애걸한 동로마를 멸망시킨 오스만보단 훨씬 자비롭지 않은가? 적어도 국가는 유지해주겠다는 거 아니냐.

       

       이게 잘 생각해 보면 간단한 일이다.

       

       오스만 찢기를 케말이 거부했다->이참에 오스만이라도 멸망시켜서 대전쟁은 협상국의 승리라는 걸 보여주자->케말이 우주 방어를 하네? 일단 항복만 받자. 이렇게 된 거라고.

       

       영국도 표팔이를 해야 하니 오스만을 어떻게든 잡아야 할 거고, 공산당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올 프랑스는 열거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까. 이 대국민의회의 케말이 버티면 다 같이 죽자가 되고 만다.

       

       다만, 확실히 죽는 것은 튀르키예겠지.

       

       적어도 다른 열강은 내전을 겪든 뭘 하든 국채는 보존할 거다. 하지만 튀르키예는? 정말끝이다.

       

       폰토스의 그리스인은 독립할 것이고, 쿠르디스탄도 독립하겠지.

       

       영국과 프랑스는 튀르키에에게 화풀이를 다 할 테고 말이지.

       

       

       “빌어먹을 영국놈들만 아니었으면 우리가 그 개 같은 전쟁에 나설 이유도 없었소! 그놈들에게 또 굴복하란 말이오. 또!”

       

       

       아타튀르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함을 쳤다.

       

       알지. 처칠 새끼가 군함 가지고 사기 쳤다는 걸. 오스만이 정말 억울하기는 할 거다.

       

       자존심은 긁힐 대로 긁혀 버렸으니까.

       

       하지만 말이다.

       

       언젠가 결국 좋은 날은 온다는 거지.

       

       

       “언젠가 기회가 있지 않겠습니까.”

       “기회?”

       “전쟁은 이번이 끝이 아닐 겁니다. 워낙에 좋지 못하게 마무리되었고, 독일은 공산당이 장악했으니. 그때 가면 우리 러시아가 귀국을 도와 영국과 프랑스에게 뜯긴 것을 좀 붙여줄 수 있겠죠.”

       

       

       결국 기회는 오게 된다.

       

       그때가 되면 영프는 온 힘을 끌어모아 독일이라는 붉은 역병을 처리하려 할 터. 결국, 본토밖에 유지할 수 없을 터다.

       

       실제 역사처럼 돼지같이 살찌운 땅을 다 토해내야 한다는 소리지.

       

       튀르키예도 땅을 반환받으려 할 테고.

       

       그때 눈 감아주는 것 정도야 뭐 괜찮잖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다작을 하다 보니 퇴고로 좀 늦었습니다!

    선작, 추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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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ast Princess of the Bear Kingdom

I Became the Last Princess of the Bear Kingdom

Status: Ongoing Author:
I became a Russian princess destined to die in a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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