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화. 첫 번째 일꾼 ( 3 )
갑옷이라는 건 사실 섬세한 부품들의 조립에 가깝다.
미늘 갑주부터 시작해서 익숙한 서양식 갑옷까지.
그 어느 시대의 갑옷도 주괴 하나를 통으로 두들겨서 만들지는 않는다.
‘하다못해 가죽 갑옷도 이렇게 만들지는 않을 텐데.’
그 미친 짓을 해낸 일꾼 1호.
심지어 갑옷을 만들면서 겉에 섬세한 조각까지 해놨다.
“…이건 발가르, 이건 이시디움인가? 날개를 보니까 미카에르도 있네.”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생생함.
이게 정녕 단조질로 가능한 범주란 말인가?
‘이게, 에픽 드워프의 힘?’
한참이나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손을 움직였다.
무기 카테고리의 갑옷을 열었다.
그중 적당한 갑옷을 해금한 다음, 별빛을 집중해 최대한 겉표면을 꾸미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윽, 으음….”
무리다.
적당히 외형을 바꾸는 거라면 모를까, 일꾼 1호처럼 세세한 조각을 새기는 건 힘들었다.
내 상상력과 미적 센스의 문제다.
에픽 드워프가 된 일꾼 1호는 도대체 뭐가 되어가고 있는 걸까.
“이런 미친놈.”
좋은 의미의 미친놈이다.
일꾼 1호는…… 스스로 승격하며 엄청난 존재로 거듭난 것이 분명했다.
– “끄응. 아이고. 아이고오. 드워프 죽네.”
어느새 오크통 3개를 비우고 있는 일꾼 1호가 끙끙거리며 죽는 소리를 냈다.
안색은 아직도 창백했다.
추측하건대 갑옷을 만드는 과정과 스스로 승격하면서 적지 않게 무리를 한 것 같았다.
“흐음……. 주괴를 두들겨서 갑옷을 만들 수 있단 말이지.”
아마 다른 드워프들이 일꾼 1호처럼 스스로 승격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일꾼 1호가 굉장한 일을 해낸 것 같았으니까.
‘이 녀석을 어디에 써먹을 수 있으려나……?’
5번째 오크통을 들이키고 있는 일꾼 1호를 유심히 바라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무려 주괴를 두들겨서 통짜 갑옷을 만들 수 있는 일꾼.
거기에 섬세한 조각까지 장식할 수 있는 손재주를 겸비한 녀석!
“츄릅.”
무궁무진한 착ㅊ…아니, 가능성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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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성지에 있는 첫 번째 일꾼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을 때.
세 반신의 자존심을 건 전쟁은 끝을 맞이했다.
피가 강처럼 흐르… 지는 않았고, 시체가 산처럼 쌓… 이지도 않았지만.
무척이나 치열했던 전투였음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아아아아아! 내가, 이 내가 승리했다! 나, 미카에르의 승리다!》
세 개의 깃발을 움켜쥔 미카에르가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초반에 장악한 제공권을 중심으로 여러 전략을 펼친 것이 상당히 유효했다.
《창조주시여! 보고 계십니까? 저, 미카에르가 승리했습니다! 이 영광을 그대에게 바치겠습니다!》
《비겁한 쫌생이.》
《계집처럼 싸우는 녀석.》
발가르와 이시디움이 미카에르에게 극찬을 던졌다.
미카에르가 지휘한 천사들은 참 얄밉게도 싸웠다.
깔짝이다가 잽싸게 하늘로 도망치기, 공중에서 활 쏘면서 약 올리기, 빠르게 활강하며 공격하는 등.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저는 도저히 당신의 전략을 이길 수 없군요.’라는 칭찬을 불러일으켰다.
《크으윽…. 비, 비겁한 날개쟁이 녀석….》
《하늘에서 내려와서 정정당당하게 싸웠더라면…….》
천사들이 장악한 제공권 아래 용암 거인과 밤의 기병, 악마들은 힘없이 스러져갔다.
날지 못하는 것들의 서글픔이 사무쳤다.
《…창조주시여?》
깃발을 높이 들어 올린 미카에르가 다시 한번 신을 불렀다.
허나 하늘에 떠 있는 일곱 개의 별은 그들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사실 보고 있지도 않았지만.
“크흠, 흠! 위대하신 분께서는 지금… 굉장히 시급한 대업을 마주하셨습니다.”
급히 나타난 케넬름이 그리 말했다.
미카에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 우주의 모든 것을 아우르시는 창조주께서는 언제나 공사다망하실 터.》
연옥을 다스리는 미카에르조차 과로로 쓰러질 뻔했다.
하물며 온 우주를 다스리는 창조주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대리인이여. 나의 승리를 인정하는가?》
“깃발 세 개를 모두 모으셨군요. 미카에르의 승리를 선언하겠습니다.”
《아하하하! 이 몸의 고귀함과 품격의 승리구나!》
미카에르가 날개를 크게 펄럭이며 승리를 자축했다.
발가르는 조금 똥 씹은 표정이었지만 엄청나게 분하지는 않았다.
《흥. 어차피 제일 중요한 개인의 무력에서는 이 몸이 승리했다. 집단의 힘 따위,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는 무너지는 모래성에 불과하다.》
발가르는 이미 1승을 거두었기 때문에 큰 미련을 남기지 않을 수 있었다.
다만….
《………흑, 크흐흐흑. 위, 위험하구나아…….》
《과연 슬픔의 머리말대로다. 실로 위험한 상황에 몰렸어.》
지금까지도 승리를 챙기지 못한 이시디움만 괜히 조급해질 뿐.
괜히 여덟 개의 팔을 붕붕 휘두르며 케넬름을 재촉했다.
《크으으으으! 으으으으윽! 대리인! 빨리 다음 경기를 안내해라! 어서! 이번에는 기필코 이 몸이 승리할 것이다!》
“좋습니다.”
케넬름은 곧바로 마지막 경합을 안내했다.
“이제 저희가 준비한 마지막 차례입니다. 그것은…….”
말을 잇던 케넬름이 손을 귀로 가져가며 무언가 듣는 시늉을 했다.
“……네? 어, 음. 아? 그런가요.”
뭔가 급하게 전해듣는 모양새에 발가르와 이시디움, 미카에르가 귀를 기울였다.
허나 들리지 않았다. 성지에 있는 리아에게서 직통으로 연결된 핫 라인이기 때문이다.
“흐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연락을 끊은 뒤 케넬름은 무언가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대리인이여?》
“잠시 변수가 생겼습니다. 으음. 긍정적…이라고 해야할까요? 아직 판단하기에는 좀 이르지만.”
케넬름은 세 거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고생하셨습니다. 당장 세 번째 경합을 치르기에는 상황이 조금 혼란스러우니, 잠시 상황을 정리하고 후에 다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으실지요?”
《난 상관없도다.》
《…마음대로 해라. 계집.》
《후후후. 승리자의 관용을 보일 때구나.》
셋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시디움은 다음 경합의 전략을 마련할 시간이 필요했고, 미카에르는 기분이 한껏 좋았기 때문에, 발가르는 그냥 케넬름이 무서워서 그랬다.
“감사합니다. 추후, 너무 멀지 않은 때에 마지막 경합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케넬름은 품에서 장도리를 꺼내더니 풍차처럼 붕붕 돌렸다.
그러더니 휙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내 기필코 마지막 경합에서 승리하리라.》
이시디움은 승리를 다짐했다.
세 개의 머리로 열심히 토론하고 회의하며 다양한 전략도 준비했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허나 이시디움의 각오와는 반대로, 마지막 경합이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마지막 경합은 치를 수 없게 됐습니다. 하나 된 분께서 도무지 여러분께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쁘셔서…….”
《……흑……. 스, 슬프구나아…….》
결국 이시디움은 마지막 승리를 챙길 수 없었다.
씁쓸한 결말이었다.
그래도 본래의 목적대로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되기는 했으니, 취지는 달성한 셈이다.
《날개 녀석들은 강풍에 유독 약했지. 잘 기억해둬야겠어.》
《마귀 대장 녀석…. 의외로 지휘에 서툴렀다.》
《대규모 병력 싸움으로 유도한다면…….》
그 이유가 상대를 때려눕히기 위한 이해라고 할지라도, 어쨌든 상대를 잘 알게 되기는 했다.
이시디움을 제외한다면,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세계의 완성이었다.
《크하하하하하! 멍청한 돌대가리 녀석. 패배자, 약해 빠진 놈! 한 번도 이기지 못한 녀석!》
《…….》
《……크하아아아! 죽여버릴까, 평온의 머리?》
《……후우.》
이시디움은 심심할 때마다 탄탈로스에 와서 놀려대는 발가르가 세상에서 제일 얄미웠다.
* * * * *
대륙의 영적 수도, 성도!
성도는 온갖 볼거리와 명물, 진기한 것들이 가득했다.
광장 한편에 자리 잡은 거대한 문, 용사 임명식이 있었던 자리, 신을 모욕한 자를 벼락으로 벌하셨다는 흔적 등등.
신도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꼭 와봐야 하는 순례지로 성도는 나날이 인기가 높아지고 있었다.
우와아아아아!
그리고 성도에서 조금 떨어진 곳, 엄숙하고 조용한 성도와 어울리지 않는 함성과 열기로 가득한 건축물이 하나 있었다.
무수한 아치형의 다리로 이루어진 거대한 건축물, 신께서 결투 축제를 위해 직접 세우셨다는 콜로세움!
그간 성도에서는 건축물 보호 차원에서 민간인의 콜로세움 입장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얼마 전부터 전격적으로 콜로세움을 개방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신께서는 전투와 전사들을 좋아하십니다.”
“하나 된 분께서는 언제나 물러섬 없는 이들을 반기셨죠.”
위대한 전사를 뽑기 위함이었다.
이제 자신들이 모시는 신의 성향을 제법 정확하게 파악한 만신전은 그런 이유로 콜로세움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분께서는 불과 벼락으로 다스리시며, 신묘하게 빚어낸 무기로 악을 벌하도록 하십니다.”
“피와 영광, 긍지가 함께하는 결투야말로 신께서 즐기시는 것.”
콜로세움에서는 반년 주기로 성대한 결투 축제가 열렸다.
신께서 개최한 결투 축제의 뒤를 잇자는 취지였으며, 신의 즐거움을 위한 거대한 의식이었다.
콜로세움의 정면에는 대리석으로 조각된 라이언하트의 조각상이 도전자들을 반겼다.
홀로 대악마를 막아낸 위대한 대전사에게 바치는 찬사였다.
《누구보다 용명했으며, 신의와 영광스러운 삶은 살다 간 팔라딘.》
라이언하트를 기리는 문구였다.
그 밑 아주 작은 구석에는 보이지 않는 낙서도 있었다.
《결투 축제에 만취 상태로 지각한 못난 놈.》
어느 늙은 대사제가 적은 낙서였다.
《친구보다 먼저 간 못된 녀석.》
유명한 대장장이가 친우를 기리며 적은 글귀였다.
“정말 엄청난 크기의 동상이야.”
“이분이 가장 노회한 팔라딘이었다면서? 심연에서 혼자 대악마를 막아내고 순교하셨데.”
“그러고 보니까 팔라딘 한 자리가 아직도 공석이네. 다음 팔라딘은 누가 되려나?”
콜로세움으로 들어가던 전사들이 라이언하트의 동상을 보며 그리 떠들었다.
만신전에는 세 명의 팔라딘이 존재한다.
정체를 모르는 영원한 공석, 최초의 성녀이자 팔라딘 케넬름을 기리는 첫 번째 팔라딘.
가장 젊은 나이에 팔라딘에 올라 이제는 유일한 팔라딘이 된 데모닉.
그리고 비어있는 세 번째 팔라딘의 자리.
“흐음. 아마 한스 사도님이 팔라딘이 되시지 않을까? 한손에 흑염룡까지 봉인하신 분이잖아.”
“그래도 이스칼 사도님이 조금 더 가능성이 높지 않아? 이스칼님은 얼마 전에 ‘벽’을 넘었다고 하시던데, 한스님은… 그, 아직이잖아?”
전사들은 시끄럽게 떠들며 콜로세움으로 들어갔다.
그 자리에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
까맣고 커다란 덩치의 개는 동상을 잠시 바라보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여기인가.》
시선이 없는 틈을 타 휙, 공중으로 뛰어오르며 안개와 함께 사라졌다.
개가 떠난 자리에는 작게 반짝이는 비늘만이 남아있었다.
* * * * *
스스로를 갈고 닦는 전사들은 어느 순간이 되면 ‘벽’을 마주한다. 벽 앞에서 인간은 두 부류로 나뉜다.
드높고 튼튼한 벽 앞에서 좌절하고 무너지는 사람, 오랫동안 벽을 두들기고 또 두들겨서 그 너머를 보는 사람!
“흐아아아아아아!! 신이시여!!”
한스는 안타깝게도 전자였다.
연무장에서 한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함께 대련하고 있던 케니스가 안타깝게 한스를 바라봤다.
“……또?”
“하늘이여!! 어째서!! 나는 아직도!! ‘벽’을 넘지 못한 것입니까!!”
‘벽’을 넘지 못한 한스의 한이 맺힌 통곡.
몇 번이고 벽을 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도 그랬다.
딱 한 뼘!
한 뼘의 차이로 벽을 넘을 수 없었다.
억울함에 눈이 돌아간 한스가 제자리에서 공중제비를 펄쩍펄쩍 돌았다.
“……으응. 한스님. 벽, 아직도 못 넘었어요?”
“커헉.”
저 멀리서 오도도 뛰어온 데이지가 천진하게 그리 물었다.
“그, 그래……. 내 재능이 미천해서 아직도 못 넘었단다…….”
“으으음……. 벽, 이거 넘는 거 쉬운데. 그러니까, 으음. 파바박? 하고, 촤자잣! 하면…?”
데이지가 짧은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뭔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보기에는 귀여웠지만, 행위의 결과는 귀엽지 않았다.
파바바방! 파앙!
손발 짓에 터져가는 공기!
어떤 계기로 전사의 업을 각성했던 데이지는 점점 재능을 꽃피웠다.
휘두르는 손짓과 발짓에 얼핏 붉은 아우라가 깃드는가 하면, 본래부터 타고난 은신술과 추적에 더욱 능숙해졌다.
무언가를 가르치면 스펀지처럼 쏙쏙 흡수해 제 것으로 만들기 일쑤.
그 결과, 괴물 같은 재능과 기연을 바탕으로 최연소의 나이로 벽을 넘으며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으음. 벽 넘기 쉽던데, 으으음.”
“……….”
악의 없는 데이지의 중얼거림은 한스에게 마지막 일격을 꽂았다.
“그냥 슈슉! 하고 뛰어서, 샤샤샥하고 때리면 되는데…….”
“……….”
지나가던 이스칼이 이 모습을 보며 한마디 했다.
“거, 아직도 벽을 못 넘은 사람이 있나?”
“…꺼헉.”
“나는 밥 먹고 우리 애들 똥 기저귀 갈아주다가 넘은 것을. 쿠흐흐흐.”
이스칼 또한 타고난 방패술의 재능으로 벽을 일찌감지 넘은 지 오래.
한스는 더러운 재능충들이 미웠다.
“신이시여!!!”
의수 안에서 이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던 용왕이 고개를 저었다.
《쯧쯧. 지닌 바 격은 충분하니 깨달음이 문제인데. 계약자가 우둔하여 참 먼 길을 돌아가는구나.》
용왕이 보기에 한스에게 부족한 것은 힘이나 기술, 격 따위의 것이 아니었다.
고찰, 혹은 약간의 깨달음이 부족했다.
이를 알려주기만 한다면 단번에 벽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지만….
용왕은 한스에게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게 더 재밌으니까!
“나는 왜!!! 아직도!!!!!!”
《흐흐흐. 저 발악하는 꼴이라니. 크하하하하!》
용왕도 용이었다.
재밌는 구경은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무언가를 만든다는 점에서 정말 닮은 것 같습니다…!! 흠. 드워프가 신이라면… 강에는 맥주가 흐르고, 땅을 조금만 파면 온갖 광물이 나오고… 용암처럼 뜨겁고 작은 분화구가 곳곳에 있어서 화로로 쓸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나름 재밌는 세상일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