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화. 펜리르 ( 4 )
– 《캐앵! 깨갱! 깨애앵!》
– “아까 전의 자신만만하던 모습은 어디 간 거냐!”
화면 너머로 보이는 케니스는 사정없이 펜리르를 몰아붙였다. 화염이 넘실거리는 대검을 휘두를 때마다 펜리르의 체력은 뭉텅이로 사라졌다.
“이러다가 펜리르가 죽겠는데?”
처음에는 한스를 대전사로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펜리르가 중간에 수작 부리면 일꾼 1호를 죽인다고 했기에 조금 쫄았다.
“그래서 확실하게 이길 수 있는 케니스를 내보낸 거였는데……. 어, 어어. 이러다 진짜 죽겠는데.”
– 《캐애앵!》
케니스는 정말 강했다.
문제는 너무 강해서 펜리르가 쪽도 못 쓰고 죽게 생겼다는 것이다.
“일꾼 1호를 인질로 삼은 건 괘씸한 게 맞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또 죽어버리면 안 되는데.”
펜리르는 죽으면 안 된다. 말뚝을 제거한 다음 구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단 말이다.
케니스에게 손대중하라고 말해야 하는지 잠깐 고민했다.
– 《크아아아악! 캐앵! 깨갱! 이 미친 계집!》
– “너의 불경함! 그 목숨으로 갚아라!”
케니스는 펜리르가 만들어낸 폭풍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러더니 한 줄기 불꽃의 유성이 되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띠링ㅡ!
《케니스가 ‘황홀한 낙하’를 시전합니다! 낙하하는 높이에 따라 최대 4단계의 공격력이 향상합니다. 낙하한 거리에 따라 사용자가 피해를 입습니다.》
《현재 추가된 공격력 : 2단계》
“2단계?”
가만있자.
케니스가 한스랑 같이 용왕을 잡을 때 황홀한 낙하가 몇 단계였지?
자세히 기억은 안 나는데, 2단계 아니면 3단계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지금 펜리르한테 추가 공격력 2단계?
“이, 이건 무조건 죽을 것 같은데.”
일단 막아주자.
그렇게 결심했을 때.
– 슈칵! 카아아아앙!!
– 《이건 또 무슨 재밌는 꼴인가.》
– “어?”
“어?”
그런데 갑자기 발가르가 나타났다.
* * * * *
발가르가 천천히 눈동자를 굴렸다. 균열을 넘어오자마자 이게 무슨 재밌는 풍경인지 가늠도 하기 어렵다.
‘죽기 직전까지 처맞은 펜리르, 수많은 인간, 여길 보고 계시는 어버이에 꽤 싸울 맛이 나는 계집까지.’
이건 뭐, 소문난 잔칫집 수준이 아닌가.
‘일단 펜리르가 죽을 것 같아서 끼어들기는 했는데…. 잘한 짓인지 모르겠군.’
균열을 넘자마자 보이는 것이 펜리르를 향해 떨어지는 붉은 혜성이었다.
무어라 생각할 틈도 없이 본능적으로 검을 휘두르며 펜리르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고 나서야 어버이의 시선과 다른 인간들, 여기가 지상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설마 뭐라고 하시려는 건 아니겠지?’
어버이께서 호통이라도 치신다면 당장 검을 휘둘러서 펜리르의 목을ㅡ
– 《아주 잘해주었다!》
움찔.
예상외의 칭찬에 발가르가 몸을 떨었다.
어… 자신이 방해한 건 아니었나?
– 《…어버이시여. 제가 방해가 된 것은 아닙니까?》
– 《아니다. 아주 적절할 때 잘 와주었어. 역시 발가르구나.》
– 《……어, 어어. 하하! 제가 어버이의 자식이지 않겠습니까.》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칭찬받아서 기분이 좋아진 발가르.
이후 어버이께서는 은밀하게 귓가에 속삭이시며 발가르에게 상세한 내용을 지시했다.
《음. 으음. 그런……. 그렇게…….》
잠시 무어라 중얼거리던 발가르는 냉철한 눈빛으로 케니스를 노려봤다.
《잘도 나의 부하를 괴롭혔구나. 이제부터 이 몸이 직접 놀아주도록 하겠다.》
“큿…. 원하던 바다. 저번처럼 쉽게는 안 될 거다.”
케니스의 대검에 화륵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뒤에 쓰러져 있던 펜리르가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키며 버럭 소리쳤다.
《멈춰…라! 마왕… 발가르. 이건 나의 싸움이다…. 아무리 너라고 해도 나의 복수를 막을 권리는 없다.》
《…….》
발가르는 잠시 멈칫하더니 속삭이듯 대답했다.
《저년은 어버… 크흠. ■이 가진 패 중에서 가장 강한 년이다. 애초부터 너를 죽일 작정이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지.》
《그렇다면 차라리 싸우다 죽을 것이다. 어째서 나를 막는 거냐!》
펜리르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한 발가르가 아주 작게 속삭였다.
실바람이 흔들리는 듯 작은 소리여서 케니스와 데모닉마저 엿들을 수 없었다.
《…네가 저 계집을 이긴다고 하여도 ■은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런지 아느냐?》
《어째서냐. 그럴 리 없다. 가장 강한 계집이라면 분명 총애를 받을 터가 분명하다.》
《저 계집은 일종의 실험체이기 때문이다. 진짜 아끼는 녀석은 따로 있지.》
펜리르의 눈이 살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 가장 아끼는 것을 처참하게 파괴해서 복수하려 했는데, 엉뚱한 곳에 화풀이하는 꼴이었다.
‘그래. 애초부터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과 싸우게 할 리가 없지. 내 생각이 짧았구나.’
발가르는 은밀하게 시선을 돌리며 속삭였다.
《저기 오른쪽 1층 난간에 서 있는 희멀건 남자가 보이나. 저 남자가 제일 아끼는 녀석이다.》
《그렇군…. 그런 거였나.》
《그러니 너는 저 녀석과 싸워라. 너를 방해하려는 이 계집과 다른 녀석들은 내가 책임지고 붙잡아둘 테니.》
《……고맙다.》
펜리르는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발가르를 잠시 의심한 적도 있었다는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그리고, 미안하다…. 나는 너와 ■에게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을 뿐이었나.》
흠칫.
발가르가 들고 있던 얼어붙은 탄식의 끝이 살짝 떨렸다.
《너처럼 신의 있는 자를 잠시나마 섬겼다는 것이 영광이다.》
《…그, 그래. 어서 가라.》
발가르의 몸에서 끝도 없이 사악한 기운이 흘러나와 펜리르의 몸에 스며들었다.
온통 베였던 부러졌던 상처가 빠르게 아물더니 이윽고 펜리르의 몸이 멀쩡해졌다.
《아우우우우우ㅡ!!》
벌떡 일어난 펜리르가 힘차게 하울링 했다.
“전 병력 집결하라! 경계 대응 수준을 최고로 올리고, 귀빈과 시민들의 대피를 우선으로 해라!”
“전사들이여, 모여라!”
발가르가 나타났을 때부터 성기사들은 반쯤 미친 것처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덕분에 콜로세움 내부의 시민들은 대피가 끝난 상황.
“한스 님. 저희도 어서….”
데이지가 굉장히 불안한 듯 초조하게 굴었다.
마왕이 나타났을 때부터 굉장히 좋지 못한 예감이 들었다.
‘어쩐지 한스 님에게 굉장히 어렵고 무시무시한 일이 닥칠 것 같은… 그런 느낌.’
가슴이 꾹 조여오는 감각.
이전에 느낀 적 있다.
‘그래. 분명히… 전에 성도 근처에서 마왕이 나타났다고 했을 때랑 똑같아.’
그때도 한스가 나가지 못하게 붙잡았지만 막지 못했다.
이번에는 막아야 한다.
“하, 한스 님. 뭔가, 뭔가 이상해요. 얼른 도망을ㅡ”
“쉿.”
뚫어져라 발가르를 노려보던 한스가 사방을 경계했다.
부산히도 움직이던 사방이 정적에 휩싸였다.
크르르르ㅡ 낮게 깔리는 짐승의 울음소리, 짙게 깔리는 안개가 사방을 자욱하게 채웠다.
스릉.
한스가 천천히 롱소드를 빼 들었다.
“…한스 님.”
“괜찮아.”
한스는 불안에 떠는 데이지의 손을 잡아주다가.
데이지를 옆으로 강하게 밀었다.
“꺄악!”
콰아앙!
《크르르르르!!》
그와 동시에 두꺼운 벽을 뚫고 날아온 펜리르의 거대한 앞발이 한스를 후려쳤다.
“크으윽!”
《죽어라! 죽어! 너의 살점을 찢고 갈가리 흩뿌려서 ■의 비명으로 변하리라!!》
발광하여 붉은 안광을 흩부리는 펜리르가 사방에서 폭풍을 일으켰다.
매섭게 회전하는 진공 칼날을 품은 폭풍이 수십, 수백 미터에 달하도록 커진다.
“갑자기 이게 무슨ㅡ”
난데없는 상황에 한스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최대한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했다.
일단 하나는 확실했다.
이 늑대 악마가, 자신과 데이지를 죽이려 한다는 것.
‘외부의 도움은….’
짙은 안개에 휩싸여 무엇 하나 보기 어려웠고,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마치 다른 세상에 떨어진 것처럼.
《크르르르. 눈치챘나? 너와 난 지금 이 안개 안에 갇혀 있다. 외부의 도움 따위는 바라기 어렵겠지.》
“무슨 수작이냐. 갑자기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녀석이 하나 된 분과 나눴던 약속을 기억하는 한스는 억울했다.
케니스가 신의 대전사 아니던가.
왜 갑자기 나한테!
《아우우우ㅡㅡ!! 그딴 속임수에 속을 거라 생각했냐! 하하하! 우습구나. 너를 죽임으로써 나의 복수는 완성될 것이다!》
“그러니까 도대체 무슨 복수를, 아니 잠ㄲㅡ”
카가가각!
바닥을 부수며 다가오는 폭풍에 한스는 뒷말을 삼키며 뛰어올랐다.
케니스는 매서운 감각에 의지해 폭풍 사이를 누볐다지만, 자신이 그렇게 했다가는 단숨에 살점이 떨어져 나갈 것이다.
‘싸우는 수밖에 없어.’
문제는 데이지도 이 공간에 있다는 것.
어떻게든 녀석을 해치우지 않으면 데이지 또한 죽고 말 것이다.
키이이잉!
한스가 전의를 다지자 롱소드에 새겨진 용기의 룬이 맥동하며 황금빛을 흩뿌렸다.
《으르르르! 역시, 역시! 그 사특한 빛, 눈에 띄게 불안한 격! 너는 ■의 총애를 받고 있는 녀석이었구나!》
“총애? 내가? 하!”
조금 울컥한 한스가 달려 나가며 검을 휘둘렀다.
총애? 총애? 자신이 총애받았다면 이렇게 고생하는 일도 없었겠지!
카가가각!
진공 칼날을 품은 폭풍에 검을 휘두르자 강한 반발력이 느껴졌다. 케니스처럼 단숨에 폭풍을 반으로 가르는 것은 무리였다.
《아우우우우!》
사방을 둘러싼 짙은 안개 속에서 펜리르의 신형이 흐릿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카가각! 까앙!
“크윽!”
《크르르르르.》
그러다가 등이나 아래, 혹은 위에서 덮쳐오듯 펜리르가 나타나는데.
한스 특유의 날카로운 감각은 안개에 감싸인 듯 먹먹하게 둔해진 지 오래였다.
한스의 사방을 포위한 채 매섭게 회전하는 폭풍과 안개 속에서 덮쳐오는 펜리르.
‘…녀석의 기척을 잡아내기가 어렵다.’
짙은 안개는 제 손을 보기도 어려울 지경.
한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악마가 불러낸 안개답게 평범한 안개는 아니었다.
“조금 어지럽기도 하고…, 평범한 안개는 아닌 것 같은데.”
-《이제야 눈치챘나. 이대로 시간을 끌면 넌 그대로 백치가 돼서 죽을 거다, 계약자여.》
의수에 깃들어있는 용왕의 사념체가 말을 걸어왔다.
쥐 죽은 듯 조용하였기에 이따금 그 존재마저 잊었지만, 지금처럼 반가울 수가 없었다.
“용왕? 그보다 뭐? 백치가 된다니.”
– 《무려 대악마의 권능으로 일으킨 안개가 평범한 안개일 리가 없지 않으냐. 계약자의 몸이 특이해서 조금 버티는 것 같다만. 오래 있으면 자아를 잃고 미칠 거다.》
“그런 건 빨리 말했어야지!”
다급해진 한스가 안개를 향해 검을 마구 휘둘렀다.
후우우웅!
검풍이 매섭게 일어나며 사방으로 퍼져갔다. 허나 안개는 강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애초부터 폭풍에 흔들리지 않는 안개였으니 어림도 없었다.
‘젠장.’
한스가 초조하게 검을 붙잡았다.
시간이 없었다.
《크르르르르. 너의 초조함이 느껴지는구나….》
“거기냐!”
안개 속에서 펜리르가 속삭였다. 검을 휘둘렀지만 형체 없는 그림자만 갈라졌다.
《조급한 것이냐? 겁이 나는가? 크르르르. 더 두려움에 떨어라….》
“크윽. 나와, 나와 이 똥개 새끼야!”
한스가 마구 검을 휘둘렀지만 그러는 족족 펜리르의 그림자만 갈라졌다.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도 알 수 없기에 더욱 촉박한 상황. 한스의 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갔다.
《크하하하하! 느려, 느리구나! 너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에게도 보여주고 싶어질 정도야!》
펜리르의 광소가 안개 전체에 메아리쳤다.
그리고 안개에 휩싸인 작은 공간 안에서, 남모르게 비수를 준비하는 작은 짐승이 있었다.
“………기회는, 딱 한 번…….”
데이지가 더욱 존재감을 죽이며, 낮고 스산한 눈빛을 발했다.
그러고는 스르륵, 안개 속으로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으며 사라졌다.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으슬으슬, 날씨가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독자님들 모두 건강 관리에 유념하세요…!!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아쉽지만 마왕 간지는 다음 기회에… 그런데 갑자기 발가르가 나타났다… 아이에에에?! 마왕?! 난데 마왕??! 뜬금없는 마왕 난입으로 상황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이걸 제대로 수습할 수 있을지… 작가인 저조차 입을 다물수가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