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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4

       “혹시 플레어라고 알아?”

         

       그 말을 들은 순간, 버멜의 사고가 정지했다.

         

       “그걸 개발하고 있는데, 뭔가 좀 부족하더라고. 오늘 실험은 이걸로 끝내고 내일 또 하려고.”

         

       ‘플레어’가 무엇이었던가. 이 게임에서 모든 사건의 이정표 역할을 하는 핵심 마도였다.

         

       플레어가 언제, 누구에게 개발되었는지가 중요하다. 후반부에 게임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알려주는 지표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특히 누가 개발했는지를 두고선 엔딩이 갈릴 수도 있었다.

         

       그랬기에 많은 플레이어들이 플레어의 개발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버멜도 예외는 아니었다.

         

       ‘연성술 동아리에 든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나?’

         

       이제야 몇몇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파트 초반부터 전개가 틀어진 이유가 있었다. 에테르가 생각보다 많은 스트레스를 받은 모양이었다.

         

       그야 그렇다. 엘랑카야 대산맥에서 조용히 나물이나 캐고 살던 소녀를, 단지 희귀한 종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노예상이 잡아다가 시장에 내다 팔았으니까. 성노예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한 달을 떨었을 것이며, 자신을 사들인 여자에게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낀 게 긍정적인 감정의 전부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배신당했다. 하스펠트 교수의 성격이라면 3년간 그녀를 개처럼 굴렸을 터였다. 제아무리 초인이라도 그만한 과정을 겪었더라면 심신이 피폐해지리라.

         

       감정적으로 한계에 내몰려 있던 에테르에게 주어진 길은 아카데미로의 입학뿐이었다. 그러나 입학 이후로도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소녀는 마법을 연구하는 것에만 틀어박히게 된다.

         

       그게 플레어였다.

         

       버멜은 에테르를 쳐다보았다. 소녀의 얼굴은 사방이 뭍으로 막힌 호수처럼 잔잔했다.

         

       금안족은 감정 표현이 드문 종족이다. 기쁠 때 웃지 않으며, 슬플 때 울지 않는다. 화내거나, 당황하거나, 두려워할 만한 일이 있더라도 차분히 앉아 생각부터 하는 종족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금안족을 울리거나 화나게 만든다면, 정말 몹쓸 짓을 했다는 뜻이 된다. 버멜은 그 사실을 상기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 플레어라는 거, 나중으로 미루면 안 되나?”

         

       아무리 일러도 플레어는 7월에 접어들고 나서 세상에 알려져야 한다. 그게 작중에서 가장 빠른 루트였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난 직후, 하스펠트 교수가 극적으로 개발해내는 루트.

         

       그런데 에테르는 그보다 석 달은 앞서서 플레어의 골격을 완성하고, 심지어 격발 실험까지 진행했다. 이러다간 메인 이벤트에 대처할 틈도 없이 모든 사건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자신이 틸레트에서 모든 준비를 끝마치기 전에 제국이 망할 가능성도 있었다.

         

       버멜의 물음에 소녀는 ‘왜?’라고 물을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 질문이 나왔을 때 대처할 수단은 마련해두었다.

         

       그러나 에테르는 확고한 반응을 보였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 며칠 있으면 완성이라 이제 와서 무르기는 너무 아깝거든.”

         

       에테르의 눈빛은 단호함으로 차 있었다.

         

       ‘미친…!’

         

       아니, 저것은 단호함을 넘어간 그 무언가다.

         

       그 무언가는 확신이라는 이름의 감정이었다. 시스템창을 확인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보름달을 퍼담은 듯한 금색 눈동자가 영롱하게 빛났다. 묵을 머금은 머리칼은 관리를 한 흔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을 따라 허리까지 흘러내렸다.

         

       그야말로 절세(絶世)의 미인. 다만 그 ‘절세’를 하는 방향이 어느 쪽일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게임에서 에테르에게 수백 번은 죽어 봤던 버멜에게는 에테르의 눈동자를 보는 것조차도 힘겨운 일이었다.

         

       ‘일리야드에 있는 걔도 마찬가지고… 금안족은 왜 이리 다루기가 어려운 거지?’

         

       에테르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플레어를 완성할 생각이었다. 그걸 막을 수 없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어떻게든 타락을 막는다.’

         

       타락하지 않는다면 설령 에테르가 플레어를 완성한다고 해도 문제없다. 플레어로 성도를 불태울 만한 개연성은 사라지게 되니까. 오히려 인류 입장에서는 절멸급 마수를 상대할 수단을 더 일찍 얻게 된다.

         

       버멜은 짐짓 화제를 돌렸다.

         

       “혹시 요새 힘든 일 있었니?”

         

       뜬금없는 질문을 받은 에테르는 ‘응?’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대화 주제를 바꾸냐는 듯한 투였다.

         

       에테르는 이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마. 여러모로 힘들었지.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는데?”

       “아, 아니. 얼굴이 반쪽이 돼서. 너무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해도 된다고. 우린 아직 1학년이라 시간도 많잖아?”

       “내 건강은 알아서 챙길게. 도와줄 거 아니면 말을 말든가.”

       “도와줘…? 내가 뭐를?”

         

       이상하다. 에테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할 성격은 아닐 텐데.

         

       그러고 보니 부실에는 그녀와 자신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에테르의 어깨너머로 두 소녀가 자신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너희 둘도 같이 실험한 거야?”

         

       로테와 프레이가 버멜의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에테르가 플레어를 개발하는 루트에 들어가면 남에게 알리는 일이 절대로 없어. 분명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연구한다.’

         

       남의 도움을 받지 않으니 개발속도가 느려야만 했다.

         

       ‘왜 이리 급한 거지?’

         

       시스템에 따르면 에테르가 자신과 같은 플레이어일 가능성은 7%보다 낮았다. 확률로 생각해봤을 때 그쪽에 무게를 두고 생각하는 건 올바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플레어를 개발하면 어디에 써먹으려고 하는데?”

       “뭐긴 뭐야. 마수 잡아 족치는 데 써야지.”

         

       좋은 변명이었다. 어느 누가 인류를 멸망시키겠다고 플레어를 개발한다고 말하겠는가. 저 말이 거짓말일 수도 있었다.

         

       버멜에게는 그런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

         

       ‘상태창.’

         

       ─ SYSTEM : ‘흑주(黑晝) 에테르’가 당신의 의구심에 떳떳함을 표명합니다.

         

       ‘거짓말이 아니라고?’

         

       “에테르가 말한 대로야. 플레어가 완성되면 인류는 절멸급에 대항할 능력을 얻게 돼.”

         

       ─ SYSTEM : ‘홍염(紅焰) 로테 살리에르’가 ‘흑주(黑晝) 에테르’의 위업에 존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맞아! 오늘 우리가 얼마나 위대한 실험을 했는지 귀쟁이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지 못 할 걸!”

         

       ─ SYSTEM : ‘요호제(妖狐帝) 프레이 폰 파스트렌드’가 시원하게 맥주 한 잔 때리고 싶어합니다.

         

       ‘세 사람이 언제부터 이렇게 죽이 잘 맞았지?’

         

       처음 보는 일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틸레트에서 추가 기연을 찾아먹느라 바삐 돌아다니느 동안, 세 사람의 관계는 여기까지 진척됐다. 이런 루트는 태어나서 본 적이 없었다.

         

       “그, 그래…?”

       “그래! 한 99퍼센트는 완료됐을걸! 이르면 내일 끝난다고! 아약!”

       “누구 멋대로 99퍼센트래? 고쳐서 내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거든?”

       “그렇다고 때릴 것까진 없잖아아아!!”

         

       ‘적어도 9할은 완성되었다는 소리네.’

         

       그 정도라면 시스템창에 변화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버멜은 조용히 시스템창을 읊었다.

         

       눈앞에 반투명한 스크린이 띄워졌고.

         

       ─ SYSTEM : 현재 배드 엔딩으로 향할 확률은 약 80퍼센트입니다.

         

       전개가 완전히 뒤틀렸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

         

       “말도 안 돼. 처음 보는 루트인데, 이것도 이벤트로 들어간다고?”

         

       이 새낀 뭐라는 거야.

         

       이벤트라니, 갑자기 웬 잠꼬대야? 내가 아는 이벤트는 이벤트 호라이즌밖에 없는데.

         

       보아하니 뭘 또 숨기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눈총을 주고 있자 버멜은 흠흠,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부실에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플레어인가 뭔가를 개발하는 거, 그런 거라면 나와 엘리예프도 도와주도록 할게.”

       “도와준다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우리 다 같은 동아리 소속이잖아.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줘.”

         

       어…. 어딘가 태도가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개발하지 말라고 그렇게 막았으면서.

         

       말리든 말든 난 도감을 채우려면 플레어를 개발해야 했다. 플레어 하나만 완성하고 나면 나머지 화계마도는 거의 자동으로 이해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버멜의 표정을 관찰해 본 결과 이 녀석이 눈동자를 사선으로 굴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짓말을 하거나 뭔가 수작을 부리고 있다면 눈동자가 저런 무빙을 보이기 마련이었다.

         

       얘 어디 아픈가?

         

       버멜이나 이르카가 도와준다고 해도 딱히 상관은 없었다. 논문 한쪽에 고마웠다는 말 한마디 적어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너 공계마도사잖아.”

       “그, 그렇지?”

        “그러면 온도나 압력같은 것도 멋대로 조절하고 유지시킬 수 있냐?”

       “힘들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야.”

       “오.”

         

       이러면 일이 금방 끝나겠는걸.

         

       좋아, 깐프야. 토카막은 네가 맡아라. 내가 나중에 인공 태양을 만들어놓으면 그걸 네가 어떻게든 유지하는 거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버멜은 안도하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너 순간이동 쓸 줄 알잖아.”

       “그렇지.”

       “그러면 너 말고 실험장비나 우리도 옮길 수 있어?”

       “약간만 준비하면 얼마든지 가능해.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물어봐?”

       “우리 실험하는 거 도와준다며? 플레어의 위력을 제대로 확인하려면 보다 넓은 공간이 필요해.”

         

       이 좁아터진 곳에서 실험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최대 출력을 조절해야 한다. 출력을 조절하면 재앙급 마수를 실제로 잡을 수 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플레어의 집속율을 높인다? 잘못했다간 동아리 부실… 아니, 학교 전체가 날아간다.

         

       그러니 탁 트인 공간에서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래, 기왕이면 재앙급 마수가 활개치고 있는 곳으로 가 보자. 장전까지 마친 뒤 거기서 쏴 보는 거야. 재앙급이 맞고 바로 죽으면 실험은 거의 성공했다고 봐도 되겠지.”

       “…너 원래 그렇게 무모한 성격이었어?”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지. 위대한 사람은, 생각하는 동시에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

         

       머뭇거릴 시간은 없는데. 도와준다고 해 놓고서 이렇게 꾸물거리기만 하면 짐덩이밖에 안 된다.

         

       “싫으면 안 도와줘도 되고. 일단 이론만 발표하고 실험은 여름방학 때 해도 늦지 않으니까.”

       “아니,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도와줄게.”

         

       그렇게 버멜은 내 실험을 제한적으로 도와주게 됐다. 뜻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상황이 좋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버멜은 공계마도 능력자.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기수에서 수석을 한 만큼 실력은 보증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공계마도 중에는 온도나 압력과 같은 통계역학적인 변수를 조작하는 마도도 있다고 했다. 인간 중에는 공계마도사가 드물어서 언제 제대로 배울 수 있을까 벼르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를 토대로 조금이라도 배울 수 있다면 상당한 이득이었다.

         

       온도와 압력을 조절하는 건 플라스마 물리학에서 중요하다. 온도가 뜨거울수록, 압력이 강할수록 플라스마가 형성되고 유지되기 쉬우니까. 또한 핵반응을 일으킬 때도 온도와 압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어…. 생각해보니 수소폭탄을 만들려면 화계마도 하나만 잘 하면 안되겠구나. 융복합적인 공부가 필요한 시기였다.

         

       결국 절멸급을 쓰러뜨리기 위한 여정이 곧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여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일이 한결 수월하게 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음 날, 나는 조례시간이 끝난 직후 버멜이 있는 자리로 다가갔다. 그가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는 그 반응을 신경쓰지 않고 물어볼 걸 물어봤다.

         

       “내일이나 모레 중으로 텔레포트 가능해?”

       “흠, 어딘지에 따라 달라.”

       “여기선 가까운 곳이야.”

         

       할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엘랑카야 대산맥.”

         

       재앙급 마수가 득시글거리고, 이따금씩 절멸급에 준하는 거물들도 튀어나온다는 절망과 괴성의 설악지대.

         

       동시에 모든 금안족의 고향이라고 알려진 장소.

         

       첫 번째 실험장은 그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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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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