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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4

       솔직히 궁금하긴 했다.

        

       그 거대한 제국을 끝에서 끝까지 주파하면서 그 모든 서브 퀘스트와 인연 이벤트를 싹 다 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물론 막 설정 같은 걸 들이대면서 진지하게 따져본 적은 단 한 번도 없기는 했다. 애초에 인생에 ‘2회차’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주인공의 인생은 1회차에 한정될 수밖에 없고, 그 1회차에서 주인공은 인연 퀘스트를 절대로 다 볼 수 없다.

        

       서브 퀘스트 같은 경우도 숨겨져 있는 것이 종종 있어서 NPC한테 말 거는 것을 깜빡하면 그대로 넘어가 버리고.

        

       그러니까 그냥 ‘게임적 허용’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면 되는 거다. FPS 캐릭터가 총 한 발에 죽지 않고, 고작 방탄복 좀 입었다고 총 맞는 것도 씹으며 돌아다니는 것을 굳이 문제 삼지 않는 것처럼, RPG도 시간이 실시간으로 흐르면 플레이어가 지나치게 힘들어지니 그냥 그렇게 단순한 시간개념을 도입한 거라고 생각한 거다.

        

       그런데 그게 현실로 넘어오면 어떻게 될까.

        

       FPS 같은 경우에는 주인공이 굉장해서 총에 맞지 않고 상대는 족족 다 쏴 죽여버리는 식으로 바뀔 거다. 게임에서야 여러 번 죽어도 현실에서 여러 번 죽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그 RPG 특유의 시간관념은?

        

       정답. 제한 시간 내에 꾸역꾸역 구겨 넣는다.

        

       게임에서 이런 식의 주말이 매번 있는 것은 아니다. 정말로 ‘매주 주말’을 구현해버리면 게임이 지나치게 길어지니까. 그래서 1학기는 중간중간 중요 이벤트를 넣어 시간을 벌면서 세 번 정도 나오고, 2학기에는 초반에 두 번 나온 뒤 본격적으로 메인 스토리에 들어가면서 주인공들이 아카데미 밖을 나돌아다니게 된다.

        

       그리고 그 중요한 주말마다 있는 서브 퀘스트는 총 일곱 개. 오전에 세 개, 오후에 세 개, 밤에 하나.

        

       그리고 오전은 당연히 말 그대로 ‘오전’이다. 일어나서 점심 먹기 전까지의 시간. 일반적으로 일곱 시에서 열 두 시까지. 그 안에 ‘세 개’.

        

       아니, 상식적으로, 오후에 네 개, 오전에 세 개인 쪽이 더 낫지 않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오전 시간이 지나치게 협소하잖아?

        

       게다가 서브 퀘스트가 문제가 아니다. 이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들 간의 ‘인연 이벤트’ 또한 그 ‘오전, 오후, 밤’ 개념에 같이 겹친다. 서브 퀘스트 따로, 인연 이벤트 따로. 그리고 그 인연 이벤트들도 대충 그 자리에 서서 대화 잠깐 하고 끝나는 게 아니다. 심부름, 상담, 훈련, 공부, 그 캐릭터가 받은 의뢰 돕기 등등…… 하나같이 수십 분에서 한 시간까지 갈아 넣어야 할 스토리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모든 인연 이벤트를 본다는 가정하에 ‘시간적인 제한이 없는 설정의’ 서브 퀘스트는 이 시간에 일찌감치 처리하는 게 맞긴 했다.

        

       ……맞긴 한데.

        

       “새벽…… 네 시……?”

        

       네 시, 라고?

        

       새벽 네 시!?

        

       그 시간에 이미 가도에 나가서 짐승들을 사냥하고 있었다고!? 제정신인가?

        

       심지어 일행은 레오와 클레어 두 사람뿐이었다.

        

       아, 그래, 아카데미에서 운행하는 24시간 역마차가 신용 있는 역마차라는 건 이미 게임 설정에서 보았다. 심지어 도중에 어디로 빠지거나 강도에게 안내하는 일도 없이 정확하게 시간 맞춰 역과 역 사이만 딱딱 맞춰 다니기에 주변 주민들도 종종 사용하곤 했다. 물론 주변 주민들한테는 돈 받지만.

        

       아마 레오와 클레어처럼 한밤중에도 이렇게 움직이는 정신 나간 사람들을 위해 24시간을 운행하는 모양인데, 나는 아무리 그래도 진짜로 이 역마차를 이런 해도 뜨지 않은 새벽부터 타고 움직이는 놈들이 있을 줄은 몰랐다.

        

       “어? 실비아?”

        

       의뢰 대상인 엘리멘탈 독을 쓰러뜨린 직후에 도착한 나의 발소리를 듣고 클레어가 돌아보았다.

        

       가로등 불빛이 환했기에 클레어의 조금 얼빠진 표정이 잘 보였다.

        

       “……이 시간에 여기서 뭘 하고 계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나는 역마차에서 내려 뛰어왔다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를 내려 노력하며 그렇게 물었다.

        

       “어? 어어…….”

        

       그런 내가 화난 것처럼 보였을까? 클레어는 조금 당황한 듯 레오를 보았다. 레오도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게,”

        

       결국 클레어는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먼저 입을 열었다.

        

       “레오랑 새벽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새벽 훈련?”

        

       “아, 응.”

        

       중간에 말을 끊었는데도 딱히 화나지 않은 표정으로 클레어는 침착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매일 아침 정신 수양, 그리고 검 휘두르기. 이렇게 꾸준히 훈련하고 있으니까.”

        

       “……아침?”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슬슬 밝아지고 있긴 했다.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아직 ‘밤’이었다. 하늘이 조금 푸르게 물들긴 했지만, 솔직히 누가 봐도 새벽보다는 그냥 한밤중이었다.

        

       “어, 응, 그런데?”

        

       클레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아니지.

        

       애초에 그 시간에 이미 정신 수양과 검 휘두르기를 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보다도 일찍 일어난다는 뜻이다. 게다가 여기까지 오는 데 시간도 꽤 걸리고. 아무리 길이 뚫려있어도 우리가 탈 수 있는 이동 수단은 역마차뿐이니까.

        

       말은…… 타고 올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얘들한테 말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카데미에 마구간이 있긴 했지만, 개인용 말을 가져다 놓은 애들은 거의 없기도 했고.

        

       자동차도 있긴 했지만…… 오히려 말 타고 다니는 애들보다 자동차 타고 다니는 애들이 더 적을 거다. 게다가 지금 자동차는 마차 운전사들과의 마찰 때문에 제도 안에서 타기에는 여러모로 제한사항이 많았고.

        

       자전거는…… 타고 올 수는 있을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오는 와중에 세워둔 자전거가 보였던 건 아니니 뭐.

        

       “이런 밤에 일어나서 움직이려고 하면 피곤하거나 하지 않으십니까?”

        

       “피곤?”

        

       내 말을 들은 클레어가 정말로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레오 쪽을 돌아본다.

        

       레오도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정체불명의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니, 그냥 새벽 공기가 차가워서는 아니다. 그보다는, 좀 더, 뭐랄까.

        

       물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내 기분과 관련된 이유로.

        

       “어…… 그러니까, 그건…… 기운과 관련된 거잖아?”

        

       “기운?”

        

       무슨 도를 아십니까 하는 사이비들이나 할법한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레이스류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게 바로 몸에 맑은 기운이 돌게 하는 방법……이니까. 검기를 다루려면 언제나 청명한 정신을 하고 있어야 하고, 그런 정신을 하고 있으려면 피곤하거나 하면 안 되니, 언제나 명상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

        

       레오가 존댓말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있다는 듯한 말투로 나에게 그렇게 설명해주었다.

        

       허.

        

       기운? 청명? 정신?

        

       아니, 지금 산업 시대 배경의 스팀펑크 판타지에서 뭔 불경을 외고 있어?

        

       …….

        

       아, 그래.

        

       뭐.

        

       설정을 파던 나도 알고는 있다.

        

       애초에 이 세계관은 검성이니 기척이니 그런 단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쓰이는 세계관이니까. 당장 나와 맞붙었던 클레어가 검기를 쏘아 보낸 것도 그렇다. 계몽의 시대에 검기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그런데, 짜잔, 이 세계에는 마법도 있고 마력석도 있네요! 절대! 라는 건! 없습니다!

        

       “…….”

        

       그렇다고 그 명상으로 심신의 피로를 달래고 정신을 맑게 한다는 게 자기최면 이상의 기능이 있는지는 몰랐다.

        

       “그러니까.”

        

       나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물어보기로 했다.

        

       “잠을 길게 자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아침 명상을 통해 피곤함을 몰아내고 청명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검기도 멀쩡하게 사용할 수 있고?”

        

       “그렇……지?”

        

       그게 뭐가 이상하냐는 양 레오가 대답했다.

        

       아, 그러니까 내가 이상한 거네.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거네.

        

       내가 잘못했네, 그렇지?

        

       주인공들이 게임상의 서브 퀘스트들을 진짜로 다 깨고 다닐 거라고 생각이라도 해봤어야 했는데!

        

       “……저기.”

        

       아니, 잠깐만.

        

       나는 다시 한번 등에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꼈다. 아마 기분 탓이겠지만 체온이 2도 정도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다른 캐릭터들은?

        

       주인공인 레오가 서브 퀘스트를 할 때 데리고 갈 수 있는 인원의 수는 레오를 포함해 단 여섯 명이다. 그 중 두 명은 서포터 캐릭터로 함께 따라가는 형태고.

        

       그럼, 남아있는 다른 캐릭터들은? 걔들은 서브 퀘스트 같은 거 하나?

        

       혹시라도 주인공이 걔들이랑 일을 나눠서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실비아? 왜 그래? 혹시 어디 아파?”

        

       내가 이마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가만히 있자, 클레어가 걱정된다는 듯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

        

       나는 그런 클레어를 한 번 흘끗 바라본 뒤,

        

       다시.

        

       시간을 되돌렸다.

        

       *

        

       운전면허를 따자.

        

       흔들리는 역마차 안에서 나는 다짐했다.

        

       이 세계에 운전면허라는 제도가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동차를 운전하는 법을 익히자. 그게 제일 좋을 것 같다.

        

       말은 사람이 꾸준히 관리해야 하니까. 물론 자동차도 관리해야 하지만, 생물인 말보다야 낫다.

        

       게다가 내가 배우기에도 승마보다는 자동차 운전이 훨씬 더 편할 거고. 일단 근처에 있으면 언제든지 다시 탈 수 있을 거고.

        

       그래, 지금처럼.

        

       “…….”

        

       마부석에 앉은 마부가 어떤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잘 들리지는 않겠지만, 굳이 그렇게 말소리를 듣지 않더라도, 나에게는 그 사람의 태도로 ‘이 상황이 엄청 불편하다’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아카데미 직원들에게는 정말 중요한 학생들에 대한 정보가 전해진다. 내가 황녀라는 것도 다들 알고 있을 거고, 당연히 내가 이 시간에 혼자 마차를 타는 것을 보고 엄청나게 불편하게 여길지 모른다.

        

       뭐, 내가 누굴 암살하러 간다거나 그렇게 생각까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

        

       성격 나빠 보이는 높으신 분이 굉장히 뚱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앞을 노려보며 아무 말도 없이 앉아있는 꼴을 본다면, 그 마차를 운전하는 입장에서는 내가 뭔가 잘못했나 싶을 거다.

        

       물론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냥 내가 혼자 짜증이 나 있을 뿐이지.

        

       “제도 동쪽 가도에 도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차가 멈추고, 마부가 내려 문을 열어주며 말하는 소리를 듣고 나는 내리며 감사 인사를 남겼다.

        

       “다음 마차는 30분 뒤에나 올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딱딱하게 대답하는 나를 보고 뭔가 심상찮은 기운을 느낀 것인지 마부는 얼른 허리를 숙여 보이며 인사한 뒤 마부석에 올라탔다.

        

       “…….”

        

       마차가 멀어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나는 어깨에 걸치고 있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어 회중시계를 꺼냈다.

        

       째깍째깍, 조용한 밤이라 그런지 시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세 시 삼십 분.”

        

       나는 조용히 그렇게 중얼거린 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밝았다.

        

       ……후우.

        

       크게 한숨을 내쉰 뒤, 나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뭐, 좋아.

        

       얼른 끝내버리고 가자.

        

       그래도 시간을 돌려 어젯밤 일찍 잠자리에 들었기에 다섯 시간은 잘 수 있었으니까.

        

       …….

        

       나도 그 명상이라는 거, 배워야 할까?

        

       *

        

       엘리멘탈 독은 그렇게 강한 짐승은 아니다. 독(Dog)이라고 불리고 있긴 했지만, 늑대보다 크고, 가진 속성에 따라 털 색과 주변에 흩날리는 이펙트가 다르다.

        

       물론 그 ‘이펙트’는 이 현실에서는 진짜 바람이나 풀, 불, 얼음 같은 것으로 직접 보였다.

        

       이런 짐승들은 이미 몇 번이나 마주했다.

        

       사격 연습으로 좋은 상대니까.

        

       퀘스트 의뢰서에 쓰여 있던 내용은, ‘가도에 엘리멘탈 독 한 마리가 나타나 사람들을 위협하니 처리해달라’였다.

        

       내 앞에 나타난 엘리멘탈 독은 초록색 털에, 몸 주변에 바람을 두르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분명 이대로 잡아다 지구에 데리고 가면 비싼 돈에 팔 수 있겠지.

        

       하지만 여기서는 그냥 흔하게 보이는 짐승이었다.

        

       “……하아.”

        

       갑자기 급격하게 현자 타임에 들어갔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이거 하나 잡자고 새벽에 일어난 건가?

        

       그것도 이미 이런 몬스터일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크르르.”

        

       자기 앞에 혼자 나타난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 엘리멘탈 독은 나와 거리를 둔 채 으르렁거렸다.

        

       “…….”

        

       철컥.

        

       나는 그 개를 바라보면서, 말없이 볼트를 뒤로 당겨 약실에 총알을 장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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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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