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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4

       

       

       

       

       

       

       털썩.

       

       따귀를 때린 직후, 여주인공께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절망이 서린 얼굴을 감싸며, 폭력의 충격에 놀란 얼굴을 감싸며.

       그 옛날, 왕립 아카데미 재학 시절의 에린시아처럼 주저앉아버린 것이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느닷없이 후피집 캐릭터가 되어버린 빙의자는 그저 안식과 낭만을 찾아 떠나고 싶었을 뿐인데, 그저 후피집을 피하고 싶었을 뿐인데.

       왜 여주인공이 내게 무릎을 꿇으며 탄식을 해야 하는 걸까.

       나는 왜 여주인공의 절망을 이끈 듯한 불쾌한 착각을 느껴야 하는 걸까.

       대체 왜 방관자 하나를 놓지 못 해 모든 상황을 망가뜨리고 있는 걸까.

       

       이해할 수가 없다.

       납득할 수가 없다.

       분명 원작에서 높은 통찰력과 냉철한 판단력과 이성적인 사고를 가진 캐릭터로 묘사되었고, 무료편수까지 모든 상황을 관철하고 유도하며 통제하는 멋진 모습들만 보여주었었는데 말이다.

       

       슥슥.

       얼얼한 뺨을 문질렀다.

       전생에서 수도 없이 맞았던 따귀라 별다른 감흥은 느껴지지 않는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참으로 억울하고 불편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미국드라마 ROST에서 드넓은 초원 위를 방방 뛰며 하늘을 향해 외치는 꽈찌쭈 형님처럼.

       

       《아무도 날 이해 몽테!》

       《함번만이라도 햄보카고 시픙데!》

       《왜 나 이쭈누는 햄보칼 수가 업숴-!》

       

       라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을 지경이다.

       르미앙의 절망은 결단코 의도한 바도, 바라던 바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절망을 즐기는 고약한 취미 같은 것도 없다.

       실의에 빠진 이를 무시와 멸시할 정도로 고약한 심보 같은 것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온정의 손길을 건넬 수도 없었다.

       그러고자 이제껏 그녀가 던지는 미끼를 피해온 것이 아니니까.

       사슬을 끊어내어 벌판을 달리기 위함이었고, 바보처럼 외양간으로 돌아가고자 해냈던 거절이 아니었다.

       

       다만.

       

       결단코 악의는 없었다는 것 정도는 전해줄 필요는 있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과거의 엘든 라펠리온은 이제 없습니다. 에린시아를 모질게 괴롭혔던 엘든 라펠리온은 인격 말소로써 영원한 어둠 속에 갇혔습니다. 아마도, 다시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 하겠지요.”

       

       빙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헛소리로 치부될 것 같아, 혼약대전을 조롱한다는 오해를 살 것 같아 꺼내지 않았었다.

       이제 와 그것을 꺼낸 것은, 이제 와 결말이 달라질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얼굴을 감쌌던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드는 르미앙.

       창백히 질린 그 얼굴이, 데론과 블런드의 것과 같아 괜스레 미안해진다.

       

       “그러니 더 이상 엘든이란 악인 때문에 비참해지지 마십시오.”

       

       복수심에 사로잡혀 비참함을 반복하지 않기를 빌었다.

       

       “세상을 향해 멋지게 내딛은 출사표를 스스로 짓밟지 마십시오.”

       

       평생을 저주의 그늘에 시달렸고, 이제야 빛을 보기 시작한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길 빌었다.

       

       “저는 그저, 대공녀님께서 행복해지시길 빌겠습니다.”

       

       그리고.

       진심을 전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기권을 선언했음에도 혼약대전에 얼굴을 비추며 체류해 있었던 건, 전부 최소한의 도리를 외면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나로 인해 여주인공의 복수가 어그러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또한, 식도락 여행에 잡티 하나 생기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이제는 도리도 다했으며, 바라는 마음도 다했으며, 떠나야 할 명분도 충분히 챙겼다.

       

       무엇보다.

       

       ‘내가 사라져주는 게 맞아.’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없듯, 르미앙과 나는 함께 할 수 없는, 함께 해선 아니되는 관계다.

       나의 존재가 르미앙이란 화염에 뿌려지는 기름과 같으리라.

       서로 마주할수록 불필요한 마찰만 생기고, 그 마찰이 한쪽에게 일방적인 부작용만 낳는다면, 다른 한쪽이 피해주는 게 응당 옳을 터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주저앉은 그녀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접으며 고개를 숙였다.

       비록 따귀를 날렸을지언정, 비록 자유를 억압했을지언정, 그녀를 욕할 생각도 아니꼽게 바라볼 생각도 없었다.

       그녀 역시 이 모순된 전개의 피해자일 뿐이니까.

       그렇기에 진심어린 존중을 담아 마지막이 될 인사를 건네었다.

       

       고개를 들었다.

       

       절망과 울분이 희석된, 해석할 수 없는 표정의 르미앙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제는, 방관자에 대한 집착을 걷어내고 있을까.

       사로잡힌 복수심에서 조금은 벗어나고 있을까.

       부디, 그러길 바라며 걸음을 옮겼다.

       

       한데.

       

       “…어째서 쓰러진 시녀를 도왔던 거죠? 당신은 그럴 인간이 아니잖아요.”

       

       등 뒤에서 르미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맥락 없이 들려온 질문이었고, 맥락을 파악하는 데에 짧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빙의 이래 쓰러진 시녀를 도운 적은 한번 뿐이다.

       모퉁이를 돌다가 부딪혀 발목을 접지른 시녀.

       도움의 손길에 살려달라며 비명을 내지른 시녀.

       그리고 원작에서 여주인공, 르미앙을 보필하는 시녀는 한 명 뿐이었다.

       왜인지 낯이 익다 했더니….

       

       “그 시녀가 대공녀님의 시녀였군요.”

       

       그리고 그 시녀께서, 나와의 약속을 어긴 것이로군.

       뭐, 이제 와 상관할 바는 아니다만.

       

       “…정말 몰랐군요.”

       “예.”

       “왜 마리엔을 도왔던 거죠? 당신은 남의 피해를 방관하고 조롱하는 인간이잖아요.”

       “저로 인해 다쳤기에 도왔던 것뿐입니다.”

       

       중세인에 빙의 당한 현대인에겐 당연한 논리였다.

       물론 여주인공께선 믿기 힘들 기적의 논리겠지만.

       

       “….”

       

       그것을 반증하듯,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재차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또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발목을 붙잡았다.

       

       “내 상처는.”

       “…?”

       “네가 남긴 내 상처는 왜 도와주지 않는 건데. 왜 외면하는 거냐고…!”

       

       투정과도 같은 노성(怒聲)이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 투정을 들어주어야 할 엘든 라펠리온은 영원한 어둠 속에 갇히는 형벌로써, 퇴장했지만 말이다.

       

       “연고가 필요하시다면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부축이 필요하시다면 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대공녀님의 청혼을 받는 것은 해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 단호히 전했고, 들러붙은 투정을 뿌리치며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 목소리.

       더 이상 붙잡지 않는 목소리.

       르미앙의 얼굴이 어떠할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으로써 부디 남은 이들에게 집중하기를 바랐다.

       그 끝에, 한 명과 성대한 혼약식을 올려 지난 날의 상처에서 영원히 해방되기를 바랐다.

       

       그렇게 난, 대전을 걸어나갔다.

       

       그나저나.

       

       ‘씁, 흥부 형님은 따귀 맞고 밥풀이라도 챙겼는데.’

       

       식고 있을 몬스터 요리, 와이번 지느러미 구이 하나를 챙길 걸… 하는 아쉬움을 남긴 채, 그리 대전을 걸어나갔다.

       

       

       

       **

       

       

       

       대전을 나섰다.

       르미앙에게 마지막을 고했을 뿐, 식도락 여행을 떠나기엔 일렀다.

       오늘 아침, 렌들러 영감이 그랬었다.

       수도성으로 떠난 대공을 대신해, 북방 괴인족의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떠난 후계자를 대신해, 혼약대전의 모든 결정권을 중앙보좌관 겔우드가 받았다고 말이다.

       차곡차곡 모아둔 패로 통첩을 걸 필요는 있었기에, 우선 그 패를 챙기기 위해 별채로 향하려 했다.

       

       “가지. 레이첼.”

       

       한데, 대전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레이첼을 나를 보곤 짐짓 놀란 얼굴을 했다.

       

       “왜?”

       “……맞으셨습니까?”

       “아.”

       

       잠시 얼얼하고 만 평범한 따귀였던 터라 티가 안 날 줄 알았는데, 티가 났군.

       괜스레 뺨을 매만지며 답했다.

       

       “그럴 일이 있었어. 별 거 아냐.”

       “피가 났습니다만.”

       “뭐?”

       

       뺨을 쓰다듬던 손을 펼쳐 보았다.

       …피가 묻어있다.

       아무래도 손톱에 긁힌 모양이다.

       물론 탈주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 유혈 사태쯤이야 간에 기별도 안 갈 일이다.

       

       “흠, 대공녀님의 손톱이 꽤나 길었던 모양이군.”

       

       그리 너스레를 떨곤 별채로 향하려 했는데, 레이첼이 코트 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내 건넸다.

       철로 만든 얇은 원통이었다.

       

       “?”

       “바르십시오.”

       “이게 무언가?”

       “상처를 아물게 해주는 데에 특효인 연고입니다. 열상조차 흉지지 않게 해주는 겁니다.”

       

       오호.

       살아온 길이 누구보다 거칠었음에도 얼굴에 자잘한 흉터 하나 없는 것이 의아했었는데, 역시 이런 특급 연고를 가지고 있었군.

       그것을 받아 곧장 뚜껑을 열었다.

       반고체의 하얀색 연고였다.

       검지로 떠서 뺨에 발랐다.

       슥슥.

       한데, 나를 보는 레이첼의 시선이 영 탐탁치 않아 보였다.

       

       “왜?”

       “엉뚱한 곳에 바르시는 중입니다. 조금 위에 발라야 합니다.”

       

       흠.

       다시 푹, 검지로 연고를 떠서 조금 위에 발랐다.

       레이첼의 시선은 여전히 탐탁치 않았다.

       

       “왜?”

       “조금 더 위입니다.”

       

       푹!

       검지로 연고를 떠서 조금 더 위에 발랐다.

       레이첼의 시선은 여전했다.

       

       “…너무 올라갔습니다.”

       “아.”

       

       다시 푹! 검지로 연고를 찍으려 했는데, 레이첼이 잽싸게 연고를 뺏어갔다.

       수직하강하던 검지는 애꿎은 내 손바닥을 찍어야 했다.

       

       “주십시오.”

       

       이미 가져갔는데.

       

       “…비싼가보군?”

       “제가 발라드리겠습니다.”

       

       비싼가보다.

       하긴, 의학이 발전되지 않은 중세시대에 흉터를 남기지 않는 연고는 꽤나 비쌀 수밖에.

       검지에 묻은 연고를 옷에 닦으며, 고개를 살짝 내밀어주었다.

       레이첼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연고를 떠 내 뺨에 발라주기 시작했다.

       처음 느껴보는 이성의 손길이었고, 전생의 이준우가 그토록 바랐던 따스한 보듬이었다.

       그래서일 거다.

       레이첼을 빤히 바라보게 된 것은.

       마치 친누나처럼 연고를 발라주는 레이첼을 무의식 중에 바라보게 된 것은.

       

       “……왜,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

       나도 모르게 그만.

       연고를 발라준 레이첼이 서둘러 멀어졌고, 괜히 뻘쭘해져 연고가 발라진 부분을 문질며 말했다.

       

       “근데 기억 상, 피가 날 정도로 쥐어터졌던 적이 몇 번 있는 거 같은데, 이 좋은 걸 혼자서만 바르고 있었군? 치사한 스승님이시여?”

       

       퉁명스레 던진 농담이었다.

       원작 엘든이 전투광이었던 설정 탓에 주먹에 큼직한 흉터가 있었고 턱에도 얇은 상흔이 있었다.

       그리고 기억을 되짚어보면 혼약대전에 참가하기 직전에도 피가 날 정도로 싸움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때도 레이첼은 있었지만, 연고를 주었던 적은 없었다.

       하물며 상처에 대해 언급했던 적조차 없었다.

       어떠한 바람이 불어 무뚝뚝이 스승님께서 직접 연고를 발라주었는지 모를 일이다.

       

       “….”

       

       한데.

       

       편안히 던진 그 농에 레이첼이 쉽사리 답을 하지 못 했고, 머뭇거리던 그녀의 볼엔 연한 홍조가 깃들었다.

       

       “가, 가시지요.”

       

       말을 더듬고선 앞장서 가버리는 레이첼.

       

       근데.

       

       나.

       

       어디로 갈지 얘기 안 했는데?

       

       오른쪽으로 가는 걸 보니, 훈련장으로 가려는 건가?

       

       훈련을 하기엔 시간이 늦었는데?

       

       엉뚱한 방향으로 당차게 걸음을 하는 레이첼의 경로를 급히 수정해 주어야 했다.

       

       “레이첼? 별채로.”

       

       휙.

       

       경로를 급선회한 스승께서 그리 별채로 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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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후피집물의 후회캐가 되었습니다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curious about what a female-oriented tragic romantic fantasy was like, so I skimmed through only the free chapters. And then… “…Ha.” I found myself transmigrated into one of the main male characters, destined for tears of regret, exhaustion, and obsession. So, the first thing that had to be done was… “I, Elden Raphelion, hereby declare my withdrawal from the competition for the betrothal of the Third Northern Duchess.” To escape this trag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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