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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4

       “재방문을 고대하겠소, 후작.”

         

       파스텔은 비공정 정박장에서 배웅을 받았다.

         

       “좋아요! 저도 재방문을 고대할게요!”

         

       일주일간 정말 티파티를 하며 멜리사와 하하호호 떠들고 논 파스텔은 기쁘게 승낙했다.

         

       “얼마든지.”

         

       캐머롯 백작이 미묘한 느낌이 담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어째 예의상 한 말일 뿐 딱히 반기는 기색은 아닌 듯한?

         

       에이 그럴 리가.

         

       티파티 때마다 맛있는 사과파이를 대접해 주신 분이잖아. 착각이겠지~.

         

       파스텔은 짐가방을 든 멜리사와 팔짱을 꼈다.

         

       “절친한 친구 멜리사도 내 다음 방문이 고대 되지?!”

       “절친하진 않지만, 네. 즐거웠어요 크래프트. 어머니 말씀처럼 얼마든지 오셔도 좋아요.”

         

       멜리사가 흔쾌히 긍정하자 캐머롯 백작의 입꼬리가 바들 떨렸다. 백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걱정스럽게 멜리사를 바라봤다.

         

       오잉.

         

       저 시선은 마치 곱게 키운 딸자식이 이상한 애랑 절친이 된 바람에 못된 짓을 배울까 우려하는 어머니의 눈빛?

         

       에이 그럴 리가~.

         

       난 전혀 이상한 애가 아니니까.

         

       분홍분홍 파스텔은 못된 짓을 하지 않는다. 멜리사가 어울린다 해서 나쁜 물이 들 리도 없다는 말씀.

         

       배웅을 받고 비공정에 들어섰다. 하늘섬을 향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몇 번 비공정 환승을 거쳐야겠지만 무난한 여정이다.

         

       “크래프트, 그동안 당신을 오해했나 봐요.”

         

       멜리사가 살짝 쑥스러워했다.

         

       “티파티 에티켓도 잘 지키지 못하시는 분이 음흉한 모략을 꾸미고 사악한 속마음을 지녔을 리 없죠.”

         

       일주일간 티파티를 함께하며 멜리사는 잘못된 인식과 판단을 수정한 모양이었다.

         

       “미안해요, 아름다운 외견에 선입견을 품었어요. 인정할게요. 당신은 모습 그대로의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있어요.”

         

       오해가 완전히 풀렸어!

         

       오예.

         

       파스텔은 좋아하다가 멈칫했다.

         

       근데 이거 바보 같은 행동은 연기일 뿐인 겉과 속이 다른 음흉한 애인 줄 알았는데 며칠 지켜봤더니 진짜 바보라서 안심했다는 얘기 아닌가?

         

       오이잉?

         

       번개가 쿠구궁.

         

       파스텔, 충격!

         

       충겨억!

         

       악마님 도움을 받으며 최선을 다해 에티켓을 지켰는데 진짜 귀족 아가씨 눈엔 성에 안 찼나 봐!

         

       으아아.

         

       이러다 바보 파스텔로 소문나겠어.

         

       필기 수석 파스텔의 명예를 돌려줘어.

         

       멜리사가 쑥스러워했다.

         

       “크래프트, 앞으론 이름으로 불러도 될까요?”

       “물론이지! 바보 파스텔이라고만 부르지 마!”

       “바보……, 파스텔이요?”

         

       멜리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파스텔은 입이 벌어졌다.

         

       허억.

         

       “지, 지금 바보 파스텔이라 부른 거야?!”

       “네?”

         

       으아아.

         

       정말 바보 파스텔이 됐어!

         

       너무 순진한 나머지 음흉하고 사악한 짓은 절대 하지 않을 거라 안심할 수 있는 바보 파스텔……!

         

       앞의 수식어는 전부 맞지만 바보 하나는 명백히 틀렸어……!

         

       으아아.

         

       털썩.

         

       절망하며 하늘섬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

         

         

         

       파스텔은 불안에 떨며 교내를 거닐었다.

         

       방학이 끝나가자 미리 기숙사에 들어온 학생들이 인사를 건네왔다. 경계하며 인사하곤 다시 걸었다.

         

       “악마님, 악마님. 들리지 않으세요? 똑똑한 파스텔을 음해하는 소문이요!”

         

       바보 파스텔이라니.

         

       덜덜덜.

         

       『전혀 안 들린다.』

         

       허억.

         

       “안 들려요?!”

         

       파스텔은 혼자 놀라곤 급격히 안심했다.

         

       “악마님 말을 믿을게요!”

         

       오예.

         

       룰루랄라 학생회실로 향했다.

         

       사과 농장에서 캔 비자금 수표와 관련된 이런저런 일을 하기 전에 일단 기숙사 신축의 상황부터 살펴볼 생각이었다. 기숙사 신축은 공적 업무니까 말이다.

         

       문을 열자 깃펜을 입에 물고 서류를 살피던 소녀가 돌아봤다. 검은 머리에 뾰족한 마족 귀였다.

         

       “앗, 엘리! 등교가 빠르구나!”

       “예정된 일거리가 많으니까.”

         

       엘리가 마침 잘됐다는 양 서류 뭉치를 꺼냈다.

         

       “그보다, 수상한 결재 서류가 존재하던데?”

         

       크래프트 상단의 설립, 이 아니라 학생회 상단의 설립과 관련된 결재 서류였다.

         

       대문짝만한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파스텔 러브 크래프트 – 지분율 100%

         

       학생회 상단인데 학생회 지분 없음.

         

       으아앗?!

         

       학생회 예산을 후루룩 쩝쩝할 상단 창립을 본인 지분율 100%로 방학 중에 졸속 처리한, 부학생회장 겸 총무부장 겸 기획부장 겸 홍보부장 겸 봉사부장 겸 선도부장은 경악했다.

         

       우아앗.

         

       파스텔의 어두운 비리가 만천하에 공개됐어!

         

       수갑이 찰캉찰캉.

         

       쇠창살이 쥬좌장.

         

       생계형 비리로 봐주세요오!

         

       엘리가 서류를 툭툭 쳤다.

         

       “공금 횡령이야?”

         

       공금 횡령.

         

       파스텔은 양팔을 휘저으며 허둥댔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허둥지둥.

         

       “학생회 업무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전문 종사자와의 업무 협약을 만들고 민간 협력을 증진시켰을 뿐이야!”

         

       양팔을 휘적휘적.

         

       미묘한 눈길이 왔다.

         

       허억.

         

       방금 지어낸 철두철미한 설득이 안 통하다니!

         

       실무진 하나 설득하지 못하는 바보 파스텔……!

         

       파스텔은 양볼을 부여잡고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신음을 냈다.

         

       흐아아~.

         

       어두운 미래가 현실로~.

         

       앞으로 감옥살이 파스텔이라 불러줘어.

         

       엘리가 고개를 젓더니 서류를 대충 툭 놓았다. 그리곤 아무래도 좋다는 양 본인 자리로 가 업무를 마저 했다. 크래프트니 이럴 줄 알았다는 태도였다.

         

       “기숙사 신축은 지하실 발견으로 기존 일정보다 차질이 생기긴 했지만 거의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어.”

         

       오잉.

         

       아무 추궁도 없네?

         

       파스텔은 슬쩍 눈치를 보다가 스리슬쩍 자신의 자리로 갔다. 그리고 다시 눈치를 보다가 정말 아무 추궁도 없자 표정이 환해졌다.

         

       뭔진 모르겠지만 하여튼 좋은 결과!

         

       양팔을 번쩍 들었다.

         

       인생 너무 쉬워 파스텔……!

         

       오예.

         

       내 미래에 감옥살이는 없는 거야~.

         

       당연한 결과!

         

       끄덕끄덕.

         

       “듣고 있어?”

       “응! 듣고 있어! 양 귀를 활짝!”

         

       손바닥을 머리 양옆에 펼쳤다.

         

       활짝활짝.

         

       엘리가 미묘하게 봤다.

         

       “신축 기숙사는 잘 완공되고 있지만 그래도 일정이 밀린 건 사실이야. 확인해 보니 미리 등교할 1학년 일부가 임시로 숙소가 모자를 예정이더라.”

       “그럼 임시 숙소를 빌려. 아카데미와 계약해 놓은 숙소들 있잖아. 여유분을 돌리면 충분할 거야.”

       “응, 그러려고. 그런데 아직 더스틴이 등교를 안 해서 제시간에 여러 업무를 처리할 일손이 부족해. 파스텔, 너도 남은 방학 동안은 실무를 해야 해.”

         

       잉?

         

       엘리가 서류 뭉치와 스케줄이 정리된 내역을 가져왔다. 얼마 안 남은 방학 기간이 가득 찰 일거리였다.

         

       파스텔은 눈이 동그랗게 됐다.

         

       나, 일할 위기?

         

       크래프트 상단의 첫 밀무역에 참여할 거룩한 사명은 어디 가고?!

         

       점점 호흡이 가빠졌다.

         

       이, 일하기 싫어어!

         

       파스텔은 바들바들 떨었다.

         

       “파, 파, 파스텔은 약속이 밀려있어~.”

         

       스케줄이 꽉꽉.

         

       일하고 싶지만 유감유감.

         

       엘리가 말없이 걸음을 옮기더니 소상한 결재 서류를 들고 왔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뚜렷한 범죄 증거를 가리켰다.

         

       파스텔 러브 크래프트 – 지분율 100%

         

       엘리의 손가락이 다시 기숙사 신축 일거리를 가리켰다.

         

       놀고먹는 상관을 향한 무언의 압박.

       으아아.

         

       사악한 협박이 순진한 아이를 덮쳐 온다!

         

       엘리, 협박은 나쁜 짓이야……!

         

       그냥 놀고먹게 해줘~!

         

         

         

       #

         

         

         

       파스텔은 힘없이 의자에 기댔다.

         

       흐아.

         

       얼마 남지도 않은 방학 동안 실무만 하게 생겼어.

         

       앞자리의 그레이스 상단주가 비자금 수표들을 살피다가 흐뭇하게 웃었다.

         

       “충분한 금액이랍니다. 크래프트 상단의 첫 밀무역을 장식할 자금으로 충분하고도 넘쳐요.”

       “그 밀무역 말인데요…….”

         

       파스텔은 의자에 완전히 늘어졌다.

         

       “전 학생회 일이 바빠서 못 가겠어요. 기숙사 신축 자재의 긴급 운반 건으로 마계 출입증만 내드릴게요. 블루웨이브에 가서 프레스턴 조직과 접촉하시면 될 거예요.”

       “어머.”

         

       그레이스 상단주가 부채로 입을 가렸다.

         

       “그러고 보니 학생회는 곧 하늘섬으로 찾아올 하늘고래 때문에 바쁠 시기군요?”

         

       하늘고래?

         

       파스텔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하늘고래요?”

       “음? 아닌가요? 매년 지금 시기일 때쯤 하늘고래가 하늘섬에 찾아오잖아요. 상단들만큼은 아니라도 학생 안전 때문에 아카데미도 바쁘지 않아요?”

         

       모르겠다. 빽빽한 일거리에 충격을 받은 바람에 업무 서류를 덜 보고 오긴 했는데, 돌아가면 엘리에게 물어봐야지.

         

       “정확한 건 확인해 봐야 해도 아마 하늘고래 건이 있을 거 같긴 해요.”

       “그렇군요.”

         

       그레이스 상단주가 부채를 살랑이며 생각했다.

         

       “그럼 각하님을 대신할 대행을 보내주셔야 해요. 상단의 첫 상행은 미신적으로 중요한지라 상단 소유주가 완전히 빠지면 곤란하거든요. 불길해 보여서 몇 년간 용병 고용이나 자금 투자가 난감해질 수 있어요.”

         

       대행?

         

       “아무나 보내면 안 되죠?”

       “안 된답니다. 어느 정도는 각하님의 위신에 걸맞은 인사를 대신 보내주셔야 해요.”

         

       파스텔 대신 첫 밀무역을 지휘해 줄 사람?

         

       번뜩 떠올랐다.

         

       호레이스 교수님!

         

       “바로 떠오른 사람이 있어요! 걱정 말고 첫 상행을 준비해 주세요!”

         

       파스텔은 호언장담하고 상단을 나왔다. 그리고 그대로 호레이스 교수를 찾아갔다.

         

       “선배님!”

         

       교내를 걷던 호레이스 교수가 돌아봤다.

         

       “오오! 후배! 어쩐 일인가?”

       “저희가 일이 있어야 만나는 사이인가요?! 물론 이번엔 일이 있어서 선배님을 찾았지만요!”

         

       헤헤.

         

       호레이스 교수가 본인의 가슴팍을 쳤다.

         

       “얼마든지 말하게! 후배의 곤란은 나의 곤란이니!”

       “후배, 든든합니다!”

         

       파스텔은 눈을 빛냈다.

         

       “선배님, 혹시 선량한 배송을 후배 대신 한차례 가주실 수 있으십니까!”

       “오오! 선량한 배송! 암암! 해줄 수 있지! 수업을 빼고서라도 가겠네! 일정이 어떻게 되는가?”

         

       든든!

         

       파스텔은 일정을 말했다.

         

       그런데 일정을 들은 호레이스 교수가 침음을 냈다.

         

       “허어, 그 날짜는 조금 곤란하게 됐군.

       “네에?!”

       “하늘고래 때문에 당직을 서야 해서 말일세. 학생 안전상 빠지기가 곤란해.”

         

       허억.

         

       안 든든!

         

       파스텔은 충격에 몸이 굳었다.

         

       호레이스 교수가 슬쩍 파스텔의 눈치를 보더니 말을 바꿨다.

         

       “물론 후배가 바란다면 어찌 시간을 내보겠네만, 장담은 어려워.”

         

       파스텔은 고개가 푹 숙여졌다.

         

       “괜찮아요……. 학생 안전을 위해서라면 별수 없죠.”

       “이해해 줘서 고맙네. 다음엔 꼭 돕도록 하지!”

       “네에.”

         

       믿었던 호레이스 교수가 떠났다.

         

       파스텔은 몸을 떨었다.

         

       으아아.

         

       호언장담해 놓고 망칠 위기!

         

       거짓말쟁이 파스텔……!

         

       덜덜덜.

         

       『너무 아쉬워할 필요 없다. 어차피 저 교수는 크래프트의 위신에 걸맞은 대행까진 아니다. 네가 학생인 점을 감안해도 무게가 부족하지.』

         

       악마님, 차가운 현실을 덤덤히 말하지 마세요!

         

       으아아.

         

       파스텔은 털썩 주저앉았다.

         

       크래프트 후작가의 위신에 걸맞은 대행?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위신에 걸맞은 타인을 보내는 게 아니라 가문의 가신을 보내 구색을 갖추는 게 정답인데, 정작 살아남은 가신이 없잖아.

         

       절망.

         

       절마앙.

         

       구두 소리가 들렸다.

         

       “크래프트, 아니 파스텔?”

         

       멜리사가 다가왔다.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있나요?”

         

       파스텔은 울상으로 친구를 바라봤다.

         

       “매우매우 곤란해애!”

       “이런.”

         

       멜리사가 우아하게 몸을 숙여 파스텔을 일으켰다.

         

       “곤란한 점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해도 좋아요. 그동안 순진한 당신을 오해한 사과의 의미로 힘껏 도울게요.”

         

       으에?

         

       멜리사 캐머롯.

         

       남부 사령관의 후계자.

         

       아직 가주는 아니지만 같은 학생에 친구라는 점을 감안하면 위신에 걸맞은 대행 아닌가.

         

       파스텔은 물기 젖은 목소리로 순진하게 물었다.

         

       “정말 도와줄 거야?”

       “물론이에요.”

       “별건 아니고오. 간절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배송하는 선량한 업무를 대신 해줄 사람이 필요하거든. 남은 방학 동안 한 번만.”

         

       멜리사가 생긋 미소 지었다.

         

       “좋은 일을 하시네요. 역시 제가 당신을 오해했어요. 그런 좋은 일쯤 얼마든지 대신 해드릴게요.”

       “멜리사아!”

         

       파스텔은 멜리사를 꼭 끌어안았다. 멜리사는 움찔하더니 포옹을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역시 넌 절친한 친구야!

         

       얼마 뒤 파스텔은 상행 준비가 끝난 정박장으로 절친한 멜리사를 데려갔다.

         

       멜리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배송이 상행, 인가요?”

       “응!”

         

       여러 비공정에 밀무역품인 가공 마석이 가득가득 쌓였다.

         

       그레이스 상단주가 다가왔다.

         

       “그쪽이 첫 상행을 대행해 주실 분인가요?”

       “맞아요!”

         

       파스텔은 상단에 멜리사를 넘겨줬다. 멜리사는 곱게 비공정에 탑승했다.

         

       “다녀올게요.”

       “기다릴게!”

         

       첫 상행의 샴페인이 터지고 비공정들이 출발했다.

         

       “잘 갔다 와, 멜리사아!”

         

       파스텔은 떠나는 친구를 배웅했다.

         

       손을 휘적휘적.

         

       아직 상황을 제대로 모르는 멜리사가 비공정 난간에 기대 싱긋 웃더니 마주 손을 흔들었다.

         

       좋은 분위기였다.

         

       밀무역선은 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본인이 뭘 하러 가는지 제대로 모르는 귀족 아가씨를 싣고.

         

       멜리사 고마워!

         

       역시 넌 절친한 친구야!

         

       다음에도 부탁해야지!

         

       오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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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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