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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4

     

    “하아, 정말.”

     

    라스를 바닥에 눕혀놓고서 아셀라는 겨우 숨을 돌렸다.

     

    산 중턱에서 오두막을 찾아 들어온 게 조금 전이었다.

     

    안에 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마법도구들이 있는 걸로 보아, 옛날에 어느 은둔 마법사가 쓰던 공방인 듯했다.

     

    “어쩌다 이런 꼴이.”

     

    아무리 약한 파벌이라지만 황제의 자식으로 살았던 몸이다.

    평생을 손에 물 한 번 안 묻혀봤던 아셀라였다.

     

    온몸이 먼지로 엉망진창이다. 태어나 이만큼이나 피부에 불쾌한 느낌은 처음이었다.

     

    특히 발가락 사이로 스며든 진흙의 느낌이 최악이다.

     

    “너 때문이야, 라스.”

     

    여전히 정신을 잃은 라스의 가슴팍을 원망스럽게 때려보았다.

     

    …이미 죽은 시체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다.

     

    다문 입술에 괜히 힘이 들어간다. 이 남자 때문에 얼마나 더 가슴을 졸여야 하는지.

     

    짜증이 난다.

     

    “…죽진 않겠지.”

     

    주치의 실기시험을 다녀온 날에도 그는 이런 식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땐 그가 죽은 줄로만 알고 묘비에 새길 문구부터 떠올렸던 아셀라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째서일까.

     

    황실에서 잘못을 저지른 구성원이나, 반란을 꾸민 귀족이 끌려와 처형당하는 일은 빈번했다.

     

    황제의 눈에 띄어야 한다면서 카밀라는 처형식마다 아셀라를 참가시켰다.

     

    그러니 사람이 죽는 장면이야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신하는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최고의 명예라고도 했다.

     

    주군은 소모품인 그들 때문에 감정을 낭비해 중대사를 그르쳐선 안 된다.

     

    항상 그리 배워왔으니 이런 상황에서도 눈썹 하나 깜빡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라스는 조금 예외가 되어버렸다.

     

    “아니지.”

     

    막스도 죽으면 안 돼.

    푹신하니까.

     

    라스는 푹신하진 않지만…

     

    비슷한 이유겠거니, 아셀라는 뭔지 모를 감정을 판단하길 보류했다.

     

    “대체 언제 일어날래.”

     

    감히 제국의 황녀인 나를 이렇게 고생시키다니, 괘씸해.

     

    너는 내 주치의잖아.

    나를 보필해야 한다고.

     

    아셀라는 듣지 못할 사람에게 괜히 투정을 부려봤다.

     

     

    ―투둑, 투둑…

     

    오두막 천장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가 들려오더니, 점점 커져 귓가를 채운다.

     

    그와 함께 아셀라의 마음 속에서 뭔지 모를 해방감이 피어났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호위기사나 시종이 없이 황궁을 나온 건 처음이었다.

     

    카밀라의 감시를 벗어난 것도 처음.

     

    어딘지도 모르는 장소에, 가진 거라곤 정신을 잃은 주치의 한 명.

     

    빗소리와 함께 피어오르는 이끼 냄새가 신선한 감각을 준다.

     

    살아있다는 감각이다.

     

    어느새 이 분위기를 즐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아셀라였다.

     

    갑갑한 황궁에서 도망쳐 나온 것만 같아서 두근두근해진다.

     

    “너도 함께 느끼면 더 재밌었을 텐데.”

     

    아셀라는 무심코 라스의 뺨을 손등으로 훑었다.

     

    아기같이 부드러운 피부는 그다지 남자답지는 못했다.

     

    그의 얼굴을 관찰하는 건 꽤 재미있었다.

    여기저기 건드려보는 것도.

     

    그가 만져오는 건 싫다.

    얕보이는 느낌이라서 어쩐지 부끄럽다.

    부끄럽다는 자각을 하는 자체가 부끄러워서 더더욱 싫다.

     

    “그런데도 너는 감히 옥체를 이리저리 주무르려 들지.”

     

    사심이 없다는 건 안다.

     

    라스는 항상 직업정신에 투철해서는, 주치의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아셀라의 몸을 만진다.

     

    도무지 자각이 없다.

     

    오히려 종종 그가 거부감을 보인다. 아셀라는 그 예민한 순간을 항상 눈치챘다.

     

    그럴 땐 오히려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그는 후작가에서 흥청망청 지내며 여자의 몸에 익숙해져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성장기인 자신의 몸은 그에게 그렇게 흥미가 가지 않을 수야 있겠다만.

     

    “혼약자잖아.”

     

    괘씸해도 너무 괘씸해.

     

    물론, 라스가 분수를 망각하고 자신을 진짜 혼약자처럼 여겨 여자로 취하려 들면 아셀라는 즉시 그의 목을 베어버릴 심산이다.

     

    어디까지나 정치적 사정에 의한 가문의 혼약 관계다.

     

    스스로 모순되는 생각을 가진 건 안다.

     

    하지만 이기적이어도 된다.

    황가의 핏줄을 이은 자의 특권이다.

     

    성군보다는 폭군이 국가를 강대하게 만드는 법이다.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셀라는 항상 그게 궁금했다.

     

    이 남자는 왜 자신을 도와줄까.

    늘 마지못해 하며 중요할 때마다 곁에서 어깨를 받쳐준다.

     

    재능을 주입받은 대가로 얻은 복통.

     

    복부에서 통증이 올라올 때마다 부정적인 감정도 함께 몸을 휘감는다.

     

    신기하게도 최근엔 그럴 때마다 항상 이 남자가 곁에 있었다.

     

    카밀라에게 심한 소리를 들을 때도, 저항하지 못하고 교육을 받아야 했을 때도, 평민이 증오스러워질 때도, 막스가 죽는 모습을 상상해 절망스러웠을 때도.

     

    그럴 때마다 뱃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말을 건다.

     

    배운 마법을 발산하라고, 세상을 파멸시키라고 유혹해온다.

     

    마법사들은 위계가 높아질수록 이런 환청을 듣거나 환각을 보는 이도 있다고 했다.

     

    그녀의 스승인 시모어도 제정신을 붙드는 노하우가 있다.

     

    …정말 마법 때문일까.

     

    그보다는 더욱 강렬한 무언가가, 자꾸만 파괴 충동을 심어놓는 듯이.

     

    “라스.”

     

    네가 찾아오고 나서는 신기하지.

    조금은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기분이야.

     

    지금 황실에서 그만큼이나 자신의 상태를 명확히 꿰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이 몸에 바늘을 꽂아 피마저 뽑아갔으니.

     

    통증도 실제로 줄어들었다.

     

    지금도 그의 약을 먹으니 마술같이 감각이 옅어지고 편안함이 찾아왔다.

     

     

    그러던 와중.

     

    “쿨럭.”

     

    주치의가 깊게 기침을 했다.

     

    아셀라는 그가 정신이 들었다 생각해 엄숙하게 화낼 준비를 했다.

     

    황녀인 자신을 고생시킨 죄는 크다. 어떻게든 대가를 받아내리라.

     

    “쿨럭, 쿨럭.”

     

    하지만 라스가 눈을 뜨는 일은 없고, 그저 기침만이 깊어질 뿐이었다.

     

    “어…?”

     

    아셀라는 그제야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라스의 뺨에 얹어놨던 자신의 손바닥에서 끈적한 느낌이 불쾌하다.

     

    검붉은 피였다.

     

    “라스?”

     

    아셀라는 화들짝 놀라며 라스의 어깨를 흔들었다.

     

    여전히 대답은 없다. 허약한 몸체가 힘없이 흔들린다.

     

    아셀라의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얼굴에 암운이 드리운다.

     

    왜 여태 가만히 있었을까 후회가 밀려왔다.

     

    그 역시 사룡의 저주를 온몸으로 맞았다. 단순히 마법 반사만이 아니라 다른 악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는데.

     

    깨어나지 못할 때 부상부터 의심했어야 했건만 안일했다.

     

    “어떡… 어떡하지.”

     

    아셀라가 필사적으로 두뇌를 굴린다.

     

    자신은 치유주문은 전혀 쓸 수 없다. 이럴 때 도움이 되는 마법도 없다. 애초에 마나도 완전히 바닥났다.

     

    “뭐라도.”

     

    팍!

     

    아셀라가 라스의 가운을 벗겨냈다.

     

    그의 안주머니를 뒤진다. 형형색색의 액체가 담긴 주사기니, 다양한 약제가 든 병이 굴러떨어졌다.

     

    “이걸 먹이면….”

     

    아셀라는 약을 꺼내려다가 멈추었다.

     

    라스는 항상 약의 과다 복용에 대해서도 경고했었다.

     

    아스피린도 절대 하루 두 알 이상 먹지 말라고 했다.

     

    뭔지 모르고 마구 먹였다가 오히려 라스를 죽일 일이 될지도 모른다.

     

    “대체 뭐가 뭐야…!”

     

    혀를 차며 아셀라가 라스의 몸을 더듬었다.

    근육이 마비된 듯 뻣뻣하다.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정말 큰일이 날 것만 같아서 조급해졌다.

     

    “이건.”

     

    아셀라가 찾은 건 한 권의 수첩.

    항상 라스가 가지고 다니며 모든 걸 적어놓는 바로 그 수첩이었다.

     

    촤라락.

     

    아셀라는 수첩을 넘기며 빠르게 내용을 읽었다.

     

    약과 주사의 용도 등이 자세히 쓰여있다.

    아셀라의 용태에 관한 기록도 빽빽하다.

     

    묘한 문장들이 조금 눈에 밟힌다.

    가로줄을 그어 지운 것도 있고, 남겨놓은 문장도 있었다.

     

     

    [처형당해 효수되었음. 삭제.]

    [질식 마법으로 사망. 삭제.]

    [마왕군에게 패배.]

    [마왕을 잘못 토벌해서 마신이 강림]

    [황실이 소멸하는 마법.]

    ……

     

    필요 없는 노이즈에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아셀라는 페이지를 넘겨 유효한 정보를 찾아냈다.

     

     

    [토혈은 사탕으로 대충 막아짐]

    [랭크가 올라가면 강화 필요]

    [사탕 추가 재료 확보, 후보 리스트]

    [황금 장미 : 노란 장미의 상위 품종, 드래곤 둥지나 마계 서부에 주로 서식]

     

     

    “사탕.”

     

    모르는 단어가 있긴 했지만 그가 항상 먹던 사탕이 상태를 낫게 해줄 게 분명했다.

     

    아셀라는 그의 주머니에서 거칠게 사탕을 꺼냈다.

     

    포장을 벗기고 입에 쑤셔넣지만 그다지 효과가 없어 보인다.

     

    “물이 필요해.”

     

    아셀라는 즉시 오두막 밖으로 나가 떨어지는 빗물을 손으로 받았다.

     

    그 바람에 옷이 흠뻑 젖었지만 신경 쓸 틈은 없다.

     

    급히 안으로 들어와 라스의 입에 흘려넣으니 사탕이 조금씩 녹았다.

     

    라스의 호흡이 조금씩 원래대로 돌아온다.

     

    하지만 여전히 정신을 차릴 기색은 없다.

     

    “다른 재료가 필요해?”

     

    노트에 적혀있는 재료를 확인한다.

     

    조금은 보기 힘든 식물이나 열매들이 그림과 함께 적혀 있었다.

     

    아셀라도 교양 수업으로 배워서 뭔지 대충은 아는 것들이다.

     

    당장 필요한 건 황금 장미라고 생각됐다.

     

    “여기가 드래곤의 둥지 근처라면.”

     

    그녀는 즉시 지팡이를 들고 오두막을 뛰쳐나갔다.

     

     

     

    ***

     

     

     

    “후우.”

     

    간신히 눈을 떴다.

     

    온몸이 저리다. 근력 강화제의 부작용이다.

     

    시간이 꽤 흘렀는지 마비된 근육은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다.

     

    입안이 마른 피로 찐득하다.

     

    정신을 잃은 동안 신나게 피가 역류했던 모양이다.

     

    …왜 단맛도 나지?

     

    안 그래도 어지러운데 상태창에서 글자가 정신없이 흘러간다.

     

     

    ―――――――――――

     

    · [주목받는 신예] 업적을 획득했습니다. 제국의 황제가 당신에게 관심을 보입니다.

     

    · [위인의 시작] 업적을 획득했습니다. 일부 민중이 당신을 존경합니다.

     

    · 의학이 C랭크로 랭크업했습니다. 새로 배울 스킬을 두 개 선택할 수 있습니다.

     

    · 재능 랭크 상승에 따라, 디버프 체력 지속 감소 D가 C로 랭크업했습니다.

     

    ―――――――――――

     

     

    의학 스킬 랭크가 올랐다.

     

    아스피린과 마스크가 많이 배포되고, 그 덕을 본 기사들이 활약을 보여서 그럴까.

     

    가장 큰 건 내 비약으로 전투한 아셀라가 사룡을 쓰러트린 덕이겠지.

     

    순식간에 경험치가 쌓였다.

     

    뭐, 마지막에 정통으로 저주를 맞아버린 만큼 반가운 타이밍은 아니다.

     

    ‘체력, 사탕을 새로 합성해야 해.’

     

    한시 빨리 움직여야 하는데 도무지 몸에 힘이 안 들어간다.

     

    간신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파악한다.

     

    타닥거리는 빗방울 소리.

     

    어둠 속에 사람의 형체가 하나, 내 앞에 다소곳이 앉아있다.

     

    그게 누군지 단번에 알아본 나는 그녀를 불렀다.

     

    “황녀님.”

     

    아셀라는 꽤 지쳐 보였다.

    내게 화를 낼 여력도 없을 정도로.

     

    그럼에도 어딘가 안도하는 기색을 잠깐 보이고는, 품에 들고 있던 한 송이의 꽃을 내게 내밀었다.

     

    “필요한 게 맞니?”

     

    아셀라가 진흙투성이 손으로 소중히 품고 있는 꽃.

     

    어둠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색 장미였다.

     

    “이걸 어디서 찾으셨어요?”

     

    조금 놀라서 무심결에 꺼낸 질문에, 아셀라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떨어져 있었어.”

     

    아셀라에게서 장미꽃을 받아들려 하니, 손이 겹쳐진 채로 아셀라가 내게 말했다.

     

    “공자, 내게 황실이 싫으냐고 물었지.”

     

    “예.”

     

    “싫어.”

     

    나로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답변이었다.

     

    “황실엔 적뿐이야. 사룡을 불러낸 건 어마마마… 외엔 생각할 수 없겠지.”

     

    아셀라가 체념하듯 힘없이 말했다.

    그녀는 꽤 지쳐 보였다.

     

    “형제자매도, 폐하도 전부 적이야. 그런 황실을 내가 좋아해야 할 이유가 있니? 여기 어디에도 내 가족은 없는걸.”

     

    비무대회에서 그들이 보인 태도를 생각하면 아셀라의 의견은 타당했다.

     

    그녀로서는 황실과 황궁에 애착을 가질 순 없겠다. 제국의 멸망 엔딩처럼 소멸시켜도 합당하지 않을까.

     

    그래도 그런 일이 벌어져서야 안 되니까.

     

    “가족이 중요하신가요.”

     

    “중요한… 것 같아.”

     

    “손에 넣으시면 되겠죠. 황녀님이 가지신 다른 것처럼요.”

     

    “어떻게?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은 날 봐주지 않아. 어마마마도 실망하시기만 해.”

     

    “이미 있는 가족만 가족이 아니지요. 새 가족을 만들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정답이 될진 모르겠지만 일단 원론적인 대답을 제시했다.

     

    아셀라는 내 말을 듣고는 잠시 행동을 멈추었다.

     

    장미 줄기 끝을 쥔 손이 살짝 진동한다.

     

    그녀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너랑?”

     

    아뇨,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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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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