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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4

       분위기라는 것은 실로 애매모호한 것이다.

       

       애초에 분위기를 무엇으로 판단하는지를 생각해 보라.

       

       미세한 표정의 변화. 목소리의 높낮이. 마주치거나 피하는 시선. 전신의 근육을 긴장시킨 정도. 어휘의 선택. 대화의 문맥….

       

       그 외에도 수많은 ‘비언어적 표현’을 종합하여 판단하는 것이 분위기다.

       

       명확한 실체가 없어 축적된 경험을 통해 학습하거나, 고도의 관찰 능력을 바탕으로 알아채야 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나는 눈치가 아주 빠른 편은 아니었다.

       

       내가 지금껏 쌓은 경험은 남녀역전 세계로 넘어오며 의미를 잃는 경우가 허다했고, 며칠 본 사람이라면 모를까 처음 본 사람의 변화를 세세하게 캐치할 정도로 눈썰미가 뛰어나지 않았기에.

       

       다만, 그럼에도 보통 이상은 간다고 생각했는데….

       

       “그나저나 성도님은 혹시 성직에 뜻을 두고 계신지요? 조금 전의 성호도 그렇고 인사 문구도 그렇고 정말 모범적이었습니다. 가능하면 저희 견습 사제들에게 보여줬으면 할 정도로요.”

       

       “큿!”

       “……!”

       

       모르겠군.

       

       대체 왜 별거 아닌 공치사에 엘리와 리디아가 이렇게나 진지하게 경계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기껏 풀어둔 분위기가 다시 냉랭해졌잖아….

       

       실제로 나를 칭찬하며 무해함을 어필하려던 남자 이단심문관은 실실 웃던 표정이 곤혹스러움으로 굳어버렸을 정도.

       

       반면 선배로 보이는 여자 쪽은 아까까지만 해도 귀찮다는 듯, 한숨만 내쉬고 있었는데 지금은 눈빛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무언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이라도 하는 것처럼.

       

       …진짜 엘리랑 리디아에게 뭐 있는 건가? 그러면 곤란한데.

       

       나도 찔리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껏해야 배식용 수프를 다 먹고 아닌 척 줄 다시 서서 두 그릇 먹는다거나, 일전의 불경한 여신 조각상을 불태운 일 정도지.

       

       만약 엘리와 리디아에게 내가 모르는 비밀이 있다면 이따위 일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비밀이겠지.

       

       잘은 모르겠지만, 평소에 받은 게 있으니 도와줄 수 있는 만큼은 도와주는 게 도리일 터.

       

       빠르게 머릿속을 뒤져 신전에 관한 정보를 떠올렸다. 굳이 군림하려 들지 않을 뿐, 미궁도시의 지배자격 단체이기에 나름 세세하게 설정했던 기억이 있다.

       

       얼추 계산을 마친 뒤에는 전신을 이완시켰다. 엘리와 리디아와 반대되는…나는 너희를 경계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아서.

       

       “아쉽게도 저는 신의 사랑을 품기에는 너무 그릇이 작답니다. 인간의 사랑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여신님의 품에 안기겠어요.”

       

       내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해 주자, 어쩔 줄 몰라 하던 남자 쪽 이단심문관이 안도의 미소로 대답했다.

       

       “이런. 그건 아쉽군요. 하지만 여신께서는 자신의 품에 안기지 않은 사람도 공평히 사랑하시지요. 성도님은 성도님의 사랑을 행하시는 걸로 충분합니다.”

       

       “아하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놓이네요. 사실 이거 전부 배식 때 하는 교리 설교로 배운 게 전부거든요. 머리로는 알지만 제대로 된 신앙이 뒤따른 건 아니라 조오금 불안했지 뭐예요. 일단 이단심문관님들 앞에서 하는 거니까요!”

       

       “예? 배식이라면…일주일마다 신전에서 수프와 빵을 나눠주는 그 배식 말입니까?”

       

       “맞아요! 지금은 엘리랑 리디아 님 덕분에 잘살고 있지만, 예전에는 먹을 게 없어서 종종 신세를 졌거든요. 혹시 베로니카 수녀님이라고 아시나요? 그분이 교리를 외우거나 예법을 익힐 때마다 빵을 조금씩 더 주셔서 되게 열심히 배웠는데….”

       

       사실은 이미 머리로는 전부 알고 있던 걸 하나씩 풀면서 열의를 갖고 배우는 척했던 거다.

       

       그래야 기특해하면서 먹을 걸 더 주니까!

       

       내 말에 짚이는 게 있는지 그리운 이름을 들었다는 듯, 허공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

       

       “베로니카 님이라면…그 나이 지긋하신 수녀님 말씀이신가요? 제가 어렸을 때도 나가서 배식하시더니, 아직도 정정하신 것 같아 다행이군요!”

       

       “너무 정정하신 것 같지만요.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수프가 식기 직전까지 설교하셔서 다들 울상이 됐었거든요.”

       

       “그분이 그런 면이 있으시죠. …여기서 아는 분의 이름이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이것 또한 여신님의 인도겠죠.”

       

       활짝 웃으며 성호를 긋는 녀석.

       

       여신의 인도는 무슨. 사실 당연한 일이다. 일부러 누군지 알아채도록 짬 좀 있어 보이는 사람 이름을 댄 거니까. 실제로 베로니카가 나를 이래저래 챙겨준 건 사실이기도 하고.

       

       …자꾸 신전에 들어와 사제 하라길래 도망치긴 했지만.

       

       나를 이 세상에 처박은 것으로 유력한 인물이 사랑의 여신 아닌가. 솔직히 말해 좀 껄끄럽다.

       

       그나저나 이렇게 내 나이대에 맞는 인간적인 모습도 좀 보여주고, 공통의 지인을 꺼내며 공감대 형성까지 했건만….

       

       다른 한 명 쪽인 여자 이단심문관은 여전히 무서운 표정으로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는 남자 쪽을 상대할 때처럼 태연한 표정을 지어서는 안 된다.

       

       보아하니 한두 번 트러블을 마주친 게 아닌 것 같아 보였으니, 자기 자신이 외부에서 어떻게 비칠지 잘 알고 있을 터.

       

       이 나이대의 남자가 무서운 여자를 보고 취할 반응을 제대로 연기해야 한다.

       

       우연인 척 눈을 마주치고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다, 은근슬쩍 리디아의 뒤로 한 걸음 물러나기까지.

       

       기다렸다는 듯이 반쯤 내 앞을 가로막는 리디아 덕에 모든 것이 완벽하게 연출된 상황.

       

       이제 고개만 빼꼼 내밀어 머쓱한 목소리로 놀라서 그랬다며 사과하면…….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산을 하는 사이. 상대가 나보다 한발 먼저 움직였다.

       

       후배를 옆으로 부드럽게 밀어내며 성큼 다가온 이단심문관이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카렌이라고 합니다.”

       

       “어…저, 저는 요나예요. 그으. 지금 이건 그게….”

       

       말을 더듬으며 최대한 겁먹은 티를 냈지만, 그녀는 다 듣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연기는 됐습니다. 여신께서 내려주신 은총 덕에 간단한 감정을 꿰뚫어 볼 수 있거든요. 지금 평온하시군요.”

       

       “…쓰읍. 그런 가호를 받고 계실 줄은 몰랐네요.”

       

       “제가 여신님의 눈을 빌려 쓰는 것도, 이단심문관이 된 것도, 이렇게 당신과 마주하는 것도 전부 여신님의 인도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그리 불만스러워하지 마십시오.”

       

       “아하?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 건지는 몰라도 꽤나 유용해 보이네요. 부러워라.”

       

       “전혀 안 부러워하면서 잘도 그런 말이 나오는군요.”

       

       “방금 건 사회적 처세술이라고 하는 거랍니다.”

       

       나와 카렌이 주고받는 대화에 아연해진 표정을 짓는 나머지 셋.

       

       그중 남자 이단심문관 쪽은 거의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충격받은 모습이었다.

       

       “그쪽의 형은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나, 나는 이안….”

       

       “음음! 너무 그런 얼굴로 보지 말아주세요 이안 형. 거짓말은 하나도 안 했거든요. 배식받으며 배운 것도 맞고, 베로니카 님과 일면식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에요. …그저 약간 분위기를 연출했을 뿐이죠.”

       

       가난한 고아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어쩌면 신앙의 씨앗이 뿌리내렸을지도 모르는 아이처럼 보이도록 말이다.

       

       어버버거리는 이안의 꼴에 카렌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배속받은지 얼마 안 된 신참이라 그런 겁니다. 다른 이단심문관들이 이렇게 만만하진 않습니다.”

       

       “카렌 씨만 봐도 그래 보이네요. …슬슬 본론으로 넘어갈까요? 저한테 볼일이 있으시니까 굳이 이렇게 지적하시며 이름을 밝힌 거잖아요.” 

       

       “좋습니다. 쓸데없는 시간 낭비는 저도 사양이니.”

       

       그리 말한 카렌이 이제는 아예 대놓고 노려보는 엘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제가 찾아온 이유는 지난 대규모 토벌의 몇 없는 생존자 중 하나에게 당시의 증언을 듣고 싶어서입니다.”

       

       “엘리가 잘나가던 시절의 일 말씀이시죠? 그래서 어땠나요? 원하는 건 얻었나요?”

       

       “아뇨. 당사자답게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작 필요한 부분은 모르고 있더군요. 거기에 악한 의도는 없으나 뭔가 숨기는 것도 있는 것 같았고요. …이제 보니 당신이 그 숨기는 것인 모양입니다.”

       

       “음. 제가 엘리의 삶의 빛이고, 생명의 불꽃이며, 죄악이자, 영혼이긴 해요.”

       

       “그럴지도 모르겠죠.”

       

       유명 소설의 도입부를 농담삼아 말했건만 무미건조하게 대꾸하는 카렌.

       

       아무리 이 세상에 그 소설이 없다 한들 명문이 명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텐데…카렌은 감수성이 메마른 불쌍한 인간이 분명하다.

       

       안쓰러운 것을 보는 시선으로 카렌을 바라보던 것도 잠시. 그녀가 대뜸 내게 물었다.

       

       “황혼을 삼키는 자에 대해 들어본 적 있습니까?”

       

       “네? 뭐…당연히 들어본 적이야 있죠?”

       

       황혼을 삼키는 자는 비밀 조직 같은 게 아니다. 다 알면서도 잡아내지 못하는 해충 같은 놈들이지.

       

       미궁에 본거지를 두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마는.

       

       카렌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거무죽죽한 다크서클로 뒤덮인 눈동자에서 분홍색 빛이 반짝이더니 기이한 위압감을 뿜어낸다.

       

       이브의 진실의 눈을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 다만 그보다는 훨씬 널널했다.

       

       하기야. 세계수가 죽기 직전에 자신의 힘을 꾹꾹 눌러 담아 만든 이브와, 수많은 이단심문관 중 하나인 카렌이 받은 가호는 그 수준이 다르겠지.

       

       예방주사를 씨게 맞은 덕에 가호의 시선을 웃어넘기는 사이. 카렌이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요나, 당신은 황혼을 삼키는 자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갑작스러운 질문. 하지만, 듣는 순간 생각을 거치지도 않고 척수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개씹호로새끼들이죠.”

       

       카렌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어제 새벽에 밤새서 절반 쓰고 완성…끄르륽…

    살, 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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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cha Addict in a Matriarchal World

Gacha Addict in a Matriarchal World

남녀역전 세계의 가챠 중독자
Score 8.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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