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44

       * * *

       

       

       아타튀르크는 나라가 멸망하는 중에도 절대로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그때 우리를 지지해주는 대신, 동로마의 영토를 달란 겁니까? 말이야 바른 말이지 갖다 붙이면 우리 역시 동로마의 계승자요.”

       

       

       그거야말로 말장난이지.

       

       이런 귀찮은 입씨름을 할 생각은 없다.

       

       지금은 그냥 다 터넣고 말을 해야겠지.

       

       

       “솔직히 말하지. 나도 지금 체면은 차려야 합니다. 그 정도는 받아 내야 지금의 러시아가 유지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상황에서 우리도 귀국의 양보가 필요한 상황이란 말입니다.”

       “그럼 그냥 러시아는 빠지시는 게.”

       “다 같이 죽든가. 국채를 보존하든가. 둘 중 하나겠죠. 물론 전자를 선택하면 튀르키예는 확실히 죽겠지만 말입니다. 다른 국가야 정권이 바뀌겠지만 튀르키예는 아니지요.”

       

       

       전투가 없어도 군대를 움직인 것부터가 좀 오해의 소지가 있거든. 이 정도 잔돈은 받아 내야 한다.

       

       전쟁 없이 차리나가 콘스탄티노플을 받아 낸다?

       

       백군들 국뽕 오지게 빨걸? 차리나가 2로마를 탈환했다면서 말이다.

       

       

       “허.”

       

       

       어차피 이것도 말장난 일 뿐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결국 식민지를 내려놓게 되어 있거든.

       

       말뿐인 지지 정도야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지.

       

       

       “그 대신 우리도 말장난은 쳐두죠. 폰토스 그리스인들을 튀르키예가 독립하는 것처럼 ‘독립’시켜 주면 됩니다. 그 정도면 대국민 의회도 러시아라는 우방을 두게 되어 좋겠죠.”

       “러시아가 우방이라. 어떻게 믿으라는 건지.”

       

       

       그래. 믿을 수 있을 리 없다.

       

       나라도 못 믿지.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것처럼 땅덩어리를 큼지막하게 떼서 원수에게 넘기는 꼴이니까.

       

       

       “러시아를 믿을 수 없다면. 저 개인을 믿어 주세요.”

       “황녀를?”

       “눈앞에서 부모와 형제가 빨갱이에게 처형당했고, 나라가 빨갱이가 될 뻔한 것을 직접 뛰어다니면서 틀어막고 이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차르의 계승서열에서 동떨어져 있던 제가 차리나로 불리고 있죠. 국난을 극복한 몸으로서 튀르키예의 독립을 위해 한 몸 불태우는 장군을 개인적으로 지지합니다.”

       

       

       아타튀르크에게 호소하는 거나 다름이 없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 저기까지 나오면 좋았다.

       

       거의 다 성공했다. 여기서 실패했으면 꼼짝없이 전쟁을 하든 했겠지.

       

       

       “영국과 프랑스가 눈치를 채면 곤란합니다. 많은 시간을 드릴 수 없습니다. 양군 사이에 전투가 일어나면 곤란하니까요.”

       

       

       얼마 후. 아타튀르크는 답신했다.

       

       후일을 기약하겠다고. 속는 셈 치고 나를 믿겠다고 한 거다.

       

       현실을 보고 차라리 속는 셈 치고 우방이라도 만들어 후일을 기약하겠다는 거다.

       

       

       * * *

       

       

       

       실제 역사에서는 끝까지 맞서 싸우며 영국에 특사로 파견된 대국민의회의 이스메트 파샤도 열강의 제안을 거부하며 강경하게 나섰지만.

       

       역사가 바뀐 지금은 백군이 아나톨리아에 진입하며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 역사와 달리 신생 튀르키예의 영토는 앙카라를 포함한 아나톨리아 중남부와 동남부 일부를 점유하게 되면서 약소국화 되었다.

       

       

       “휴. 이제 좀 다행입니다.”

       “러시아를 너무 크게 해주는 감이 없지는 않지만. 음 뭐 어차피 지중해만 막아두면 되겠지.”

       “독일 꼴을 보세요. 저러다가 독일 자유사회주의 공화국이 내전에서 이기면 곤란합니다. 러시아라도 키워줘야 합니다.”

       “차리나가 단독으로 케먈과 협상했다던데?”

       “그러고 보니, 차리나가 하는 개혁을 보면. 좀 빨갱이 같지 않소?”

       

       

       영국과 프랑스는 그나마 체면을 차릴 수 있게 되었으며. 적 백 내전 이후 볼셰비키들 때문에 자존심이 긁혔던 러시아인들은 새로운 자부심으로 똘똘 뭉쳤다.

       

       다름 아닌 ‘로마’

       

       빨갱이들 때문에 나라가 뒤집힐 뻔한 러시아인들은 콘스탄티노플 수복으로 그 어느 때보다 로마의 계승자로서 자부심이 불타올랐다.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했다!”

       “역시 예카테리나 2세의 화신! 아나스타샤 차리나야말로 로마의 적통 후계자인 러시아의 진정한 주인이셔!”

       “로마의 부흥이라니 대단한 것이야!”

       “로마 3 제국이다!”

       “신성로마제국 따위는 독일의 전신일 뿐!”

       “하느님 차르를 보우하소서!”

       

       

       적 백 내전 이후, 힘든 시기를 넘기기 위한 정신적 지주로 자신들은 로마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러시아인들은 로마 뽕에 차올랐다.

       

       진정으로 자신들이야말로 로마의 후손이라고. 자랑스럽게 외치면서 실제 역사의 소련과 달리 백계 러시아인들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아타튀르크와 이뇌늬는 패자가 된 기분이었다.

       

       

       “이래도 괜찮은 겁니까? 괜히 속는 기분입니다만.”

       “황녀의 말이 다르지 않네. 남은 것 훗날을 봐야겠지. 자네도 말하지 않았나. 지금까지가 기적이라고.”

       

       

       무기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대국민의회의 군대에서도 불평불만이 나오고 있었다.

       

       이 정도 했으면 괜찮지 않을까.

       

       

       “그렇지요. 그래도 그 러시아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러시아를 믿지 않네. 그 황녀를 믿을 뿐이지.”

       

       

       아직 그 황녀가 어떤 인물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나이에. 적진 한복판이나 다름없는 곳에 나와 그리 멀쩡할 여자가 어디 있을까.

       

       러시아군이 주변에 많은 것도 아니었다.

       

       ‘대화’를 위해. 케먈과 대국민의회 지휘부의 안전을 위해 군대를 다 뺐다.

       

       그 자리에서 작정하면, 황녀를 죽이는 것도 일이 아닌 상황에서 그 황녀는 그런 생과 사를 넘나든 얼굴이었다.

       

       전장에서 구르다 보면 알 수 있다.

       

       이놈을 경계해야 하는지, 그도 아니면 일단 손을 잡아야 할 존재인지.

       

       황녀는 둘 다에 해당한다.

       

       실제로 러시아가 무리하면 영프의 공인을 받아 튀르키예 절반 이상은 먹을 수도 있는 상황 아니었던가.

       

       그러지 않고 황녀는 우방을 만드는 쪽을 선택했다.

       

       그래. 지금은 일단 살아남자.

       

       튀르키예가 오스만 시절처럼 다시 한번 우뚝 설 수 있는 그날을 위해.

       

       

       * * *

       

       

       튀르키예 대국민의회가 결국 항복했다.

       

       그쪽 대표로는 직접 무스타파 케먈 아타튀르크가 나왔고, 영국은 티베깅을 위해 처칠이 나왔다고. 역시 혐성질 하는 놈들이다.

       

       우리는 전 캅카스 백군지도자이자 현재 외교부 장관인 바실리 하를라모프를 보내 협상을 진행했다.

       

       그렇게 앙카라 조약이 새롭게 맺어졌다.

       

       그리스는 지들이 삐쳤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협상장에서 뛰쳐나갔다지.

       

       백군에게는, 정확히는 내전에서 가족들이 죄주고 겨우 두마에 의해 차리나로 낙점된 상황에서 콘스탄티노플 수복은 정통성을 채워주게 되겠지.

       

       그나마 항복해서 얼마나 다행이냐.

       

       아타튀르크가 작정하고 최후의 한 명까지를 외치며 끝까지 싸웠다면 질렸을 테고. 내전도 막 끝내고 볼셰비키 치하에 있던 땅은 여전히 민심이 흉흉한 마당에 다시 빨간 맛으로 물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원 역사와 비교하면 초라한 결말을 맞이한 거 같아 불쌍하긴 하지만.

       

       

       “황녀님.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했다고 합니다.”

       “이제 콘스탄티노플에서 차리나에 오르시면 됩니다.”

       

       

       두마의 의원들의 입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볼셰비키부터 일단 죽이자며 “할 수 없지. 이번만큼은 임시동맹이다!”했던 흐리호리우나 안토노프나 테르필로 같은 녹군 출신들도 아주 해맑다.

       

       그래. 로마뽕은 못 참지.

       

       차리나라. 차리나.

       

       팔자에도 없는 차리나다.

       

       전에도 말이 나온 거긴 하지만 이쯤 되면 러시아는 상당히 떡상한 상황이다.

       

       적백내전 상황에서야 내가 차리나 취급을 받을 수 있었다. 쳐도, 지금은 내전이 끝나고 얼떨결에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했다.

       

       여기에 숟가락 얹을 놈이 없을까.

       

       

       “지금까지는 대외적으로 말하지 않아서 별다른 말이 없지만, 살리카 법이 있지 않습니까.”

       

       

       살라카 법. 러시아 제국의 파벨 1세가 공식화한 법으로, 쿠데타로 아버지를 죽이고 여제가 된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사무쳐 살라카법을 끌고 와 여자가 황위 계승을 못 하도록 만들었다.

       

       뭐 황위를 이을 남자가 없으니 살라카법도 의미 없지만.

       

       

       “이미 선대 차르 시절에 올가 황녀님의 황위 계승 관련해서 말이 나왔던 것으로 압니다.”

       

       

       이번에 창당한 국민공화당의 보리스 사빈코프가 입을 열었다.

       

       저 사람은 실제 역사에서도 좌익 계열이었던 주제에 잘도 발 빠르게 이쪽에 몸담았다.

       

       이 사람 암살도 잘하고 다니던 인간이다.

       

       케렌스키 정부에서 국방장관도 했는데.

       

       뭐 사람 속내야 모르는 법이지만.

       

       

       “지금은 사정이 좀 다르지 않습니까.”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하고 당당히 로마황제라고 외칠 수 있는 상황에서, 군침 흘리지 않을 황족이 있냐는 거지.

       

       

       “한 숟갈 얹으려는 황족들도 칼이 들어가면 죽지 않겠습니까.”

       

       

       황족들은 지금 대다수 영국과 프랑스로 가 있었다.

       

       그래. 뭐.

       

       이들은 아직 오지는 않았는데, 이러면 사실상 나를 차리나로 인정하겠다는 소리겠지.

       

       아니면 차르가 죽어 나간 땅에서 자기들 목도 위험하다 여길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렇다치고. 칼이라니.

       

       

       “아니, 그건 좀.”

       

       

       사람 습성 어디 안 가는구나.

       

       이걸 또 암살 각을 보고 있다

       .

       제 앞에 있는 차리나도 같은 황족이라는 걸 모르나.

       

       내전 후에 합류한 사람들이 진짜 죄다 제정신이 아닌 거 같은데. 이거 정말 두마에 권력 이양해도 괜찮은 건가.

       

       

       “우리는 지금 특수한 상황에 직면해 있고, 법은 그 시대에 맞게 새롭게 바꾸면 되는 겁니다. 황녀님이야말로 백군의 상징이며, 두마에 권력을 이양한 차리나십니다. 지금 와 다른 황족을 차르에 올린다면 혼란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남성 후계자가 없으면 살라카법은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황녀님께서는 이미 충분히 차리나의 위에 오르실수 있습니다.”

       

       

       그래. 두마에서 다 결정한 거겠지.

       

       이런 건 원래 한두 번 핑계를 대면서 거절하다가 세 번째는 못 이기는 척 받아야 한다.

       

       더군다나 국가 권력의 중심인 두마에서 결정한 거잖아. 피할 수 없지.

       

       

       “두마의 뜻이라는 거군요.”

       

       

       두마의 뜻이라면 어쩔 수 없지.

       

       아, 두마가 시켜서 어쩔 수 없네?

       

       이러면서 두마의 우위권을 인정하고. 황위에 오르는 거지.

       

       나는 어디까지나 너희가 주는 왕관을 받아들인 것뿐이다?

       

       이렇게 되면 나는 아나스타샤 1세가 되는 것인가.

       

       

       “오오오. 몽골제국의 계승자이시자, 전능한 로마 황제의 자리까지. 황녀님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군주이십니다.”

       

       

       이번 콘스탄티노플 수복으로 그리고리 세묘노프도 몽골에서 당장 달려와 나를 찬양하기 바빴다.

       

       그러게 말이다.

       

       동서양의 대제국의 황위를 다 받는 거 아니냐.

       

       물론 몽골 쪽은 뒤통수 시원하게 찌르고 들어가서 강제로 받아 낸 느낌이 없지 앉아 있지만 뭐.

       

       

       “식량 생산량은 어떻습니까. 내전으로 너무 많은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압니다만.”

       “밥이나 축내는 골수 볼셰비키들을 모조리 처리하면서 식량에 좀 여유가 생겼고, 마흐노의 자유지구에서 나오는 것도 많습니다.”

       

       

       대숙청.

       

       여기서 나는 볼셰비키들을 사정 없이 죽여댔다.

       

       오로지 새로운 러시아에 충성하는 백계러시아인들로 채우기 위해. 빨갱이의 혁명 따위는 신성한 쌍두독수리 아래에서 짓밟힐 뿐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아직도 마르크스, 레닌을 욕하지 못 하는 자들은 철저히 탄압수준이 아니라 반역죄로 소탕당했다.

       

       

       “마흐노의 우크라이나 동부 덕에 식량은 그나마 괜찮군.”

       

       

       마흐노가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영국놈들에게 의지했어야 했을 거다.

       

       

       “그래도 그 빨갱이를 언제까지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괜히 그놈이 레닌처럼 군다면.”

       

       

       그건 아닐 거다.

       

       애초에 마흐노가 꿈꾸는 건 아나키즘으로. 레닌의 사상과는 거리감이 있으니까.

       

       트로츠키도 그래서 실제 역사에서도 마흐노를 때려잡은 거 아닌가.

       

       

       “지금은 내버려둡시다. 저래 보여도 나름 군세를 가진 몸이 아닙니까. 볼셰비키에 당해 그 수가 줄었다고 하나 5만 이상의 군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이 우크라이나 땅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면 답이 없습니다. 결국, 저 무정부주의가 얼마나 허상으로 가득 찬 건지 알게 되면 이쪽에 합류하게 되어 있습니다.”

       

       

       굳이 마흐노의 흑군을 지금 두들길 이유가 없다.

       

       레닌이 몰락하고 볼셰비키가 두들겨 맞고 백계 러시아에 의해 공인된 아나키스트 자유지구는. 백계 러시아의 자유 도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가만히 내버려 둬도 알아서 그 세력은 줄어들고 이쪽에 흡수될 수밖에 없다.

       

       왜? 바로 위에 개혁을 마친 러시아가 있는데, 마흐노 혼자서 자유지구를 유지하고 싶어도 쉽지 않을 거다.

       

       국제 사회는 홀로 살아갈 수 없는 법.

       

       그나마 자유 무역으로 교역하면서 상대해주는 것이 우리 러시아라면. 결국, 알아서 무너지게 되어 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튀르키예는 실제 역사와 달리 더 상황이 안좋게 되었습니다.

    무스타파 케먈은 튀르키에의 국부가 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메고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열심히 나라를 재건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러시아 출신으로 소련이 성립된 러시아에서 공산주의에 절망하고 미국으로 건너간, 자유주의 사상가이자, 작가로서 활약한 인물도 등장할 예정이며, 공산 독일의 등장으로 중유럽 국가들은 특히 군주정인 오스트리아가 지금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우리의 콧수염씨의 운명은 과연?

    선작, 추천 감사합니다.

    다음화 보기


           


I Became the Last Princess of the Bear Kingdom

I Became the Last Princess of the Bear Kingdom

Status: Ongoing Author:
I became a Russian princess destined to die in a revolution.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