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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4

       “아가씨! 무사하셨군요!”

        “더글라스? 오랜만인 것이에요. 그보다 어떻게 여기까지……?”

        “이 마도구로 제게 메시지를 주시지 않았습니까. 고생은 좀 했지만 덕분에 이곳까지 올라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걸 보낸 적이 없는데요?”

       

        상처 투성이가 된 몸으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기사의 예를 다하는 더글라스와.

        밑바닥의 초콜렛을 긁어 먹으려 파르페 컵 안쪽에 혀를 집어넣다 얼굴이 크림 투성이가 된 마리엘.

       

        두 사람의 대화 직후 마리엘로부터 엄청난 양의 메시지가 폭탄처럼 떨어졌지만 모조리 무시했다.

        애초에 그녀를 사칭해서 한 일이라곤 해주학파를 연결시켜준 게 전부였으니까.

        도리어 오갈 데 없던 기사단이 쉽게 탑을 오를 수 있도록 해주었으니 감사 인사를 받아 마땅했다.

       

        실은 저들의 실력이 꽤나 출중해 한 두 명 정도만 19층으로 보내려던 계획은 틀어져 버렸다.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전투 후에도 전력을 유지하고 있던 것이었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저희 창구로 찾아 오시더라고요.”

        “관리인?”

       

        이렇게 된 이상 생색이라도 내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예상대로 자초지종을 듣게 된 마리엘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멸문 이후에도 모험가 생활을 전전하면서까지 자신에 대한 충의를 잊지 않은 기사들의 모습에 감동받은 귀족영애 그 자체였다.

       

        세월이 흘러 더욱 성숙해진 아가씨와, 추레하나 마음만큼은 변치 않은 이들이 서로의 면면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입가에 묻은 초콜릿 자국만 없었다면 그 감동이 배가 되었을 텐데. 어쨌거나 좋은 일임은 분명했다.

       

        “지금 그 말이 전부 사실인가요?”

        “예, 마리엘 님을 만나고 싶다 하기에 물심양면으로 도와 드렸습니다. 중간에 사악한 흑마법사들이 훼방을 놓았지만 제가 전부 처리했죠.”

        “더글라스?”

        “그게…… 하아, 맞습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그에게는 느긋하게 그간의 해후를 풀 시간이 여의치 않았다.

        지금 이곳에 머무를 수 있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문하생 대표들의 배려 덕이기 때문이었다.

        라운지 바깥에는 치안대를 비롯해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행정부 소속 마법사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더글라스는 자신의 검집을 풀어 머리 위로 올리며 간언했다.

       

        “아가씨, 저희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나가시지요. 홀크로프트를 재건해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때가 왔습니다.”

        “싫은 것이에요.”

        “어째서입니까!? 백작가의 긍지를 더는 잇지 않으시려는 겁니까?”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어요.”

       

        과연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자신들의 주인을 데려갈 기세인 기사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멍청하다고 까지는 안하겠지만 평소 그리 고차원적인 사고를 하는 지 의문인 마리엘이었다.

       

        수업은 뒷전이고 하루 종일 하는 거라곤 갤질과 갤러리 관리, 외에는 요상한 머리 손질 정도.

        가끔 감시하러 오면 설렁설렁 눈치나 보며 마법 연습하는 척 한다.

       

        솔직히 내가 교수여도 차라리 밖으로 나가서 꿈을 펼치라 할 것 같은데, 어떤 화려한 언변으로 기사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지 걱정되었다.

       

        ‘그나마 여기까지 와서 강제로 납치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다행이군.’

       

        목적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아 불안한 분위기가 공간을 잠식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굳은 표정으로 변해가는 이들이 늘어났다.

        화려한 샹들리에로부터 쏟아지는 빛을 받으며 고개를 까딱이던 마리엘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천장 위의 보석보다 더욱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관리인은 나가는 것이에요.”

        “괜찮겠어요?”

        “이건 저희 가문의 문제이니 제가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에요.”

       

        그녀를 혼자 놔두기에는 다소 불안했지만 이쪽도 할 일이 있었다.

        전투지역에 급히 숨겨놓은 이자젤을 해주학파의 라운지로 옮겨놓아야 했다.

       

        혹시 몰라 밖에 있던 세라와 아르투르에게 마리엘을 잘 지켜보라 당부한 뒤 아래층으로 향했다.

       

        “헉, 허억…… 자, 잠시만요!”

       

        반쯤 부서진 11층의 건물 잔해를 뒤지며 ‘구멍’ 낸 곳을 찾던 도중, 익숙한 기사단의 일원이 나를 불러세웠다.

       

       

       

        *

       

        “제가 이 탑에 남아있는 이유는 방금 나간 저 남자 때문이어요.”

        “그게 무슨……?”

        “그대들도 이곳까지 오는 동안 관리인의 실력을 봤겠죠? 제가 홀로 나간다 한들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는 어려울 것이에요.”

       

        허나 클락의 힘이 있다면 가능하다.

        그 말에 아이린을 포함한 모든 기사들은 차마 반박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전장에서 만나면 벌벌 떨어야 하는 흑마법사들이 창 한 자루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던 모습.

        다만 그 말의 진위 여부를 당장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정녕 전지의 비석에 그런 내용을 적으셨다는 겁니까?”

        “그렇사와요.”

        “그자가 홀크로프트의 재건을 아가씨께 약속했나요?”

        “사와요사와요.”

       

        우아하게 입가를 닦은 마리엘은 제 가슴에 손을 얹으며 되는대로 지껄였다.

        어차피 기사들에겐 4황자에 대한 복수니 신비의 완성이니 하는 것들보다 가문의 재건을 위한 짝을 찾았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클락을 팔아먹어서라도 우선 이들을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어디까지나 속이는 것뿐-.이라며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이미 그는 제 몸의 포로가 되어 밤이고 낮이고 헤롱헤롱인 것이에요.”

        “과연 마리엘 아가씨께……??”

        “난 상상이 안 가는데.”

       

        실제로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인 건 확실해 보였기에 기사단 내부에서도 의견 충돌이 일었다.

        더글라스 역시 고민에 빠져 과연 합당한 사안인지 생각을 정리했다.

       

        “바이에른의 그 망나니와 비교하면 어떻지?”

        “어차피 인성은 둘 다 비슷해 보이던데 가주로 섬긴다면 이미 세력을 일군 쪽이 낫지 않나?”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다 홀크로프트가 역으로 흡수당하면 어떡하려고?”

        “하지만 창은 좀…… 검에 비해 덜떨어진 무기인데.”

        “그래서 네가 아까 그놈이랑 싸워서 이길 자신 있어?”

       

        좀처럼 수근대는 소리가 줄어들지 않는 가운데 아이린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한 뒤, 조심스럽게 19층을 벗어났다.

       

        계단을 통해 곧장 11층으로 내려온 그녀는 미궁의 입구 근처에서 클락을 발견했다.

        그는 허리에 찬 검을 내려다 보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여기가 맞았는데…… 살살아, 소환학파라며. 좌표도 제대로 기억 못 해?”

        “저기!”

        “응?”

        “하, 한 가지 여쭐 게 있는데요.”

       

        전투 중 고전하던 흑마법사의 눈앞에 쇄도하는 창끝을 본 순간 기억해냈다.

        접수원으로 일하던 시절 내내, 그의 얼굴이 조합에서 배포했던 실종자 포스터의 최상단에 위치해 있었다는 사실을.

       

        성주의 첨병(尖兵)이라 불리우며 한때 대륙의 미개척지를 밝히는 횃불의 시대를 열었던 위대한 세 명의 모험가 중 하나.

        목이 타는 갈증을 느끼며 아이린은 조심스레 한 걸음 다가갔다.

       

        “혹시 당신은 ‘창끝’이 맞으실까요?”

        “확신이 없어?”

        “솔직히, 네.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제가 봤던 이름만큼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미궁에 들어오기 전, 그는 자력으로는 절대 생각해낼 수 없을 거라 했다.

        세계의 법칙 혹은 저주라고.

        그럼에도 직접 대답을 듣고자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만약 그가 창끝이 맞다면 마리엘은 칠현자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의 업적을 이룬 남자에게 홀크로프트의 미래를 맡기겠다고.

        부군으로 삼겠노라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었다.

       

        “혹시 아가씨께서는 이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알고 있으면?”

        “지금 당장 위층으로 돌아가 부단장의 뒷목을 잡고 탑 바깥으로 끌어내겠죠.”

        “모르면?”

        “그래도…… 제가 할 일은 변하지 않겠네요.”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는지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지만 충분한 대답이 되었기에 아이린은 곧장 계단을 다시 올라갔다.

       

        라운지에서는 아직도 마리엘의 계획이 믿을만 한가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다들 주목!”

       

        그녀는 손뼉을 쳐 모두의 주목을 이끌어 내고는, 짧게 말했다.

       

        “이만 내려가죠. 저희의 역할은 여기까지인 듯합니다.”

       

       

       

        *

       

        마탑에 무단으로 침입했던 은익 기사단이 자신들의 고향으로 떠난 지 정확히 엿새가 흘렀다.

        11층에 난자했던 전투의 흔적들도 어느덧 깔끔하게 복구된 뒤였다.

       

        나는 생활부장이 각 방에 설치하라고 건네준 ‘초음파 무법자 퇴치기’를 손에 들고 마리엘의 방문을 두드렸다.

        실제로 효과가 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듣기로는 마법사가 아닌 자들이 기숙사에 침입하는 걸 막아주는 아티펙트라고 했다.

       

        “어서오는 것이에요.”

        “방문에 뭣좀 달려고 왔습니다. 겸사겸사 간섭기 연습도 좀 하고요.”

        “멋대로 하는 것이에요. 어차피 싫어도 할 거잖아요?”

        “그럼 실례합니다.”

       

        마리엘은 여전히 침대에서 뒹굴며 인사를 받았다.

        갤질 대신 더글라스에게 딸려보낸 노트를 통해 백작가의 사람들과 메시지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전파의 수신범위가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으나 당분간 북부가 아닌 마탑 근방의 도시에서 세력을 불리기로 한 모양이었다.

        설치를 끝낸 ‘무법자 퇴치기’의 전원을 키자 마리엘이 불쑥 다가와 말했다.

       

        “관리인관리인.”

        “네?”

        “이 뒤에 일정이 없으면 잠시 시간 좀 내는 것이에요.”

       

        일정이라면 있었다.

        사실 좀 중요한 것이.

       

        11층 바닥에 구멍을 뚫고 이자젤을 대미궁 안에 숨겼는데 벌써 6일 동안이나 찾지 못했다.

        곧 아사할지도 모르니 슬슬 녀석을 꺼내줘야 했다.

        마침 몇 시간 뒤, 원탁회가 한 번 더 열린다고 하니 그때가 적기였다.

        다행히 마리엘의 용건은 시간을 오래 잡아먹진 않을 듯 싶었다.

       

        “이리 와서 저랑 사진 한 장 찍는 것이에요.”

        “사진? 왜요?”

        “가문의 늙은 원로들은 의심이 많은 것이에요. 기사단을 다시 보낼지도 모르니 주기적으로 증거를 제출하기로 하였어요.”

       

        무슨 증거인지 듣기도 전에 이불을 박차고 일어난 그녀가 베개를 껴안은 채 내게로 바짝 다가왔다.

        기다란 속눈썹, 나풀대는 머릿결, 위에서 내려다보면 다시금 노출이 과하다고 느껴지는 드레스까지.

       

        평소에도 갑자기 달려드는 일이 잦았지만 이번엔 거리를 좁히는 속도가 사뭇 조심스러웠다.

        간섭기를 연습할 때조차 이렇게 가까이서 서로 마주본 적은 없었다.

       

        “가, 가만히. 절대 움직이지 말고 돌처럼 앉아 있는 것이에요.”

       

        그녀는 위치노트를 든 한쪽 팔을 쭉 뻗어 우리의 얼굴 쪽으로 조정했다.

        서로의 살결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머리카락이 내 볼을 간질였다.

        슬쩍 곁눈질하자 바들거리는 입가에 붙은 과자 부스러기가 보였다.

       

        드럽게. 좀 닦고 다니지.

        조심스레 손을 들어 평소처럼 닦아줘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 마리엘이 기습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쪽.

       

        눈앞에 가득 찬 황금빛 동공이 보름달 만큼이나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이윽고 붉은 바다 아래로 잠수해버린 그것을 쫓으려던 나는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확인했다.

       

        머리끝에서부터 전류가 흐르는 감각에, 우리는 동시에 뒤로 나가 떨어졌다.

        쿠당탕! 소리를 내며 침대 밑으로 떨어진 마리엘은 한참 뒤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열었다.

        아가씨 말투 따위는 온데간데 없었다.

       

        “실수였어요.”

        “사고였죠.”

        “제가 분명 움직이지 말라고 말했는데.”

        “전 처음부터 가만히 있었는데 고개를 돌린 건 그쪽이잖아요.”

       

        한참 동안 실의에 빠져있던 우리는 이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같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가장 멀리 떨어진 끝과 끝이었다.

       

        그날 저녁에는 사감실의 창문 밖으로 도심의 불꽃놀이가 보였다.

       

        상인들의 말에 따르면 어느 몰락한 귀족가의 가신들이 모여 가문의 경사에 축배를 들기 위해 터뜨린 것이라고 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늦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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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이세계 마탑의 갤주가 되었다
Score 3.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10 years since transfer to another world

What I do inside the Ivory Tower of Truth isn’t much different from what I did on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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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you missed today’s attendance for the ‘Principles and Understanding of Dimensional Glass’ course, you’ll get a penalty] If you want to kill the professor who suddenly changed the classroom with a phase transition 2 minutes before the start of class, go ahead. Hah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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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why does everyone think I’m the Tower 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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