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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44

        

         

       “그러니까 빨리 여는 법 말하라고. 내가 자물쇠 부수기 전에.”

         

       “…이상한 짓 하지 말라니까.”

         

       “잘 생각해. 자물쇠 부수고 여는 거나 네가 알려줘서 여는 거나 똑같이 냉장고 문은 열려. 하지만 자물쇠가 부서지는 것보다는 그냥 얌전히 열리는 게 훨씬 좋지 않을까? 응?”

         

       “하지만…으음….”

         

       “얼굴 보니까 너도 궁금해하는 거 같은데 왜 이렇게 빼고 그래? 잠깐만 열어보자. 지금 아니면 언제 이거 보겠어?”

         

       “그런…가?”

         

       냉장고를 열고 싶어 하는 이아린.

       이아린을 말리던 이세린.

         

       하지만 대화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이세린이 이아린에게 말려들어 가기 시작했다.

       이세린은 내면의 호기심과 이아린의 꼬드김, 이 두 조합을 이길 수 없다는 듯 점점 혹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망설이는 듯 말을 더듬기는 했지만, 눈동자가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권능을 사용할까 말까 고민하는 듯 보였다.

         

       진성은 냉장고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냉장고 근처에 놓여있는 식탁 위의 숟가락 둘이 둥둥 떠올랐고, 느릿느릿한 속도로 허공을 가르며 둘에게 접근했다. 기감이 뛰어난 이아린도, 한창 이아린에 집중하느라 권능을 사용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는 이세린도 눈치채지 못하게 아주 은밀하게 말이다.

         

       그렇게 움직인 숟가락은 천천히 그녀들에게 다가가….

         

       토옥.

         

       아기가 숟가락을 휘두른 것처럼 아주 약하게 그녀들의 머리에 떨어졌다.

         

       “어?”

         

       “응?”

         

       아픔은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숟가락으로 머리를 톡 쳐서 지금 하는 행동을 멈추게 만든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이아린과 이세린은 화들짝 놀라며 자기 머리에 떨어진 것을 확인해보았고, 그것이 숟가락임을 확인하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곧 진성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눈치채자, 이 숟가락은 진성이 자신들에게 보낸 것임을 깨달았다.

         

       “으, 으음….”

         

       이세린은 진성과 시선이 마주치자 슬쩍 눈을 피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시선이 느껴지자 손을 머리 위로 슬쩍 올리곤, 마치 처녀 귀신 흉내라도 내려는 듯 옆머리를 움직여 자기 얼굴을 덮었다. 마치 머리카락이 암막 커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아린은 달랐다.

       오빠한테 부끄러운 것을 들켜서 자기 얼굴을 숨긴 이세린과는 다르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진성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얼굴에 철판이라도 깐 것처럼 당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도리어 진성에게 소리치기까지 했다.

         

       “오라비! 냉장고에 자물쇠 걸려있는데 이거 좀 풀어줘!”

         

       이아린은 당당하게 온몸으로 주장했다.

         

       자신은 잘못한 게 없고, 켕길 것도 없다고.

       냉장고를 열려고 한 자신이 잘못한 게 아니라, 오히려 냉장고에 자물쇠 따위를 걸어둔 오라비가 잘못한 게 아니냐고.

       그런 적반하장에 가까운 태도로 뻔뻔하게 진성을 바라보았다.

         

       진성은 그런 이아린의 태도에 피식 웃더니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니 되느니라.”

         

       “왜?”

         

       이아린은 진성의 거절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갸웃거렸다.

       그녀의 양손이 깍지를 끼며 가슴 앞에 모였고, 동그랗게 뜨인 눈망울은 어린아이의 눈을 보는 듯 순진무구함이 넘쳐났다.

         

       “저건 아직 열면 아니 되기 때문이니라.”

         

       “왜? 진공 멸균 상태에서 김치라도 숙성시키고 있어?”

         

       “허허허. 진공은 몰라도 멸균이면 김치가 숙성되지 않겠지.”

         

       “아, 그런가?”

         

       이아린은 천진난만하다 못해 자유롭기까지 한 질문을 던졌고, 진성은 그 질문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뭐, 그래도 아주 틀리지는 아니하였다. 과자는 포장이 뜯어지면 그 순간부터 변질하기 시작하고, 음식이란 입을 댄 순간부터 빠르게 해치우지 않으면 상하기 시작하는 법이 아니더냐. 저 안에 들어있는 것 역시 그와 마찬가지인즉, 하여 혹시 우연이라도 문이 열려서 내용물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하여 자물쇠를 달아놓은 것이니라.”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이아린은 진성의 설명에 아쉽다는 듯 냉장고에서 멀어졌다.

         

       열면 상한다는데 어쩌겠는가.

       냉장고 안의 내용물이 궁금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안의 내용물을 상하게 만드는 것을 감안해서까지 봐야 할 정도로 궁금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가볍기 짝이 없는, 흥미본위의 호기심이었을 뿐이니까.

         

       비유하자면 친구 집에서는 생수를 사다 먹는지, 수돗물을 끓여다가 옥수수차나 보리차로 만들어서 먹는지, 정수기가 설치되어 있는지 궁금해하는 정도의 너무나 사소한 호기심이었다고 할까.

         

       타닥.

         

       그녀는 정말 별것 아닌 호기심을 빠르게 포기하고는 가볍고 날렵한 움직임으로 진성의 바로 앞에 도달했다. 그리곤 의자 하나를 끌어서 진성 근처에 놓고는 그 위에 앉았다. 엉덩이를 안쪽까지 밀어 넣고 등을 편안하게 기댔고, 발을 쭉 뻗어 돌 위에 얹었다.

         

       그렇다.

       진성이 침대처럼 쓰고 있는, 바로 그 돌 위에 말이다.

         

       의자에 앉은 채 발을 어딘가에 걸치고 있는 이아린의 모습은, 마치 학교에서 의자에 앉은 뒤 책상에 발을 턱 올리고 비스듬히 누워있는 활발한 여학생을 보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모습을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닌 듯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였기에 더더욱.

         

       그리고 이런 이아린의 모습은 평소에도 예의범절을 강조하던 사람의 눈에는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얘! 그런 교양 없는 자세 하지 말라고 했잖니!”

         

       이아린이 돌에 다리를 턱 하니 올리자 그녀의 어머니가 나섰다.

       예의에 어긋나는 짓은 하면 안 된다, 다시 돌아가서 예절 교육을 받고 싶은 거냐며 잔소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이아린은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아, 엄마. 우리끼리 있는데 뭐 어때요. 다른 사람들 있는 곳에서나 주의하면 되지.”

         

       “예절이라는 건 일상에서 묻어나와야 하는 거야. 아무리 밖에서 조심한다고 해도 평소의 모습이 그대로 묻어나온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니? 너는 돌아가서 예절 교육 다시 한번 받을 준비나 하렴.”

         

       “내가 무슨 어린아이도 아니고, 그런 걸 또 받아요. 싫어요.”

         

       “예절을 모르면 그게 어린아이 아니니! 아샤가 예절 교육받을 때 너도 거기 껴서 같이 받으렴! 알겠니?”

         

       “…음? 아샤랑? 그건 좀…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이아린은 예절 교육이라는 말에 레몬을 처음 먹은 어린아이처럼 격렬한 거부반응을 보였다가, 아나스타시아랑 같이 예절 교육을 받는다는 말에 순간 멈칫하더니 잠시간 고민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같이 다니면서 온갖 사고를 치며 놀던 아나스타시아랑 같이 예절 교육을 받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재미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아나스타시아랑 함께라고 해도 예절 교육은 별로 받고 싶지 않았다.

       식사 예절부터 걷는 법, 말하는 법 등등…뭐 그리 따지는 게 많은지.

       그나마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회초리로 때리거나 하는 체벌은 가하지 않았지만, 깐깐한데다가 카리스마도 넘쳐서 시키는 대로 안 할 수가 없었다.

         

       나름 자신을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생각하는 이아린으로서는, 예절 교육이라는 것은 그녀와 상극 그 자체인 수업이었다.

       맞지 않는 옷을 강제로 입는 느낌이라고 할까.

         

       “아냐. 그런 거 안 받아요. 무공 수련할 시간도 없는데 무슨 예절 교육.”

         

       “얘가 진짜!”

         

       진성은 둘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과열될 기미가 보이자 그 둘 사이에 개입했다.

         

       “본디 짐승이 되었던 사람이 되었건 자신의 보금자리에서는 긴장이 풀어지는 법이고, 집에서는 허례허식을 벗어던지고 쉬고 싶어 하는 법이지요. 하니 아린의 이러한 태도를 개의치 아니하셨으면 합니다.”

         

       타이밍 좋게 끼어든 진성은 둘의 말을 딱 잘라버렸다.

         

       이아린의 어머니는 진성의 말에 탐탁지는 않지만, 일단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고, 이아린은 오라비가 자신에게 힘을 실어주어서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었다는 사실에 생글생글 웃었다. 그리고 마치 퍼포먼스라도 하듯 기지개를 켰는데, 그 모습이 마치 고양이가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아린이 기지개를 켜자 팔이 위로 쭉 뻗어지고 뒤로 움직였으며, 등이 굽어지며 상체를 강조하듯 앞으로 쭉 나왔다. 그리고 돌 위에 얹혀 있던 다리는 쭈욱 뻗어나갔고, 진성의 몸에 발끝이 토옥 닿았다.

         

       그렇게 닿은 이아린의 발끝은 진성의 맨피부에 딱 닿았는데, 맨발이었기에 진성의 피부 온도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

         

       뜨겁고, 차갑다.

         

       이아린은 화들짝 놀라며 의자에 똑바로 앉았다.

       그리곤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더니 손을 뻗어서 진성의 팔을 잡았다.

         

       손바닥으로 느껴보니 더더욱 확실하게 느껴진다.

         

       뜨겁다.

       그리고, 차갑다.

         

       그 두 가지 상반된 온도가 진성의 피부에 공존하고 있었다.

         

       한 자세로 온풍기의 뜨거운 열기를 그대로 받은 것처럼 피부는 뜨끈뜨끈 달아올라 있었다. 따뜻하다고 보기에는 손난로에 피부를 한껏 달군 것처럼 느껴지는 온도였고, 그렇다고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겁냐면 그건 또 아닌…그런 애매한 뜨거움이었다.

         

       이건 이상한 것이 없었다.

       진성은 지금 화상을 입어서 온몸이 빨갛게 변해 있는 상태가 아니던가.

         

       그런데.

         

       차갑다니?

         

       ‘이건…?’

         

       이아린은 진성의 피부 아래에서 느껴지는 냉기를 느낄 수 있었다.

       정제되지 않은 듯한 냉기.

       한겨울의 녹지 않은 호수에 손을 담갔을 때 느껴지는 듯한 그런 냉기가 아닌가.

         

       그러한 냉기가 핏줄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뜨겁게 달궈진 피부 아래에서, 자기 몸을 숨긴 채 그렇게 계속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낮의 태양에 뜨겁게 달궈져도 녹지 않은 동토(凍土)를 연상케 만드는 것이었다.

         

       ‘뭐지…?’

         

       화상을 입은 피부.

       냉기가 흐르는 핏줄.

         

       냉기가 화상이 아래로 침투하지 못하게 막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냉기가 서서히 올라가며 피부의 화기를 없애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그것도 아니라면 냉기와 화기가 각자 제 위치를 유지하면서 짧은 평화를 누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무엇이 정답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아린의 본능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가 익혀온 무공이, 무공과 함께 단련된 감각이 말해주고 있었다.

         

       진성은 이 냉기를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으며, 마음만 먹으면 피부의 화기를 전부 몰아낼 수 있으리라고.

       단지 그리하지 않고 그냥 화상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라고.

         

       이아린은 진성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진성은 이아린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검지 하나를 들고는 입가에 가져가 세웠다.

         

       눈치챈 것을 말하지 말하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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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주술사는 초월을 원한다
Status: Ongoing Author:
The shaman realized he had gained life once more. This time, he would live a life solely for transcendence, through shamanism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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