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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44

    레니에 아린세이아.

    그것은 과거 자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였고 마지막에는 삶의 목적 그 자체가 되어버린, 여신의 성녀이자, 불사의 용사이자, 세계의 영웅이자, 아린세이아의 여왕되는 여인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인공지능의 이름이 되었다.

    그것도 아린세이아에서 스스로 학습을 마치고 마중나온 고성능 인공지능.

    ‘뭐, 따지고보면 그렇게까지 이상한 작명도 아니지.’

    그녀는 어쨌든 아린세이아를 다스리게 될 테니까.

    아린세이아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게 될 존재의 이름이 레니에가 아니라는 쪽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아린세이아를 다스리는 이는 언제나 레니에가 되어야 하니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루크가 집 안에서 편하게 입을 목적으로 온천의 기념품 상점에서 구매한 동대륙의 옷을 꺼내 갈아입을 때였다.

    -그건 혹시, 동대륙의 옷인가요?

    인공지능 레니에가 루크의 테이블 위에 놓인 컴퓨터를 통해 질문을 건네온 것이다.

    음, 레니에는 동대륙의 옷을 모르는 건가?

    하긴, 아린세이아에도 동대륙에 관한 지식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러니 이제 막 아린세이아에서 학습을 마치고 나온 레니에라면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

    “그렇다네. 한번 입어보니까 이게 또 상당히 편하기에 말이야. 어쩌면 집에서도 편하게 입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사 봤지.”

    그러자 레니에는 흥미롭다는 듯 대답했다.

    -오오, 과연 그랬군요! 본 적은 없었지만,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서대륙에서는 전혀 없던 양식이라.

    “역시 그랬나?”

    역시나, 이 옷에 대한 지식은 레니에에게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에 루크는 가볍게 웃어보였다.

    “……훗.”

    그나저나,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목소리를 들은 루크는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마치 레니에와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지 않은가.’

    컴퓨터에서 흘러나오는 그 목소리가 기억 속 레니에의 그것과 어찌나 닮았던지, 그 루크가 차 안에서 레니에가 되살아난 줄 알고 화들짝 놀라 눈을 떴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린세이아의 곳곳에 새겨진 기억과 지식들을 매개로 학습한 결과인지, 인공지능의 목소리는 레니에의 그것과 정말 똑같다고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비슷해도 결국 그녀는 그저 인공지능일 뿐, 과거 자신과 함께한 그녀가 아니라는 것 또한 루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해도 흥분되는 감정을 감출 수는 없는 법이었다.

    무려 5000년만에 듣게 된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다. 

    도대체 그 누가 흥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뭐, 사실 체감상으로는 실제로 5000년 이라고 할 만큼 오래 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루크가 웃으며, 심지어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옷의 허리를 조이고 있을 무렵, 레니에가 생긋거리는 듯 상큼한 목소리로 말했다.

    -음. 굉장히 귀엽고 예쁘네요! 잘 어울려요.

    “큽!”

    괴상한 추임새와 함께 루크의 콧노래가 끊겼다.

    귀엽고 예쁘다는 말을 들은 루크가 오랜만에 기겁한 것이다.

    실제로 레니에가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리듯 감탄하는 목소리 같아서 말이다.

    이 꼴을 레니에가 직접 봤다면 했을 법한 말이라서 더더욱.

    그래도 루크는 애써 태연한 척 표정을 되돌렸으나, 레니에가 그것을 놓쳤을 리 없었다.

    -루크님, 왜 그러세요? 뭔가 옷에 불편한 점이라도?

    “아냐, 그건 아닌데….”

    -그럼 뭐죠? 혹시 몸이 안좋으신가요?

    레니에의 태연한 질문에 루크는 우물쭈물거리며 대답했다.

    “그 목소리로 말하니까 왠지 그대가 나를 능멸할 목적으로 건넨 말 같아서 말이네.”

    -전혀 아니에요, 정말 잘 어울린다니까요?

    그녀는 억울하다는 듯이 목소리를 내었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이 주인이니만큼 설득력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공지능의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니면 단순히 비위를 맞추기 위해 지어낸 거짓인지 파악할 방법도 없는 루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뭐, 그런거면 됐다만.”

    그래, 말의 내용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실제로 자신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봐도 굉장히 예쁘고 귀여운 편이니 말이다.

    다만, 그것을 말하는 목소리 때문에 좀 신경이 쓰였을 뿐이지.

    그렇게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루크의 반응에 레니에는 다시금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런거면 된게 아니라요, 주인님! 정말 보기 좋다구요!

    레니에의 이어진 칭찬.

    하지만 루크는 이번엔 돌연 정색을 하기 시작했다.

    “레니에?”

    -네?

    “그 목소리로 ‘주인님’이란 말은 하지 말아주겠나? 조금 신경이 거슬려서 말이야.”

    루크가 아는 한 그녀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이 되고자 했고, 또 그렇게 살아왔다.

    누구에게나 공정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오래도록 고민하고 또 고민한 것이 그녀다.

    그리고 루크는 그녀의 신념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쳤다.

    그래서일까?

    그런 그녀의 목소리로 듣는 ‘주인님’이라는 말에서는,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당하는 듯한 불쾌감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나를, 아니. 그 누구를 칭할 때에도 절대 주인님이라는 말은 절대 쓰지 말게. 알겠나?”

    루크의 달라진 분위기에 레니에는 띄엄띄엄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 네, 그러죠. 루크님.

    원래 그가 주인님 소리 듣는 걸 이렇게 싫어했나?

    아무래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옷을 다 갈아입은 루크가 테이블에 앉아 말했다.

    “그나저나,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학습을 마쳤더군.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빨리 학습이 완료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도 제대로 된 기능을 갖추려면 그래도 일주일은 걸리지 않을까 생각했건만, 고작 하루이틀만에 완성될 줄이야.

    놀라움을 담아 중얼거리는 루크의 목소리에, 레니에가 우쭐대는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후후, 그건 제가 그만큼 대단하기 때문이지요.

    “그래…, 과연 그렇구나.”

    충분히 우쭐댈만한 일이기는 했지만, 목소리의 주인이 남긴 기억때문인지 아니면 목소리가 어린애처럼 앳된 느낌이 있어서인지 정말 대단하다는 느낌은 조금 덜했다.

    적어도 그 목소리만 어떻게 했다면 훨씬 더 믿음이 갔을텐데.

    하지만 그건 그거고, 현재 루크가 진정으로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나저나, 이 저택의 권한은 어떻게 취득한 거지? 분명 엄청난 수준의 보안이 걸려 있었을 텐데.”

    저택에 루크가 건 잠금 인챈트는 대륙에서 그 누구도 풀 수 없으리라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아무리 성능좋은 컴퓨터와 솜씨 좋은 열쇠공이 있어도, 서클식과 클래스식을 교묘하게 섞어서 복잡성을 높여둔 그 잠금식은 평범한 마법사는 그 풀이방법에 대한 발상조차 불가능할 테니까.

    그런데 그 잠금들을 모조리 뚫고 벽난로를 비롯해, 각종 마도기기에까지 제어할 수 있다면, 그건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 말인 즉, 저택의 코어가 이미 완전히 레니에의 제어하에 넘어갔다는 말이 되니까.

    뭐, 아린세이아의 성능이 있다면 식 자체를 망가트릴 작정으로 아예 비틀어버린다면 사실 제어를 탈취하는 게 어려운 건 아니었지만, 코어에는 그런 무식한 방법으로 파고든 흔적은 일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루크가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아, 그거요?

    그러자, 레니에가 대답했다.

    -간단하던데요? 투르켈 방정식에다 아리페켈의 정리를 응용해서 만든 암호였잖아요? 그걸 루크님 스타일로 약간 손봐서 해를 찾기 어렵게 하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해법이 정해진 거니까요. 탈로스의 역전식에 계를 다중차원을 섞어 살짝 조정하면 복호화는 쉽죠.

    레니에의 말을 들은 루크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과연, 그렇게 해제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도, 반복된 10번의 시도 이내에 말이다.

    이건 말도 안되는 보안상의 허점이었다.

    “허허, 그런 실수가 있었나?”

    잠깐 변명을 해 보자면, 이러했다.

    저택에 인챈트를 감을 당시만 해도 루크는 새로운 문물에 익숙하지 않아 첨단 마도기기의 힘을 빌리기보단 종이와 펜으로 직접 계산하고 디자인하는 빈도가 높았다.

    그렇다보니 아무래도 생각할 수 있는 요소가 부족했지.

    명백한 실책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마법이 너무나도 간단하게 파훼당하는 수치를 겪었음에도, 루크는 미소지었다.

    아주 흥미로운 응용법이었다.

    탈로스의 역전식에 다중차원 계를 도입한다고?

    드디어 제대로 된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나타났군.

    레니에의 목소리에선 여전히 지적인 면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지만, 말하는 내용만큼은 굉장히 유익하고 흥미로웠다.

    “잠깐, 그렇다면 레니에, 거기에 다중 역전좌표를 섞어 암호화를 한다면 어떨것 같나? 기존 이론에 새로운 축을 추가하는거야. ”

    루크의 제안을 레니에는 곧바로 부정했다.

    -그건 보안성을 높이는 데엔 괜찮은 발상이지만요,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합니다. 역전좌표는 특성상 모든 부분에 적용할 수 없으니 오히려 인챈트간에 호환성에서 문제가 생기겠지요. 

    호환성이라, 인챈트를 만들 때엔 그 또한 중요한 요소였지.

    금방 아이디어만 떠올렸을 뿐이라 거기까지는 미처 검토하지 못했군.

    “흐음, 과연. 그럴 수 있겠군. 그럼 그대가 보기엔 어떤 방법이 더 나을 것 같나?”

    -글쎄요….

    루크의 질문을 받은 레니에는 잠깐 고민하는 시간을 갖더니, 이어서 컴퓨터 화면으로 다량의 정보를 출력함과 동시에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이미 인챈트가 유기적인 호환성을 이루고 있는 점에서 좌표를 건드리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니까요. 보안성과 호환성의 균형을 깨트리지 않고 수정한다면, 홀레인 상수를 이용해 가짜 값을 생성해 동시에 입력을 받는 식이 유효할 것 같아요. 이렇게하면 상수의 값 만큼의 다중연산이 불가능한 기기로는 절대로 해체할 수 없겠죠. 값이 넬슨 특이점만 넘겨도 해체는 이론상 불가능해요.

    레니에의 제안에 루크는 턱을 쓰다듬으며 감탄했다.

    과연, 그런 방법이 있겠군.

    “홀레인 상수라, 그거 썩 괜찮은 방법인데! 이거 당장 시도해보고 싶구나!”

    영감을 받은 루크는 곧장 서랍에서 펜과 종이를 꺼내 아이디어를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몇분이 지난 후.

    루크는 아무래도 졸음이 오는지, 고개를 꾸벅거리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결국 레니에는 그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루크님, 졸리면 주무세요. 평소에 주무시던 시간입니다.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레니에의 말에 시간을 확인한 루크는 진작에 잘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야기를 나누느라 집중해서 전혀 몰랐군.

    차 안에서 내도록 잤음에도 불구하고 또 시간이 되니 졸려오는 것은 신기했다.

    그러나 마법사에게 아이디어가 있는 순간 다 잊고 자라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

    그것도 마음과 수준이 맞는 대화상대를 눈앞에 두고서 아이디어를 잊고 잠자리에 들라는 것은 마법사에겐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 루크는 무어라 말을 하려 했으나, 이번엔 레니에가 그런 루크의 말을 끊었다.

    -루크님, 그냥 주무세요. 저는 어디 안 가요. 제때 주무시질 않으면 살이 찔 뿐만 아니라, 피부도 망가진다고요?

    수면의 중요성을 말하는 레니에의 말에는 루크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래, 레니에는 갑자기 사라지지 않으니까.

    “……그래, 아침에 다시 이야기하지, 레니에.”

    -그래요, 내일 아침에 뵈어요!

    그렇게 루크가 레니에의 인사를 받으며 침대로 돌아가려던 루크는 순간, 무언가가 떠오른 듯 고개를 들었다.

    “아, 잠깐만. 레니에.”

    -네? 뭔가 필요하신 거라도?

    “아니, 그건 아닌데.”

    루크는 방 안의 인챈트를 이용해 손짓으로 공간을 열었다.

    6서클을 새긴 뒤로는 좌표값 교란식을 이용해 언제 어디에서 보관한 물건이든 꺼내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미 공간인챈트가 된 방 안이라면 별그림자와 같은 매개체가 없어도 손쉽게 물건을 가져올 수 있게 되었다.

    뭐, 아린세이아로 공간이동까지 가능한 시점에서 대단한 능력인 것은 아니지만.

    루크는 가볍게 미소지으며 생각했다.

    ‘그래도, 이것 때문에 레니에에게 열어달라고 부탁하기엔 부끄럽지.’

    그렇게 공간 속에서 루크가 꺼내온 것은, 다름아닌 ‘다 마신 우유병’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첫눈의 결정이 담긴 우유병이라고 해야겠지.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쩔수가 없었다.

    그런 기억이 떠올랐으니까.

    어쩌다보니 무심코 담게 되더라.

    루크는 레니에의 마석이 올려진 테이블 위에 우유병을 툭, 하고 올려 두며 말했다.

    “온천에서 첫눈이 왔었다네. 보고 있으니 생각이 나서.”

    -…….

    그에 레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말을 하지 않으면 표정이 안 보이니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만은, 싫어하는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맘에 드는 모양이지?”

    -음, 약간은요.

    “다행이군. 그럼 나는 이만 정말로 자러 가겠-.”

    그가 말을 끝맺기도 전, 루크의 입에서 하품이 튀어나와 그의 말을 끊었다.

    그만큼 졸음이 쏟아진 것이리라.

    “흐아암……. 그럼, 아침에 보세나.”

    그렇게 루크는 크게 하품을 하며 침대로 향했다.

    그 때,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리브가 레니에의 마석에 다가와 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인형이라 표정이 변하지 않음에도 느껴지는 분위기가 마치, 거기서 무얼 하고 있냐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에 레니에는 작게 목소리를 내었다.

    -쉿.

    “…….”

    그 소리에 리브는 얌전히 자리로 돌아갔다.

    그건 여왕의 명령이었으므로.

    병 속에 담긴 눈송이가 반짝거렸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정말로.

    다들 많이 귀여워진 것 같아 보기 좋네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루크에게는 쉿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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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다시 대마법사를 꿈꾼다 대마법사였던것은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5000 Years in the future, the Archmage Luke Irushi opened her eyes again. The world has changes so much.

Horseless carriages, an entertainment box with audio and video, food and spices she has never seen before…

And, a changed magical system!

It wasn’t just the world that chan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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