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5화. 큰 힘에는 큰 책임이… ( 3 )
왱알왱알.
화면 가까이 날아온 유니콘 아주 작게 속삭인다. 귀를 기울여 녀석의 이야기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반문했다.
– 《……허?》
곧장 말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다른 녀석들의 반응을 살필 시간도 없다.
게임을 종료하고 손가락 끝에 별빛을 모아 균열을 열었다. 쩍 갈라지는 허공을 넘어 성큼성큼 모래사장을 밟았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어쩐 일로…?”
“오늘은 조금 이른 시간에 오셨네요?”
한가롭게 쉬고 있던 케넬름과 리아가 벌떡 일어나 곁으로 다가왔다. 평소였다면 살갑게 인사라도 해줬겠지만, 지금 내 머릿속은 유니콘에게 들었던 말이 가득했다.
– 《감히 아뢰옵니다. 차원의 틈에서 상서롭지 못한 것을 발견했기에 말씀드립니다.》
유니콘이 전한 소식은 꽤 심각한 사안이었다.
‘차원과 차원의 틈에 커다란 땅굴이 생긴 것 같다고 했지.’
차원과 차원의 틈에 존재하는 허무.
그 자체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진공이라는 말조차 붙일 수 없는 무의 세계.
그런 공간에 땅굴이 생겼다?
그것도 아물지를 않는다고? 차원은 항상 본래의 형태를 유지하려는 성질이 있는 거 아니었나?
“…이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나의 지혜 주머니들, 리아와 케넬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둘은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일단 저는 그런 경우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애초에 선배님이 모르신다면 저도 모르는 게 당연하지만….”
“차원의 틈에 땅굴이 생긴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그곳에 뭔가 살고 있어서 땅굴을 팠다는 것 같은데.”
차원의 틈에 생명체가 산다…?
그게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케넬름과 리아는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고, 나 역시 둘의 의견에 동의했다.
“애초에 차원의 틈은 아무것도 없는 허무의 공간입니다. 모든 것의 근간이 되는, 심지어 영혼을 이루는 별빛조차 허무에서는 매개체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당장 생각나는 유일한 용의자가 있다면, 내가 직접 차원의 틈으로 던져버린 카르타할 정도?
황금 나무의 신성을 빨아먹고 인간의 몸으로 내 곁에 서겠다고 지랄 발광을 한 카르타할은 내가 차원의 틈으로 던져버린 유일한 생명체다.
아직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아직까지 잘 살아있겠지? 죽었으려나?’
차원의 틈은 별빛이 없는 곳이라서 영혼이 무너져 죽었을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아, 내가 미치지 말라고 머리에 별빛을 아주아주 약간 심어줬으니 안 죽었을 수도 있겠네.
신성을 빼앗기고 평범한 인간이 되어버린 카르타할이 차원의 틈을 파먹고 다닌다….
이런 모습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아마 다른 이유가 있겠지.
“일단 저와 리아가 자세히 조사를 해보겠습니다. 당장 생각나는 유력한 이유는… 차원 간 알 수 없는 압력이 기묘한 결과를 유도해서 땅굴이 생겼다는 것 정도인데.”
“저도 선배님도 차원에 대해서는 잘 알지를 못하거든요. 일단, 최선을 다할게요.”
“응. 나도 한번 찾아볼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찾아보려니까 막막했다.
차원의 틈은 내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공백의 땅이다.
일단 너무 좁다.
벽이랑 장롱 뒤에 존재하는 작은 틈 같은 느낌이랄까.
거기에 허무뿐인 공간이라 별빛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어려웠다.
‘그냥 차원의 틈으로 가는 균열을 열고 눈으로 보는 것 정도는 가능한데, 그 이상은 어렵단 말이지.’
예전에는 별의 거인일 때에도 차원의 틈에 손을 넣기 버거웠는데, 요즘은 그냥 인간의 모습으로도 손을 넣을 수 없다.
아마 연옥을 만들기 전까지 꾸준하게 성장한 내 힘이 이유겠지. 내가 더 커져서 장롱의 틈 사이에 손을 넣기 힘들어진 거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한다…?”
대악마를 전부 처리하니까 또 이런 문제가 튀어나오네.
“음.”
일단 차원의 틈을 모니터링이라도 해볼까.
균열을 열어서 차원의 틈을 보는 건 문제가 없으니까.
짝.
손에 별빛을 두르고 박수를 쳤다.
수백 개에 달하는 균열이 열리며 각기 다른 차원의 틈을 비췄다.
수백 개에 달하는 균열을 연 것까지는 좋았는데, 내 눈은 고작 두 개라서 하나하나 살펴보는데 눈이 어지러웠다.
잠시 고민하다가.
짝.
다시 박수를 쳤다.
이번에는 몸이 커지며 별의 거인의 형태가 되었다. 이전과는 조금 다른 형태다. 내가 의도한 변화가 추가된 것이다.
“지금 도대체 뭐하시는ㅡ 꺄아아아악!”
발밑에서 리아가 찢어질 듯 비명을 질렀다. 얼마나 놀랐는지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두 손을 덜덜 떨었다.
《많이 징그럽나?》
뒤늦게 다가온 케닐름이 한 손에 장도리를 꼭 쥔 채 리아를 감싸 안았다.
사색이 된 얼굴로 나를 원망스럽게 째려봤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시나요!!”
끔뻑끔뻑.
몸 곳곳에 자라난 수백 개의 눈동자를 무안하게 깜빡였다.
…수백 개의 균열을 전부 모두 모니터링하려면 이게 제일 효율적인 방법이었단 말이야.
* * * * *
순백.
하얀색.
흰 공간.
그저 모든 것이 하얀색으로 가득한 공간을 둥둥 떠다니는 작은 점 하나가 있었다.
카르타할이다.
그의 외형은 앙상하고 빼빼 말라서 뼈 위에 가죽을 덮어 놓은 형태였다.
머리와 수염이 가시덩굴처럼 자라서 온몸을 뒤덮었고, 눈은 꾹 감고 있기에 사체와도 다름이 없었다.
“………스ㅡ읍.”
아주 천천히. 가끔 내쉬는 호흡이 아니었다면 죽었다고 생각했으리라.
아니, 어쩌면 이미 죽어있을지도 모른다.
카르타할의 정신은 아주 오래전에, 멈춰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생각을 멈추고, 시간 헤아리기를 멈췄으며, 그저 멈춰버렸다.
미쳤다는 것은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카르타할은 미치지 않았다. 미칠 수 없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쩌적ㅡ
수년, 어쩌면 수십 년 만일까?
실로 오랜만에 전해지는 외부의 자극에 죽은 듯 눈 감고 있던 카르타할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미치지 않는 정신이 환청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아…….’
쩌저적, 쩌적ㅡ
그렇다기에는 소리가 너무 뚜렷했다. 오랜만에 자극을 접한 고막이 몸을 뒤틀며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파르르르, 오랫동안 쓰지 않는 눈꺼풀 근육이 무겁게 흔들리며 간신히 눈을 떴다.
여전한 순백의 공간 속에서, 카르타할은 커다랗게 금이 간 균열을 볼 수 있었다.
‘…………저………건…….’
“……….”
뻐끔거리는 입술, 말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균열은 틀림없는 진실이었다. 환청이나 환각 따위가 아니었다.
‘……균열……!’
여기서 나갈 수 있다는 열망이 메마른 땅을 적시듯 차오르며 카르타할의 몸을 움직였다.
녹슨 관절이 삐걱거리며 비명을 지른다. 고통을 참으며 억지로 몸을 휘적휘적 흔들었다.
《흐음? 이건 또 뭔.》
커다란 균열 너머에서 시커먼 것이 휙 모습을 드러냈다. 빛 한 점 반사하지 않는 탁한 진흙 색의 비늘과 커다란 몸통, 쩍 벌어진 아귀.
차원의 틈을 유영하며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데보라였다.
“………! …………!”
카르타할은 눈앞에 있는 것이 거대한 물고기 악마든, 그냥 커다란 물고기든, 무엇이라도 좋았다.
무엇이라도 자신의 앞에 말을 하는 존재가, 말이 통하는 존재가 나타났다는 것이 중요했다.
카르타할이 열성적으로 팔다리를 휘적거렸다. 말을 할 수 없으니 몸짓으로 제 의사를 전달하고자 했다.
‘나갈… 수 있다……!’
나갈 수 있다. 이 지옥 같은 공간에서 나갈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신의 영향이 닿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복수를ㅡ!
《별 희한한 공간에 이상한 녀석이 다 있군.》
텁.
데보라는 유유히 헤엄쳐서 카르타할을 한입에 꿀꺽 삼켰다.
그걸로 끝이었다.
커다란 입 안에서 카르타할의 여린 몸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억센 이빨 사이에서 퍽, 머리통이 터져나갔다.
《……으음?》
그와 동시에 입 안에서 아주 약간의 별빛이 피어오르다가 휙 증발해버렸다. 눈알갱이처럼 작은 크기의 별빛이었다.
《영문 모를 녀석이군. 이런 좁은 틈에 있지를 않나, 아주 조금이지만 몸 안에 별빛이 있지를 않나.》
아주 작은 크기였지만 별빛은 별빛.
그것을 머리통에 넣고 있었기에 차원의 틈에서도 죽거나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던 걸까?
《제힘으로 이런 곳에 들어올 수 있는 녀석은 아닌 것 같단 말이지.》
차원의 틈은 데보라에게도 무척이나 흥미로운 공간이었다.
거의 평생 동안 차원의 틈을 누비며 살았지만, 아직도 완전히 알지 못한다.
차원의 틈을 돌아다니는 매 순간이 새로울 지경이다.
방금 먹어버린 인간처럼, 생각지도 못한 것을 만날 때도 많았다.
《흐흐. 흥미로워. 인간의 신체에 극소량의 별빛이 있으면 차원의 틈에서도 버틸 수 있는 건가?》
무심코 먹어버린 것이 후회될 정도다.
데보라는 아쉬운 입맛을 쩝쩝 다셨다.
《뭐. 인간이 별빛을 가질 수 있을 리는… 없나.》
큼직한 지느러미를 휘적 흔들어 허무를 유영했다. 큼직한 아가리를 벌려서 허공을 와작, 한 입 깨문다.
차원의 틈이 데보라의 입 모양으로 찢겨나가며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렸다. 그 틈으로 데보라의 몸이 유연하게 구겨지며 파고들었다.
우걱우걱.
차원의 틈을 파먹는 데모라의 입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지나간 자리를 따라 지렁이의 땅굴처럼 길게 구멍이 파였다.
《프흐흐흐흐. ■ 녀석…. 지금을 마음껏 즐겨둬라.》
데보라는 자신이 ■에게 비빌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비유하자면 바위산에 부딪히는 계란. 혹은 바다에 뛰어드는 멸치 한 마리.
그렇기에 데모라는 나름의 꾀를 부렸다.
사악한 지혜 주머니를 풀어 ■에게 간접적으로 피해를 주고자 한 것이다.
우걱우걱.
지금처럼 열심히 차원의 틈을 파먹는 것 또한 데보라가 그리고 있는 거대한 그림의 일부였다.
일부러 지상에서 가까운 차원 주변을 돌아다니며 차원의 틈을 파먹다 보면 언젠가 분명….
아무튼 데보라는 밤낮 가리지 않고 열심히 차원의 틈을 파먹었다.
《……?》
열심히 차원의 틈을 파먹던 데보라의 아가리가 멈췄다.
시선이 느껴졌다.
거대하고 위대한 시선.
온몸의 것들이 비명을 지르며 피를 토하는 이 기분.
피부 아래로 얼음이 흐르는 듯하며, 전기가 통하는 듯 소름 돋는 이 기분!
데보라는 이 기분을 언젠가 겪은 적이 있었다.
■
데보라의 썩어버린 심장이 멈췄다.
멈췄다고 느꼈다.
《찾 았 다》
소리 없이 균열이 열리더니, 데보라를 통째로 삼킬 듯 거대한 균열이 열리더니.
그 균열 너머로 커다란 눈동자가 이글이글 불타는 동공으로 데보라를 내려다보는데.
《흐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아!!》
데보라가 비명을 지르며 곧장 몸을 돌려 도망쳤다.
그 앞을 가로막듯 커다란 균열이 쩍 벌어졌다.
그런 것이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는 것이 무력할 정도로.
거대한 균열이 증식하듯 데보라의 주변을 뒤덮으며 수십에서 수백 개의 숫자로 늘었다.
무시무시한 눈동자도 수백 개로 증식하며 모두 데보라를 노려보며 천둥 같은 목소리로 외치는 것이.
《찾 았 다!》
데보라가 기겁하며 차원의 틈을 미친 듯이 헤엄쳤다.
《으아아아아아아아!! 흐아아아아아아아아악!!》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야말로 떠먹여주는 변명거리…!! 넙죽 받아먹은 주인공…!! 참 보기 좋게 훈훈한 신과 신도들의 모습이군요…!! 거기에, 아직 ‘아무것도’ 안 한? 데보라!! 좆되다!!! 그야말로 일가실각의 위기!! 과연 데보라는 이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인가…??!! 굳세어라 데보라!! 살아라 데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