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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45

    화창한 하늘, 언덕 위의 나무, 그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수많은 사람들과 지붕들.

    익숙한 풍경이었다.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이면 루크는 종종 영지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앉아 책을 읽고는 했다.

    이 장소는 날씨가 좋으면 시야가 탁 트이기에 영지민들이 어떻게 사는지 확인도 할 수 있고, 마력도 영지 근처에서 얻을 수 있는 것 치고는 꽤나 정순한 편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며칠 전에 비하면 영지민들의 표정은 꽤 살아난 모습이었다.

    가장 큰 이유라면 역시, 며칠 전에 내린 비 덕분이려나.

    긴 가뭄 끝에 내린 단비는, 그들에게는 드디어 고생이 끝났다는 신호가 되었을 테니 말이다.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행복해보이네요.”

    그 목소리의 주인은 붉은 머리칼을 늘어트린 여성.

    그녀는 이전에 본 적 없는 복장을 입은 채로 루크의 곁으로 다가와 나무에 기댔다.

    루크는 그 소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맙소사. 레니에, 대체 그 꼴은 뭔가?”

    “이거 말인가요? 동대륙의 의상이라던데요. 예쁘죠?”

    “아니, 내 말은 그 옷차림의 정체를 물은 게 아닐세. 대체 왜 그런 되도않는 폴리모프를 하고 왔냐는 말이네.”

    루크는 레니에의 모습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전에 본 적이 없는 기이한 옷차림은 둘째 치고서라도, 그녀가 성숙미가 물씬 풍겨져 나오는 그 모습은 대체 무얼 위해 갖추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그녀는 대외적으로 위엄을 내보여야 할 때라던가, 모종의 이유로 변장을 해야 할 때에 종종 폴리모프를 이용해 모습을 바꾸곤 했다.

    물론 그녀 스스로는 마법을 쓸 수 없었기에 그 마법을 시전하는 쪽은 언제나 다른 마법사들이 되어야 했지만.

    레니에의 이런 모습을 보니, 또 어디서 도망쳐온 것이 뻔했다.

    “하아…….”

    그래도, 이번엔 그럭저럭 어색한 부분은 없군.

    “그래도 이번엔 썩 괜찮은 폴리모프군. 누굴 시켰나?”

    “글쎄요? 제가 했는데요.”

    “허. 농담도.”

    레니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하긴, 그게 당연하겠지.

    말해주어서 그가 경계받게 되면 다시는 그 마법사에게 폴리모프를 부탁할 수 없게 될 테니까.

    대답은 기대도 안 했다.

    그러자 레니에가 주제를 바꾸려는 듯 싱긋 웃으며 말을 돌렸다.

    “무슨 책을 읽고 계신가요, 루크님?”

    “책?”

    루크는 고개를 내려 자신의 손에 들린 책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손에 들린 책.

    그래, 항상 책을 읽으러 오는 언덕이었으니, 루크의 손에 책이 달려 있는 것은 이번에도 당연한 일이었다.

    왜 몰랐을까?

    그러나 레니에의 ‘무슨 책을 읽고 있냐’는 물음에 루크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들고 있는 책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음?”

    루크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며 자신의 손에 들린 책을 들여다 보았다.

    책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천리를 부순 그대에게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저주를, 모든 것들의 경멸을, 채워질 수 없는 상실을, 그리고 영원마저 초월한 비참한 죽음을.

    “……?”

    이해할 수 없는 구절, 하지만 그 구절에 담긴 끈적한 저주의 말들은 퍽이나 불쾌했다.

    당장 책을 덮어버리고 말았을 정도로.

    ‘이게 도대체 무슨 책이지?’

    책의 제목이나, 하다못해 그 저자라도 알아내기 위해 책의 표지를 보았지만, 책의 표지에는 그저 무언가 나무 문장의 화려한 장식만이 되어 있을 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여러모로 실속이라고는 전혀 없는 책이군.

    읽은 이에게 저주를 내리는 마도서였을까?

    그런 것 치고는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고, 글귀도 딱히 마법적이지는 않았다.

    마법서보다는 오히려 성서에 가까운 듯한…….

    루크는 결국 인상을 크게 구기고 말았다.

    아니, 자신이 당최 이런 걸 왜 들고 있었을까?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별로 재미있는 내용은 아니었나 보네요.”

    루크의 구겨진 표정을 바라보던 레니에가 루크의 손에서 책을 가져가 떼어놓으며 말했다.

    “재미없는 거면 이리 치우고, 저희 이야기나 해요. 좋은 날이잖아요?”

    “그래, 차라리 그 편이 더 즐거울 것 같군.”

    “정말요?”

    루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레니에는 마치 오랫동안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루크님. 당신의 생각에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말해보게.”

    “만약 원본이 완전히 사라진 세계라면, 복제품은 정말 원본이 될 수 있는 걸까요?”

    “음?”

    기껏해야 무슨 꽃이 제일 예쁜가 정도의 질문이 들어올 것이라 생각했던 루크는 레니에의 질문에 꽤나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건……. 도플갱어의 역설인가?”

    “비슷하죠. 어때요?”

    ‘재미있는 주제 아닌가요?’라는 듯이 웃으며 다가오는 레니에의 얼굴에 루크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긴, 자신도 어떤 꽃이 예쁜지, 어떤 가게의 과자가 더 맛있는지 등에 대하여 대답하는 것보다는 이 쪽이 훨씬 더 관심이 가는 주제이기도 했다.

    그런가, 원본이 사라진 복제라.

    “흠…….”

    그 질문에 대한 본질은 사실, 원본과 복제를 나눌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인가 묻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마족, 도플갱어의 특성은 원본의 성질을 아주 정확하게 베껴낸다.

    지금은 비록 마계의 마나 아래에서만 그 형체를 유지할 수 있지만, 이후에는 그 변화무쌍한 특징점을 이용해 또 어떻게 적응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도플갱어가 인간으로 둔갑하여 이미 사회에 섞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은, 이미 마계침식 초기부터 큰 논란이 되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사람들은 원본과 복제를 나눌 수 있는 기준을 명확히 하고 싶어했고, 그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 수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도플갱어의 역설은 급기야, 이런 식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만약 누군가의 몸의 부분 부분을 잘라낸 다음 회복시키고, 떼어낸 부위들을 조립해 인간을 만들어 살려낸다면, 여기서 원본은 누구인가? 원본에 해당하는 영혼은 과연 어느 쪽이 차지하게 되는가?’

    마법사들 사이에서 그것은 꽤 생각해 볼 만한 질문이었다.

    지금의 마법기술로는 실험으로 증명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으흠.”

    이것에는 꽤 많은 주장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었다.

    당연히 계속된 시간대에서 연속적으로 살아있었을 쪽이 원본으로서 작용한다는 파.

    만약 새로 만들어진 쪽이 복제라면, 오히려 몸에서 잘라낸 쪽이 결국 원본이니 원본으로서 작용한다는 파.

    그 두 주장 모두 논리에 큰 모순점이 없어 의견의 차이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지.

    그런데, 루크는 사실 그 질문에 별 생각이 없었다.

    “글쎄, 어느 쪽이든 생각하는 사람 마음 아닐까?”

    “네?”

    “그야, 실존은 본질에 앞서는 법이니까.”

    그래, 여신에게 용사로 간택받지 못했음에도 영웅이 된 자신과 케일처럼.

    “어느 쪽이든, 자신을 원본이라 주장하고 똑같이 행동하면 달라지는 건 없다고 생각해.”

    만일 자신의 복제가 있다고 바뀌는 게 있다면, 기껏해야 마음가짐 밖에 더 있겠는가?

    결국 그 사람을 그 사람으로 남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고자 하느냐가 될 것이다.

    그러니 논쟁은 무의미하다.

    그런 건 타인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하는 거니까.

    “…….”

    그 말을 들은 레니에는 흐뭇하게 미소짓다가, 돌연 루크의 곁으로 불쑥 다가오며 귓속말을 건넸다.

    “당신이라면 역시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흐익-!”

    갑자기 등줄기를 타고 내달리는 소름끼치는 감각에 루크는 화들짝 놀라 묘한 신음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소리에 놀란 것은 다름아닌 루크 바로 자신이었다.

    그 소리에 자신이 놀라 입을 쥐었을 정도로.

    ‘대체 이게 무슨 감각이지?’

    생전 이런 감각은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루크는 혹시 레니에가 무슨 마법이라도 쓴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담아 그녀의 얼굴을 마력시에 담아보았지만, 별다른 마력흔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고보니 레니에가 자신에게 귓속말을 건넬 때, 얼굴의 위치가 위로 크게 어긋나 있지 않았나?

    나는 그게 왜 귀라고 생각했지?

    이상하다.

    그렇게 루크가 제 입을 막고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레니에는 그 모습이 너무나 우습고 재미있어서 파핫,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하하하! 정말 귀엽다니까요.”

    “……?, ?”

    귀엽다?

    내가?

    그게 대마법사인 자신에게 정말로 연관지을 수가 있는 형용사란 말인가?

    레니에의 취향은 역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루크가 가만히 눈을 깜빡거리고 있을 무렵.

    “이건 저도 못 참아요.”

    -쪽.

    이마에 느껴지는 촉촉하고도 말캉한 감각.

    갑자기 고통스러울 정도로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한 심장과 서클에, 루크는 크게 당황하며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 횡설수설하며 외쳤다.

    “이, 이건 무슨 짓인가! 마음에 둔 남성도 이미 있는 여인이! 그렇게 값싸게 입술을-! 그래! 그대는 케일에게 미안하지도 않나, 이런 짓을 하면-!”

    레니에는 케일을 좋아하고 있으니, 이런 짓을 했다간 케일을 볼 면목이 없어지고 만다.

    루크는 이런 일로 케일과의 관계를 부수고 싶지 않았다.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너무 많았으니까.

    그러자, 레니에가 말을 이었다.

    “아뇨, 그게 케일이 아니라 당신이라고요.”

    “뭐?”

    “다시 말해줄까요? 저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요, 루크 이루시.”

    항상 케일과 함께 단 둘이 시장을 다니며 즐겁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둘이서 공연등을 보고 돌아와서 기념품으로 꽃을 사오던 레니에의 모습을 떠올린 루크는 그게 대체 무슨 헛소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그러자 레니에는 조목조목 따지고 드는 듯이 입을 열었다.

    “여성이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꽃을 선물할 거라고 생각해요? 바보. 다 당신 주려고 같이 고민해서 골라온 거라구요. 케일은 당신을 곁에서 가장 오랫동안 봐온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당신은 별 이유가 없으면 아예 방에서 나가려고 하지를 않으니까.”

    그러자 루크는 어딘가를 크게 한방 얻어맞은 사람의 표정이 되었다.

    “뭐? 둘이 계속 함께 다닌 게, 그게 나 때문이었다고?”

    그러자 레니에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래요, 이제야 좀 이해가 되세요? 그게 다 착각이었다고요.”

    어떻게 사람이 착각을 90년동안 할 수가 있는지!

    자신을 끝까지 여성으로 보지 않은 게 그런 시덥잖은 이유였을 줄은 정말 상상도하지 못했다.

    그렇게 툴툴거린 후, 레니에는 홱 하고 몸을 일으키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빛을 향해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루크는 그 뒷모습에 손을 내뻗으며 외치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자, 잠깐. 기다려! 레니에!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레니에-!” 

    ‘잠깐, 내 손은 또 왜 이렇게 둥글어?’

    그 순간, 눈앞의 광경이 뒤바뀌었다.

    —–

    -루크님, 일어나실 시간이에요.

    루크가 눈을 떴을 때.

    그렇게 멀어지던 레니에는 어디로 가고, 손도 닿지 않는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모빌만이 루크의 눈 앞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시야 끝에는 리브를 닮은 곰돌이 인형 하나가 큼직한 보석 목걸이를 찬 채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레니……에?”

    리브를 닮은 곰인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예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성녀를 통한 여신의 계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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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다시 대마법사를 꿈꾼다 대마법사였던것은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5000 Years in the future, the Archmage Luke Irushi opened her eyes again. The world has changes so much.

Horseless carriages, an entertainment box with audio and video, food and spices she has never seen before…

And, a changed magical system!

It wasn’t just the world that chan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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