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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47

    <447 – 간절한 시간>

     

    남부 신성도시국가연맹.

    만신들이 한 뼘의 땅을 두고 다투는 이 땅을 누군가는 패배자들의 땅이라고 말한다.

    유일신 <태양의 소페미아>에게 밀려 광대한 제국의 땅은 차지할 엄두도 못 내는 잡신들의 무리.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 않아~?”

    “아가씨, 제발 체통 좀 지키세요. 제국출신 교수 아버지를 두셨다고 남의 나라에서 그 나라 욕을 하고 다니면 밤에 칼 맞기 십상이라고요.”

    “치. 어차피 이런 촌동네는 밤에 놀러 갈 곳도 없네요. 그놈의 금기실험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지 몰라. 아~ 아. 나도 사교계에 데뷔하고 싶었는데.”

     

    꽃다운 나이에 제국무도회에서 잘생긴 남자들과 춤을 추는 대신, 취급주의 푯말이 가득 달린 배양시설에서 허브나 재배하는 방년의 미녀, 하비.

    그녀에게는 당연히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기프트 아카데미 입학이 뭐라고 이렇게 까지 하는 거람?”

    “세계제일의 교육기관이잖아요. 교수님께서도 분명 아가씨가 훌륭한 교육을 받으시길 바라는 마음에 성과를 내어 특례입학을 하길 바라시는 거예요.”

    “한스는 누구 시종인지 몰라. 나야, 아빠야?”

    “저야 돈 주는 사람 시종이죠.”

    “최악~.”

     

    거짓말이다.

    아무리 많은 돈을 불러도 제국에서 일하는 시종과 변방에서 일하는 시종은 위치가 다르다.

    머슴살이도 대감집에서 하라는 말마따나 잘 나가는 제국수도가문의 시종은 누리는 권력도, 주변사람의 대우도 천지차이다.

    혼삿길을 찾는 것도,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는 것도 제도帝都에서라면 인생난이도가 월등히 내려간다.

    가문 따위, 충성할 대상 따위 바꾸면 그만인데.

    그런데도 이 충직한 시종 한스는 정 때문에 자신을 따라 풀떼기밖에 없는 곳까지 내려왔다.

     

    ‘한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런 마계종 튤립 따위, 재배에 성공한다고 아카데미 입학은 어림도 없을걸.’

     

    제국에 머무르던 당시, 그녀는 우연한 기회로 아카데미 겨울방학에 휴가를 나온 재학생과 마주칠 기회가 있었다.

     

    -밥은 몇 끼나 굶을 수 있어?

    -귀여운 토끼 목은 비틀어 뽑을 수 있어?

    -무장강도가 나타나면 시종이나 호위의 도움 없이 혼자서 칼싸움으로 몇 명까지 제압해?

     

    아카데미에서 요구하는 소양에 연구자로서의 역량이나 귀족아가씨로서의 소양은 없구나.

    영민한 하비는 질문들만 듣고도 아카데미에서 요구하는 인재상의 실체를 깨달았다.

    교수인 아버지라고 모를 리가 없다.

     

    ‘내 장래를 핑계 삼아 깡촌까지 데려왔지만 전부 핑계였던 거야. 연구의 성과로 득을 보는 건 아버지뿐. 나는 혹시나 연구성과물을 노리는 경쟁자의 손에 납치당해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안전한 곳에 숨겨두었을 뿐인 존재.’

     

    사교계에 데뷔시키지 않은 이유도 짐작이 간다.

    연구에 성공하고 제국에 하비스트 교수의 이름값이 다시 높아지거든 그 명성에 힘입어 지금보다 훨씬 높은 위치의 권세가에 혼인을 치르려는 거겠지.

    소위 말하는 어른들의 사정이다.

     

    “차라리 망나니처럼 떼라도 쓰면서 제도에 머무르겠다고 버틸 걸 그랬나?”

     

    아버지의 권력욕이란 결국 긴 역사에 이름 한 줄이나 겨우 남긴 수많은 연구가들과 다를 바 없다.

    우연찮게 성과를 내어 분에 넘치는 권력을 손에 쥐고, 그 실체가 드러나 자리에서 쫓겨나고도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발버둥 치는 자.

    권력이라는 이름의 독에 중독된 권력중독자들의 말로란 다들 이 모양이다.

     

    “정말 동화책 속 왕자님이라도 나타났으면 좋겠네.”

    “그럼 저 같은 남자는 어떠십니까?”

    “…누구세요?”

    “하비 양의 아버님과 거래를 트러 온 상인입니다.”

    “돌아가세요. 마계종 튤립 따위, 심어봤자 대단한 효능도 없어요. 땅을 마계화시키는 토양오염의 효과는 품종개량으로 없앴지만 그뿐이라고요.”

    “그래서 더 좋은 겁니다.”

     

    마계의 꽃을 인류가 정복했다.

    그런 승리의 상징으로나 소비되었던 마계종 튤립.

    하베스트를 제국교수로 만들고 또 실각시켰던 꽃의 무어가 그리도 좋은 걸까.

     

    “제가 파는 상품은 혁명. 실속이 없기로는 하비 양의 아버님의 튤립 못지않거든요.”

     

    제국의 황제도, 변방의 국왕들도, 신성도시국가연맹의 수많은 시장들도 사용을 포기한 이색튤립을 혁명군이 혁명의 상징으로 삼겠다.

    별난 사람의 사치라고 여기기엔 혁명군의 규모가 정말 대단했다.

     

    “왕자님은 무슨. 당신은 정말 끔찍한 악인이네요. 그놈의 혁명 때문에 제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하세요?”

    “필요한 희생이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단지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저는 제국과 달리, 그 누구에게도 죽음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공포를 팔아 힘을 얻는 마계령 마왕국.

    죽음을 팔아 힘을 얻는 신성중앙제국.

    그런 족속들이 세계의 거대세력으로 군림하는 마당에 혁명을 팔아 힘을 얻는 혁명군이 대수일까.

    그를 향한 반감은 점차 사라졌다.

    원치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영민한 지혜를 물려받은 하비는 남자, 혁명가의 입장을 깨달았다.

     

    ‘벼랑 끝에 내몰린 하이에나야.’

     

    혁명의 불씨가 줄어드는 순간, 혁명은 실패한다.

    그를 지켜줄 인의 장벽이 조금이라도 헐거워지는 순간, 제국이 그의 숨통을 끊는다.

    그런데도 그가 살아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

    제국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모든 이들이 혁명가를 지지하고 후원하기 때문이다.

     

    “아가씨, 도망칩시다.”

    “한스?”

    “부친께서 기어이 선을 넘으셨습니다. 혁명군과의 거래는 제국의 적이 되는 지름길입니다. 부친의 욕망에 아가씨가 희생되도록 둘 수는 없습니다.”

     

    시종 한스의 도피권유에도 하비는 처연히 웃었다.

     

    “도망치면 어디로 가게?”

    “서부삼국으로 떠납시다. 왕국의 힘이 강성한 그곳에는 제국의 혁명군도, 제국의 힘도 닿지 않습니다. 그간 모아온 제 혼수자금을 사용하면 저와 아가씨 두 사람이 떠나서 정착할 비용은 충분합니다.”

    “몸이야 그렇게 떠날 수 있겠지. 마음은 달라. 아무리 쓰레기 같은 나라라도 나고 자란 고향은 쉽게 버릴 수 없어.”

     

    하비는 깨달았다.

    이 척박한 시골까지 자신이 내려와야만 했던 이유.

    그것은 이 순간을 위해서라고.

     

    “아버님이 판매할 튤립을 바꿔치기하겠어. 제국에 해를 끼칠 수 없는, 완전히 무해한 튤립으로.”

     

    식물을 무기화하려는 부친과 혁명군의 움직임을 하비는 방관할 수 없었다.

     

    “꼭 그러셔야만 합니까? 아가씨의 노력은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겁니다.”

    “자랑스러운 소꿉친구가 알아주잖아. 세계제일의 도적, 용사파티의 든든한 동료, 디스트로이어가.”

     

    한스는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어린시절부터 아가씨를 모신 10년의 세월로도 디스트로이어 님과의 추억을 넘어서기엔 부족했군요.”

    “기특하지? 요즘 같은 세상에 지고지순한 순애파 소꿉친구라니. 실제로는 아버지의 욕심 때문에 혼삿길도 막히고 연애도 못 하는 처지일 뿐이지만. 히히.”

    “…제게 정녕 기회는 없는 겁니까?”

    “미안해, 한스. 네 마음은 알지만 이만 떠나줬으면 좋겠어.”

    “제가 마음을 드러내어서 그런 겁니까? 그렇다면 다시는 아가씨에게 이 몹쓸 마음을 내비치지 않겠습니다. 무덤까지 이 마음을 묻어가겠습니다!”

    “그런 게 아니야.”

     

    하비는 신비로운 형광빛을 뿜어내는 튤립들을 바라보며 과거를 떠올렸다.

    한스와의 시간은 잔잔하지만 행복한 나날이었다.

     

    “한스가 나를 아껴주듯이 나도 한스를 아끼기 때문이야. 이런 위험한 곳에 한스까지 머무를 필요는 없어. 열심히 모은 혼수자금이잖아? 써보지도 못하고 죽으면 곤란하다고.”

    “아가씨…”

    “어서 가. 아버님이 눈치 채기 전에. 심부름을 보냈다고 하면 열흘은 따돌릴 수 있어. 그 틈에 갈 수 있는 최대한 먼 곳으로 떠나야해. 알았지?”

     

    직전까지와는 다른 의미의 눈물을 흘리는 한스의 머리를 하비는 상냥하게 어루만져주었다.

     

    “그래도 영영 잊어버리지는 말고 가끔은 편지도 써줘. 알았지? 피렌체 왕국은 미녀가 많기로 유명하던데 결혼하면 아내 이야기도 해주고.”

     

    한스는 결국 튤립농장을 떠났다.

    하비는 홀로 바람에 흔들리는 튤립들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한스를 그냥 보내주셔서.”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혁명군의 묵인이 없었다면 한스는 떠나지 못했겠죠. 이런 척박한 시골에서 아버님이 심어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떠나기란 불가능에 가까우니.”

    “얕은 계산이었을 뿐입니다. 혁명군의 인파에 섞여 시종 분을 떠날 수 있도록 돕는 편이 하비 님에게 점수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튤립파동, 제국을 발칵 뒤엎을 대사건이 벌어지기까지 불과 6개월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 * *

     

     

    디스트로이어는 이야기를 끊고 마나보드를 펼쳤다.

     

    “중간고사, 그 두 번째 문제다. 한스는 튤립농장을 떠난 뒤에 어떻게 되었으리라 생각하나.”

     

    후에 일어날 재난을 아는 입장에서 이슈타르는 감히 낙관적인 전망을 내다볼 수 없었다.

     

    “살해당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혁명가가 솔직하게 약속을 지킬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10점이다. 네 우직한 편견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구나. 과거의 내가 그랬듯이.”

    “…”

     

    이슈타르의 뒤를 이어 버서커 헤스티아가 덤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가씨의 소망대로 새 삶을 살다가 훗날 일어난 사건을 듣고 자살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유는?”

    “현역에서 은퇴한 용병들도 전우들의 비극을 듣고 극단적인 선택을 저지르는데 귀족가의 곱게 자란 시종이 순정을 바친 여인이 얽힌 비극을 견뎌내지는 못했을 거라고 봅니다.”

    “50점이다. 한스, 녀석이 견뎌내기에 벅찬 사건이었다는 점에서는 틀리지 않았지.”

     

    마지막으로 오크노디가 손을 들었다.

     

    “정답! 하비라는 분이 디스트로이어 교수님의 소꿉친구라면 한스라는 분도 동향출신이었겠죠?”

    “그렇다.”

    “그럼 혼수자금을 다 털어서 하비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디스트로이어 교수님을 찾아 나섰을 거라고 생각해요!”

    “조금은 인간의 마음에 눈을 떴군. 100점이다.”

    “와아! 백점이닷!”

    “…”

     

    그럼 난 재단의 다크프린세스보다도 인간의 마음에 눈을 뜨지 못했다는 거야?

    이슈타르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한스는 기어이 나를 찾아내었다. 모아온 돈을 다 털어서라도 나를 찾겠다는 집념이 내게까지 닿았지.”

    “한 사내의 10년이라는 시간을 모아온 전 재산이 내게 도달한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일국의 국왕조차 내가 원치 않으면 1분의 시간조차 빌릴 수 없는 시기였으니까.”

    “덕분에 하비에게 닥친 위험을 깨달았다.”

     

    디스트로이어 교수님은 이슈타르만큼이나 깊은 후회를 내비쳤다.

     

    “하지만 늦었다.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늦었지. 내가 그녀의 앞에 다시 섰을 때에는 모든 일이 벌어진 이후였으니.”

     

    삼대거악의 협력자 하비.

    전대용사 디스트로이어의 소꿉친구.

    교수님은 재회한 소꿉친구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한스가 떠나고 6개월 동안 벌어진 일들을.

    그 일을 우리는…

     

    “잠시 쉬지.”

    ‘…이 타이밍에?!’

     

    쉬는 시간이 끝나는 10분 뒤에 들을 수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학생의 휴식을 배려하는 친절한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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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아카데미 흑막의 딸이 되었다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From the side, she looks pitiful and worn out, but in reality, she’s living her joyful survival story in the world of games.

But how can someone’s name be Okno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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