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48

   “어쩌면 우리가 마지막 순간에 방송했던 것 때문일지도 몰라.”

   클레어는 그렇게 추측했다.

   “사람들은 CG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가 그 뒤로 방송하지 않고 있다는 건 사실이잖아. 그리고 내가 이쪽으로 와서 찾아봤는데, 우리 찍었던 방송국에서는 그 장면으로 뉴스까지 내보냈어. 내가 방송국에 전화하지 않았으면 경찰 수사까지 진행되었을지도 몰라.”

   엣헴, 하고 클레어가 가슴을 쭉 펴는데, 옆에 있던 레나가 물었다.

   “CG라는 건 무엇입니까?”

   “커, 컴퓨터 그래픽이에요.”

   미아가 그 질문에 대답했다.

   “영상 위에 세밀한 그림을 덧씌워서 실제로 없는 것을 있도록 만드는 걸 뜻해요.”

   “그렇습니까…….”

   레나는 조금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데, 그럼 레나가 넘어갔으니 레나 신분증도 나온 거야? 우리 신분증이 알아서 생성되었던 것처럼?”

   “여기.”

   클레어는 이번에도 바로 대답하면서 테이블에 신분증을 올려두었다.

   “……여신이 고생이 참 많을 것 같네요.”

   샤를로트가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소피아의 말에, 샤를로트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태어나서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신앙을 유지하며 지냈다면—”

   “어째서 피자 위에 이런 불경한 ‘과일’이 올라가 있는 거죠?”

   “…….”

   소피아의 진지한 분노에 샤를로트가 입을 다물었다.

   진짜 무서워서 다문 건 아닌 것 같지만.

   “애초에 이 과일은 대체 뭔가요? 왜 피자에 단맛이 나는 과일을 올리는 거예요?”

   “하와이안 피자라더라. 그리고 파인애플은 원래 새콤한 맛도 나는 과일인데, 이렇게 구워서 달게 만드는 거야.”

   클레어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 한 조각 들어 입에 물면서 말했다.

   “하와이에 사는 사람들이 문제였군요.”

   “만들어진 건 캐나다라더라.”

   “……어째서 캐나다라는 나라에서 만들어진 음식에 다른 나라 이름이 붙은 거죠?”

   굳이 따지자면 하와이라는 나라도 이젠 존재하지 않지만, 그걸 굳이 설명하려면 제국주의 시대의 광기부터 설명해야 하므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 그리고, 이거.”

   클레어는 거기서 더 사악해지기라도 하려는지 소피아에게 커피 캔 하나를 건넸다.

   “이건……?”

   “아메리카노야.”

   “아메리카노?”

   “에스프레소에 물 탄 거.”

   “…….”

   소피아가 얼어버렸다.

   “음, 이건 꽤 맛있는데! 로티 고향에서 먹던 거랑 비슷한 맛이야!”

   “정말이에요. 그리운 맛이네요.”

   “그건 진짜 인도인 아저씨가 하는 카레 집에서 시킨 거니까요…….”

   나는 제이크와 로티한테 대답하면서 이마에 손을 얹었다.

   아니, 진짜 정신이 없네.

   클레어가 자기 능력을 깨달았다는 걸 안 직후에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그 주 주말에 친구들을 싹 다 데리고 넘어올 줄은 몰랐다.

   그래, 그래도 선생님과 검성까지 데리고 오지 않은 건 다행인가.

   지금쯤이면 여신은 그야말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나를 이쪽 세상에 보낼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를 후회하고 있을지도.

   뭐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긴 하지만.

   누군가가 내 등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찔러서 뒤를 돌아보니, 로티와 같은 반인 릴리가 TV를 가리키며 말했다.

   “혹시 저런 건 얼마나 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대상인의 딸로서 피가 끓어오르기라도 하는 걸까.

   “……전기부터 확보해야 하므로, 그냥 저거 하나만 구매하는 것은 별로 소용이 없을 겁니다.”

   “그런 그 전기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아, 그러네. 이러면 아예 베이커 가와 손잡고 전기를 적극적으로 도입할 수 있을지도 몰라.”

   기술 혁명이 한 번 더 일어나겠네.

   나는 앨리스와 진지하게 사업 논의를 시작한 릴리를 그대로 두고, 그냥 피자나 먹자고 생각하며 손을 뻗었다.

   “그런 불경한 음식을 먹으려고 하시는 건가요!?”

   아, 쫌.

   *

   그렇게 일대 혼란이 지나간 뒤.

   나는 방 안에 모여앉아 있는 열 명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뭔가 명절에 친척들 모여든 것 같은 느낌이네. 그래도 아파트를 그럭저럭 비싼 곳을 구해서 다행이다.

   “다들 조금 진정하셨습니까?”

   내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그나마 로티와 제이크는 그냥 처음부터 조용히 즐기고 있었고, 레나는 집 안을 구경하느라 정신없었으니 뭐라고 할 이유는 없었다.

   “클레어.”

   “응.”

   “소피아한테 사과하십시오.”

   “미안.”

   아니, 그렇게 생글생글 웃으면서 사과하면 그게 사과냐고.

   솔직히 클레어가 그렇게까지 즐길 거라는 생각은 못 했다.

   ……설마 소피아가 레오 좋아하는 걸 알고 나서 일부러 그런 건가?

   시누이 모드라던가 그런 거?

   “……용서해 드릴게요.”

   그나마 다행히 클레어는 그럭저럭 전통적인 피자도 따로 시켜주었다. 거기에 에스프레소도 제대로 준비해두었었고.

   마냥 괴롭힌다기보다는, 지난번에 샤를로트가 보였던 모습이 재미있어서 한 번 더 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샤를로트.”

   소피아에게 사과하는 클레어를 보고 샤를로트가 조용히 손을 들어 보이길래, 나는 샤를로트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저도 마카롱과 와플과 크로와상에게 한 만행을 사과받고 싶은데요.”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진심입니까?”

   “미안해요. 소파 위에 앉아서 고민하는 실비아의 얼굴이 너무 재미있어서.”

   샤를로트가 혀를 살짝 내밀었다.

   쟤도 성격이 좀 낙천적으로 된 것 같아.

   나는 작게 숨을 내쉬고 말했다.

   “어쨌건, 여기 앉아계시는 여러분 모두, 왠지 오늘 바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만.”

   누구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눈에는 모험을 갈망하는 감정이 선히 보였다.

   “방 배정을 해드리겠습니다만, 성비가 맞지 않아서 대부분은 바닥에서 자야 할 겁니다.”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어.”

   “침낭도 가지고 왔지.”

   레오와 제이크가 차례대로 말했다.

   그…… 조금은 ‘사양’이라는 걸 하면 안 될까?

   아무리 그래도 여자애가 아홉 명이나 있는 집에서 남자 둘이…… 자고 싶겠구나, 응.

   물론 두 사람 다 우리한테 함부로 손댈 사람들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레오는 지극히 신사적이고, 제이크도 겉모습과는 다르게 로티만 바라보니까.

   그래도 방송에는 내보내면 안 되겠지. 여러모로 염상거리라.

   ……게임에서의 레오는 하렘 마스터이기도 했고.

   다만.

   “두 분은 방송용 방을 써주셨으면 합니다. 의자만 빼면 잠자기에는 충분한 자리가 나올 거라 생각합니다만, 괜찮겠습니까?”

   “그래, 물론이야.”

   “방이라도 주는 게 어디겠어.”

   레오와 제이크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제이크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 집 안에서 지나친 애정행각으로 풍기를 문란하게 하면 바로 원래 세계로 돌아가게 해드리겠습니다.”

   “명심할게.”

   로티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지만, 못 본 척했다.

   “나머지 분들은…….”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옷은 그냥 방에 가서 갈아입고, 원래 이 집을 쓰던 저희 다섯 명은 거실에서 자도록 하겠습니다.”

   “황녀님들이요?”

   레나가 깜짝 놀라 되묻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를 사 두고도 따로 쓰지는 않았으니까요. 방에 들어가서 주무시더라도 큰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아, 청소는 조금 해야겠지만요.”

   아무래도 꽤 오래 비워둬서 먼지가 조금 쌓여있더라.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내가 말하자, 다들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하지 말라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왜 보기만 해도 한숨이 나올까.

   “일단……. 오늘은, 다 같이 근처라도 돌아볼까요.”

   내 말에 다들 눈을 반짝였다.

   나까지 전부 하여 열 한 명.

   무슨 패키지 단체관광이냐고.

   아니, 다를 것도 없나?

   *

   나는 ‘주인공 일행’에 대해서 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었다.

   게임에서 여러 번 보기도 했고, 실제로 만나서도 대화를 나누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원래 사람이라는 게 들여다볼수록 그 안이 깊고 깊은 법이다.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간에, 내가 모르던 면이 아주 많이 쏟아져 나온다.

   소피아는 생각보다 아이스크림을 훨씬 좋아했고, 레나는 내 생각보다 캐릭터 상품을 사랑했다.

   제이크와 로티는 둘이 붙어있기만 하면 장소가 어디든 상관없는 모양이고, 소심한 줄 알았던 릴리는 생각보다 사업가로서 야망이 꽤 컸다.

   “힘들지?”

   그리고 레오는 생각보다 어른스러웠다.

   “어허.”

   하지만 나한테 그렇게 물어보는 레오와 내 사이에 클레어가 얼른 끼어들었다.

   “너는 내 동생이고, 언니는 내 언니야. 그러니까 둘은 남매 사이라고. 나는 두 사람이 사귀는 건 절대 반대야.”

   “…….”

   그래도 아무것도 몰랐을 때는 이렇게까지 나오진 않았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우리가 플레이한 게임이 클레어에게 경각심을 다시 한번 심어준 모양이었다.

   서울, 우리가 지내는 아파트 근처의 한 거리.

   우글우글하게 모여있는 외국인 무리를 돌아보며, 나는 조금 암담한 기분을 느꼈다.

   ……뭐.

   그래도 아주 조금은, 음.

   즐거운 것 같기도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