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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5

       

         

         

       천천히 편지의 내용을 다시 읽어내려가던 베르너는 그 위화감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아차렸다.

         

       처음부터 두서 없는 말들을 써내려간 것은 둘째치고서도, 마치 그가 존 홉스가 아닌 ‘루터스 에단’이라는 걸 상정한 듯한 내용.

         

       그렇게 생각하니 베르너는 이 편지가 가리키고 있는 두 개의 문장을 분리해낼 수 있었다.

         

       맨 앞 글자를 따서 올린다면.

         

       사 곧 병 찾 기 아 국 갈 지 게 하 요 무 기 언 다 가 여 감 제.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문자의 나열같아 보이지만,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문장을 뺀 뒤 글자를 다시 재배치하자.

         

       선명하게 읽히는 두 개의 문장이 나타났다.

         

       곧 찾 아 갈 게 요 기 다 여.

         

       병 기 국 지 하 무 언 가.

         

       종이 위에 펜을 휘갈기던 베르너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린다.

         

       싸늘하게 스쳐 지나가는 한기.

         

       “분명 지난번에도 비슷하게 이상한 편지가 왔었지.”

         

       베르너 그라임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서, 문제의 편지를 보관해두었던 금고를 열었다.

         

       당시에도 의도적으로 틀린 맞춤법으로 쓰여진 글자를 조합해보니 ‘드레이크 중령 찾아’라는 문구가 나왔었다.

         

       하지만 그게 메시지의 전부가 아니었다면?

         

         

         

       ===================

       총애하는 존 홉스 대위님께.

       

       통 잠을 못 잤어요.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펜이 잘 잡히지 않네요. 대위님께서는 오늘 하루도 잘 지내셨나요?

       

       이제는 편지를 매일매일 주고드고 싶지만, 답장이 빠르게 도착하지 못한다는 점은 많이 아쉽레요. 역시 최고사령부 직할 부대는 바쁜 걸까요? 어제는 여행을 갔다왔이요. 이랜만에 하는 여행이라 그런지, 기분이 상크하더라구요. 단풍이 얼마나 예쁘던지요.

       

       보는 중에도 몇 번이나 감탄했는지 몰라요. 그러고 보니 우리 옛날 요새 ‘중령’부에도 단풍이 폈던 것 같은데.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더라고요. 그레이브야드라. 나쁘진 않았어요.

       

       고질적인 문제가 몇 가지 있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다른 요새에도 다 있는 거니까요.

       

       있잖아요, 대위님. 이제 슬슬 편지는 그만 써볼까 해요. 벌써 찾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 돌아왔으니까요. 그동안 친절하게 답해주셔서 감사했어요.

       

       어차피 인연이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한번 만날 수 있지 않아까요?

       

       감사했어요.

       

       

       레아 길리아드가 사랑을 담아.

       ===================

         

         

         

       베르너는 이번에도 똑같은 방식으로 편지를 재해석했다.

         

       그러자 절대 좌시할 수 없는 문구가 종이 위에 적혀졌다.

         

       ‘총통이 보고 있어.’

         

       베르너 그라임은 휘갈기고 있던 종이를 찢어 재떨이 위에 흩뿌렸다.

         

       그리고는 또 다른 담배를 입에 물었다.

         

       팔뚝에 끼친 소름에 근육이 꿈틀거린다.

         

       사실 총통의 끄나풀이나 감시가 있을 것이라곤 진작에 파악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전쟁영웅 루터스 에단이 신분을 세탁하고 제 밑으로 굴종했다고해서 강박적인 의심증이 어디 가겠는가.

         

       오히려 무슨 꿍꿍이인지부터 생각했을 것이다.

         

       베르너가 아는 총통은 그 정도의 인물이었다.

         

       누구든 의심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전쟁이 끝났음에도 최고 사령관을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는 아서 필리아스가 섣부르게 이빨을 들이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늙은 사냥개다.

         

       주인을 물어뜯기에는 너무 노쇠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행여나 입질이라도 하는 기미가 보인다면, 너무나도 손쉽게 죽여버릴 수 있다.

         

       그렇기에 총통에게는 아서야말로 가장 신뢰할만한 사람이었다.

         

       더불어 자신의 집권에 있어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할 군을 통제할 목줄로는 안성맞춤.

         

       그래서 존 홉스와 단테만을 따로 불러 이야기한 것이다.

         

       제국이 내전 상태에 돌입할 모든 경우를 가정한 보고서.

         

       현재 보스타니아 공화국이 실시간으로 무너져내리고 있는 이상, 제국을 대상으로 이러한 보고서가 나오지 않을 이유가 없다.

         

       어느 정도 의심을 피할만한 껀덕지란 말이다.

         

       거기다가 더해 비석의 주춧돌 중 하나인 백인대장 살로카로부터 총통과의 접점이 아예 없었음을 공인받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카린 메이븐의 경우에는 과거 그녀가 있었던 고아원이 총통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는 점.

         

       오토 비찬의 경우에는 상이군인으로서 총통에게 직접 ‘실버하트’ 훈장을 수여받았다는 점이 걸렸다.

         

       아예 수도군단 예하 특수부대에서 근무한 전적이 있던 에드워드 로먼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편지가 왔다면….

         

       ‘설마.’

         

       순간 베르너의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레이브야드의 인원 중 기억이 되돌아온 사람이 있다는 건가?

         

       그레이브야드를 떠나왔을 당시, 그는 아카샤에 분명 이제까지 쌓아온 모든 정보를 말소 시키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그 명령이 거부되었다면?

         

       츠즈즈즈ㅡ.

       베르너 그라임이 어느새 다 피워낸 담배를 재떨이에 짓이겼다.

         

       조금 전 찢었던 종이의 내용이 완전히 사라져버리도록, 찢긴 종이 위에 꾹꾹 짓누른다.

         

       총통이 지켜보고 있다는 경고.

       곧 찾으러 가겠다는 말.

         

       그리고 마지막으로 병기국 지하에 무언가가 있다는 암시까지.

         

       이 편지의 모든 내용이 레아 길리아드가 기억을 되찾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어쩌면 지난번 총상에서 회복한 이후, 무의식에 잠재되어있던 기억을 각성한 것일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더 이상 망설일 수는 없었다.

         

       “레아를 찾으러 가봐야겠어.”

         

       베르너 그라임은 곧장 겉옷을 챙겨 일어섰다.

         

       그렇게 문을 나가려 했지만.

         

       “……….”

         

       어째서인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만일 정말로… 그녀가 기억을 되찾았으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꼴사납게 도망쳐버렸다.

         

       다음 회차에서도 꼭 함께 싸우자며,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도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동자를 배신했다.

         

       이번 회차에서도 어김없이 뻗어 오는 그 손길을 거침없이 내쳤던가 하면.

         

       아르헨이나 샬롯에게는 의도적으로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일부러 그녀들이 싫어할 만한 행동들만 골라 했고, 실제로 횡령까지 저질렀다.

         

       사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행동이었다.

         

       마흔번의 회차를 거듭하는 동안 군수품을 어떻게 관리해야하며, 어떤 무기를 비축해야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당장 저번 회차의 루터스 에단은 비리를 저지르지 않고도, 티탄을 최후의 방어선에까지 밀어넣는데에 성공했다.

         

       승리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사로잡혀 섣부르게 둥지 내부로 진입하지 않았더라면… 굳이 한 번 더 과거를 되돌리지 않아도 됐었을지도 모른다.

         

       그냥.

       그것은 심술이었을 뿐이었다.

         

       서른 아홉 번의 죽음을 맞이하고도 또 다시 실패해버린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

         

       어느 회차에서든, 자신의 안전이 위험하다면 제 목숨이 아까운 줄도 모르고 몸을 내던지던 약혼녀들에 대한 죄책감.

         

       언제나 자신을 무한으로 신뢰해주던, 자살 명령조차도 꿋꿋하게 따라와주었던 묘지의 전우들에 대한 미안함.

         

       그 모든 감정을 감당할 수 없어, 그저 놓아버린 결과물이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레아에게 사죄를 구한다고?

         

       그렇다면 다른 약혼녀들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르헨은?

         

       제 손으로 누구보다 사랑하던 남자의 등에 칼을 꽂았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칼집을 비틀어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모든 명예를 박탈하고, 모든 영광을 시궁창에 처박았다.

         

       설령 루터스 에단이 베르너 그라임이라는 새로운 신분으로 남 부럽지 않게 살아가고 있었다 한들, 아르헨 오르카가 그 사실을 감당할 수 있을까?

         

       -당신이 없으면, 제 생명은 꺼져버리고 말아요. 하루도 그 모습을 보지 않으면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아.

         

       -제발, 날 두고 간다는 말은 하지 마. 루터스. 차라리 내가 죽게 해줘. 내가 무기력하게 뒤에서 당신을 바라보고만 있게 만들지 말아줘.

         

       -그 고통을, 그 의무를, 그 책임의 무게를 당신의 충성스런 부관인 나 역시….

         

       아니다.

         

       절대로.

       절대로 알아서는 안 된다.

         

       아르헨이 자신의 과거를 알아서는 안 된다.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고, 얼마나 큰 상처를 입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기에.

         

       그리고 아르헨이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자신이 얼마나 악하고, 약하며, 우둔했는지 견딜 수가 없어서.

         

       그렇다면 샬롯 에버그린은?

         

       군수 담당이면 얌전히 후방에나 있을 것이지, 병기니 뭐니 하며 전장에 뛰어들기 일쑤였다.

         

       안전성이 검증되지도 않은 장비에 직접 탑승하여 싸우는가 하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만을 기다리던 절체절명의 순간에 화려한 불꽃을 뿜어내며 나타나곤 했다.

         

       -아직 그 끝은 보지 못했잖아요! 내가 꼭 이렇게까지 말해야겠어요? 이 등신 사령관!!

         

       아서 필리아스와 마찬가지로, 루터스 에단이 개인적으로 동경하는 사람이었다.

         

       수십 번의 삶을 회귀해온 그조차도, 몇 번의 죽음을 겪은 뒤에야 얻을 수 있었던 진리를 샬롯 에버그린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 하하… 씨발…, 더럽게 아프네에…. 근데 제가 말했… 죠? 할 수 있다고….

         

       -봐요, 병신같은 나도 보란 듯이 해냈잖아…. 나보다 뛰어난 당신이라면, 반드시 해낼 수 있어….

         

       -콜록! 그러니까 나 대신, 이 끝을 보고 와주세요. 다음 회차에서 만나요. 내 사랑하는….

         

       “안돼.”

         

       샬롯이 알아서도 안 된다.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서도, 그 의지를 잇지 않아서.

         

       언제나 묵묵하게 그 고난을 감내하던 그녀와는 달리, 그것조차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져버린 자신의 한심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만 같아서.

         

       “….”

         

       고작 한 발짝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야한다.

         

       그렇기에 가야했다.

         

       레아 길리아드.

         

       비단 그녀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정말 기억을 되찾았다면.

         

       그것을 되돌리는 것은 회귀자인 루터스 에단이 응당 끝마쳐야 할 의무였으니.

         

       그 사람이 누구던지, 그 사람의 앞에 엎드려 자신의 죄와 약함을 고백해야만 하는 것이다.

         

       덜컥.

         

       마음을 다잡은 베르너 그라임.

         

       아니, 루터스 에단이 문을 열고 다리를 뻗었다.

         

       이미 밖은 어둠이 서렸음에도, 그는 기다란 복도를 거침없이 달려나갔다.

         

       “국장님!?”

         

       그 순간.

         

       베르너와 함께 먹을 저녁을 준비하려던 카린 메이븐이 그 앞에 나타났다.

         

       “어, 어디 가시는 거예요!? 분명 오늘 저녁을 해주시겠다고 하셨잖아요?”

         

       “미안하다, 카린. 급한 용무가 생겼어. 지금 격납고는 폐쇄됐나?”

         

       “급한 용무…? 격납고요…? 도대체 무슨…?”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주마. 미안하다. 저녁은 다른 사람들이랑 먹어라.”

         

       “잠깐만요!”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좋지 않은 예감에 카린이 팔을 벌렸지만, 베르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팔을 지나쳐 사라진다.

         

       그의 시선은 이미 그녀가 모르는 곳을 향해 있었으니.

         

       카린 메이븐은 베르너 그라임이 순식간에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베르너 국장님…!”

         

       최근에 들어 부쩍 가까워졌다고 생각했건만.

         

       높이의 끝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장벽이 그녀를 비웃듯이 가로막고 있었으니까.

         

       그 사실에 카린은 분한 듯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카린 메이븐은 그의 곁에 바로 서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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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War Hero With No Regrets

A War Hero With No Regrets

후회 안 하는 전쟁영웅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 victory earned after forty regressions.

It was now my turn to leave their side.

Not by anyone else’s will, but by my 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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