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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5

       청록빛 머리를 한 여병사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이 당당하면서도 뻔뻔한 대답에 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으니까.

         

        물론 저 여병사가 나를 보고 저런 말을 하는 이유 자체는 충분히 추론할 수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말도 안 되는 전적이기는 했지.

         

        제대로 전문 훈련을 받은 경력도 없고, 심지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귀족도 아닌 일개 메이드가 갈고리엄니를 토벌했다는 건.

         

        물론 몬스터 봉인 스크롤에 담겨있었던 만큼 만전의 상태가 아니었고, 엄밀히 따지면 더블 다운이었으니 순조롭게 이긴 것도 아니었지만.

         

        그 모든 요소를 참작하더라도 이 여병사의 주장은 지극히 당연하고 옳은 주장이었다.

         

        당장 나만 해도 이사벨이 어느 날 5레벨의 고블린을 잡았다고 말하는 순간 틀림없이 경악했을 테니까.

         

         

        그러니 이 여자의 주장 자체를 이해할 수 없는 건 당연히 아니었지만….

         

         

        ‘그런데, 사실인 걸 어떡해.’

         

         

        전생의 경험과 마침 무기로 쓸만한 쇠꼬챙이가 옆에 있었다는 점.

         

        봉인되어있던 몬스터이니만큼 상대적으로 약체 상태였다는 점.

         

        그런 여러 우연이 겹쳐서 이뤄낸 게 그날의 갈고리엄니 토벌전이었고.

         

        겨우 그 사건 하나로 릴리스는 2레벨에서 5레벨까지 무려 3레벨을 올리는 쾌거를 이룩했다.

         

        그것도 다른 누구의 도움 없이 오직 릴리스 한 명만으로 이뤄낸 쾌거.

         

        경험치 분산 없이 150가량의 온전한 경험치가 전부 나한테 들어왔던 게 그 증거였다.

         

         

        그렇기에 이 청록빛 머리를 한 여병사는 사실상 나한테 위증을 하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내가 갈고리엄니를 토벌한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었으니 이 여자의 말대로 공적을 정정하는 건….

         

         

        ‘……어라?’

         

         

        잠깐, 생각해 보니 갈고리엄니를 토벌한 전적이 굳이 내 거일 필요는 없는 거 아냐?

         

        물론 그때 당시에는 감추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화려하게 저지르기도 했고, 애초에 내가 교회에서 회복하고 일어난 사이 모든 일이 마무리된 상황이었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이 업적이 굳이 내 것이라고 해서 이득 볼 부분은 없었다.

         

        오히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고 싶다는 면에서는 손해에 가까웠지.

         

        이미 내가 갈고리엄니를 토벌했던 것 자체는 해럴드에게 보고가 올라가기도 했고, 이사벨이나 카타리나 등 주변 사람들은 대충 다 알고 있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조금이나마 소문의 규모를 축소할 수 있다면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내가 죽을 때까지 영원히 블랙우드 저택에서 근무할 것도 아니고 언젠가는 자유인의 신분이 되어 다른 직업을 찾게 될 텐데, 이런 귀찮고 이질적인 전적은 쓸데없이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끌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당신이 대장님을 유혹해서 갈고리엄니 소재 값을 챙긴 것 정도는 눈감아드릴게요. 그러나 저희 대장님께서 갈고리엄니의 토벌을 평범한 메이드에게 맡기고 방관했다는 오명은….”

         

        “에밀리아, 그만.”

         

        “하지만 대장님. 기록일지에 들어가야 하는 내용이니만큼 확실하게 사실관계를 작성해야….”

         

        “…그만하라고 했어.”

         

        “……네.”

         

         

        나를 향해 합리적인 추론에서 내려진 의심을 이어가는 여자와 조금 화난 듯한 목소리로 그녀를 진정시킨 세르.

         

        보아하니 내가 여기까지 불리게 된 이유는 저 여자의 항의가 주요 원인인 모양이었다.

         

         

        “…소개가 늦었군. 이쪽은 에밀리아 레인하트 양이네. 블랙우드 경비대의 상급 병사이고, 내 보좌이기도 하지.”

         

        “아, 안녕하세요, 에밀리아 씨….”

         

        “…네, 릴리스 씨.”

         

        “그녀는 내 보좌라서 연간 기록 일지 작성에도 관여하고 있다네. 그리고 검토 과정에서 내가 적어놓은 갈고리엄니 토벌 건을 그냥 넘어가지 못한 모양이라서 말이야.”

         

        “당연한 의심이라고 생각해요. 저라도 제 메이드 동료 중 누군가가 스스로 갈고리엄니를 퇴치하겠다고 말하면 기겁을 할 테니까요.”

         

        “…이해해줘서 고맙네, 릴리스 양.”

         

         

        여전히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에밀리아와 반대로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짓는 세르.

         

        두 사람이 대충 어떤 관계일지를 조심스레 추측하는 도중 에밀리아의 발언이 재차 이어졌다.

         

         

        “세르 대장님께서는 이전에도 자신의 공적을 몇 차례 다른 대원들에게 나눠주신 적이 있으십니다.”

         

        “네?”

         

        “누가 보더라도 세르 대장님의 지분이 8할 이상 들어간 합동 작전을 끝내고 나면, 모두가 열심히 싸웠다며 당신의 공적 비율은 1할 정도만 챙기시고 나머지를 하위 병사들에게 전부 나눠주신 적도 있으십니다. 혹은 다른 대원이 저지른 실수를 세르 대장님께서 저질렀다고 말씀하시며 덮어쓰신 적도 더러 있으시죠.”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에밀리아.”

         

         

        “지금까지는 그래도 같은 동료들에게 공적이 나뉘는 것이고, 전체적으로 블랙우드 경비대의 사기가 오르는 행위이기에 저 또한 묵과하였습니다만, 이번 건에 관해서 만큼은 당연히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에밀리아….”

         

        “세르 님…아, 아니, 세르 대장님의 공적을 어떻게 군사 훈련조차 받지 않은 평범한 메이드에게 나눠줄 수 있단 말인가요! 그것도 대장님이 눈앞에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평민 메이드의 전투를 막지 않고 방관한 것으로 기록되다니요! 대장님의 보좌이자 기록관으로서 이런 오명이 쌓이는 것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

         

        “…….”

         

        “…….”

         

         

        그래, 이런 이유에서라면 세르가 나를 굳이 여기까지 불러낼 만도 하지.

         

        아무래도 밖에 새나가서 좋을 것 없는 이야기이니만큼 서한에 적지 못한 것도 이해할 수 있고.

         

        지금까지 블랙우드 영지 경비대의 치안대장인 세르라는 남자는 평소에도 자신의 공적을 널리 나눠주거나, 부하의 실수를 자신의 몸으로 덮어주는 식으로 부대를 관리해 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저 고지식해 보이는 에밀리아라는 여자는 지금까지 그의 그런 미련해 보이는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겠지.

         

        그런 상태에서 기록을 정리하던 와중 내가 갈고리엄니를 토벌했던 것이 눈에 들어왔을 테고.

         

        같은 동료조차도 아닌 일개 메이드에게 공적을 나눠줬다는 점에서 쌓여왔던 앙금이 터져버린 모양이었다.

         

         

        “에밀리아 씨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은 잘 알겠습니다.”

         

         

        뭐, 결과적으로는 내가 공적을 양보하기만 하면 전부 해결되는 문제일 테니까.

         

        안 그래도 살기 팍팍한 게 빚 메이드라는 신분인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적을 만들어봤자 좋을 게 없었다.

         

         

        “저 또한 이런 연약한 몸으로 갈고리엄니를 토벌한 공적이 있다는 것에 조금은 부담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또한, 저 같은 평범한 메이드보다는 세르 경 같은 훌륭한 기사님에게 공적을 양보하는 게 옳은 일이겠지요.”

         

        “…릴리스 양?”

         

        “그러니 저 또한 동의하겠습니다. 작년 다섯 번째 달의 열다섯 번째 날. 갈고리엄니를 토벌한 공적은 세르 경에게로 양도하는 것으로….”

         

         

        그렇게, 어느 사람도 굳이 얼굴 붉힐 일 없이 순조롭게 일을 풀어가려는 순간.

         

        …느닷없이, 한 사람의 인영이 내 앞을 가로막으며 한 발짝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메이드, 잠깐.”

         

        “에단 도련님?”

         

         

        요즘도 지치지 않고 하는 검술 훈련이 어느 정도 영향이 있는 건지, 뚱땡이 치곤 조금 나아진 걸음걸이의 에단이 에밀리아의 앞으로 다가갔고.

         

        그렇게 그녀의 눈을 마주치며 조금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에밀리아…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방금 자네가 한 말, 온전히 자네가 책임질 수 있겠나?”

         

        “……네?”

         

        “방금 자네가 말한 내용대로라면, 마치 내 메이드가 거짓말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 같아서 말이지.”

         

         

        …뭘까, 이 심상찮은 분위기는.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에단을 중심으로 치안부 사무실 안은 무언가 불온한 분위기로 감싸지기 시작했고.

         

        그 애매한 상황 속에서 에단은 여전히 에밀리아의 눈을 직시한 채 그대로 말을 이어갔다.

         

         

        “릴리스 로즈우드는 내 전속 메이드일세. 블랙우드 공작 가문의 후계자인 나, 에단 리처드 블랙우드의 전속 메이드란 말일세.”

         

        “…….”

         

        “또한, 내가 가장 신뢰하고 있는 사용인이기도 하고. 그런데, 자네는 지금 그런 내 메이드의 주장을 자네는 지금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지?”

         

        “…도련님?”

         

        “감히 내 전속 메이드를 욕보이고도 그렇게 당당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걸 보니, 자네도 어딘가의 귀족 아가씨 정도는 되는 모양이지?”

         

         

        …아니, 쟤는 갑자기 또 왜 저래.

         

        그냥 내가 공적만 양보하면 모든 게 원만히 끝나는 상황이었는데, 에단은 느닷없이 에밀리아의 앞에 다가가선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들기 시작했고.

         

        방금까지만 해도 차분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던 에밀리아는 순식간에 구석에 몰려 당황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요, 도련님. 제 말씀은 그저….”

         

        “자네가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주장하는 건가? 세르 경이 갈고리엄니를 토벌하고, 메이드가 그 공적을 가로채는 그 경위를.”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그런 주장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군. 지금 자네가 하는 짓은 그저 자네가 상급 병사라는 이유로 내 메이드를 협박해서 공적을 가로채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말이지.”

         

        “…….”

         

        “만약 그렇다면 그 반대로, 내가 그저 블랙우드 가문의 후계자라는 이유만으로 자네를 경비대에서 해고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겠군.”

         

        “……!”

         

        “……!”

         

         

        느닷없이 튀어나온 에단의 살벌한 발언에 에밀리아는 물론 나까지도 놀랄 정도였다.

         

        …그냥 말실수 좀 한 거로 그렇게까지 할 건 아니지 않나?

         

        게다가 하급 병사도 아니고 상급 병사라는 건 병사 중에서도 상당히 높은 계급이었다.

         

        그것도 블랙우드에서 임명한 기사인 세르의 보좌까지 할 정도라면 실력 또한 절대로 부족하지는 않을 테고.

         

        그런 지위에 있는 사람을 고작 자기 메이드가 욕 좀 먹었다고 자르겠다고?

         

         

        ‘…너무 심한데?’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의문스러운 감상이 떠오르긴 했지만, 생각해 보니 그리 이상한 상황은 아닐지도 몰랐다.

         

        오히려 느닷없이 통보하는 게 아니라 저렇게 변명할 기회라도 준다는 것 자체가 게임 속 혐단에 비하면 말도 안 될 정도로 자비로운 처사긴 하지.

         

        요즘 예절 교육을 받고 유난히 얌전해졌을 뿐, 에단의 근본이 『루미노르 아카데미』의 혐단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

         

        언제 어디서 그 혐단의 일면이 튀어나오더라도 그리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실 지금의 이 모습만 봐선 혐단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어중간한 감이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의 에단은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더라도 최소한의 명분은 갖추고 있었다.

         

        아무 이유 없이 릴리스를 괴롭혔던 게임 속 혐단과는 다르게.

         

         

        ‘혹시 권력을 잡을 때를 대비해서 미리미리 준비하는 건가?’

         

         

        블랙우드 영지뿐만이 아니라 어느 영지든 간에 지배자가 바뀌게 되는 순간 잡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상 중 하나였다.

         

        특히 에단 같은 경우에는 해럴드에 비해 많은 부분이 부족하다는 게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이었고.

         

        이 애새끼가 블랙우드 영지를 물려받을 때쯤 얼마나 괜찮은 인물이 되어있을지는 몰라도, 현직 소드 마스터의 위상을 따라가기에는 틀림없이 부족할 터였으니.

         

        만약 그 부분을 생각한다면 에단의 지금 이 행동도 이해를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블랙우드 영지의 기반 시설들을 하나하나 돌아다니며 위압감을 조성해 놓는다면, 후일 에단이 영지를 물려받을 때 들릴 잡음을 최소화할 수 있겠지.

         

        이것이 겨우 예절 교육만 일 년 남짓 받은 애새끼의 머릿속에서 나올 만한 발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 고위 귀족의 예절 교육은 단순히 예의를 차리는 방법 정도에 그치지 않고, 화법이나 처세술 같은 상급 지식 또한 포함되어 있을 테니, 그런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은 또 아니기도 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것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기도 했고.

         

        자기 메이드가 욕 좀 먹었다고 나름 상급 병사까지 올라간 인물에게 권위를 내세우며 협박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았다.

         

        애초에 딱히 에단 얘가 위험성까지 감수해서 나를 보호해 줄 정도로 우리의 관계가 깊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

         

        “…….”

         

         

        긴장감이 감도는 치안부 사무실 안.

         

        언제 터질지 알 수 없는 불온한 분위기 속에서, 에단의 눈치를 보던 에밀리아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에단 도련님. 제가 그만 눈이 멀어 도련님의 전속 메이드를 모욕하는 발언을 하고 말았습니다.”

         

        “…사과할 대상은 내가 아닐 텐데.”

         

        “…릴리스 양에게도 진심으로 사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 단순한 식견이 그만 릴리스 양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드렸습니다.”

         

        “아, 아니요….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기는 하니까요….”

         

         

        원래대로라면 그냥 내가 숙이고 들어가서 원만하게 끝낼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상대 쪽에서 사죄를 받으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방향과 다르기는 하지만…어쨌든 증언 관련 내용은 그럭저럭 잘 풀린 것 같기도 하고.

         

         

        “에밀리아.”

         

        “……네, 도련님.”

         

        “두 번은 없을 테니, 다시는 같은 말실수를 지껄이지 말도록.”

         

        “…송구했습니다.”

         

         

        아무튼, 잘 풀린 거…맞겠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딩딩딩님 5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자정이 기다려지는 이유라니…너무나도 영광스러운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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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Maid of the Lout Prince

I Became the Maid of the Lout Prince

망나니 공자의 메이드가 되었다
Score 7.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transmigrated into a character from my favorite game in my previous life. Moreover, as the character I despise second most in the game. (Not a wasteman) The cover was designed by Deep Dark Wolf, and the typography was done by 유일유화 (Yu Ilyu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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