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450

       #외전 4 어떤 하루

       

       제국인들의 아침은 바쁘다.

       

       백성들이야 하루하루의 생계를 이어 나가기 위해 밤낮없이 뛰어야 했으니 원래 바빴고, 귀족들은 귀족들대로 전후 복구라는 막대한 초대형 과제를 앞두고 나날이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전쟁 당시보다는 나은 게 아니냐, 라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원래 요리 같은 것도 판을 벌이는 것보단 뒷정리 쪽이 훨씬 손이 많이 간다.

       

       물론 남들이 다 준비해놓으면 달려가서 밥만 먹고, 설거지는커녕 그릇 정리조차 하지 않고 몸만 빠져나오는 이들이 있듯이, 귀족들 중에서도 ‘그동안 고생했으니 인간적으로 좀 쉬어도 되지 않나?’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긴 했다.

       

       남들도 고생한 건 마찬가지지만 원래 사람이란 게 다른 사람 팔 잘린 것보단 내 손가락에 바늘 찔린 게 더 아픈 법이니까.

       

       그래서 그들은 ‘노동에 대한 정당한 휴식’을 보장받기 위해 태업을 시도했고. 

       

       ─황제 폐하께서 잠도 줄여가시며 업무에 힘쓰신다는군. 황궁을 비추는 등불이 꺼지는 날이 없다던데?

       

       본인들이 태업을 시도했다는 티도 못 내보고 곧바로 업무에 복귀해야 했다.

       

       하다못해 같은 사무실 부장님이 잔업만 해도 퇴근하는 입장에선 발걸음이 영 불편해지는 법인데, 군주제 국가에서 황제가 업무에 치이고 있다는데 신하 된 몸으로 노동을 마다했다간 무슨 대가를 치르게 될지 몰랐다.

       

       설령 황제 폐하가 그런 거 신경 안 쓰신다고 해도, 같은 부서 상사와 부하 모두가 똑같이 황제 폐하처럼 관대한 마음을 품어주길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설령 기적적으로 그런 일이 발생한다고 해도 그땐 옆 부서 김춘식 백작이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하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황실 직속 특무 기사 리그렛은 무척이나 특이한 케이스에 속했다.

       

       당장 직책만 봐도 그렇다. 과거에야 워낙에 제국이 어지러웠으니 ‘크롬 미다스 남작의 호위’라던가 ‘황녀 전하의 개인 손님’ 같은 애매모호한 칭호만 가지고도 황실을 돌아다니는 데 별문제가 없었지만, 이제 남작은 후작이자 국서가 되었고, 황녀 전하는 황제 폐하가 되었다.

       

       그렇다고 황실 호위 기사 같은 직책에 임명해봐야 리그렛이 제대로 된 조직 생활이 가능할 거라고는 리그렛 본인을 제외하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기에, 라일라는 그냥 아예 새로운 직책 하나를 만들어서 거기에 리그렛을 집어넣었다.

       

       직급만 따지면 군단을 이끄는 장군에 버금가고, 황제 이외 누구의 명령도 따를 필요가 없는─가끔 황제 말도 안 들었다─ 무지막지한 고위직이었다.

       

       명명백백한 낙하산 인사였지만, 불만을 제기하는 이는 드물었다.

       

       직급이 높을 뿐 휘하에 배정된 인원이 없으니 궁궐 내 권력 구도에 큰 영향이 없다는 것도 있었고, 황제 폐하와 국서 양쪽의 심기를 거슬러서 반대해봐야 돌아올 게 없다는 것도 있었으며, 마왕 모가지를 날려버린 인류 최강자에게 자기 모가지도 따일지 모른다는 생존본능의 경고도 한몫했다.

       

       특히 마지막이 중요했다. 이래서 사람이 일단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법이다.

       

       다만, 정작 리그렛 본인이 현 상황에 만족하고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한가하네.’

       

       애초에 시킬 일이 있어서 만든 직책이 아니니 해야 할 일도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황제가 뭔가 시키면 해야 하긴 하는데, 정작 리그렛을 투입할만한 사건 자체가 그리 널려 있는 게 아니었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 쓰는 것도 정도 것이지, 크고 작은 마수나 도적 퇴치 따위에 리그렛을 투입하는 건 만렙 고인물이 뉴비가 먹고 커야 할 경험치를 강탈하는 짓에 가까웠다. 국가적으로 보면 이익이 없는 걸 넘어서 손해다.

       

       그렇다고 수련하면서 실력이나 키우자니, 이젠 리그렛하고 상대가 될만한 적수 그 자체가 거의 없었다.

       

       이스탈이나 디트리히는 군단장으로서 무지막지하게 벌크업 시켰던 군을 재편하고 정예화시키는 데 여념이 없었고, 라바울은 고향과 제국을 오가며 여러 문물을 전파하느라 바빴다.

       

       ‘별의 그릇’의 영향으로 마옥성의 가호에 눈을 뜬 라일라라면 상대로 부족함이 없고 겸사겸사 가까운 데 있기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본인 심심하다고 노동에 시달리는 친구한테 가서 싸우자고 할 정도로 리그렛이 개념이 부족하진 않았다. 노동에 시달리건 말건 황제인 시점에서 싸움 걸면 안 된다는 인간계의 상식은 좀 부족했지만, 무력으로 따졌을 때 이미 인간이라기보단 인간 언저리였기에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서, 너야.”

       

       “아니아니아니.”

       

       손을 파닥거리며 강렬한 부정을 표현한 피오레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라일라 님은 노동에 시달려서 안 괴롭히는데, 왜 저는 괴롭혀도 괜찮은 거죠?”

       

       “한가하잖아.”

       

       “무지 바쁘거든요!?”

       

       빼액하고 고함이 울려 퍼졌다. 피오레치고는 드문 정색이었다.

       

       “수면 부족이 미용에 얼마나 나쁜지 아세요? 요즘 들어 살도 빠지고 피부도 푸석푸석해지는 게 느껴져서 얼마나 마음이 아픈데요. 흑흑.”

       

       리그렛은 그 말에 피오레의 얼굴을 빤히 살펴보았다.

       

       눈 밑에는 기미라고는 존재하지 않았고, 하얀 피부에는 탄력과 부드러움이 공존했으며, 터질듯한 몸매는 수수한 관료복 위로도 존재감이 강렬했다.

       

       살 빠졌다는 말이 아예 헛소리는 아닌지 병약 비스름한 기색이 살짝 비칠 듯 말 듯 하긴 했지만, 퇴폐미가 그리 증가하진 않았다. 원래 1에서 10이 되면 눈에 확 띄지만 100이 101이 되어봐야 별 티도 안 난다.

       

       여동생 아니면서 여동생을 자처하고 미다스 아니면서 미다스를 자처하는 존재 자체가 유해 지정 아슬아슬한 흑막에게 그 정도야 사소한 오차였다.

       

       리그렛은 하루하루 미모와의 전쟁을 벌이는 뭇 여성들을 대신하여 온몸을 붉게 하고 전투력을 3배로 뻥튀기한 뒤 이 사악한 기만자에게 하얀 광선포를 쏘아내진 않았다.

       

       대신 심플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바쁘다는 녀석이 밤마다 잠 안 자고 잠입 미션은 왜 하는 건데.”

       

       피오레의 전신이 잠깐 굳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잠깐이었다. 리그렛이 아니었다면 움찔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할 만큼 짧은 시간 동안 대처법을 떠올렸는지, 피오레는 태연하게 ‘에? 그게 무슨 소리죠?’라는 표정으로 무장을 끝마쳤다.

       

       모르는 사람이 봤더라면 정말로 자기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할만한 리액션이었다.

       

       역시 ‘Boss: 제국을 암중 지배하는 요사스러운 외눈 안경의 여동생’ 타이틀이 괜히 주어진 건 아니었다.

       

       “글쎄요,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 꺄악!”

       

       물론 보스 몹 잡기를 레저 스포츠쯤으로 여기는 리그렛에게 통할 수작은 아니었다.

       

       이마에서 느껴지는 강렬하고도 예리한 통증에 비명을 지른 피오레는, 리그렛이 딱밤용 손가락을 소지에서 약지로 바꿔 잡으려 하는 걸 보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잊고 있던 진실이 떠올렸다. 충격 요법과 진실이 이토록 우애가 좋았다.

       

       “그치만! 요즘 라일라 님만 오라버니를 독점하고 있잖아요! 낮이고 밤이고 항상! 오라버니를 위해 이토록 열심히 일하고 있는 여동생에게 작은 보상 정도는 있어도 되는 거 아닌가요?!”

       

       리그렛은 같은 사무실에서 종이와 잉크와 펜을 들러리 삼아 함께 야근하는 걸 ‘독점’이라 표현하는 피오레의 얼굴 두께에 새삼 감탄하진 않았다.

       

       ‘아직’은 작전 준비만 하고 있으니 찔릴 것도 없다는 기적의 변명을 상식과 윤리의 이름으로 단죄하지도 않았다.

       

       그런 사소한 걸 하나하나 지적하면 애초에 미다스 남매와 함께하는 건 불가능할뿐더러, 리그렛 역시 살짝 비슷한 감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그렛은 그 감상을 솔직히 내뱉진 않았다. 미다스랑 비슷하다는 건 인간으로서 좀 많이 위험한 요소였다. 리그렛은 인간 언저리였지만 적극적으로 탈 인간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리그렛은 무난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결혼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아니요! 그러니까 더욱 서둘러야죠! 스타트 지점에서 좀 빨리 출발하는 것 정도는 핸디캡이라고 치고 역전극의 짜릿함을 맛볼 수 있지만, 아예 한 바퀴 돌 때까지 기다리면 우위가 확정되잖아요! 이건 경쟁의 형평성 문제에요! 승부라고요!”

       

       피오레랑 같이 근무하는 관료들이 남녀 할 것 없이 상사병으로 괴로워하는 통에 피오레에게 개인 사무실이 주어진 게 참으로 다행이었다.

       

       만약 이곳에 다른 관료가 있었더라면, 이 어마어마한 대화를 보고했다가 불경죄로 도매금 당할지, 보고하지 않고 반역죄를 저지를지 극한의 선택을 강요받았을 터이니.

       

       “흐음.”

       

       리그렛은 팔짱을 낀 채 잠시 고민했다.

       

       피오레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 이게 승부라는 표현은 꽤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대(對) 미다스 전술에 통달할 만큼 통달한 리그렛조차 이 지경이었으니, 그 해악이 실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기야 그녀가 미다스 저항력 만렙이었더라면 애초에 크롬의 호위로 고용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리그렛의 심정에 미묘한 변화가 생긴 걸 눈치챈 피오레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리그렛 씨는 마족 대륙으로 넘어갈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거잖아요? 아마 내부 정리가 대충 마무리되고 나면 곧바로 그쪽 사업도 진행될 텐데, 그때 가서 일을 시작하려면 이래저래 조급하지 않겠어요? 그냥 지금 미리미리 준비해두자고요.”

       

       리그렛이 본격적으로 나서면 라일라나 크롬의 경계도 그쪽으로 쏠릴 테고, 그럼 피오레 자신이 행동하기도 훨씬 편해진다.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계산을 끝마친 피오레였지만,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그녀는 한가지 오라버니랑 비슷한 실수를 저질렀다.

       

       “그렇네. 갈까.”

       

       “네?”

       

       어딜요, 라고 묻기도 전에 리그렛이 모습을 감추었다.

       

       혀로 싸우는 자들은 감히 도달할 수 없는 파워풀한 추진력이었다. 

       

       그제야 자기가 아군을 만들려다가 최강의 적을 각성시켰다는 걸 깨달은 피오레의 안색이 급격히 나빠졌지만, 이미 차는 떠나간 뒤였다.

       

       <><><>

       

       “……그래서, 크롬을 데려가겠다고요?”

       

       제국의 황제답게 옥좌에 앉아서 문무백관들을 내려다보는 대신, 집무실에서 개인 업무를 보고 있던 라일라는 이마를 짚었다.

       

       새삼스레 리그렛에게 그럴듯한 직책을 부여해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었으면 대뜸 제국의 황제를 만나겠다는 일개 무직 평민─태평성대라서 요즘 용병업은 직업으로 잘 안 쳐줬다─의 앞을 가로막지 못한 황실 호위대에게 단체로 처벌을 내려야 했을 테니.

       

       물론 그 일개 무직 평민의 또 다른 타이틀이 인류 최강인 걸 고려하면 호위대도 좀 많이 억울할 테지만, 군주제가 원래 아랫것들의 억울함보다는 높으신 분의 안위가 중요한 체제였다. 이건 라일라 본인이 자비를 베푼다고 어찌 되는 문제가 아니다.

       

       “하루면 돼.”

       

       리그렛은 무심하게 말했다.

       

       상점에서 물건 하나 구매하는 듯한 태도였다.

       

       물론, 이제 와 황제에 대한 경의라거나 예절을 지키라고 할 생각은 라일라에게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친구이자 대등한 연적을 대하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싫다고 한다면?”

       

       “최근에 많이 같이 있었잖아.”

       

       라일라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건 그녀가 아는 리그렛답지 않은 대답이었다.

       

       ‘그러면 힘으로라도 데려가겠다’라는 선언이 아니라 ‘그 정도 했으니 조금은 양보해도 되지 않느냐’는 제안 또는 협상에 가까웠으니.

       

       라일라는 잠시 침묵했다.

       

       혼인도 치렀는데 독점해서 뭐가 나쁘냐, 말은 이 경우에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황제라는 직책과 대외적 시선 때문에 그녀가 가장 우위에 가까운 위치를 차지하긴 했지만, 개인 대 개인의 관계로 보면 그녀는 확고한 첫 번째라고 하기엔 다소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싶진 않았다.

       

       이것만큼은 논리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였다.

       

       고로, 라일라는 되물었다.

       

       “…왜 굳이 저한테 그걸 말하러 온 거죠? 그냥 바로 크롬을 찾아가면 되는 일 아니었나요?”

       

       차라리 몰래 일을 치른 거라면 적당히 모른 척해줄 텐데, 굳이 찾아와서 선언하는 저의가 뭐냐는 뜻이었다.

       

       일단 말의 형식은 질문이었지만, 실제 내용은 불평이나 투정에 가까웠다.

       

       그 감정을 느낀 건지, 이번엔 반대로 리그렛이 침묵했다.

       

       그리고.

       

       “기습은 조금.”

       

       짧은 말이었다. 문장 자체도 짧았지만, 비언어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표정마저도 얼굴을 훽, 하고 돌려버린 탓에 볼 수 없으니 더더욱 그랬다.

       

       라일라는 순간 영문을 알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리그렛이 말로 다 하지 못한 그 감정이 ‘멋쩍음’이라는 걸 깨닫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빈자리를 노리는 식으로 얼렁뚱땅 승리를 가져가긴 싫다, 뭐 이런 건가요?’

       

       새삼 황제가 굉장한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리그렛의 저런 반응을 볼 수 있는 자리가 그리 흔할 리가 없었다.

       

       솔직히 라일라로서는 조금 억울한 기분까지 들었다.

       

       기습은 싫다고 말하면서, 정작 저 태도가 진짜 기습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가슴 속에 가득한 경계라던가 울분 같은 감정을 이토록 빠르게 토벌하는 데 성공했으니, 역시 인류 최강이라는 이름이 허명은 아닌듯했다.

       

       “하아.”

       

       제법 긴 한숨과 함께 라일라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항상 조각상이나 회화를 떠오르게 할 만큼 완벽한 몸가짐을 뽐내는 그녀로서는 이례적으로 늘어진 모습이었다.

       

       조금 퉁명스러운 목소리와 표정으로, 라일라가 말했다.

       

       “하루뿐이에요. 앞으로 1년 정도는 더 독점하려고 하던 참에 양보한 거니까, 약속은 지키세요.”

       

       “알고 있어.”

       

       “그리고 피오레 양을 견제하는 것도 도와주세요. 일단 봉인을 시도하긴 했는데, 미혼자에게 맡기면 연애극을 찍으려 하고 기혼자에게 맡기면 불륜극을 시작하려고 해서 잘 안되네요.”

       

       “그건 반년 정도로 타협해. 두 번째 마왕을 탄생시키는 것보단 좋잖아?”

       

       “…하긴 내전은 좀 그렇긴 하네요.”

       

       리그렛도 라일라도 그게 과장된 걱정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너무 고삐를 풀어놔도 문제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고삐를 조이면 그건 그것대로 나라 하나쯤은 말아먹을 터.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용법이 좀 다른 것 같지만 원래 결과가 같으면 나머지는 사소한 오차로 취급할 수 있다.

       

       흉악한 재액을 앞두고 인류의 통치자와 인류 최강자가 손을 잡으니 제국의 앞날이 참으로 밝았다.

       

       <><><>

       

       “아니, 잠깐 내 의견은? 당사자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질 않았잖아!!”

       

       황제의 사유지에 있는 많은 별장 중 한 곳에서 크롬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명색이 제국의 국부 겸 후작의 행동치고는 좀 품위가 부족했지만, 원래 근본 없는 평민 나부랭이였으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그리고 리그렛은 당당히 대답했다.

       

       “그게 왜 필요해?”

       

       “…….”

       

       최근 크롬의 간교한 혓바닥에 놀아나 끝없는 과업무와 성과 경쟁에 시달리고 있는 관료들이 보았더라면 기립해서 박수를 칠만 한 위업이었다.

       

       저 크롬 미다스를 말 한마디로 격침하다니, 역시 최강자는 뭔가 달라도 달랐다.

       

       격조 높은 영웅이라면 여기서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승자에게 경의를 표했겠지만, 명예 따윈 알지 못하는 상놈답게 크롬은 헛된 발버둥을 계속했다.

       

       “아니, 당연히 필요하지! 당사자 동의 없이 이뤄지는 거래가 어디 있어!”

       

       “니가 프렐리야한테 동의받고 걔를 마그누스 영애로 만든 건 아니잖아.”

       

       “그, 그거야 뭐 적어도 그 집 가장하고는 동의를 끝마쳤으니까.”

       

       “나도 동의받았는데?”

       

       “아니, 우리 집 가장은 이미 광신도 놈들한테 담가진 지 오래인데 대체 누구한테….”

       

       “너 국서잖아. 그럼 라일라가 너희 집안 가장 아니야?”

       

       크롬의 입이 떡하고 벌어지고, 요사스러운 혓바닥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바르하르트 제국 류 번외 초식 정치적 올바름의 퇴마력이 이토록 영험했다.

       

       두 번 연속으로 다운 판정을 받았으니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영예로운 결투법 삼세판의 규율을 따져봐도 이미 승패는 명확했지만, 크롬은 추잡했다.

       

       하기야 원래 좀 추잡하고 더러운 쪽이 생명력이 질기긴 하다.

       

       “그래도….”

       

       “내가 그렇게 싫어?”

       

       크롬의 입을 통해 펼쳐지려 하던 온갖 기만과 사기와 논리 무장이 일제히 힘을 잃고 정지했다.

       

       특별히 리그렛이 울먹거린다거나, 서운한 감정을 드러낸 건 아니었다.

       

       리그렛은 언제나 그렇듯이 무심한 듯이, 하지만 크롬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을 뿐이었다.

       

       정말로 싫다면 그만두겠다고, 애처롭게 매달려 승리를 구걸하지는 않겠노라고.

       

       이번에야말로, 크롬은 인정했다.

       

       아니, 사실 승패 같은 건 옛날 옛적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그 결론을 계속 뒤로 미뤄왔을 뿐.

       

       크롬은 입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그냥 다물어버렸다.

       

       언제나 주인공 자리를 놓치지 않던 명배우 혓바닥은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 자리를 두 팔에게 맡겼다.

       

       언제나 조연에 지나지 않던 그들은, 모처럼의 기회를 허비하지 않고 그 역할을 다해냈다.

       

       누구보다도 강인할 리그렛의 몸은, 이번만큼은 가냘프게 크롬의 두 팔에 자신을 맡겼다.

       

       두 명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이내 그림자가 완전히 겹쳤다.

       

       평범하고도 특별한.

       

       그런 하루의 일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마지막 외전입니다.

    오래 기다려 주신분들에게 감사와 사죄의 말씀을 함께 올립니다.

    알콩달콩이라는 게 영 쓰기가 어렵더군요.

    크롬의 이야기는 이걸로 막을 내립니다.

    다음에는 새로운 작품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등록된 마지막 회차입니다


           


How to Live with the Golden Totem

How to Live with the Golden Totem

황금 토템으로 살아가는 방법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Artist: Native Language: Korean

My three Essentials for Surviving a Trouble-Filled World: Knowledge, Companions, and Financial Luck.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