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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50

    그렇게 루크가 짐짓 화난 표정으로 몸을 돌렸을 무렵.

    여기까지 와서 그 혼자 옷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레니에는 삐친 루크를 어떻게든 달래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제가 무조건 다 잘못했으니까요, 네? 제가 이런 몸으로 옷을 봐서 어쩌겠나요? 다 맨날 똑같은 옷만 입는 루크님을 생각해보니 안타까워서 그런거죠. 그러니까 이만 화 푸세요!

    다 다른 옷인데 자신이 못 알아봐서 미안하다는 둥, 예르나에게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둥, 생각나는 모든 부분에 대해 사과를 건네며 계속해서 싹싹 비는 레니에를 보고 있으니, 루크도 마음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흠….”

    뭐, 사실을 말하자면 처음부터 그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마법사인 자신이 고작 그런 일로 감정이 상해서 혼자서 돌아다니겠다는 식으로 철없이 굴었겠는가?

    어린애도 아니고, 단순하게 말이 안되는 얘기다.

    그런데 왜 그렇게 화가 난 것처럼 굴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그녀를 잠깐 시험해 본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레니에가 속으로 자신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그런 식으로 살짝 심리를 떠본 것이라고 할까?

    레니에는 자신이 하나부터 열까지 설계하여 사고를 꿰뚫고 있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아린세이아의 고도화된 연산력을 이용해 스스로 학습하고 완성된 인공지능.

    따라서 그녀는 ‘레니에’라는 이름과 목소리를 지니고 있어도 엄밀히 말하면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인격체다.

    바꾸어 말하면, 그건 루크에겐 그녀를 진지하게 믿을 수 있는 구석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존재라는 의미.

    심지어 그녀는 오늘 본 것처럼 거짓말에도 능숙한 존재이니, 루크에게는 더더욱 그녀에 대한 불안심리가 커져있는 상황이었다.

    루크에게 거짓말에 대한 제약이 없는 마법사라는 건 언제나 꺼림칙한 존재였다.

    심지어 레니에는 단순한 지능수준도 결코 떨어지는 게 아니다보니 더욱 그렇다.

    서로 깊이 논하고 있었던 논제 자체가 완전히 거짓일 가능성까지 예측해야 하는 고지능화된 존재라니.

    생각만 해도 정말 피곤한 존재가 아닌가?

    만약 그녀가 뒤에서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하면, 루크로서는 그것을 막아낼 방법이 전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루크가 기댈 수 있는 거라고는 그녀를 제거할 수 있도록 심어둔 ‘킬코드’와,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니 킬코드를 사용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신에 대한 그녀의 반응을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그녀의 행동원칙이, 정말로 자신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상태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조금은 유치한 방법을 사용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뭐, 적어도 지금의 이런 진심어린 듯한 반응을 보면 아직까지는 정말로 자신과의 관계가 어긋나는 걸 원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다행이라고 해 둬야 할까.

    ‘…뭐, 일단은 합격이라고 해 둘까?’

    이제는 슬슬 화를 푸는 모습을 보여줄 때도 된 것 같다.

    너무 오랫동안 화를 내면 오히려 관계가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적당한 지점에서 타협을 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루크는 살짝 표정을 풀어내며 말했다.

     

    “……앞으로는 조심하거라.”

    -네! 용서해주셔서 감사해요!

    루크의 용서를 받은 레니에가 뛸듯이 기뻐하며 방방거리자, 루크는 그런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도 일단 주제를 돌려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무거운 갑주로 인해서 바닥에서 위태로운 소리가 나고 있었기에.

    “어허, 진정하고. 그래서, 그대는 내가 입을 옷으로 대체 무슨 옷을 고를 생각이지? 생각해 둔 게 있나?”

    정말로 패션에 대해 아는 것 맞냐는 듯한 의심이 담긴 루크의 목소리에, 레니에는 당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요! 제가 미리 다 검색을 해 봤죠! 최신 트렌드 기준으로 무려 32490건의 자료를 조사, 취합, 분석해, 유행에 대해 완벽한 공부를 했다고요!

    그녀의 말에 루크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32490건의 분석데이터라면 충분히 믿을 수 있을만한 수준이 아닌가.

    “뭔가 불안한데….”

    아무래도 신뢰가 가지 않는 건, 역시 목소리 때문이겠지?

    잠시 후.

    “음….”

    -어떤가요? 일반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입는 외출복입니다!

    레니에가 자랑스럽게 먼저 선보인 것은 체크무늬 코트에 청바지로 단순하지만, 스카프로 약간의 포인트를 준, 꽤나 성숙한 분위기의 초겨울 패션이었다.

    레니에가 골라준 의상을 입은 루크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보다, 고개를 저으며 코트를 벗어냈다.

    “너무 평범해.”

    이것이 요즘 유행하는 복장이라는 주장에는 반박할 여지가 없었지만….

    “이런 건 집에도 많다.”

    자신이 산 게 아니더라도,코트와 청바지 정도는 예르나가 주로 입는 복장이기에 집에 이미 충분하리만치 넘쳐나고 있었다.

    애초에 요즘 키도 그녀와 비슷해진 덕분에 굳이 입는다면 예르나에게 빌려서 입어도 되기 때문에, 새로 살 필요는 전혀 못 느끼겠다.

    그에 루크는 덧붙였다.

    “게다가, 너무 몰개성한 옷을 입으면 나는 오히려 더 눈에 띈단 말이지.”

    수인 특유의 귀와 두꺼운 꼬리를 제외하더라도, 곱슬기가 있어 넓게 퍼지는 백금빛 머리카락과, 색차이가 너무나도 뚜렷한 오드아이는 어떤 평범한 옷을 입어도 평범한 느낌이 나질 않게 했다.

    그녀가 고른 옷이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옷도 마찬가지로 조금은 화려한 편이 루크의 외모에는 더 어울리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레니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흐음-! 그렇네요, 그걸 고려하지 못했군요!

    단순히 유행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었다.

    ‘가장 유행’이라는 건 즉, ‘가장 평범함’이라는 말을 의미하기도 했으니!

    -그럼, 이번엔 다른 방향으로 접근하는 걸로!

    다시 잠시 후.

    -자,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요! 화려하죠? 따듯한데다 움직이기도 편하고요!

    “어…”

    루크는 이번엔 당황스런 목소리를 내었다.

    “여러가지로 화려하긴 하다만, 이건 좀 넝마같이 않느냐……?”

    -왜요, 나름대로 귀여운데!

    목까지 감싸는 무채색 무늬의 판초, 붉은 체크무늬 치마, 단추가 장식된 비니에 손을 반쯤 덮는 스웨터까지.

    여러가지 무늬로 화려한 인상을 주는 건 사실이나, 묘하게 부랑자같은 느낌이 든다.

    “이거 정말 유행 맞아? 언제 입는다더냐?”

    그에 대한 레니에의 대답.

    -등산이나 야영할 때 주로 입는다네요.

    “그럼 내가 아까 생각한게 맞잖아.”

    등산이나 야영, 그러니까 다르게 말하면 노숙에 적합한 복장이라는 뜻이었다.

    근시일 내에 그런 아웃도어 활동을 할 것도 아닌데, 지금 굳이 이런걸 살 이유는 없다고 본다.

    루크는 판초와 모자를 벗으며 대답했다.

    “나는 단정한 게 좋아. 이런 꼴로 밖을 돌아다니고 싶지는 않구나.”

    -흠! 그런가요! 알겠어요, 그럼 이번엔 또 다른 식으로 고르죠!

    레니에의 말에 루크는 의심을 내비쳤다.

    “이거, 이번엔 정말로 괜찮은 거 맞아?”

    또다시 잠시 후.

    이번에 루크가 입은 옷은 패딩과 후드, 청바지 조합의, 그야말로 캐주얼에 맞는 복장이었다.

    누가 입더라도 무난하게 소화할 수 있는 그 단순하고 평범한 조합은, 적당한 화려함을 바라는 루크도 어느정도 만족할만한 실루엣이 나왔다.

    한가지 문제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레니에? 이건 다이튼에게 입혀도 맞겠는데?”

    패딩이 너무 컸다.

    그러자 레니에가 대답했다.

    -요즘은 중간정도의 적당한 크기의 옷 보다는 더 크게, 또는 더 작게 입는 것이 대세라고 하더라고요! 게다가, 큰 걸 입으면 나중에 몸이 커져도 계속 입을 수 있잖아요? 그 대비효과로 몸집도 작아보이고요!

    몸집이 작아보인다는 말에 루크는 잠시 멈칫하기는 했으나, 이내 다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래도 이건 좀 아니야.”

    몸에 편하게 맞는 옷을 사러 일부러 직접 옷가게에 온 건데, 이래서야 그냥 네트워크로 큰 패딩점퍼 하나를 검색해 주문하면 되는 게 아닌가?

    그러자, 레니에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아, 그거 아쉽네요. 그럼 이제 다른 옷 보러 가죠!

    “이번엔 나 진짜 믿어도 되는 거지?”

    그녀에겐 제대로 옷을 골라 줄 생각은 있는걸까?

    어쩌면, 그냥 이 상황 자체를 즐기고 있는 건 아닌가?

    불안하기는 했지만, 일단은 어울려주기로 했다.

    또또다시 잠시 후.

    레니에가 루크를 이끌고 도착한 곳은 바로 이름을 들으면 다들 알 법한 명품 옷가게.

    이번에는 레니에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번엔 어때요! 적당히 화려하고, 몸에도 딱 맞고, 유행에도 뒤처지지 않으면서 굉장히 잘 어울리는데요!

    몸에 딱 맞는 흰색의 명품 패딩과, 그 위를 가로지르며 허리라인을 잡아주는 명품 로고가 박힌 벨트. 사이드에 명품 브랜드가 적힌 레깅스, 그리고 푹신한 깔창과 착용감이 인상적인 명품 운동화.

    그것은 그야말로 패션쇼장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수준으로 명품으로 몸을 치장한 꼴이었지만, 루크에게는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흠.”

    그래서인지, 이번엔 확실히 루크도 마음에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좋은 재료를써서 그런가, 착용감도 좋은데다 마법적인 인챈트 성능도 굉장히 훌륭했기 때문이다.

    루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며 물었다.

    “그래서, 이게 전부 다 해서 얼마라고?”

    -710만길인데요. 

    그에 루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710만? 네가 잘못 본 게 아니냐?”

    라함이 준 용돈이 20만길인데, 710만길이라고?

    그 돈이면 고가형 가정용 컴퓨터 2~3대는 사는 금액 아닌가?

    심지어 아무리 비싼 마도부품조차도 200만길의 선을 크게 넘기질 않았는데, 710만은 명백하게 단위가 이상하다.

    71만길이라고 하면 그럭저럭 납득은 하겠다만은.

    그러자 레니에가 발언을 정정했다.

    -아, 제가 잘못 봤네요.

    “그럼 그렇지.”

    옷이 어떻게 그렇게 비싸단 말인가?

    아무리 명품이어도 마법 문명 기술이 집약된 고성능 컴퓨터의 부품보다 비싸다는 건 말이 안되는 거지.

    처음 예상한대로 71만 정도의 선이라면 제 돈을 보태서라도 구매할 의향이 루크에게는 있었다.

    하지만, 이어진 레니에의 대답은 루크가 미리 예상한 것이 아니었다.

    -부가세는 별도네요. 710만길이 아니라 더 비싸요.

    그 말에 루크는 허탈한 기분이 되었다.

    그게 잘못 본 숫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진짜 옷에 그만한 돈을 받는다고?

    “아주 단단히 미쳤군.”

    그에 루크는 곧바로 피팅룸에 들어가, 혹시라도 망가지면 배상하라고 할까봐 조심스럽게 옷을 벗어 직원에게 돌려주고 나왔다.

    옷은 그냥 처음에 본 걸로 사자.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여러가지 보고나면 역시 처음에 고른게 최고

    그나저나, 역시 겨울옷은 귀여운 걸 찾기가 어렵네요!
    열심히 자료를 뒤져봐도 역시 루크가 부끄러워할 만한 건 없는듯..

    다음화 보기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다시 대마법사를 꿈꾼다 대마법사였던것은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5000 Years in the future, the Archmage Luke Irushi opened her eyes again. The world has changes so much.

Horseless carriages, an entertainment box with audio and video, food and spices she has never seen before…

And, a changed magical system!

It wasn’t just the world that chan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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