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2화. 지켜야 할 것은 ( 3 )
“그래서, 뭐가 고민이냐?”
회사 부지 내 마련된 작은 공터의 조용한 곳에 도착한 박덕춘 부장이 곧장 상담을 시작했다.
들고 있는 커피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으음.”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
박덕춘 부장에게 이야기하기에 앞서 잠깐 머리를 굴렸다.
“그, 으음. 그러니까 말이죠….”
차원의 틈이나 거기에 생긴 땅굴, 지상과 심연 등.
이런 것들을 그럴 듯하게 비유하며 설명하느라 제법 애를 썼지만, 어찌어찌 비슷하게 의미는 통했다.
“흐음. 내 생각에는 말이다.”
박덕춘 부장은 손에 든 커피가 미지근하게 식을 때까지 깊이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단 한마디도 흘려듣지 않으려 신경을 곤두세웠다.
박덕춘 부장이 제시한 여러 해결책에는 그럴듯한 것도 있었고, 내 상황과 맞지 않는 것도 있었다.
히지만 소득은 있었다.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부장님!”
“으휴. 그래, 쯧. 다음부터 이런 고민 있으면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또 상담하러 와라. 커피 정도는 사줄 테니까.”
어깨를 몇 번 두들기고 휘적휘적 사무실로 돌아가는 박덕춘 부장.
무자비한 업무 사이코패스라는 첫인상과 달리 박덕춘 부장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게 되어 기분이 묘했다.
박덕춘 부장이 말하기를, 하수는 문제를 해결하고, 중수는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며, 고수는 똑같은 문제가 또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법이라 했다.
짧으면서도 길었던 상담은 새로운 관점으로 사태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줬다.
‘일단 최선은 차원의 틈에 생긴 균열을 메우는 것. 두 번째는, 서로 충돌하지 않게 차원 사이에 지지대를 설치하는 것. 그것도 안 된다면….’
최후의 수단.
분명 쉽지 않은 과정일 것이고 적지 않은 고생이 따라올 것이다.
차원의 벽을 몽땅 허물어 버리는 것.
그리하여 심연과 지상을 하나로 만드는 거다.
그렇게 한다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
물론 생각해야 할 건 엄청나게 많다.
차원의 벽을 허무는 동시에 지상이 심연에 연착륙하도록 유도해야 하고, 지상에 가해지는 부담도 줄여야 하고, 지상에 살아가는 생명체도 살펴야 하고….
“일단 기억은 해두자.”
이건 어디까지나 C 플랜, 즉 최후의 작전이다.
설마 앞에서 A, B 플랜이 있는데 C 플랜까지 오는 일이 있겠어?
타다다닥-
조금은 가벼워진 머리로 일을 시작했다.
* * * * *
영혼의 바다로 끌려온 데보라는 대 악마 전문 협상 전문가와 긴밀한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퍼버버벅! 퍼억! 뻐억!
“자, 이제 말할 기분이 드나요? 네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었는지 슬슬 말하고 싶을 텐데요.”
《컥, 케헥! 꾸에에엑! 자, 잠깐, 쿠헤헥! 마, 말할 시간은 줘야, 꺼헉!》
주로 피와 폭력,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찢어지는 대화 시간이었지만.
아무튼 상호 간 의사소통은 이루어졌으니 대화였다.
사실 데보라가 숨겨둔 수작질은 전부 파악했지만, 반쯤은 화풀이를 겸한 교차 검증의 시간이었다.
영혼의 바다에게 사지를 결박당한 데보라의 권능은 족쇄에 묶인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데보라는 진득하고 찐한 ‘대화’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후우.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독한 녀석이군요.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입을 열지 않다니.”
케넬름이 땀 한 방울을 닦았다.
눈앞에는 처참하게 얻어터져서 복어와 문어의 중간쯤이 돼버린 데보라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끄흐…. 케헥. 크흐, 흐흐. 아, 아무리 그래도 내, 내가 크헤헥. 말, 할 것 같으냐…?》
케넬름이 작게 감탄하며 장도리를 움켜쥐었다.
이렇게 독한 녀석일수록 입을 여는 재미가 있는 법이다.
이시디움과 미카에르는 케넬름의 무자비한 손속에 감탄하며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허. 보았느냐, 막내야? 저 여인은 팔 하나로 능히 만 개의 움직임을 담아내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냐.》
《칫. 제일 까다로웠던 능력을 봉인했으니 당연히 그렇겠지.》
《크하하하! 우리 막내가 토라졌다! 허접 약골에 속도만 빨라서 삐지는 것도 제일 빠르구나!》
《으흐흑. 으흑…. 약골 머저리 막내…. 으흐흑.》
《아아악! 닥쳐, 좀 닥쳐라!》
모처럼 영혼의 바다가 시끌시끌해졌다. 썩 나쁜 소음은 아니었다.
저 멀리서는 데보라의 비명이, 여기서는 이시디움과 미카에르가 투닥거리는 정겨운 다툼이 들려왔다.
“음? 오늘은 어쩐 일로 시끌시끌하네.”
돌연 영혼의 바다에 균열이 열리며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고 초라한 인간의 모습이었지만, 외형이 내면을 가리지는 못했다.
《위대하신 분을 뵙나이다.》
《창조주를 배알합니다!》
이글거리는 태양 같은 존재감, 가까이 있으면서도 저 하늘의 별처럼 아득한 위압감.
삼라만상 온 우주를 다스리는 분이 행차하셨도다.
이시디움과 미카에르는 곧바로 무릎을 꿇으며 존경을 표했다.
“뭐야. 너희들도 있었구나.”
평소에 비하면 가볍고 털털한 말투. 허나 거룩한 옥음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니.
나비의 날개짓에 숨은 용의 발걸음이라.
《명하신 대로, 차원의 틈에 있던 사특한 녀석을 제압하였습니다.》
《크흐흐흐! 제가,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가 잡았습니다!》
《으흐흐흑. 으흑…. 우리 막내는 열심히 날아다니면서 흐흑…. 시선만 끌어주었습니다….》
머리를 조아린 이시디움이 제 손톱보다 작은 인간을 향해 열심히 제 무위를 뽐냈다.
이에 질세라 미카에르도 소리쳤다.
《무, 무슨 헛소리야! 창조주시여, 제, 제가 사이한 녀석의 발목을 붙잡아 뒀습니다. 바로 제가, 저 혼자서 말입니다! 제가 아니었다면 녀석은 영영 차원의 틈으로 도망쳤을 것입니다!》
팔짱을 끼고 가만히 듣고 계시던 창조주께서 손을 뻗으시매.
이시디움과 미카에르의 커다란 머리 위에 손을 올려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래, 그래. 둘 다 잘했어. 미카에르 너도 녀석이 도망가지 못하게 잘 붙잡고 있었고, 이시디움도 저 녀석 제압하느라 고생했어.”
《허업ㅡ!》
《흐, 허읍. 여, 영광! 영광입니다!》
이시디움과 미카에르의 머리는 모래사장을 뚫고 들어갈 기세였다.
“이시디움이 잡아 왔다는 그 새끼 얼굴이나 좀 보자…. 어, 음. 저게 뭐야? 물풍선? 말미잘?”
“저게 이시디움께서 잡아 온 악마예요. 연옥이랑 지상에 물고기를 푼 못된 녀석!”
“…저게?”
위대하신 분께서 짐짓 당황한 듯 그리 물었다.
시야 끝에는 불어 터진 복어와 문어를 닮은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휴. 면목 없습니다. 녀석의 입을 열어서 저희가 알아낸 사실과 검증해보려 했는데…. 결국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래? 뭐, 됐어. 일단 면상이나 한번 보자.”
성큼성큼,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데보라에게 향하는 걸음마다 은은한 노기가 스며들어 있으니.
영혼의 바다가 제 주인의 노함을 알아채고 은은하게 몸을 떨며 두려워했다.
“…….”
《크흐, 쿨럭. 하, 하하! 이, 이런 꼴로 다니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
“재밌었냐?”
《크하ㅡ 크하하하! 쿨럭, 쿨럭! 재미있었냐고ㅡ? 물론이다, 물론이지! 흐하, 하하하하!》
데보라가 있는 힘껏 미소를 터뜨렸다.
위대하신 분은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한 점 생각조차 읽을 수 없는 가면 같은 얼굴로 데보라를 바라봤다.
“……네 수작은 이미 다 알고 있어. 케넬름은 혹시나 해서 교차 검증하려고 했던 거지.”
그리 말하며 커다란 균열을 열어 무언가를 비추시매.
지상의 차원 부근에 이리저리 뚫린 데보라의 땅굴이라.
“네가 파놓은 땅굴. 이 땅굴로 지상의 차원을 무너뜨리려고 한 거지? 지상이라는 차원을 통째로 무너뜨려서 심연과 부딪치게 하려고.”
《……!》
설마 들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걸까.
데보라의 안면 근육이 미세하게 떨렸다.
“내가 대악마를 나름 많이 상대해봤다고 생각하는데…. 넌 선을 넘었어.”
모든 것을 바라보는 눈으로 바라보았으나, 녀석의 심상에는 펜리르처럼 두 개의 말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말뚝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구정물처럼 탁하디 탁한 영혼만이 존재할 뿐.
“쯧.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뒤틀리고 오염됐구나.”
구원할 수 있는 길을 한참이나 지나쳐 진창에 몸을 깊이 담그고 있었다.
“녀석을 탄탈로스로 데려가. 이시디움 네가 알아서 잘 해줄 거라 믿는다.”
《걱정하지 마소서. 그것이 이 몸의 본분 아니겠나이까?》
《흐하하하하ㅡㅡ!! 앞으로 이 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꾸나!》
이시디움이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데보라를 어깨에 거뜬히 짊어졌다. 커다란 균열을 열고 곧장 탄탈로스로 사라졌다.
“휴. 미카에르, 너도 고생 많았어. 일단… 연옥 상태가 말이 아니니까 정상화부터 시키고, 도와줄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원래라면 내가 도와줄 텐데… 상황이 좀 말이 아니네.”
《이 몸 부서지도록 수행해보겠습니다.》
창조주께서 직접 하명하신 것에 대해 어찌 앓는 소리를 하겠는가.
미카에르는 아무리 힘들어도 가이에드와 둘이서 이 악물고 버텨 보겠노라 다짐하며 균열을 통과했다.
《하아….》
균열을 넘어서자 보이는 연옥의 풍경은 참담하기 그지없어서.
와르르 무너진 여관이며, 노점과 옷 가게, 향료와 음식점 등등.
아직도 곳곳에서 곡소리와 앓는 소리가 흘러나오는데, 바삐 날아다니는 천사들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꼴이었다.
《……하아.》
거의 바닥부터 다시 연옥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창조주께서 힘을 빌려주신다면, 손짓 한 번에 일이 끝날 것이지만….
챱!
‘불경이다, 불경! 창조주께서는 더 중히 할 일이 있으신데 어찌 어리광을 부리려 하는 것인지! 정신 차려라, 미카에르! 자꾸 막내라고 불리니까 진짜 막내처럼 어리광이라도 부릴 셈이냐?’
해야 할 일이 태산처럼 많지만, 그럼에도 하나씩 하다 보면 언젠가는 전부 해결할 수 있으리.
와르르! 우지끈, 쿠웅!
“으악! 재판소가 무너진다! 모두 도망쳐!”
우르르 무너지는 재판소의 정문을 바라보며, 미카에르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 * * * *
“자, 다들 이리 모여봐.”
이시디움과 미카에르를 돌려보낸 다음, 나는 케넬름과 리아를 불러 머리를 맞댔다.
“지금 차원이 무너질 때까지 얼마나 남았다고 했지?”
“으음. 한 달 조금 넘게 남았어요. 정확한 시일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 정도면 됐어. 아무튼,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 정도 있는 것 같아.”
“그, 저어…. 위대하신 분께서 별빛으로 차원의 붕괴를 막을 수는 없나요?”
리아가 손을 들며 질문했다.
나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기에 고개를 저었다.
“무리야. 차원의 경계까지는 내 힘이 닿는데, 차원의 틈부터는 별빛이 안 닿아.”
순수한 별빛으로는 무리다.
하지만 매개체를 얻은 별빛이라면 가능하다.
“하지만… 매개체를 사용하려면 차원의 틈에서 가해지는 압력을 견딜 만큼 어마어마한 내구성을 가져야 할 텐데요.”
여기서 필요한 것이 A 플랜.
차원의 틈에 생긴 땅굴을 채우는 작전이다.
“우리한테는 이미 튼튼한 광물이 있잖아.”
차원의 압력을 견딜 만큼 내구성도 튼튼하고, 빠르고 쉽게 별빛을 부여할 수 있으며, 심지어 양산도 가능하다.
“여기서 드워프들을 써서 무기를 만드는 거야.”
수십 km에 달하는 땅굴을 전부 채우려면 무지막지하게 많은 무기를 만들어야겠지.
성지에 있는 광산을 무한대로 개발하고 채굴할 시간이다.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장남의 위용을 제대로 보여준 이시디움…!! 그야말로 탄탈로스 초창기부터 혼자 일해온 장남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줬군요…!! 머리 셋, 여덟 개의 손…!! 1승도 못 한 장남의 한이 여기서 풀립니다…!!
– ‘ATLAS1359’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헙… 다른 분들에게도 얼마든지 열려 있는 공간입니다…! 말하자면… 작가의 소통은 활짝 열린 문…!! 작가는 소통에 굶주려 있는 가련한 동물이기에… 부담 없이 댓글을 달아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