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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53

       좋아.

        

       내가 지구로 돌아온 것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한 번쯤은 다시 돌아오고 싶기도 했고, 게임 후속작의 스토리가 어떻게 되는지도 솔직히 조금 궁금했다.

        

       나는 반드시 아제르나로 돌아갈 생각이었고, 그러니 한 번 정도는 다시 이렇게 와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내 자매들이 넘어온 것도 뭐 그러려니 했다.

        

       클레어야 날 찾기 위해서 세상을 건너뛰는 것 정도는 할 것 같은 아이였다.

        

       사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게, 내가 직접 떠올리고도 조금 감동이었다.

        

       그리고 그런 클레어를 앨리스가 따라오는 것도 그러려니 할 수 있다. 앨리스도 나를 진심으로 아끼는 아이였고, 그러니 클레어가 나를 찾아갈 때 억지로라도 붙어서 따라왔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두 사람 모두 나의 소중한 자매였으니까.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저 사람은 대체 어떻게 온 겁니까?”

        

       “네 아버지 되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조금 섭섭하구나.”

        

       아니, 전혀 섭섭하지 않은 목소리잖아.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하더라도 다음 기회가 있다면 잡는 것이 현명한 것이 아니겠느냐, 내 딸아.”

        

       “아, 그래서 지금 이세계로 도망쳐 오셨다, 그 말씀이십니까?”

        

       나는 벌써 아파져 오는 이마를 짚었다.

        

       지금 내 손에는 아직도 갓 사 온 신선한 채소와 할인 중이던 제육볶음 재료가 비닐봉지 안에 든 채 들려있었다.

        

       어쨌거나 이쪽 세상에서도 살아야 했기에 오늘내일 정도 먹을 양으로 사 온 재료다.

        

       보아하니 오늘 저녁이면 순식간에 사라질 것 같았지만.

        

       “……미안, 언니. 나도 저 사람이 갑자기 뛰어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아냐, 내 잘못이지. 조금 더 주위를 살피고 달려들었어야 했는데.”

        

       클레어와 앨리스가 차례대로 사과했다.

        

       나는 일단 비닐봉지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고,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그리고 집게손가락으로 이마를 꾹 누른 채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니 일단은 집 안에서 신발부터 벗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다들 바로 직전까지 전장에 있었는지 먼지투성이 신발을 신고 내 원룸에 들어와 있었다.

        

       한국인으로서 그건 용납하기 힘들지, 응.

        

       *

        

       우리 셋은 지보를 한가운데 두고 앉아있었다.

        

       참고로 방 안에 있는 건 넷이었지만, 셋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둘러싸고 앉아있는 사람이 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한 명은 무려…… 내 아버지…… 라고도 할 수 있을 법한 인물이다.

        

       정작 나는 아버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일단 상대인 황제는 나를 딸이라고 생각하긴 했던 모양이지만, 그것도 자기 피가 흐르고 있다고 착각해서 그랬던 것뿐이니까.

        

       그래도 일단 나머지 두 사람은 모두 딸이긴 했다.

        

       “그래서, 지보를 이용하면 저쪽 세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까?”

        

       내 질문에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지금은 빛이 줄어들었네…….”

        

       “아마 이미 한 번 사용했기 때문이겠지.”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우리 세 사람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지보의 힘은 무한한 것이 아니다. 여신의 힘을 견제하기 위해 초대 황제가 만들어낸 것이니, 당연히 그 힘을 쌓기 위한 조건이 선행되어야 작동한다.”

        

       “……그 선행 조건에 대해서 알려주실 생각 있으십니까?”

        

       “글쎄, 여신이 힘을 사용하면 할수록 그 지보에도 힘이 쌓이겠지. 질서의 여신은 자신만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건 하니, 이쪽 세상의 질서를 망가뜨려 보는 것은 어떻겠느냐?”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내가 했던 것처럼.”

        

       테러라도 일으키라는 건가.

        

       “죄송합니다만, 이쪽 세상도 나름대로 흉흉한 것이라 웬만한 이유로 일으키는 폭력 사태는 이런저런 이유가 붙어 ‘그럴 수 있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우리가 나서더라도?”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곳은 우리가 살던 세상이 아니지. 네가 어떻게 이 세상으로 온 뒤에 적응한 듯 행동할 수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우리 같은 ‘외부인’이 너무 티 나는 행동을 하면 여신도 허둥지둥 사태를 수습하려 들 거다. 우리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사실을 밝힐지도 모르니까.”

        

       음.

        

       솔직히 꽤 그럴싸한 말이긴 했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어떤 게임에 나온 캐릭터들이랑 너무 비슷하게 생겼거든.

        

       생긴 것만 비슷한 게 아니라 목소리도 똑같다. 쓰는 언어가 일본어가 아닐 뿐이다.

        

       “죄송합니다만, 그런 폭력적인 수단은 쓸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딱 잘라 말했다.

        

       나는 이쪽 세상 출신이라고.

        

       분명 내가 살던 동네에서는 여전히 부모님과 동생이 살고 있을 거다. 그런 세상을 전란으로 몰아넣다니, 애초에 선택지에 넣고 싶지도 않았다. 남의 고향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직 고향이라고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다른 세상까지 와서 그러고 싶으세요?”

        

       앨리스가 대놓고 노려보았지만, 황제는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그냥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말해주었을 뿐이다.”

        

       얄밉기도 해라.

        

       “아무튼, 돌아갈 방법은 있다는 거지?”

        

       앨리스는 다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래도 돌아갈 방법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한결 줄어들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내가 다른 세상에서 몇 년을 살았어도, 내 입맛은 역시 한국에 맞춰져 있었다.

        

       그야 30년을 넘게 살았던 세상이니까.

        

       아제르나에서 한식을 먹기 싫어서 먹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냥 순전히 먹을 방법이 없어서 못 먹었을 뿐.

        

       슈퍼에서는 라면을 살까, 아니면 오랜만에 요리를 해볼까 진지하게 고민했었는데, 역시 일단은 요리부터 해 먹어보자는 생각을 하며 제육볶음 재료를 사 왔다.

        

       어쩌다 보니 나 혼자 먹으면 이틀, 잘하면 사흘도 먹을 양을 네 사람이 함께 먹게 되었지만.

        

       “이건 젓가락이라는 건가? 동방에서 쓴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내가 직접 쥐어보는 것은 처음이군.”

        

       저 양반은 왜 이렇게 즐거워하는지 모르겠네.

        

       차라리 평소처럼 그냥 냉철하게 굴라고. 지금 옆에 있는 두 딸이 엄청나게 껄끄러워하잖아.

        

       하필이면 펼쳐둘 수 있는 테이블이 네 사람 딱 앉을 수 있는 크기의 테이블이라서 더 불편했다. 그나마 클레어와 앨리스는 서로 마주 보고 앉아있었지만 나는 황제를 마주 보고 앉아있었으니까.

        

       “고기 흘리지 말고 그냥 숟가락을 쓰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나는 접시에 굳이 고기를 덜어서 앞에 주면서 말했다.

        

       “음? 하지만 이제는 여기서 지내야 하지 않느냐? 적응하려 노력하는 게 옳겠지.”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거 조금 맵네! 그래도 맛있다!”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해보기 위해 클레어가 그렇게 말하며 고기를 열심히 먹었다.

        

       “그러게. 우리가 살던 곳에서는 먹기 어려운 종류의 맛이네. 카레의 매운맛이랑은 또 다른 맛이야.”

        

       그래도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조금은 풀린다.

        

       …….

        

       그런데 진짜 어쩌지.

        

       당장 내일이라도 일자리를 알아봐야 하나.

        

       나 혼자서라면 앞으로 2주 정도는 그냥 푹 쉬어도 되었을 거다. 아마 길게 잡으면 한 달도 멀쩡할걸? 그 이후부터는 조금 불안해지겠지만.

        

       그런데 지금은 이 좁은 집에서 네 명이 지내게 되었다.

        

       황제야 뭐 나이 먹은 늙은이니까 배식을 조금 줄인다고 해도 큰 문제 없을 거다. 사람은 나이 먹으면 보통 신진대사가 느려진다. 그러면 조금 먹어도 오래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집에 있는 나머지 두 사람은 열다섯 살.

        

       한창 많이 먹을 때의 나이였다.

        

       “그런데, 이 집은 방이 이것뿐이냐? 확실히 넷이서 지내겠다고 한다면 조금 불편하겠구나.”

        

       그래도 내가 구한 집인데 저런 소리를 들으니 조금 성질 뻗치네.

        

       “폐하, 그거 아십니까?”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폐하는 얼마 전에 제 몸에 구멍을 내셨습니다. 저는 그래도 하루 정도 지난 기분이지만, 폐하께서는 불과 한 시간 정도 전의 일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구멍 났던 당사자의 집에 있으며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으십니까?”

        

       ‘폐하’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염치라는 게 있긴 한 걸까.

        

       “이 집은 지금 당장은 제 이름으로 되어있습니다. 제가 마음먹으면 당신을 얼마든 밖으로 쫓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주셨으면 합니다.”

        

       “호오. 강제 집행할 방법이 있다는 뜻이냐?”

        

       ……왜 협박에서 행정력의 가능성을 엿보는 건데.

        

       나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은 채 그 말을 무시했다.

        

       “하지만 두 분은 절대로 쫓아내지 않을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고마워, 언니.”

        

       “그래도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두 사람은 차례대로 그렇게 대답했다.

        

       “딸에게 무시당하는 아버지의 심정이 이런 것인가 싶군.”

        

       “…….”

        

       분명 농담조로 한 말일 텐데,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역시 얼마 전에 저 양반 칼에 맞은 적이 있어서겠지.

        

       나름대로 서로 모든 것을 걸고 싸운 것이니 뭐 이해는 한다. 어느 정도까지는. 백 퍼센트는 아니고.

        

       하지만 그래도—

        

       ……이 젓가락 던지면 꽂히려나? 그래도 나름대로 쇠젓가락인데.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분명 한 번 정도는 꽂아보았으리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외전은 짧게 끝낼 예정입니다!

    =

    개와고양이의시간 님, 후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설을 쓸 때마다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말은 역시 제 소설이 재미있다는 말씀이죠. 사실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제 글을 읽고 재미있어해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소설을 쓰고,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었기에 이렇게 꾸준히 매일 글을 쓸 수 있는 거겠죠. 지난 몇 년동안 여러분 덕분에 정말 행복하게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역시 여기 글을 쓰길 잘했다고, 처음 썼을 때부터 쭉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저의 글을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글을 쓰면서 너무 즐겁고 행복했는데, 여러분도 저의 글을 읽고 그렇게 느껴주셨을지 모르겠네요. 부디 저의 글을 읽던 시간이 여러분에게 추억으로 남기를 바랄 뿐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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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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