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4화. 지켜야 할 것은 ( 5 )
위대하신 분 가라사대.
저기 척박한 차원의 틈에 도리와 신의를 모르는 땅굴이 끝도 없이 생겼으니.
이를 내버려 두면 장차 지상에 큰 피해로 닥쳐올 것이요, 이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십만의 무기를 양성하여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고 하셨으니.
이를 줄여서 십만양병설이라 부르기로 하였다.
‘…이게 무슨 미친 헛소리야.’
플랜 A의 완벽한 전복에 드디어 미쳐버린 건가.
차원 붕괴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26일.
드워프들에게 7일의 시간 동안 10만 개의 무기를 만들도록 시켰지만, 완벽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망해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플랜 B로 넘어간다.”
“플랜 B요?”
“그래. 우리는 차원의 틈에 생긴 땅굴에 골조를 세워서 차원을 지탱한다. 일차적으로 땅굴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고, 나중에 안정화되면 무너지지 않도록 추가적인 조치를 취할거야.”
쉽게 말하자면,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천장에 추가적인 기둥을 세우는 것이다.
임시방편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하기 나름에 따라서 아주 튼튼하게 보강될 수 있는 것이 플랜 B의 장점이다.
“그렇다면 제일 중요한 골조는 어떻게 구하실 예정인지 궁금합니다.”
“음. 좋은 질문이야.”
이 계획의 핵심은 골조.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도, 드워프를 쓴다.”
결국 돌고 돌아 드워프 만능론이다.
“어…. 그냥 위대하신 분께서 직접 만드셔도 되지 않나요? 왜 굳이 드워프들의 손을 빌리시려고 하는 건지….”
“그래도 되기는 하는데. 대량으로 만드는 건 드워프들이 훨씬 더 빠르거든.”
내가 하나하나 만드는 동안 드워프들은 자동화 공장처럼 물건을 찍어낸다.
드워프들의 숫자가 몇십 명일 때는 내가 더 빨랐을지 몰라도, 거의 200명에 가까워진 드워프들의 생산 속도는 나날이 고점을 갱신하고 있었다.
– 카강! 카앙! 깡!
– “으음. 끄으응. 어휴, 후우!”
성지에서 열심히 망치질하는 드워프들의 안색이 거무죽죽하다.
요 며칠간 자비 없이 굴렸더니 반쯤 시체 꼴이다.
“어휴. 얘들은 뭔 근육 값도 못 하고 이렇게 비실거려? 응? 나는 한창 프로젝트 마감일에 2시에 퇴근해서 7시에 출근한 적도 있는데.”
새벽 2시 퇴근한 다음 아침 7시에 출근하는 기적의 근무 시간.
그때는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
“일단 조금이라도 쉬게 해주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적절한 휴식은 성공을 위한 숨 고르기가 되기도 하니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여기서 일을 더 시키면, 으으, 너무 불쌍하기도 하고요….”
“쩝. 그런가?”
생각해보면 또 케넬름과 리아의 말이 맞았다.
고된 노동 후에는 적절한 휴식이 필수니까.
이틀… 아니다. 하루 정도 드워프들에게 휴식을 제공했다. 만들고 있던 무기는 전부 취소했다.
이제 와서 플랜 A는 의미가 없어졌으니 상관없다.
– “어, 어어? 가, 갑자기 만들어야 하는 무기가… 전부 사라졌는데?”
– “이,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갑작스러운 상황에 드워프들이 얼떨떨하게 서로를 마주 보다가,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 “으하! 자유! 쉬는 시간이다!”
– “다들 술집으로 모여! 오늘 먹고 죽어보자고! 맥주! 맥주를 가져와!”
– “어떤 맛알못 새끼가 맥주를 들먹여? 수염 달린 드워프라면 당연히 보드카를 먹어야지! 그 독한 맛 속에 숨은 진정한 남자의 향기! 크으으!”
– “쯧쯧. 이런 품위 없는 녀석들. 교양있고 지성 있는 드워프라면 와인에 담긴 풍미를 즐길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 “뭐라는 거야 근본도 없는 것들이! 맥주가 근본이다, 근본!”
금방 시끌시끌 떠드는 드워프들이 술집으로 몰려갔다. 그러고는 세 부류로 나누어져서 제각기 맥주와 보드카, 와인을 마시며 떠들기 시작했다.
* * * * *
그오오오오ㅡ
거대한 용암 거인 수십 마리가 육중한 발걸음으로 돌아다니는 이곳.
노릿한 유황의 악취와 뜨거운 열기를 느끼고 있자면,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바로 이곳이 지옥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끄윽. 끄으으윽….”
하루에도 수십에서 수백 명의 죄인이 탄탈로스에 떨어진다.
그리고 지금, 탄탈로스의 지배자인 이시디움께서 몸소 잡아 온 죄인이 탄탈로스에 떨어졌다.
“커헉, 켁…! 흐윽, 끙…. 이, 이건 도대체 뭔 꼴이냐.”
포식과 적응의 대악마, 데보라.
본래의 아귀와 닮았던 외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온몸이 퍼석퍼석한 석탄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크하하.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 쓰레기!》
이시디움의 머리 중 분노를 담당하는 머리가 드물게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사납게 찢어진 미소는 먹잇감을 어떻게 가지고 놀지 궁리하는 맹수의 잔혹함을 품고 있었다.
“하….”
사방을 둘러본 데보라는 이곳이 어디인지 금방 깨달았다.
차원의 틈을 여기저기 헤매다가 지나가듯 본 공간이다.
설마 이곳이 ■이 감옥으로 쓰는 곳 일줄이야.
지독한 악취미다.
“나를 고문할 셈이냐? 하! 뭐, 화풀이라도 하겠다면 마음껏 해봐라.”
애써 의연한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다.
여기서 저 녀석에게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비참하게 패배한 짐승의 말로에 지나지 않을 것 같았다.
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살려주세요살려주세요살려주세요살려주세요살려주세요살려주세요!
곳곳에서 들려오는 고통에 찬 비명은 등골이 섬찟해질 정도다.
《어리석은 자여. 너의 그 당찬 모습이 얼마나 오래 갈 수 있는지 보도록 하겠다.》
이시디움은 이렇게 뻗대며 강한 척하는 녀석을 처음 본 건 아니었다. 아마 데보라가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으흐흑. 으흑…. 이것부터 시작하자. 으흐흑. 이것은… 피의 독수리라 불리는 것이다…. 으흐흐흑. 으흐흑.》
《가볍게 즐기기 딱 좋은 수준이지! 크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ㅡ!》
“…!”
저 멀리, 이시디움이 가리킨 피의 독수리라 불리는 형벌을 확인한 데보라의 몸이 차갑게 식었다.
대악마로 제법 긴 세월을 살아온 데보라는 실로 오랜만에 공포라는 감정을 느꼈다.
입이 오들오들 떨리고 손발이 차갑게 식어간다.
“그, 음….”
인제 와서 아는 걸 전부 말하겠다고 하면… 믿어줄까?
《우리는 아주 길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후후.》
“…….”
이시디움의 특별 관리를 받으며 탄탈로스에서의 생활을 만끽하던 데보라가 모든 것을 실토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3일이었다.
* * * * *
드워프들에게는 꿈만 같았던 짧은 휴식이 끝났다.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찬 대장간은 연신 망치질 소리와 터져 나오는 기합, 짙은 땀 내음이 가득했다.
카강! 까앙! 캉!
“흐음.”
골조를 만드는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중이었다.
200명 가까이 되는 드워프가 모조리 골조 만드는 작업에 달라붙으니 그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확실히 케넬름이랑 리아가 같이 설계한 골조라 그런가. 튼튼하게 생기기는 했네.”
내가 뭐 건축 전공은 아니니까, 골조 설계 부분은 케넬름과 리아에게 전부 위임했다.
원래 유능한 부하를 적당히 부릴 줄 아는 것이 윗사람의 미덕인 법이다.
“아뇨. 아르고스의 도움이 컸습니다. 아르고스가 아니었다면 저와 리아로는 부족했을 테죠.”
《응후후! 성지의 귀염둥이, 겸 똑똑한 천재 두뇌! 아르고스에게 감사하라고!》
순수한 별의 불꽃 덕분인지, 아르고스는 저번부터 유독 연산 능력이 필요한 곳에서 빛을 발했다.
‘소녀의 인격과 목소리를 가지고 있고, 계산 능력이 뛰어나고…. 핵심 코어도 있네.’
점점 슈퍼 컴퓨터를 닮아가는 듯한 아르고스.
– “후우. 일단 하나 완성이다!”
드워프들이 골조를 한 개 완성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기둥의 형태와는 많이 달랐다.
골조는 이리저리 뻗어나간 나뭇가지를 뚝 잘라 온 듯한 형태였다. 비좁은 차원의 틈을 효율적으로 지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생김새였다.
거기에 끝과 끝을 연결해서 연장하기도 쉬웠으니, 차원의 틈에 쓰려는 용도에 딱 맞았다.
스윽.
성지에서 드워프들이 완성한 골조 한 개를 공물로 받았다. 시제품이 완성되었으니, 이제 테스트할 시간이다.
“후우. 잘됐으면 좋겠는데.”
손끝으로 균열을 열었다. 차원의 틈 여기저기에 흉물스럽게 자리한 땅굴이 눈에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나뭇가지 모양의 골조를 손으로 들어 균열 너머로 넣어서 세부적인 위치를 조정해야… 이걸 넣어야……, 으, 으음?
“…아, 안 들어가네.”
골조가 안 들어간다.
“……….”
설마 골조가 균열을 통과하지 못하는, 그런 미친 상황이 일어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식은땀이 흐른다. 여기서 플랜 B가 전복되면, 어쩔 수 없이 플랜 C로 넘어가야 한다.
“…이, 이러면 안 되는데. 케넬름. 이거 네가 한번 해볼래?”
“알겠습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케넬름에게 골조를 넘겼다.
제 몸의 수십 배에 달하는 크기의 골조를 너끈하게 들어 올린 케넬름이 조심스레 균열로 다가간다.
쑥.
다행히 케넬름은 손쉽게 골조를 균열 너머로 밀어 넣었다.
차원의 압력에도 골조는 너끈하게 견뎠다. 다행히 내가 생각했던 최악의 흐름은 피했다.
내가 잡고 있어서 골조가 차원의 틈에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다.
‘내가 잡고 있는 것도 차원의 틈에 들어가지 못할 줄은 몰랐는데.’
이건 생각지도 못한 변수다.
“이제 차원의 틈으로 넘어가서 골조의 위치를 조정해보겠습니다.”
케넬름이 균열 너머로 몸을 밀어 넣었다. 상반신을 통과시킨 다음, 조심스럽게 하반신을 마저 통과시키려다가.
움찔.
“…으읏?”
케넬름이 움직임을 멈췄다. 당혹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온다.
“뭐야? 왜 그래 케넬름. 무슨 문제 있어?”
“아, 아뇨! 어, 아니. 자, 잠시, 이, 이게 이럴리 없는…! 으, 으앗…! 잠시, 잠시만요! 이, 이게 도대체 왜…!”
케넬름이 다리를 바둥바둥 흔들었다. 건너편에서 쿵쿵- 내리치는 소리도 들렸다.
마치 넘어가다가 중간에 낀 사람처럼….
“…너 설마 꼈니?”
“으으으읏!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끼었다뇨! 아닙니다!!”
끼었다.
누가 봐도 완벽하게 껴버렸다.
“…설마 아니겠지만. 살이 찐 건 아니ㅡ”
“아닙니다!!!!”
“어, 음. 그래.”
당연한 말이지만, 균열을 통과하는데 마르고 뚱뚱한 정도는 상관이 없다.
엄청 커다란 이시디움도 자유롭게 균열을 통과하는데 케넬름이 통과를 못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도대체 왜?”
지금까지 차원의 틈에 들어가지 못한 존재는 딱 하나, 나밖에 없다.
그것도 내가 너무 강해져서 차원의 틈이 비좁은 탓에 통과를 못 하는 건데.
이시디움과 미카에르도 차원의 틈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도대체 케넬름이 왜….
“아.”
케넬름이 이시디움, 미카에르보다 강한 거구나…?
세상에.
“이익! 으으읏! 끄으응…! 리, 리아! 저 좀 반대쪽에서 당겨주세요! 얼른!”
“네, 네엣!”
하반신만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케넬름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리아가 케넬름의 다리를 붙잡고 열심히 당겨봤지만…. 별로 효과는 없어 보였다.
‘제대로 끼었네.’
상반신이 보이지 않는 탓에 케넬름의 하반신 굴곡이 유독 강조된다.
바둥거리는 다리 사이로 반투명한 옷감이 은근하게 비치는 것이, 음, 길쭉하게 뻗은 종아리와 몇 번이고 누워봤던, 그래서 그 감촉을 알고 있는 부드러운 허벅지가.
“으으음.”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엉덩이를 바라봤다.
저 엉덩이, 손에 꽉 움켜쥐면 엄청 부드럽겠지.
Stuck in wall….
나쁘지 않은 장르였구나.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악역의 부재… 그것은 작가의 역량 부족이라는 말로 밖에 설명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걸 무어라고 변명하겠습니까… 악역…… 매력적인 악역……. 가슴이 무겁군요……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작가는 항상 모든 조언을 새겨듣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열린 문이니까요…! 말씀 감사히 새겨듣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