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5화. 나를 속인 거니
바둥바둥.
균열에 끼어버린 케넬름의 다리가 마구 바둥거린다.
나는 한참이나 그 자태를 구경하다가 도와주기 위해 팔을 걷었다.
‘…그런데 어디를 어떻게 잡아줘야 하는 거지?’
종아리?
허벅지?
아니면, 허리?
“케넬름. 내가 같이 당겨줄 테니까 기다려봐.”
제일 무난한 종아리가 좋겠다.
성난 망아지처럼 바둥거리는 케넬름의 종아리에 내 손이 닿기 무섭게ㅡ
“으햣!”
콰앙!
새된 비명과 함께 차원의 균열이 와르르 무너졌다.
“……어, 으음.”
케넬름의 종아리에 손을 올리고 있던 나는 황급히 손을 거뒀다.
“후, 후우…. 추, 추태를 보여서, 죄, 죄송합니… 다….”
균열을 부수는 것이 제법 힘들었는지 케넬름의 얼굴은 터질 듯 붉었다.
손끝에 남은 종아리의 감촉이 선명하다.
“어, 아. 아니야. 내가 더 빨리 도와줬어야 했는데.”
조금 아쉬웠다. 구경은 적당히 하고 진작에 좀 도와줄걸.
그랬다면 허벅지 정도는 만질 수 있지 않았을까.
“크흠. 크흠! 그,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상황이 조금 곤란해집니다.”
“아. 그건 그러네. 나도 골조를 설치할 수 없고, 케넬름도 못 하고….”
케넬름과 나는 리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거대한 크기의 골조는 무게가 상당하다. 리아는 골조를 들 수 없을 것이다.
“으음. 그렇다면….”
차원의 틈에서 자유롭게 운신할 수 있는 이시디움과 미카에르, 발가르.
이 셋을 불러서 골조를 설치하도록 시켜야 한다.
“크흠, 흠! 아ㅡ《아, 아아. 됐다.》
살짝 목소리를 깔면서 중후한 멋을 더해준다. 이미 편한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그건 사적인 자리였으니까 패스.
일을 시킬 때는 상사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법이다.
‘박덕춘 부장에게 배운 사회생활 꿀팁이지.’
박덕춘 부장이 지나가듯 해준 꿀팁들은 은근히 맞는 말이 맞아서, 나도 지키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스윽.
손짓을 따라 허공에 거울이 생겨난다. 거울의 표면이 살짝 흔들리더니 탄탈로스의 모습을 비췄다.
《어디 보자….》
이시디움은 뭘 하고 있나.
너무 바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후후. 우자여. 이제 조금 말할 기분이 드느냐?》
– 《크하하하! 흐하하하하! 아직이다, 아직이야! 우리가 개발해낸 특제 인형! 강철 소녀의 안으로 들어가라!》
– 《으흐흑. 으흑…. 흐흑…. 강철 소녀의 안에 있는 날카로운 가시들…. 흐흑, 흐윽…. 너, 너를 부, 부드럽게 안아줄 것이다…. 으흐흑.》
– “으하하하악! 끄아아아아아! 죽여! 날 죽이라고! 크하아악! 끄르르릅!”
– 《우후후. 너의 비명, 괴로움, 분노, 슬픔, 원망! 아, 아아ㅡ. 실로 달콤하구나.》
이시디움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목소리에는 황홀함이 가득 스며들어 있었다.
– 《크흐흐흐! 나는 이 순간이 제일 즐겁다!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
– 《으흐흐흑. 으흐흐…. 흐흐흐흐… 흐흐, 흑…. 죄, 죄인이여…. 너, 너의 고통을 달콤하게 비명 질러라…!》
“오…….”
이시디움은 세 개의 얼굴이 모두 활짝 웃으며 한 죄인을 고문하는 중이었다.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이건 내가 끼어들기 조금 그런 타이밍이네.’
사춘기 아들의 사적인 시간을 엿보는 것 같은 죄책감이 든다고 해야 할까.
이시디움이 눈치채기 전에 서둘러 화면을 연옥으로 바꿨다.
“연옥은, 음….”
사방팔방 안 부서진 곳이 없는 연옥.
미카에르와 가이에드는 날개 깃털이 모두 뽑힐 정도로 바쁘게 돌아다니며 사태를 수습하는 중이었다.
하긴, 미카에르는 지금 제일 바쁠 것이다.
미카에르도 패스.
“그러면 이제 남은 건 발가르인데….”
아마 발가르는 한가할 것이다.
심연에 지금 뭐 특이 사항이 있는 건 아니니까.
스윽.
거울이 심연을 비췄다.
– 《헛! 어버이시여, 그대를 뵙습니다!》
텅 빈 방에 홀로 옥좌를 지키던 발가르가 벌떡 일어나서 인사했다.
조금 쓸쓸했는지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다.
《크흠. 발가르여, 지금 너는 차원에 생긴 이상을 알고 있느냐?》
– 《잘 모르겠습니다. 어버이시여, 부디 가르침을 베푸소서.》
발가르에게 지상과 심연 사이의 차원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해줬다.
발가르는 심연의 악마들을 지배하는 마왕, 심연과 지상이 충돌하는 것은 녀석에게도 재난이나 다름없다.
– 《제가, 이 제가! 반드시 그 막중하고 중대한 임무를 성공시켜 보겠나이다!》
아니나 다를까.
발가르는 발 벗고 나서며 꼭 자신을 믿어달라고 큰소리쳤다.
《좋도다. 나의 아들이자 만마의 제왕, 발가르 칸 가르데나. 그대에게 차원의 운명을 맡기겠노라.》
– 《……! 감사합니다! 어버이시여!》
일단 이걸로 노동력 한 명 확보.
드워프들이 골조를 만들어내는 족족 내가 심연으로 전달하고, 발가르는 골조를 차원의 틈에 설치한다.
“아무래도 발가르 혼자서 차원의 틈에 골조를 모두 설치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불안하기는 하겠지?”
발가르는 강하다. 심연에서 견줄 악마가 없는 최강자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차원의 틈은 넓고 광활하다. 혼자서 드넓은 차원의 틈을 돌아다니며 골조를 설치하면 시간이 부족할 수도 있다.
“우음…. 하지만 지금 일할 수 있는 분은 발가르 한 분이신데요?”
미카에르는 개박살 난 연옥을 수복하느라 바쁘다.
이시디움은… 해피 해피 타임을 보내는 중이다. 언제 끝날지 모른다.
‘그냥 이시디움을 부를까?’
…아니다.
난 자식의 개인적인 시간을 존중해 줄 수 있는 부모니까.
“발가르 혼자서 차원의 틈에 골조를 설치하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리아가 허공에 떠오른 거울을 잠시 조작하다가 대답했다.
“예상하는 시일은… 대략 20일입니다. 오차 범위는 3일이고요.”
“촉박하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또 마냥 안심하기도 애매하네.”
지상과 심연이 부딪히기까지 남은 시간은 앞으로 26일.
그중 발가르 혼자 20일 동안 차원의 틈에 골조를 설치한다고 생각하면, 어, 으음?
‘어, 잠깐만.’
나는 리아를 바라봤다.
“혹시 그 계산 결과는… 발가르가 24시간 쉬지 않고 일했을 때의 결과야?”
“네. 20일 동안 먹지도, 쉬지도 않았을 때를 가정해야 간신히 20일에 맞출 수 있어요.”
“…먹고 쉬고 한다면?”
“그렇게 한다면 33일 정도 걸릴 것 같네요.”
애매하다.
상황이 너무 애매했다.
발가르를 드워프들처럼 무휴식으로 20일 동안 굴리라고? 못 할 것도 없기는 한데….
“흐음.”
균열 너머로 혼자 열심히 일하는 발가르의 모습이 보인다.
서로 의지할 형제가 있는 드워프들과 달리 발가르는 혼자였다.
사천왕 비스무리하게 의지할 부하들도 있었지만, 이제는 없다.
그런데 맡은 역할은 반드시 물리쳐야 하는 악의 수장 겸 악마들의 왕.
《…발가르여.》
– 《예. 듣고 있습니다.》
《너는 홀로 견뎌내야 하는 것이 힘들지는 않느냐? 너에게 무거운 짐을 올린 나를 원망한 적이 없더냐?》
이시디움과 미카에르는 대적자로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한 차원의 관리자로 만들어졌다.
발가르는 다르다. 타고나기를 대적자로 만들어졌으며, 만마의 제왕으로 태어났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사천왕 부하들이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없이 혈혈단신.
– 《어버이시여, 그대께서 주신 고난은 저에게 감주와 다를 바 없습니다. 어찌 이를 마다하겠습니까?》
‘고난이 아니라는 말은 하지 않는구나….’
발가르는 그 말을 끝으로 묵묵히 골조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제 몸보다 수십, 수백 배 커다란 골조를 나르는 그 모습은 마치 소년 가장의 뒷모습이었다.
‘…….’
닳아 없어진 줄 알았던 양심의 삼각형이 날카롭게 각을 세웠다.
콕콕 찔리는 가슴 한구석이 너무나 아프다.
‘이, 이게…… 이게 맞냐…?’
드워프들을 굴릴 때는 이렇게 양심의 가책이 심하지 않았는데. 발가르는 억까를 위해 태어난 태생과 그간 고생한 과거, 의지할 부하도 없다는 것이 너무 컸다.
“내가 아무리 효율을 중요시한다고 해도 이건 좀….”
내 안의 작은 선신이 고개를 저으며 꾸짖었다.
그러고도 네가 인간, 아니 신이냐! 이 악신! 쓰레기!! 아우터 갓! 인간의 마음을 모르는 외신!! 신살자나 만나버려라!
“…발가르를 도와줄 녀석을 찾아야겠어.”
저대로 혼자 일하도록 두기에는 내 가슴이 너무 아프다.
케넬름과 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도와줄 사람을 구하신다니요? 어디에서 말인가요?”
“연옥, 탄탈로스, 심연…. 저희가 가용할 수 있는 차원 중에서 차원의 틈에서 가해지는 압력을 버틸 수 있는 존재는 다 찾아본 것 아니었나요?”
아직 한 군데 남기는 했다.
“지상이 남았잖아.”
지상은 가장 많은 생명체가 살아가는 차원이다.
케니스와 한스, 데모닉, 이스칼, 프리가, 에샤와 루나, 발리안 등등.
내가 무기를 건네준 수많은 강자들이 있는 곳.
그중 아무리 적어도 둘, 셋 정도는 차원의 압력을 견디는 녀석이 있지 않을까?
“케니스랑 한스 정도 되면 차원의 압력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은데.”
솔직히 내가 얼마를 투자했는데,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케니스랑 한스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케니스랑 한스를 발가르와 한 공간에서 일하도록 하신다고요?”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서로 죽이려 들지 않으면 않으면 다행일 것 같은데요.”
“아.”
맞네.
발가르는 지금 지상의 적으로 선포된 상황.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직접 그렇게 말했다.
“쓰…벌….”
머리를 쥐어 싸매고 나지막하게 욕설을 뱉었다. 세상이 나를 억까해. 온 세상이 내 계획을 망치려고 작정하고 있어.
“그, 그래도 내가 싸우지 말라고 하면 안 싸우지 않을까?“
“애초부터 분란의 여지가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구구절절 맞는 말만 하는 케넬름. 정론 그 자체인 말에 한 줄기 희망이 꺾였다.
“그럼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하냐….”
발가르 혼자 일하도록 두라고?
드넓은 차원의 틈에서 홀로 묵묵히 일하는 발가르의 모습과, 믿음직한 형제들과 고난을 나누는 드워프들의 모습이 너무 대조된다.
드워프들은 형제도 있고, 맛있는 술도 있고, 푹신한 침대에 온갖 편의 시설이 다 있는데.
발가르는 저런 황무지에서 혼자 먹지도, 쉬지도 않고 혼자 20일 동안 일해야 한다니.
– 삐, 삐, 삐이이익!
심지어 드워프들은 귀여운 이베르도 있어서 노동 속도가 올라가는… 올라가는…, 어?
이베르의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리를 홀린 듯 바라보고 있으니, 영감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용?”
이베르는 꼬리를 흔들어 작업 속도를 올려준다.
거기에 무척 귀엽다. 귀여워서 마음의 평화를 준다.
그렇다면… 발가르에게 이베르 같은 용을 하나 분양해준다면 어떨까?
‘이거 나쁘지 않을지도?’
작업 속도가 올라가는데 거기에 귀여운 펫 역할도 겸한다고?
“내가 이베르를 어떻게 얻었더라?”
천천히 기억을 되짚었다.
아마도, 분명히… 으음. 케넬름이 나한테 무슨 알을 줬었지. 거기서 이베르가 나온 거였고.
“케넬름! 이베르 같은 다른 용을 부화시킬 수 있는 알 남은 거 있어?”
내 갑작스러운 질문에 케넬름이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 그게. 잠시만요.”
나는 그동안 케넬름의 하반신, 그러니까 엉덩이와 허벅지로 내려가려는 눈동자를 붙잡느라 부단히도 애를 써야했다.
아까 균열에 꼈던 케넬름의 엉덩이 굴곡이 계속 눈 앞에 잔상처럼 아른거리는 것이, 으음. 으으으음.
“용족의 알 말씀이신가요. 애석하게도 저한테는 남은 알이 없습니다. 용족 말고 고대의 골렘이나 거대 뱀의 정수는 있습니다. 이 정수로 골렘의 알은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황급히 케넬름의 엉덩이로 향하던 눈동자를 끌어올렸다.
들키지는 않았겠지?
“아, 그건 좀.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마왕이라면 무조건 용이지.
“…꼭 용족을 원하시는 거라면, 이베르에게 찾아오게 시키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베르가 용의 정수를 찾아오면, 그걸로 용의 알을 만들 수 있거든요.”
어째서인지 케넬름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대답했다. 손으로 은근히 엉덩이를 가리는, 아 젠장. 들켰구나.
어쩔 수 없다.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뻔뻔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으잉? 그게 무슨 말이야? 이베르가 용의 정수라는 걸 찾아온다고?”
뭐?
아니, 잠깐.
이베르한테 그런 기능이 있었어?
이베르는 그냥 귀여운 마스코트 겸, 엉덩이춤으로 작업 속도 올려주는 펫 비슷한 게 아니었어?
“…잊으셨군요. 이베르에게는 희귀한 자원을 찾아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중 용의 정수도 있습니다.”
“뭐, 라고…!”
충격, 그리고 공포.
혼란.
그 모든 감정이 한데 아우러져 나를 휩쓸었다.
눈 앞에 아른거리던 케넬름의 엉덩이마저 잊을 정도로 강렬한 충격이었다.
이베르한테 그런 개쩌는 기능이 있었다고?
희귀 자원을 찾아올 수 있는데, 지금까지 엉덩이춤만 추면서 펫인 척하고 있던 거야?
이베르, 너….
지금까지 나를 속인 거니?
* * * * *
씰룩씰룩.
성지에서 열심히 엉덩이를 흔들던 이베르는 작게 혀를 찼다.
칫, 달콤하고 안락한 나날이 영원할 줄 알았는데. 결국 끝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결국 들켰나.’
안녕, 꿀 빨던 나날이여.
이베르는 괜히 아쉬워 입을 쩝쩝거렸다.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 ‘신선우’ 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가슴과 엉덩이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저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엉덩이를 고를 겁니다…!! 엉 덩 이 좋 아…!!! 개쩌는 골반!!! 엉덩이!!! 뿌아아아아아앙ㅋㅋㅋㅋㅋ!! 빵빵!! 더 많은 빵!!! 빵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