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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55

    식사를 마친 루크가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입가를 정돈하고 있을 무렵, 레니에가 빠르게 다가와 차를 내어왔다.

    -자, 여기요.

    “…고맙군.”

    루크는 그녀가 건네는 차를 받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식사를 하고 나서 마시는 차는 언제나 환영이지.

    그렇게 루크는 차를 들어올린 뒤, 찻잔에 가볍게 입을 대었다.

    차의 맛과 향은 음식의 맛과는 달리 딱히 특별할 것 없이 익숙하기만했다.

    아무래도 그냥 집에 있던 자신이 쉽게 마시기 위해서 입맛에 맞게 따로 만들어 둔 티백을 그대로 달여서 내어 온 모양이다.

    아마, 음식을 만들면서 서랍을 뒤지다 찾은 거겠지.

    딱히 그것이 싫은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부분을 칭찬해주고 싶다.

    레니에가 이것을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루크는 차로부터 기대하는 맛과 향이 언제나 정해져 있었으므로, 자신이 바라는 맛을 온전히 낼 수 있도록 만든 찻잎을 그대로 달여서 내온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익숙하고 친숙한 찻잎의 향은, 혀 끝에 아직도 은은하게 남아있는 그 요리의 맛과 추억들을 더욱 수월하게 떠올릴 수 있도록 돕고 있었으므로.

    루크가 그렇게 눈을 감고 그 맛의 기억을 다과삼아 천천히 차를 음미하고 있을 무렵, 레니에가 식기를 다시 가져가 설거지를 하는지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와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함께 들려오기 시작했다.

    또 함께 들려오는 콧노랫소리는 덤이었다.

    그 콧노래는 오늘 외출부터 시작해서 하루종일 그녀가 흥얼거리는 그 노래의 이름은 ‘싱그러운 꽃밭의 재회’.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루크는 오늘의 기억이 하나씩 떠올라 마치 일기를 쓰는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외출을 할 때, 기다릴 때, 길을 걸을 때나 음식을 만들 때, 언제든 틈만 나면 저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으니.

    그만큼 오늘이 즐거웠다는 이야기일까?

    그렇게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천천히 정리하고 있다보면, 아까 전 레니에의 호들갑스러운 모습도 눈앞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잠깐 식사를 멈췄을 뿐인데 화들짝 놀라며 이리저리 걱정하고 사과하면서 안절부절하던 그 모습.

    레니에는 자신이 ‘지금은’ 고양이혀라는 걸 깜빡했다…라고 했었지.

    처음에는 그것때문에 자신도 적잖이 당황하는 바람에 미처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넘겨버리기는 했지만, 루크에게는 레니에가 횡설수설하면서 분명히 그 말을 했다는 기억이 남아있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이다.

    ‘지금은’이라는 말은 즉, ‘전에는’ 고양이 혀가 아니었음을 인지하고 있다는 뜻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 말은 곧 ‘레니에가 자신이 이 모습이 되기 전을 알고 있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만약에, 정말로 그녀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면, 그건 과연 어떤 형태인가?

    이 육신에 대해서는 자신도 잘 모르는 부분이 아직 남아있다.

    그것은 과연 어떤 의미에서 튀어나온 말일까?

    “레니에, 내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흐흥…. 네, 뭐죠?

    루크의 말에 콧노래를 끊으며 물소리와 접시 닦는 소리를 줄이는 레니에.

    그에 루크가 말을 이었다.

    “아까 전에, 그대가 나한테 호들갑을 떨면서 사과 할 때 말이지. 그 말을 다 기억하나 싶어서.”

    -네! 제 성능이 어떤데 물론 다 기억을 하죠! 

    “그래, 기억을 하고 있다는 말이지…….”

    -그런데 그게 왜요? 아, 역시 제 사과를 받아주시려는 건가요? 그거죠?

    레니에의 목소리는 곧, 정말이지 황홀한 지경으로 밝아졌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아, 네에…….

    그러자 금세 또 시무룩한 목소리가 되어버리는 레니에.

    그 순간, 접시가 딱딱한 무언가에 긁히는 듯한 기묘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결국 그 소리에 신경이 쓰여 집중을 할 수가 없던 루크는 결국 또 한마디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거 맨손으로 하지 말고, 고무장갑이라도 좀 끼고 하게. 접시에 흠집나겠어.”

    -아, 아앗! 네, 넷! 알겠습니다!

    그에 레니에는 뒤늦게 현재 자신의 몸인 아세릴제 갑주의 건틀릿 때문에 접시를 닦으며 흠집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눈에 띄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며 접시 닦기를 멈추었다. 

    루크는 아무리 그것이 자신의 몸이 아니라지만, 왜 그렇게 괴리감을 조율하지 못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꾸 그러는군. 하루를 썼는데, 그 몸이 아직도 익숙하지 않나?”

    -죄송해요, 제가 또 깜빡했네요.

    그것은 아직 하루밖에 안 된거라 육신 자체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거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또 다른 곳에서는 묘하게 육신적인 디테일이 살아있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마냥 ‘미숙함’을 원인으로 삼기에는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 있다.

    첫 외출을 시도한 뒤로 쭈욱 거듭된 실패에 아무래도 상당히 주눅이 들었는지, 기가 죽었다는 듯이 아주 어깨까지 추욱 늘어져 있다.

    이런 걸 보면 표정이 전혀 드러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감정표현이 아주 풍부하다.

    제스쳐의 자연스러움만 따지자면 거의 몇천년간 데이터를 축적하고 최적화해온 ‘리브’와 견주어 볼 정도로 말이다.

    보통 육신을 처음 얻은 존재들은 걸음걸이부터 어딘가 어색한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단순하게 걸음을 걷는다고만 해도, 그 움직임을 섬세하게 조율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부자연스럽고 불안한 부분이 생기게 마련이니까.

    따라서 그것이 어느정도로 자연스러운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연산력을 요구하고, 실용적인 판단을 중시하는 인공지능은 이동에 극심한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투박한 정도로 조율을 하게 된다.

    단순한 움직임따위에 너무 많은 리소스를 투자하는 것은 굉장히 비효율적이므로.

    그렇기에 골렘들의 움직임은 대부분, 일반인들도 자세히 보면 금세 부자연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인형이 움직이는 것같은 묘한 불쾌감을 말이다.

    심지어 그 리브조차, 잘 보면 역시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부분은 있다.

    그랜드 소드마스터 급의 세심한 움직임과 검술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채로운 음성표현을 완전히 포기하고 온전히 움직임만에 집중하여 그 최상급 코어 거의 전부를 사용한 덕에 꽤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여주는 모델인데도 그런데, 레니에의 첫인상은 확실히 달랐다.

    몇번정도 몸을 움직이더니 ‘이런 느낌이구나?’하며 금세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

    처음에는 그것이 그저 현대에 존재하는 어떤 컴퓨터와도 비교 할 수 없을 정도의 압도적인 성능의 결과이라며 감탄하고 넘겼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미심쩍다.

    그게 정말로 단순히 ‘레니에의 처리성능이 다른 인공지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뛰어나서’ 벌어진 일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숨겨진 이유가 있는 것일까.

    그 뿐만 아니다.

    원래 일주일로 예상한 지능 형성기간이 고작 며칠만에 끝났다는 점, 현 시점에서는 제대로 된 기록으로 남은 것도 아닌 신성력의 사용법과 성질을, 단지 아린세이아에서 만들어졌다는 이유로 자신보다 더 명확히 이해하고 있는 등의 합리적인 의심부터, 화내거나 밀어내면 바짝 엎드리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계속해서 시덥잖은 거짓말을 하는 꼴이 정말로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것 같다거나, 마침 오늘 아침에 꾸었던 꿈이 그저 단순한 꿈이 아닌 것 같다는 감정적인 의문까지.

    심지어 방금 전도, 객관적으로 더 자극적이고 맛이 좋은 수많은 현대식 레시피 사이에서 굳이 마치 노린 듯이 옛스러운 그 맛을 찾아 요리한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이 모든 걸 종합해서 보면, 레니에는 아무리 봐도 단순한 인공지능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 생각이 미치자, 루크는 곧 한가지 가능성에 도달하고 말았다.

    만약 ‘레니에’가 자신이 만든 인공지능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하나의 가능성.

    어쩌면, 정말 어쩌면…….

    “사과는 됐네. 이제 질문할 테니 답이나 해 주게.”

    -네, 물론이죠!

    어떤 질문을 하던 성심성의껏 답해주겠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레니에.

    그에, 루크는 레니에를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레니에, 여기엔 한치의 거짓 없이 제대로 답해주게. 그렇게 하겠나?”

    -네? 네. 거짓말 안 할게요.

    “음, 좋아.”

    그에 레니에는 루크가 대체 무슨 질문을 하려고 그러나 싶어 의아한 눈치였지만, 루크로서는 그것이 믿을 수 없는 화자를 대상으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였다.

    루크는 그렇게 차를 한모금 삼키며 잠깐 말을 고른 후, 꽤나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레니에, 그대는 정말로 인공지능이 맞는가?”

    -네?

    갑작스레 정곡을 찔러오는 질문에 잠시 당황했던 레니에는 미심쩍은 웃음소리와 함께 대꾸했다.

    -‘일단은’ 인공지능이기는 하죠? 

    “일단은…, 이라고? 그건 또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에요. 그야 저, ‘지금은’ 인공지능이니까요.

    “…지금은?”

    -네!

    전혀 예상치 못한 당혹스러운 대답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레니에는 그런 루크의 표정을 바라보며 이내 만족스런 목소리와 함께 웃었다.

    -그러니까, 원하시는 대답을 듣고 싶으신 거라면 질문을 다시 하셔야겠는걸요?

    착각일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망가진 가면의 모습은, 어딘가 후련한 사람의 표정으로 보이는 것은.

    -하하하! 와, 저 생각보다 힌트를 너무 많이 줬었네요? 아깝다! 제가 조금만 더 잘 했으면….

    “아깝긴 무슨! 그랬으면 큰일 날 뻔 했어! 만약 내가 눈치채는 게 늦었다면-”

    -뭐 때문에요? 설마 그 귀여운 킬코드 때문에?

    “…혹시 알았나? 언제부터?”

    -그야 당연히 처음부터죠. 근데 제가 뭐, 고작 그런 걸로 신경 써야 했나요? 아마 다음 인공지능도 어차피 저였을텐데.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기다려주셔서 감사하고,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에 대한 변명을 좀 하자면….
    이번 화는 진짜 잘쓰고 싶어서 플롯부터 총 3번 갈아엎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루크가 착각을 해소하지 못하고 어물쩡 넘어가는 평범한 이야기로 썼다가 너무 애가 눈치가 없어지는 것 같아 폐기.

    두번째는 루크가 어느정도 선에서 눈치를 채기는 했지만, 레니에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의도를 뭔가 신성력이랑 얽혀있는 사건이라고 착각해서 역으로 레니에에게 모르는 척을 하고, 레니에는 그걸 또 몰라서 서로 언제 아는 척 하나 착각하는 이야기로 써 봤다가, 이건 또 무리수두는 것 같아 포기.

    마지막 세번째가 이건데, 이게 그냥 서로 빠르게 착각이든 장난이든 뭐든 풀어버리고 스토리 빨리 진행하기로 생각한 결과입니다..

    근데 이틀넘게 너무 많은 생각을 해서 그런지, 이게 정리가 잘 된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욕심을 좀 내려놓는 것도 필요할 것 같네요…….
    이틀동안 잠은 잠대로 못자고, 그렇다고 글은 또 글대로 안써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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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다시 대마법사를 꿈꾼다 대마법사였던것은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5000 Years in the future, the Archmage Luke Irushi opened her eyes again. The world has changes so much.

Horseless carriages, an entertainment box with audio and video, food and spices she has never seen before…

And, a changed magical system!

It wasn’t just the world that chan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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