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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55

        

       그렇기에 아나스타시아가 꾸었던 꿈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악인에게 있어서는 괴물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아직 진정 지옥으로 거듭나기 전의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광기를 의무라도 되는 것처럼 흩뿌리고 다니는 그 빙의술사를 상대할 수 있는 이들은 드물 테니까.

         

       하지만 역설적으로, 횔레는 강인하기는 하되 그리 위험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악인이 아니라면 횔레에게 공격당하기는커녕 횔레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 하리라.

         

       그는 오직 악인만을 수집하는 자.

         

       그렇기에 진성은 이아린에게 가벼운 마음으로 단언할 수 있었다.

         

       별거 아니라고.

       너희에게는 별거 아닌 이야기일 뿐이라고.

         

       ‘악인이 아니니까.’

         

       적어도 진성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중, 횔레가 악인이라고 여길만한 이는 없었으며, 횔레에게 노려져서 목숨이 위험할 만한 이들도 없었다.

         

       게다가 횔레가 악인을 판단하는 기준도 그리 빡빡하지 않았다.

       그는 그 사람이 쌓아온 악업과 몸에 들러붙은 악령이나 사념을 기준으로 악인을 판별하였는데, 그 기준이 꽤 느슨한 편인지라 어지간히 악행을 벌이지 않는 이상은 그가 직접 수확하러 오는 일은 드물었다.

         

       그 대표적인 예시를 들자면….

         

       ‘윌리엄 R. 아르투아.’

         

       얼마 전 한국에 왔다가 좋은 배필을 얻고 본국으로 돌아간 악명이 자자한 망나니가 그 대표적인 예시가 될 수 있겠다.

         

       윌리엄은 온갖 패악질을 부리고 다녔다.

       정말 망나니라는 말이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패악질을 말이다.

       물론 정말 심각하다고 할만한 강력범죄는 저지르지 않았다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것 말고는 어지간한 범죄나 손가락질받을만한 짓거리는 다 하고 다녔다고 해도 무방한 망나니였다.

         

       당연히 윌리엄은 많은 사람에게 원망받았다.

       그의 망나니짓에 피해를 본 사람부터 그가 벌인 짓거리를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아르투아 가문의 사람들, 그의 문란한 생활에 연관이 되어있는 사람들까지….

         

       윌리엄은 숱한 원한을 샀고, 돈으로 그것을 어찌어찌 봉합은 했을지언정 그 앙금은 쉽게 사그라드는 재질의 것이 아니었다.

         

       아마 윌리엄에게 붙어있는 원한과 원망을 본다면, 다른 사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수준일 것이다. 어지간한 범죄자조차 명함을 내밀지 못할 수준일 수도 있었고.

         

       하지만 그런 윌리엄조차, 횔레에게 죽지 않았다.

         

       마치 사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묵시록의 기사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을 죽음이라고 소개하고 다니는 그 빙의술사는 윌리엄의 목숨을 수확할 수 있었음에도 죽이지 않았다.

         

       왜냐고?

         

       윌리엄이 그의 ‘기준’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수확할만한 악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했던 망나니짓에 중대한 범죄 몇 개가 더해졌다면 당장 횔레의 눈에 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이것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기가 막히게 선을 잘 탄다고 해야 할까.

         

       윌리엄은 정말 선을 묘하게 타면서 패악질을 부렸다.

         

       모두에게 원망은 샀지만, 어찌어찌 수습은 될 수 있는 수준.

       정말 위험한 사람에게서 원망을 사서 목숨을 위협받지는 않을 수준.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가십거리로 소비하기 좋을 만한 패악질이란 패악질은 다 벌였으니….

         

       윌리엄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아찔한 외줄 타기를 한 셈이다.

         

       어쩌면 그것은 반쪽짜리라고는 하지만 예언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위험한 선택은 예언으로 회피하고, 최악으로 향하는 길은 예언자로 살아가면서 습득한 육감으로 피해 갔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윌리엄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온갖 패악질을 부리면서 살아갈 수 있었겠지.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자유도 끝이다.

         

       윌리엄은 이제 구속된 몸이었으니까.

       결혼이라는 성스러운 계약에 묶여서, 가정을 위해 살아가야만 했으니까.

         

       ‘좋은 일이로다.’

         

       진성은 윌리엄의 결혼식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첫사랑과 영혼으로 맺어지는 윌리엄의 모습이라.

       첫사랑의 죽음이 윌리엄에게 트라우마를 심고, 그 트라우마가 윌리엄이 패악질을 부리게 만드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첫사랑과의 결혼은 윌리엄의 트라우마를 회복시키고, 첫사랑과 이어졌다는 충족감에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임이 틀림없었다.

         

       윌리엄은 지금 행복하게 지내고 있겠지.

         

       ‘그 증거로 하루가 멀다 하고 퍼져나가던 윌리엄의 망나니짓이 뚝 끊기지 않았던가.’

         

       어떤 모델과 잤다, 누구와 싸움을 벌였다, 어떤 가게를 때려 부쉈다, 누구에게 모욕을 줬다….

         

       며칠에 한 번, 주마다 한 번씩은 퍼져나가야 하는 윌리엄의 악행이 결혼식을 기점으로 뚝 끊겨버렸다.

         

       이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윌리엄은 지금 행복한 신혼을 보내고 있으리라.

       아마 밤낮 구별 없이 서로 들러붙은 채, 쾌락 속에 빠져 있겠지.

         

       ‘나의 축복이 큰 도움이 되고 있겠지.’

         

       본래 귀접이란 어마어마한 쾌락을 주는 대신 사람의 정기를 빨고 시름시름 앓게 하다가 죽게 만드는 독과 같은 것. 그나마 무인이라면 버틸 수 있지만, 윌리엄처럼 몸을 단련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리 오래 살지 못하겠지.

       하지만 진성의 축복이 있다면 그 부작용을 최소화한 채, 서로 사랑을 나눌 수 있으리라.

         

       첫사랑과의 결혼, 체력과 수명을 걱정할 필요 없이 나누는 사랑, 사람과 나누는 것으로는 쉬이 얻을 수 없을 어마어마한 쾌락까지.

         

       얼마나 좋은 일인가.

         

       게다가 윌리엄만 좋은 것이 아니다.

       윌리엄이 행복한 신혼 생활을 보내는 동안 망나니짓이 끊길 것이니 그에게 피해를 볼 이들이 더 생기지 않아 좋고, 아르투아 가문은 뒤치다꺼리를 하지 않아도 되니 행복할 것이고, 그가 한곳에 정착한데다가 살아있는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 없는 몸이 되었으니 윌리엄의 문란함에 피해를 보는 이들도 없을 것이다.

         

       ‘토마스가 좋아하겠군.’

         

       그는 분명히 기뻐하리라.

         

       모두가 행복해졌으니 이는 신의 축복이고.

       이 모든 것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니, 이것이 바로 신이 내리신 은총이라고.

         

       진성은 윌리엄과 소녀를 결혼시킨 신성술사를 떠올리며 밖을 바라보았다.

         

       깜깜한 어둠.

       넘쳐흐르는 음기.

       평소보다 깜깜한 골목들까지.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지. 오늘 밤에 주술사와 접촉할 일이 있었거늘, 다른 주술사를 둘이나 떠올리다니.’

         

       강령술사.

       빙의술사.

       신성술사.

         

       숫자도 셋이고 종류도 셋이다.

         

       그리고 3이란 길한 숫자이니.

       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닐 수 있을까?

         

       스륵.

         

       그가 일어서자 자연스레 그의 몸을 덮고 있던 얇은 이불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리고 이불과 함께 그가 대충 몸에 걸치고 있던 비단 잠옷 역시 같이 흘러내렸는데, 매끄러운 비단의 표면이 진성의 빨간 피부를 스치며 자그마한 고통을 주었다.

         

       고통이라기에는 쓰라림에 지나지 않은 거슬림이었다.

         

       그렇게 진성은 알몸이 된 채 냉장고로 향했다.

         

       이아린이 보고 싶어 하던, 하지만 진성이 허락하지 않았던 봉인된 냉장고였다.

         

       그는 냉장고의 봉인을 자연스럽게 푼 뒤 활짝 열었다.

         

       덜컥.

         

       잘 밀봉이 되어 있던 냉장고는 거친 소리와 함께 열렸다.

       문 쪽에 보관된 물건들이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작은 소음을 내었고, 냉장고가 품은 냉기가 사정없이 흘러나오며 맨몸의 진성의 피부를 시리게 만들었다. 냉기는 하얀 연무처럼 떠돌며 냉장고 안에 떠돌았고, 처녀 귀신의 입김처럼 서늘한 그것은 자욱하게 퍼져나가며 냉장고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쉬이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냉장고 안에 대량의 드라이아이스라도 넣어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손을 뻗어 냉장고 안으로 뻗으면 시린 냉기가 손을 얼려버릴 것만 같은, 그런 서늘한 광경.

         

       진성은 그 연무의 중심으로 손을 뻗어 물건 하나를 꺼냈다.

         

       투명한 물이 들어있는 자그마한 병이었다.

         

       봉인된 냉장고에 들어있다고 보기에는 너무 보잘것없어 보이는 물건이었다.

         

       병은 어디 길거리에서 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조잡하고 흔해 보였고, 안에 든 것은 투명한 것이 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밀봉 역시 뚜껑을 덮고 랩을 씌운 뒤 고무줄로 묶은 것에 지나지 않은, 보잘것없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이 자그마한 병은 외형에서 가치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허름한 상자가 안에 들어있는 물건의 본질을 훼손할 수는 없는 법이 아니던가.

         

       보잘것없어 보이는 병은 품고 있는 내용물의 가치를 대변하지 못한다.

         

       ‘성수.’

         

       병 안에 든 것은 성수였다.

       그것도 신성술사, 토마스가 자기 피를 섞어 만든 성수.

         

       엄청 귀한 물건인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당장 DMZ 쪽으로만 가도, 성수를 아낌없이 써대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성수라는 것이 그냥 마트에서 살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으니까.

       특히나 실력 있는 신성술사가 자기 피를 일반적인 성수보다 더 많이 집어넣은 물건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진성은 토마스가 고맙다면서 자신에게 준 성수를 하나 꺼낸 뒤 다시 냉장고를 닫았다.

       저 자욱한 냉기 속에서 더 꺼낼 것은 없었으니까.

         

       저벅.

         

       진성은 성수를 들고 단순한 구조의 책상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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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주술사는 초월을 원한다
Status: Ongoing Author:
The shaman realized he had gained life once more. This time, he would live a life solely for transcendence, through shamanism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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