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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56

    과거, 자신의 이 변한 모습이 레니에를 비롯한 과거의 인연들에게 들키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레니에가 잠들지 않았고, 케일이 죽지 않았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원래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장난처럼 가볍게 생각해본 것이기는 했어도, 아마도 반드시 부끄러운 꼴이 되리라는 것은 장담할 수 있으리라. 

    남성이, 그것도 다 크다못해 늙어빠진 노인이 어느날 스스로 벌인 일 때문에 갑자기 어린 여자아이가 되어버렸다고, 그것도 결코 자신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스스로 일으킨 현상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대체 무슨 반응을 보였을까…….

    그들과는 오랜 인연인만큼 루크도 나름대로 가능성 있는 반응을 몇가지 이끌어 낼 수는 있었다지만, 그런 상상도 결국 증명될 길이 없는 혼자만의 추론일 뿐인지라 공허할 따름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스스로를 인공지능이라 칭하며 레니에가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

    비록 그 본질과는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나, 그것에 한없이 가까운 존재가 되어서 말이다.

    그것은 평소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던지라, 루크는 그녀를 가장 오랜시간을 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데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알아차린 다음에는 꽤 낯이 부끄러웠다.

    다만, 그것은 이런 꼴이 되어있는 것을 그녀에게 들켜버린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아니었다.

    그 때는 그것을 몰랐다고 하나, 그러한 추태들을 전부 자신이 알던 사람에게 낱낱이 보여지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그 사실을 깨닫게되면 제아무리 냉철한 이성이라고해도 약간의 동요가 일어나기 마련이었으니까.

    루크는 그렇게 부끄러움에 괜히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보기도 하고, 왜 진작에 얘기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었지에 대한 서운함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옛 친우와 마주한 반가움이라는 감정을 넘어설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래서일까?

    항상 내리쬐던 아린세이아의 햇살조차, 오늘만큼은 확연히 다른 느낌이 들었다.

    분명히 의식이 깨어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꿈결을 거니고 있는 것 같달까.

    레니에도 자신도, 엄밀히 말하자면 서로 본체라고 볼 수는 없는 존재이기는 하다.

    레니에의 본체는 여신이 되어 잠들어있는 상태에 아린세이아로 작성된 인공지능인 상태고, 루크는 본체는 죽었지만 서클이 대신하여 그의 의지와 정체성을 이어받은 상태이니.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각각 루크와 레니에로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서로는 서로를 여전히 과거 5000년 전의 인연으로 바라보고 웃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만남은 더욱 귀하다.

    마법사의 인공지능이 된 여신과, 여신의 파편이 된 마법사라니.

    이 기묘한 대비가 마치 운명과도 같아 보이지 않는가?

    루크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나 말이지, 오늘 그대와 만나는 꿈을 꿨어.”

    -어머, 그런가요?

    레니에는 루크의 중얼거림에 꽤나 흥미롭다는 듯이 맞장구쳤다.

    “그래, 아무래도 그건 그냥 단순한 꿈은 아니었던 모양이네. 이렇게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까. 어쩌면, 그건 일종의 계시였을지도.”

    그에 레니에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어왔다.

    -후훗, 표정이 되게 좋아보이네요. 그게 대체 무슨 꿈이었는데 그래요?

    “음, 그건-.”

    루크는 그 꿈의 내용을 떠올리다 문득 입을 다물었다.

    왜냐하면, 그꿈의 내용이 영 부끄러운 꼴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 꿈은 간략히 설명하자면 옛 기억 속 레니에가 자신이 맘에 들어하는 옷을 입고 등장하여 ‘그대를 좋아했었다’고 고백하는 꿈이었다.

    만에하나 레니에가 그것은 계시가 아니라 당신의 망상이었다며 시치미를 뗀다면, 자신은 대체 뭐가 되겠는가?

    뒤늦게 사랑을 깨닫고 한참 뒤에야 후회하는 멍청이처럼 보이지 않으면 다행이지.

    게다가, 마법사적 관점으로 봐도 꿈의 내용을 알려주는 것은 꿈에 담긴 신비를 희석시키는 행동이기에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루크는 이 말을 입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흠, 자세한 건 기억이 나질 않는군.”

    -뭐에요, 재미 없게!

    실제로, 꿈이라는 특성상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이 흐릿해진 부분도 분명히 있었고.

    아무리 기억력만큼은 누구보다 자신이 있는 루크라고해도, 이 꿈은 루크가 눈을 뜨고 일어난 시점에 벌써 그 분위기와 줄거리 말고는 기억나지 않을 정도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루크는 투덜대는 레니에의 그 목소리를 뒤로하고 발걸음을 이었다.

    그러자 루크의 목적지를 읽은 레니에가 물었다.

    -그런데, 어딜 가시는거죠? 그쪽은 온통 만들다 만 세계수만 심어진 숲인데요.

    지금 루크가 향하는 방향은 과거 베리튼의 세계수를 해석하고 복제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실패작들을 옮겨두어 외형적으로 굉장히 스산한 숲.

    아무래도 관광삼아 걷기에 좋은 코스는 아니었다.

    “물론 알고 있네, 지금 그것때문에 가는 거니까.”

    -그것 때문에 가고 있다고요?

    레니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의 땔감으로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제멋대로 이리저리 얽히고 휘어지고 구부러진 그 나무들을 갖고 대체 뭘 하려고?

    그걸 자신이 만들었다는 사실이 부끄럽긴 하지만, 그것이 쓸모없다는 사실은 그것을 만든 레니에 자신이 더 잘 알았다.

    세계수를 재배하기위한 디딤돌이 되어준 고마운 식물들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그 어디에도 사용될 수 없는 잡목 수준이라는 것을.

    그에 루크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야, 가면이 망가졌으니 새로 하날 만들어야지.”

    오늘 레니에가 망가트린 가면은 2000길짜리 싸구려 장난감가면을 베이스로 만든 아티팩트.

    아무리 루크가 고품질, 고수준의 인챈트를 걸었다고 해도 결국은 재료가 그 정도로 수준미달이라면 레니에가 동작하며 내뿜는 수준의 마력방출에도 버티지 못하고 부서지고 마는 것이다.

    그런 치명적인 결함을 그냥 두고볼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루크는 이번기회에 대 마력 내구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세계수가 되다 못한 묘목들중 적당한 것을 깎아 가면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세계수는 그러한 마력 내구성은 아주 뛰어난 편이긴 하지만, 생물로서의 의지가 너무나도 강해 마법자체가 잘 인챈트되지 않는 성질이 있었으나, 세계수가 되다 만 식물의 경우는 어느정도 마력적인 저항력을 갖추면서도 인챈트가 가능한 재료였으니까.

    그에 레니에는 수줍게 망가진 가면을 고쳐쓰며 고개를 내젓고 있었으나, 목소리만큼은 크게 감동받은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루크님! 저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아이 참, 그러지 않아도 저는 이대로 충분히 괜찮은데요!

    비록 망가지긴 했어도 이 가면은 루크가 자신을 위해 직접 건네어 준 물건인만큼, 오래오래 소중히 여기며 써줄 생각이었다.

    그래도 자신을 위해 굳이 만들어준다고 하면 말리지는 않고 싶은 그런 느낌이-.

    그때, 루크가 고개를 뒤로하며 웃음기를 쫙 빼고 질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린가? 누가 네 갑주에 쓴대? 내가 쓸 가면이다만.”

    -…네?

    사실은, 그 가면도 루크의 계획에 필요한 준비물이었다.

    처음에는 인챈트에 꽤 공도 들였고, 이미 있는 아티팩트를 개선한답시고 시간을 쓰는 것도 낭비라고 생각하여 그냥저냥 사용할 생각이었다만, 이렇게 망가져버린 이상 이야기가 다르다.

    레니에가 내뿜는 마력만으로도 폐품이 되어버리는 내구성이다.

    자신이 쓰면 어떻게 되겠는가?

    결과는 안 봐도 눈앞에 보이듯 선명하고 뻔하지.

    또, 레니에에게 그 가면을 선물하면 또 무슨 일을 벌일지에 대한 것도.

    그러니 루크의 경고는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이런 말을 하게 되어 미안하지만, 그대는 앞으로는 밖에서 갑주를 사용하겠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도 말게. 아니, 애초에 밖에서 몸을 갖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더 좋고.”

    평생을 작은 키로 자라온 그녀가 오늘 하루 맞지 않는 갑주를 입고 일으킨 수많은 소동들을 생각해본다면, 그녀가 몸을 얻는 시나리오에 자연히 회의적인 관점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

    또한 그게 아니더라도, 그녀가 있음으로인해 늘어나는 시선과 집중도를 중심으로 보더라도 방해다.

    따라서 현 시점에 그녀는 지금으로서는 몸을 갖지 않는 쪽이 최선이었다.

    결국 그에 레니에는 쉬이 반박하지 못하고 풀죽은 소리를 내며 어깨를 늘어트릴 뿐이었다.

    -힝….

    그런 소리를 내도 할 수 없다.

    아무리 그녀를 사랑한다지만, 그건 그것이고 이건 이것이니까.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것은 어른으로서의 당연한 덕목이 아닌가?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다만, 한가지 약속을 할 수는 있겠지.

    “일이 모두 끝나고 함께 여유를 갖게 된다면, 그 때는 제대로 된 몸을 하나 만들어보도록 하지.”

    만약에 그녀가 신체가 몸에 맞지 않아 사고를 일으키는 거라면, 그녀의 몸에 맞는 육신을 하나 더 만들면 될 일이었다.

    -와, 정말요? 신난다! 

    루크는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자연히 자신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숲의 규모를 둘러보던 루크가 돌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이 숲이 참 울창하구만. 옛날에 이 부근은 그저 광활한 초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렇게나 많이 실패했나?”

    그에 레니에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 그게요. 제가 생물학 쪽은 영 재능이 없더라구요. 생각보다 시행착오가 많았지 뭐예요. 

    “음……. 그래?”

    -그래도 뭐, 결국은 이렇게 해냈어요. 시간은 많았으니까요.

    아무리 초점을 멀리 잡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정도로 넓게 조성된 숲.

    대체 그녀가 혼자서 얼마나 많이 시도하고 실패했을지, 눈 앞에 그려지는 듯 하다.

    -제가 아니라 당신이었다면 금방 성공할 수 있었겠지요?

    “그야 그렇겠지.”

    여신을 가둘 키메라를 만들었을만큼, 생물학은 그의 전문분야이기도 했으니까.

    세계수의 개량과 보급화. 

    그것은 자신이 연구하더라도 꽤 많이 실패했을 법한 문제이기는 하나, 이 정도로 넓은 숲이 조성되지는 않았으리라.

    그런 루크의 말에 레니에가 멋쩍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저, 엄청 재능 없지요?

    그에 루크가 답했다.

    “글쎄…. 적어도 나는 그대만큼 불사라는 말에 걸맞는 여자를 본 적이 없네.”

    자신이 아무리 재능이 없음에도, 또 이 정도로 실패했음에도 포기하지 않은 점 만큼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녀의 재능이었으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불멸자의 고집은 정말 대단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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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다시 대마법사를 꿈꾼다 대마법사였던것은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5000 Years in the future, the Archmage Luke Irushi opened her eyes again. The world has changes so much.

Horseless carriages, an entertainment box with audio and video, food and spices she has never seen before…

And, a changed magical system!

It wasn’t just the world that chan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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