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7화. 이런 건 처음이라
차원이 붕괴하여 지상과 심연이 부딪치기까지 남은 시간.
26일.
발가르에게 골조 작업을 지시하여 차원의 틈에 골조를 설치했다.
동시에 이베르를 지상으로 파견하여 용의 정수를 찾도록 했다. 발가르의 노동 효율을 높일 겸, 외로워하는 발가르를 달래기 위해서였다.
20일.
발가르의 작업 속도가 상상 이상으로 빠르다. 작업 완료까지 20일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했는데, 이 정도 속도라면 일정이 훨씬 단축될 것 같다. 생각보다 상황이 여유로워졌다.
‘…예상보다 속도가 빠르다는 건, 발가르가 쉬지 않고 일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지상으로 향한 이베르는 용의 정수를 발견했다. 뼈다귀를 물어온…, 음. 원반을 물어온 강아지처럼 기뻐하며 나에게 용의 뼈를 바쳤다.
“이게 용의 뼈란 말이지.”
화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베르가 찾아온 뼈는 겉보기에 여타 평범한 뼈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자세한 정보를 확인하면 숨겨진 가치가 드러났다.
《이름 모를 용의 뼈 : 삭아버린 용의 뼈. 길고 긴 인고의 세월을 거쳤다. 과거의 절대자를 증명한다. 어느 부족이 장식품으로 사용했던 탓인지, 깃털과 화려한 장식이 달려있다.》
나름 있어 보이는 설명.
아쉽지만 어느 용의 뼈인지는 나와 있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흑룡이나 적룡의 뼈였으면 좋을 텐데.
띠링ㅡ!
《‘이름 모를 용의 뼈’에서 ‘이름 모를 용의 정수’를 추출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해야지.”
확인을 누르자 SD 케넬름과 SD리아가 총총 튀어나와서 용의 뼈를 들고 사라졌다.
예상 대기 시간은… 30분?
“생각보다 얼마 안 걸리네.”
영혼의 바다에서 내 힘을 끌어다 사용하기 때문인 걸까.
30분 정도야 뭐, 이것저것 하다 보면 금방 지나간다.
슥, 스슥.
화면을 돌려 차원의 틈으로 향했다.
발가르 혼자 묵묵히 움직이며 차원의 틈에 골조를 설치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발가르가 너무 붕 뜨기 시작했어.’
본래 녀석의 역할은 용사라는 존재의 대적자 겸 악마들을 제어하는 마왕이다.
거기에 내가 대악마들을 구원하기 쉽도록 한곳에 모아두는 역할도 함께 했다.
그런데 이제 대악마들이 모두 사라졌다.
녀석에게 남은 것은 한참 수준 떨어지는 악마들뿐.
이제 발가르가 믿고 의지할 동반자 혹은 부하가 없었다.
‘감정적 교류가 없는 사람은 고독해지고, 고독해진 사람은 스스로를 갉아먹지.’
홀로 옥좌에 앉아있던 발가르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발가르에게는 온기가 필요하다.
“이게 녀석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네.”
태생이 모든 부정한 것들로 만든 것이라서 그런가.
발가르는 나에게만 깍듯이 대하고, 저보다 수준 떨어지는 존재에게는 오만하고 광오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이시디움과 미카에르에게는 조금 살갑게 대하는 듯했지만, 자주 만날 수 없으니 아쉬울 뿐.
발가르는 약자에게 파괴적이고, 패도적이고, 냉소적이며, 무자비하다.
그야말로 마왕.
“에휴. 내 탓이지.”
발가르는 아픈 손가락이다.
나는 녀석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녀석에게 용을 선물하려는 것이다.
용의 알에서 용이 태어나면 분명 이베르처럼 작은 새끼용일 터.
‘생명을 키우다 보면 스스로 깨닫는 것이 있을 거야.’
온갖 부정한 것들로 빚어진 발가르의 마음에 작은 새싹 하나가, 미약한 온정이 피어나기를 바란다면.
너무 큰 욕심인 걸까.
띠링ㅡ!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자니, 30분이 금방 흘러갔다.
《‘이름 모를 용의 뼈’에서 ‘이름 모를 용의 정수’를 추출했습니다.》
《‘이름 모를 용의 정수’를 통해 다음과 같은 ‘알’을 만들 수 있습니다.》
《1. 바위로 가득한 알》
《2. 비늘이 자라난 알》
《3. 눈동자가 박힌 알》
《4. 불씨가 깃든 알》(NEW!)
어디선가 한번 본 것 같은 알들이 주르륵 나타났다. 맨 마지막에 New 표시가 붙어있는 알로 시선이 향했다.
“케넬름. 이 알들이 전부 용이야?”
– “네, 그렇습니다. 알에서 어떤 종류의 용이 태어날지 자세히 설명해 드릴 수도 있겠지만….”
“아니야. 됐어. 내가 생각하고 고를래. 설명 듣고 고르면 재미가 없잖아.”
– “후후.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SD 케넬름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내 선택을 기다렸다.
고민이 깊어지는 순간이다.
‘바위로 가득한 알? 이건 딱 봐도 땅 타입이고. 비늘… 비늘? 물고기? 뱀? 바다 쪽인가? 눈동자가 박힌 알은, 으음…. 뭔 종류의 용인지 가늠도 안 되네. 이건 패스. 불씨는 뭐, 딱 보이는 종류고.’
바위와 불씨의 알.
두 종류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 무난할 것 같다.
“으음.”
무엇이 좋을까.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이내 마음을 굳혔다.
“좋아. 이걸로 하자.”
띠링!
* * * * *
《후욱. 후우욱.》
아무것도 없는 허무의 공간, 차원의 틈.
발가르는 거친 숨을 뱉으며 거대한 골조를 묵묵히 나르고 있었다.
이 기묘한 공간은 온몸에 족쇄라도 묶어놓은 것처럼 힘을 제약했다. 덕분에 발가르가 낼 수 있는 힘은 본래의 3할.
그 때문에 골조를 나르는 데 제법 힘이 많이 들었다.
《후…. 그래도 쉴 수는 없다. 발가르, 발가르 칸 가르데나! 어버이께서 너를 믿고 막중한 임무를 맡기셨음을 기억해라!》
몸이 지쳐 정신도 나약해질 때면.
발가르는 자신을 채찍질하며 쉴 새 없이 스스로를 혹사시켰다.
근육이 팽팽하게 부풀고, 턱 끝까지 내몰린 호흡이 거세게 몰아쳤다.
초월자가 처음 느껴보는 육체의 한계란 참으로 아찔한 경험이라. 발가르는 정신이 아득해지고 몽롱해지는 착각마저 들었다.
쉬지 않고 얼마나 골조를 날랐을까?
3일? 4일? 5일?
아니면, 일주일?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발가르가 이 공간에 들어온 이후 단 한 번도 쉰 적 없다는 것이다.
어버이께서는 발가르에게 적당한 휴식과 함께 일하라 말씀하셨다.
허나 발가르는 한순간도 쉬지 않았다.
‘움직여라, 발가르! 움직여! 어버이께서 너를 믿고 계심이다!’
어버이의 믿음과 기대.
이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
그런 것들이 발가르를 거세게 몰아쳤다.
무거운 몸을, 지친 정신을 억지로 쥐어 짜냈다.
눈앞이 핑 돌아가며, 입 안에서 비릿한 쇠 맛과 텁텁한 단맛이 돈다.
모든 것이 발가르에게는 낯선 경험이었다. 태어나기를 초월자로 태어난 발가르가 언제 신체의 한계에 부딪혀 봤겠는가.
그렇게 발가르는 기계처럼 멍한 정신으로, 지친 육신을 억지로 이끌어 골조를 설치하고 또 설치했다.
《………!》
풀려있던 발가르의 눈에 생기가 돌아온다.
차원의 틈에 균열이 열릴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단 하나의 경우밖에 없었다.
어버이께서 오는 것이다.
발가르는 부리나케 떨리는 팔다리를 진정시키고, 거센 호흡을 억지로 조절했다.
어버이 앞에서 못난 모습을 보이기 싫은 마음이다.
《발가르 칸 가르데나. ……으음. 또 쉬지 않고 있었던 것이냐.》
《어버이시여. 사태가 시일을 다투고 있는데, 어찌 개인의 편안함을 추구하겠습니까? 저에게 맡겨주신 바가 막중하니, 부단히도 노력하고 또 노력할 뿐입니다.》
《음….》
어버이께서 조금 못마땅한 듯 말을 흐리셨다.
어버이를 거역하는 것에 부패한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싶었지만 이건 발가르도 양보할 수 없었다.
《…좋다. 오늘은 밤낮으로 고생하는 너에게 작은 선물을 주기 위해 찾아왔노라.》
《어버이께서 주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기쁘게 받겠습니다!》
어버이게서 자신을 위해 직접 준비하신 선물이라니.
지친 육신에 비가 내리듯 활력이 돌아왔다.
《자. 받거라.》
어버이의 눈동자가 보이는 균열 아래로 아주 작은 균열이 열렸다.
균열을 통과하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주 작은 타원형의….
《…알?》
알이었다.
발가르의 육신에 비하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작고 여린 알.
공중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알을, 발가르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조심스럽게 받아냈다.
《이, 이건…. 어버이시여…?》
《용의 알이다.》
용?
알…?
…선물?
발가르의 영리한 머리는 금방 결론을 도출해냈다.
다만 결과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자신도 납득할 수 없었기에 질문했다.
《…어, 어찌하여 용의 알을 저에게…?》
《선물이다.》
《…….》
《과거 세상을 지배했던 종족의 알을 복원한 것이니, 그중 하나를 너에게 선물로 주겠노라. 잘 보살피도록 하여라. 잘 보살핀다면 더 많은 선물을 주도록 하겠다.》
그리 말씀하시면서 작은 부화기 하나를 두고 사라지셨으니.
남은 것은 발가르와 작은 알 하나, 부화기 하나.
《어, 으, 으음. 이, 이것을 그러니까, 어찌해야….》
알을 품에 안은 채 허둥거리던 발가르는 조심스럽게 부화기에 알을 올렸다.
단순한 과정이었지만 행여나 알이 깨질까, 잘못될까 행동 하나하나에 극도로 주의를 기울였기에 30분의 시간이 소요됐다.
《후….》
어떻게 된 것이 골조 나르는 것보다 이게 더 힘든 것 같다.
식은땀을 닦던 발가르는 시간이 30분이나 지난 것을 눈치챘다.
《이, 이런…!》
쉴 틈이 없는데 한눈을 팔다니.
30분의 공백을 채우고자 발가르는 더욱 바쁘게 움직였다.
《몸이 훨씬 가볍군.》
겨우 30분 쉬었을 뿐이지만, 초월적인 육체는 막대한 피로를 씻어내고 충분한 활력을 보충했다.
덕분에 작업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조금씩이라도 쉬는 편이 좋겠어.》
잎으로 24시간에 30분씩 쉬도록 하자.
어버이께서 주신 용의 알도 돌봐야 할 테니, 딱 그 정도면 될 것 같다.
그렇게 20일의 하루가 지나갔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간다.
발가르는 하루에 30분씩 알을 닦고 살피며 같은 나날을 반복했다.
어느새 차원 붕괴까지 남은 시간은 겨우 15일.
발가르가 차원의 틈에 골조 설치 작업을 시작한지 11일이 지나던 때.
쩌적ㅡ
《음?》
여느 때처럼 열심히 골조를 설치하던 발가르가 수상한 소리에 주변을 둘러봤다.
뭔가 얇은 것이 깨지는 듯한 소리.
발가르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이곳은 차원의 틈, 그것도 무너지고 있는 차원의 틈이다.
만에 하나 차원의 틈이 깨지는 소리였다고 한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최악의 상황이 일어날 수 있었다.
쩌저적, 쩍! 짜그작ㅡ
발가르가 소음의 근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잔뜩 긴장한 몸이 탁 풀어진다.
‘하. 뭐야. 알에서 난 소리였나.’
알에서 깨지는 소리가 나는ㅡ
음?
알이 깨지고 있다고?
《ㅡ으어엇?!》
어버이께서 주신 알이 깨지고 있다!!
초유의 비상사태에 발가르가 들고 있던 골조를 내팽개치고 부리나케 달려왔다.
쩌저적, 짜그락ㅡ 쩍!
부화기에 올려진 알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금이 가고 있었다!!
발가르가 알을 허둥지둥 살피며 진땀을 흘렸다.
《이, 이것이 어찌! 아니, 이게 금이 가도 되는 건가? 어, 으으어! 이대로 둬도 괜찮은 건가?!》
알은 깨져야 부화한다.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었지만, 지금의 발가르에게는 이만한 상식을 떠올릴 여유가 없었다.
어버이께서 직접 주신 알이 깨지고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요, 알이라는 존재를 처음 보살펴 봤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으며, 누군가를 죽이거나 두들겨 팬 적은 많아도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을 본 적 없다는 것이 세 번째 이유였다.
《금, 금이 가고 있는…! 알이 깨지고 있다……!》
금을 막아야 하나? 알이 깨져도 되는 물건이던가? 아닌 것 같은데?
발가르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알이 깨지는 것을 막아야 하는 거 아닐까?
막을까? 말까?
…막을까?
막자.
그렇게 마음먹은 발가르가 천천히 알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제 운명이 경각에 달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아니면 기가 막히게 우연이 닿은 것인지.
파사삭ㅡ!
“삐ㅡㅡㅡ”
알을 깨고 나온 작은 주둥이가 바깥 공기를 들이마셨다.
동시에 뜨거워지고 있던 발가르의 머리가 임계점을 통과하며 역으로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알, 알에서 새끼 용이 태어났다. 어버이께서는 나에게 이 용을 살피라 말씀하셨다. 지키고 키워야 한다. 주변의 위험 요소는?’
발가르는 빠르게 판단 내렸다.
이 공간!
이 공간 자체가 녀석에게 위험하다!
‘이곳은 나조차도 억눌리는 차원의 틈! 갓 태어난 새끼 용에게는 너무 위험하다!’
위험을 배제한다!
발가르가 순식간에 검을 휘둘러 허공에 균열을 내리그었다. 그리고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으로 새끼 용을 균열 너머로 던졌다!
삐이이이?! 삐이이이이익ㅡㅡㅡㅡ…….
균열 속으로 점점 작아지는 새끼 용의 울음소리.
균열은 마왕성으로 연결했다. 마왕성은 심연의 독무도 침범하지 못하는 곳이니, 어린 용이 지내기 좋은 환경일 것이다.
《큰일 날 뻔했군.》
발가르가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이것이 발가르와 새끼 용의 첫 만남이었다.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닌 곳은 많지만… 그냥 지나치기만 했었죠…!! 이베르야, 알지…? 그 동안 쉴 만큼 쉬었으면 이제 밥값 벌어와야지!! 언제까지 온천에 짱 박혀 있을 생각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