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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57

       뭔가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을 볼 때의 무력감을 아는가.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황제가 불리는 돈의 크기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쯤 되면 이게 경제학적으로 가능한가 싶을 정도인데, 문제는 아무튼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황제를 말릴 명분이 없다.

        

       황제가 버는 돈은 ‘실제로’ 우리에게 유용하게 쓰이고 있었다.

        

       우리는 결국 아르바이트 구하는 것을 포기했다.

        

       지낼만한 돈이 충분히 있는데 굳이 일을 해가며 스트레스받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황제가 지금까지 나에게 가져다준 돈만 하더라도 우리는 몇 개월은 그냥 방에서 뒹굴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돈이, ‘황제가 나한테 직접’ 준 돈이라는 게 스트레스의 원인이라는 거다.

        

       제국에서는 황제에게 ‘직접’ 돈을 받지 않았다. 재무관이 관리해주는 금액 안에서 황녀인 내가 쓸 돈이 정해져 있었고, 나는 거기 있는 돈을 대충 꺼내 쓰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래, 뭐, 그것도 엄밀히 따지면 황제 덕분에 쓰는 돈이긴 했다. 하지만 적어도 황제가 나에게 그 돈을 주면서 씩 웃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 나도 알고 있다. 그렇게 스트레스받고 자존심 상하면 안 받으면 그만이다.

        

       그만이긴 한데—

        

       솔직히 말해서, 누가 딱히 갚을 필요는 없다면서 그냥 수백만 원씩 주면 받지 않을 이유가 있나?

        

       “없지.”

        

       앨리스는 딱 잘라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건 결국 네가 황제보다 그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잖아. 우리가 전장에서 아버지를 이겼던 걸 기억해보라고.”

        

       “그건 그렇긴 합니다만.”

        

       나는 눈을 꾹 감은 채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이대로 가다간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갈 거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클레어가 웃으며 물었다.

        

       “그게 뭐가 어때서 그래?”

        

       “……아니, 뭐랄까.”

        

       나는…… 그래, 지금까지 입 밖으로 내지 못하던 이야기가 있다. 이쪽 세상으로 오고 나서, 앨리스와 클레어의 뒤에 황제가 딸려온 뒤에 지금까지 지내며 계속 생각만 하던 이야기.

        

       그러니까, 그 이야기는—

        

       “너무 화목한 가정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다.

        

       내가 어떻게 투덜거리건, 그냥 반항기 있는 십 대 소녀처럼 보이는 게 문제다. 아니, 이 세계에서는 성인이었으니 20대 딸처럼 보이려나. 그것도 아버지한테 빌붙어 살면서 대학교도 가지 않고 취업도 하지 않은.

        

       그런데 아버지 역할인 황제는 그냥 속 좋게 웃으면서 나한테 용돈이나 주는 거다. 그것도 수백만 원 단위로. 가끔은 천만 원 단위로.

        

       지금까지 내가 돈을 벌어본 것 중에 가장 많이 벌어본 순간에도 황제가 주는 용돈만큼 받아본 적이 없었다.

        

       “…….”

        

       “…….”

        

       그리고 겨우겨우 그 생각을 털어놓은 나를, 클레어와 앨리스는 빤히 바라보았다.

        

       “음, 사실 언니의 생각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해. 언니처럼 이쪽 세상에서 살았던 건 아니지만…… 나도 아주 어렸을 때는 돈 버는데 동원되긴 했잖아?”

        

       하지만 클레어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귀족이 되고 나서 ‘이 돈은 내가 번 돈이 아니다’라면서 자존심 상해본 적은 없어. 그냥 주어진 것에 감사하면서 살았지.”

        

       “나도 마찬가지야. 언젠가 아버지를 밀어내고 황제가 될 생각이 있긴 했지만 딱 그것뿐이고, 돈은 그냥 내거라 생각하고 썼어.”

        

       그야 앨리스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황녀였으니까. 황제가 능력으로 차별하긴 했다고 하더라도 부유한 생활에는 적응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황제가 벌고 있는 모든 돈은 네가 이쪽에서 열심히 모아둔 돈이 있어서 있을 수 있었던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큰 문제 없지 않을까? 오히려 돈을 잃으면 아버지가 미안해해야지.”

        

       아니, 그게 그렇게 되긴 하는데!

        

       “그런데, 언니. 그래서 복권을 산 거야?”

        

       “…….”

        

       그렇다.

        

       앨리스와 클레어, 두 사람과 잠깐 바람 쐬러 나갔을 때 충동적으로 구매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여기서 한 달 정도 지냈다. 아직 인터넷 방송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우리는 원룸에서 살고 있으니까.

        

       황제가 돈을 불리고 있긴 하지만, 그 모든 돈을 털어서 아파트를 사는 건 아직 조금 곤란하다. 대출을 잔뜩 끼는 수밖에 없는데, 아무리 돈을 잘 번다고 해도 주식으로 버는 것이다 보니 언제나 리스크는 있었다.

        

       지보는 우리가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천천히 밝아지고 있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나는 여신이 나를 이쪽에 일부러 보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보는 기본적으로 여신의 힘을 강탈해 황실의 피가 짙게 흐르는 이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장치였다.

        

       그러니 여신이 이쪽 세상에 꽤 많이 간섭하고 있다는 소리이긴 한데, 그 이유가 뭘까.

        

       혹시 황제가 너무 일을 잘한 나머지 이목이 이쪽으로 쏠리고 있기라도 한 걸까?

        

       내가 우울하게 복권을 내려다보자 클레어가 내 등을 툭툭 쳤다.

        

       “혹시 모르잖아? 이 복권이 당첨되어서 커다란 투자금이 되면 언니의 생각도 조금은 바뀔지 몰라. ‘확실하게 엄청난’ 도움이 된 거잖아?”

        

       과연 그럴까?

        

       나는 진지하게 고민에 잠겼다.

        

       *

        

       그리고, 복권 당첨 결과가 나온 날.

        

       나는 또다시 황제와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우리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내 뒤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나란히 앉아있는 앨리스와 클레어도 말이 없었다.

        

       참고로 나는 이마에 땀이 살짝 맺혀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황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얼마까지 투자해줄 수 있느냐?”

        

       “…….”

        

       어, 그게.

        

       사실 아제르나에서의 나는 돈에 대한 개념이 그렇게 확실하게 잡혀있지 않았다.

        

       아니, 계산을 못 했다는 소리는 아니다. 어떤 것을 사면서 아, 이건 서민들에겐 비싸겠구나, 이 정도면 사 먹을 순 있겠구나, 하고 하는 생각은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돈을 쓰면서 현실감이 느껴진 적은 없었다.

        

       물론 아제르나에서도 못 살던 시절이야 있었지만, 그때는 내가 직접 돈을 쓸 수 없었으니 ‘아껴보거나’ 한 적 자체가 없다.

        

       나에게 아제르나의 화폐는 그냥 줄지 않는 무언가였다. 물건을 살 때 바가지를 쓴다고 생각해도 따로 값을 깎은 적이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원화’는 다르다.

        

       나는 허리띠 졸라가면서 돈을 아끼며 살아본 적이 있다. 십만 원 짜리 피규어를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 하다가 결국 포기한 적도 있고, 영화 한 편을 보더라도 신중하게 고르고, 극장 가기 아깝다고 생각하면 OTT에 업로드되길 기다리던 사람이다.

        

       이쪽으로 돌아온 직후에는 조금 여유 있게 살아보려고 했다.

        

       혼자 버는 것보다는 같이 사는 사람들이 벌면 조금은 여유 있을 것이고, 모아둔 돈도 있고. 지보도 있으니 그 돈이 다 떨어지기 전에는 돌아가겠거니 했었다.

        

       그러니 그런 나에게 20억 원이라는 당첨금은 무시무시한 금액이었다. 같은 번호가 죄다 맞아서 1등 상금이 중첩되어 세금을 다 내고 나서도 그 정도 금액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황제는…… 천만 원을 고작 한 달 만에 거의 1억 원 가까이 불렸다.

        

       그렇다면, 황제에게 그 이상의 돈을 투자하면 어떻게 될까?

        

       “……1억은 어떻습니까?”

        

       나는 조금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약 황제가 없었다면, 나는 투자 따위 꿈도 꾸지 않았을 거다.

        

       일단 아파트를 하나 사 얘네들이랑 이사하고, 남은 돈은 모조리 통장에 넣어두고 이자나 받았을 거다.

        

       솔직히 나로서는 1억을 무려 ‘투자’에 쓴다는 것도 조금 이해가 안 가는 일이다. 없어질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문제는, 내가 그런 가정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황제라면?’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거지만.

        

       “음.”

        

       황제는 한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내 쪽으로 상반신을 살짝 내밀었다.

        

       “기왕 돈이 생긴 거, 더 투자해보는 건 어떻겠느냐?”

        

       “…….”

        

       “모든 돈을 다 투자하라는 것은 아니다. 아니, 절반도 아니다. 5억 정도는 어떻겠느냐.”

        

       5억.

        

       내 생전에 만져본 적도 없는 돈이었다.

        

       “……음.”

        

       내가 망설이고 있으려니, 황제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하긴, 오가는 돈이 커지면 여러모로 문제도 생기는 법이지. 예를 들어, 네가 나한테 돈을 그냥 ‘준다’면 증여세를 내야 한다. 안 그래도 복권 당첨금에서 세금을 떼어갔는데, 여기서 더 떼게 된다면 화가 나겠지.”

        

       황제의 말에 나는 그제야 잊고 있던 증여세를 떠올렸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느냐? 차용증을 쓰고 네가 나한테 돈을 빌려주는 것이다. 그럼 나는 그 돈을 불려서 갚도록 하마. 그렇게 하면 증여세 문제는 해결된다. 너는 법정 이율에 따라 돈을 받을 수 있고, 나는 네게 돈을 갚아야 할 의무도 생기지.”

        

       “……우리는 결국 돌아가게 될 텐데요.”

        

       “그래서 내가 갚지 않으리라 생각하느냐?”

        

       황제는 웃었다.

        

       “한가지 말해두마. 나도 너희가 돌아갈 때 따라 돌아갈 생각이다. 나로서는 물러나더라도 권력을 가진 편이 더 즐겁기 때문이다.”

        

       “…….”

        

       그건 그거대로 머리 아픈데. 돌아가서도 권력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소리잖아.

        

       “하지만 내가 너의 돈을 갚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면 너는 나를 고소할 수 있겠지. 잘하면 구속도 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나는 너희를 따라 본래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냐? 지보는 너희에게 있으니까.”

        

       아.

        

       “그러니, 나는 법적으로나 상황으로나 너에게 반드시 돈을 갚아야 하는 상황이 되는 거다. 자, 어떻게 하겠느냐? 법정 최대 이율로 계산하더라도 돈을 돌려줄 자신이 나에게는 있다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돈을 돌려줄 수 있을지 모르지.”

        

       “…….”

        

       결국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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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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