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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6

    그리운 광경이 보였다.

    아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 보였다.

    창백하게 내리쬐는 달빛.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정체불명의 한기.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의지를 가진 어둠.

    내 기억 속에 있는 지옥 같은 서울숲이었다.

    ***

    춥다.

    추위 따위는 느끼지 못할 텐데, 너무 추웠다.

    어둑어둑한 한밤중의 숲속에서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고 있었다.

    비가 오고 있는데도 하늘 위에는 정체불명의 보름달이 보였다.

    폐가 없는데도 숨이 차는 것 같았다.

    맨손으로 하염없이 땅을 판다.

    말랑한 회색 피부는 돌을 고르고 땅을 파헤치느라 찢어지고 짓이겨졌다.

    상처투성이 손.

    손에 난 상처에서는 노란 불꽃이 핏물처럼 흘러내렸다.

    오브젝트의 삶을 바랐지만, 이런 삶을 바란 건 아니었는데….

    숲속에서 눈을 뜬 뒤로는 언제나 죽음 근처에서 뒹구는 기분이 들었다.

    땅을 딛고 있는 맨발도 상처투성이.

    말랑말랑한 발바닥은 숲속에서는 쉽사리 찢기고 뚫렸다.

    평범한 나뭇가지도 손쉽게 발바닥을 뚫고 나왔다.

    입을 벌린다.

    답답한 마음에 인간 시절처럼 입을 벌리고 소리치지만 소리가 나지 않았다.

    속 시원하게 고함이라도 쳤으면 기분이 좀 풀렸을 텐데….

    땅을 계속 파지만, 그 끝은 보이지 않았다.

    보름달의 빛을 받으면 죽는 두더지를 죽이기 위해서, 그저 한결같이 두더지가 잠든 곳을 파 내려갔다.

    이 가혹한 숲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땅을 계속 파고들었다.

    인간보다 무른 손발은 딱딱한 바닥을 파고들 때마다 너덜너덜하게 변했다.

    인간보다 예민한 감각은 피부에 난 가벼운 상처에도 몸부림치게 했다.

    인간처럼 소리 내어 울지도 못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는 가시질 않았다.

    이 어두운 밤은 도저히 끝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두더지가 잠든 땅은 아무리 파도 그 끝이 보이질 않았다.

    ***

    땅을 계속 파던 중, 문득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이 고통스러운 광경은 이미 겪었던 일이었다.

    느닷없이 숲속에 떨어진 뒤, 세희 연구소로 가기 전의 일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오브젝트를 죽이던 시절이었다.

    지금의 나는 행복한 연구소 라이프를 즐기고 있을 텐데….

    지금 보이는 건 잠든 두더지를 죽이기 위해서 계속 땅을 파고 있던 날의 기억이었다.

    몇 날 며칠 동안 두더지를 쫓아다니면서 땅을 파던 시절의 기억.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 날의 기억은 승리의 기억이었다.

    오랜 기간 두더지를 죽이기 위해서 노력해 왔던 결실을 손에 넣었던 날.

    보름달이 내리쬐는 밤, 비가 오는데도 달빛이 보이던 날.

    잠든 두더지의 보금자리를 파헤쳐, 달빛을 두더지에게 쏘이던 날의 기억이었다.

    두더지가 달빛에 타오르며 재가 되고, 그토록 얻고 싶었던 유령화를 손에 넣은 순간의 기억이었다.

    힘들었지만, 성공의 순간이니만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유령화를 얻기 전의 서울숲의 장르가 항거할 수 없는 공포 스릴러라면, 얻은 뒤의 서울숲은 주인공이 이길 가능성이 보이는 블록버스터였으니까 말이다.

    그걸 깨닫자, 세계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 꿈이었구나.

    이 가짜 서울숲 이면에서 흐르는 황금 나무의 맥동이 느껴졌다.

    세계가 박살나는 것과 동시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

    깨어나 보니 눈앞에 보이는 것은 황금 사신 펀치였다.

    뚜시뚜시.

    걱정스러운 표정의 황금 사신이 내 볼에 펀치를 날리고 있었다.

    이거 지금 나를 깨우려고 하고 있는 건가?

    쉬지 않고 펀치를 날리던 황금 사신은 내가 눈을 뜬 것을 발견하자 주먹질을 멈추고 볼에 달라붙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황금 나무를 돌아보니, 변한 점은 없었다.

    아, 역시 내가 잠에서 깨어나는 건 인간이 깨어난 걸로 쳐주지 않는 건가?

    역시 진짜 인간이 깨어나야지만 조건이 달성되는 것으로 보였다.

    잠깐 잠든 사이에 시간은 상당히 지나가 있었다.

    이러다가 하루가 지나가버리면 곤란한데….

    하루살이 황금 사신이 사라져버리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황금 사신을 다시 만들어낸다고 쳐도, 지금과 똑같은 행동을 한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예상하기 힘들고, 말도 안통하고, 마음대로 조종할 수도 없으니 섣불리 예측하기에는 좀 그랬다.

    파괴 조건이 바뀌지 않을까 싶어서, 황금 나무위에 손을 대고 다시 파괴 조건을 확인했다.

    [인간이 나무의 악몽을 극복할 것.]

    그대로네.

    하지만 바뀐 점이 있었다.

    파괴 조건이 바뀌지 않았지만, 나무에서 느껴지는 맥동에서 다른 것들이 느껴졌다.

    이제 왠지 다른 사람의 꿈속으로 침입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무를 타고 흐르는 맥동에 몸을 실고 다른 사람의 꿈속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무의 악몽을 한 번 극복했기에 나타난 현상일까?

    나는 볼에 붙어있는 황금 사신을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또 쓰러지더라도 걱정하지 말라는 의사 표시였다.

    황금 사신의 머리를 툭툭 두들겨 준 다음, 나무의 맥동에 다시 한 번 몸을 맡겼다.

    Zzz

    ***

    빈곤한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엉성한 건물들.

    만들다 만 것 같은 엉성한 외곽 도시 묘사.

    다급한 표정으로 도망 다니는 남자의 주변 말고는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다.

    아마 이곳은 지금 도망 다니는 저 남자의 꿈속일 것이다.

    남자는 공포에 빠진 채,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었다.

    도시를 파괴하면서 쫓아오는 괴물을 피해서 말이다.

    “크아아아앙!”

    우렁찬 소리를 내면서 건물을 쓰러트린 것은….

    거대한 회색 사신이었다.

    아니, 저 남자는 도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거대 회색 사신의 생김새가 미묘하게 나랑 다르게 생겨서 더욱 기분 나빴다.

    열심히 도망가던 남자는 거대 회색 사신이 입에서 뿜어낸 불꽃을 맞고는 재가 돼서 죽어버렸다.

    그리고 이 엉성한 세계는 다시 뒤로 되감기기 시작했다.

    무너진 건물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불타버린 차량과 가로수도 다시 생겨났다.

    마지막으로 아스팔트 바닥 위에 쓰러진 남자까지 허공에서 나타나자, 이 세계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살려줘!”

    남자는 건물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회색 사신의 실루엣을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남자는 거대 회색 사신에게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거대한 회색 사신이 불을 뿜으며 남자를 뒤쫓고, 남자는 어김없이 밟혀 죽거나 타죽었다.

    그럼, 이 남자가 이 꿈을 극복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살아남도록 도와주면 되는 건가?

    우선 같이 도망가면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쪽으로 계획을 세웠다.

    온 몸을 식은땀으로 푹 적신 남자가 허공에서 생겨나자, 나는 그 남자 앞으로 달려 나가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남자의 반응은 내 예상과는 달랐다.

    “컥, 회… 회색 사신!”

    하지만 내 모습을 본 남자는 그대로 심장을 부여잡더니 그대로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다가가서 보니 파랗게 질린 남자는 이미 죽어있었다.

    또 심장마비야?

    왜 나만 보면 자꾸 숨이 넘어가고 그래?

    남자의 심장이 멈추자, 꿈 속 도시는 다시 되감기기 시작했다.

    이번 오브젝트, 생각보다 쉽지 않네….

    ***

    폴짝폴짝.

    황금 사신은 잠든 회색 사신의 배 위에서 점프를 하며 놀고 있었다.

    신나게 뛰어놀던 황금 사신은 갑자기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곤 아쉬운 표정으로 회색 사신 쪽을 돌아보더니 결연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2번째 황금색 물결이었다.

    황금 사신이 우르르 몰려간 곳은 박람회장의 외곽.

    오브젝트들이 황금 사신을 피해서 도망친 곳이었다.

    황금 사신들과 인간에게 적대적인 오브젝트들은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마치 전쟁이라도 벌이려는 것처럼 황금 사신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오브젝트들도 심상치 않은 황금 사신의 분위기를 느낀 건지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딱히, 누가 신호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제히 서로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물리 면역이 없는 오브젝트들이었다.

    그들은 황금 사신의 물결에 휩쓸려 가장 먼저 사라져버렸다.

    그 다음으로 사라진 것들은 재생력이 없는 물리 면역 오브젝트들이었다.

    물리 면역을 가지고는 있지만, 파괴 조건은 보통의 물건이나 기계, 생물과 다르지 않은 녀석들이었다.

    황금 사신은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날려 물리 면역 오브젝트의 몸을 파괴했다.

    물론 몸이 훨씬 조그마한 황금 사신은 겹쳐지는 순간 죽음을 맞이했다.

    수많은 황금 사신들이 한줌의 불꽃이 돼서 사라졌다.

     

    물리면역을 가진 오브젝트들마저 사라지자, 인간에게 적대적인 오브젝트들도 정말 한줌밖에 남지 않았다.

    특별한 방법 없이는 죽일 수 없는 오브젝트들.

    ‘눈’을 가지지 못한 황금 사신들은 죽일 수 없는 오브젝트들.

    그런 오브젝트만이 남아있었다.

    대신 황금 사신에게는 회색 사신과 같은 ‘장작’이 있었다.

    아주 적은 양이지만 ‘눈’의 연료인 ‘장작’이.

    남아있는 황금 사신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겹치기에 당한 오브젝트들은 황금 사신의 크기만큼 부피를 잃어버렸다.

    죽음의 조건을 채우지 못한 손상은 당연히 회복되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황금 사신이 죽은 자리에는 조그마한 장작의 불씨가 남았다.

    아주 작은 황금색 불꽃.

    그 불꽃은 그들을 죽이진 못해도, 그들을 회복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말 그대로 황금 사신들은 자신의 몸을 태워서 싸웠다.

    적대적인 오브젝트가 모두 움직이지 못 할 때까지, 그리고 모든 황금 사신이 불꽃으로 덧없이 스러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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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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