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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6

   

    배가 묵직하다.

   

    이 안정적이고도 익숙한 무게감.

   

    슬쩍 눈을 떠 아래를 내려다보니 역시나 춘봉이가 보였다.

   

    “오빠….”

   

    잠꼬대를 웅얼대는 춘봉이의 눈가가 발갛다.

   

    문득 서준의 머릿속에 단편적인 기억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가기 시작했다.

   

    “으음….”

   

    눈살이 찌푸려진다.

   

    두통도 두통이거니와, 스스로의 행동이 오롯이 자신의 의지만으로 이루어졌음을 확신할 수 없었다.

   

    꽈악-!

   

    주먹을 쥐어보자 묘하게 힘이 넘친다.

   

    서준은 눈을 감고 스스로의 내부를 관조했다.

   

    나름 생기를 띠어가던 심상 속 풍경이 한바탕 폭풍이 몰아친 듯 난리가 났다.

   

    썩어 문드러진 매화 나무가 커다랗게 피었고, 흘러넘친 강이 주변을 휩쓸어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 또한 자연스러운 하나의 풍경이니, 잘못되었다 일축할 수는 없는 모습이었다.

   

    “하아….”

   

    멍하니 한숨을 내쉬니 배가 들썩인다.

   

    정확히는 경기를 일으키며 잠에서 깬 춘봉이가 번쩍 고개를 치켜든 것이었다.

   

    “오빠…!?”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던 춘봉이 울상을 지었다.

   

    “빨리 일어나라고 바보야….”

    “넹.”

    “으꺄아아악…!!”

   

    춘봉이가 펄쩍 뛰었다.

   

    착지점으로 예상되는 곳은 서준의 배 위. 충격에 대비해 힘을 주었지만, 한 팔과 한 다리를 이용해 착지한 춘봉이 숨을 헐떡였다.

   

    “모, 몸은 괜찮아…!?”

    “어. 멀쩡해.”

   

    기묘한 자세로 착지한 춘봉이를 번쩍 들어 앉혀두고 몸을 일으키니, 그녀가 바짝 다가와 얼굴을 들이댔다.

   

    “더 누워있어! 물이라도 갖다줄까!?”

    “아니, 괜찮아. 그보다 비무 대회는?”

    “지금 그게 중요해!?”

   

    바락 성을 낸 춘봉이 씩씩대며 억지로 서준을 자리에 눕혔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어떻게 되기는! 일단 사흘 뒤로 미뤄졌어!”

    “오, 잘됐네.”

   

    실실 웃자 춘봉이의 시선이 점차 날카로워진다.

   

    “야, 이서준.”

    “응?”

    “너 지금 웃음이 나와? 너 진짜 큰일날 뻔한 건 알고 이러는 거야?”

    “아유 괜찮아.”

    “괜찮기는! 너 자칫 잘못했으면 그 자리에서 죽었어! 아무리 네가 재능이 있어도 화산파 장로한테 그렇게 달려드는 게 말이 돼!?”

   

    입을 다물자 한참을 씩씩대던 춘봉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 되겠어. 너, 비무 대회고 뭐고 한동안은 일어설 생각도 하지 마.”

    “아니, 진짜 멀쩡하다니까?”

    “…….”

   

    이번에는 춘봉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침묵이 침묵이 아니다.

   

    그녀의 눈이 어느 때보다도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결국 얌전히 취침 자세를 취한 서준이 머쓱하게 웃었다.

   

    “많이 이상해 보였냐?”

    “그러면. 그게 정상이라 생각해?”

    “가끔 그러더라고.”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는데 어째 천장이 낯설다.

   

    묵던 객잔의 천장이 아니다.

   

    희미하게 풍기는 약재 냄새로 보건대 아무래도 어디 병원쯤 되는 것 같았다.

   

    “근데 진짜 괜찮아. 홱 돌아도 평소에 안 할 짓은 안 하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조금 과하긴 했지만, 만약 정신을 멀쩡히 차리고 있었더라도 장로에게 달려들긴 했을 것이다.

   

    그런 서준의 말에 춘봉의 눈썹이 축 처졌다.

   

    “내 몸 말고 니 몸 걱정부터 좀 해.”

    “멀쩡….”

    “멀쩡하다 하면 진짜 죽여버릴 거야.”

    “오….”

   

    서준이 실실 웃었다.

   

    그런 서준을 바라보던 춘봉이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엉덩이를 끌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래서, 너 뭐 나한테 숨기는 거 있냐?”

    “숨기는 거? 딱히 없는데.”

    “거짓말 하지 마. 전부터 조금 이상하긴 했어. 이것저것. 나한테 말 안 한 거 있지?”

   

    없는데용? 장난스럽게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워낙 춘봉이의 눈빛이 진지해 그랬다가는 그녀가 상처받을 것 같았다.

   

    “이거랑 상관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말 안 한 게 하나 있긴 하지. 별거 아닌 거지만.”

    “뭔데. 말이라도 해봐. 아니면 나한테도 말 못 할 얘기야?”

    “그건 아니지. 너한테 못 할 얘기가 어디 있다고.”

   

    머리를 긁적이던 서준이 자리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춘봉이가 도로 누우라는 듯 눈빛을 보냈지만, 누워서 할 만한 얘기는 아니다.

   

    “전에 말했었잖아. 나 이세계 출신이라고.”

    “그랬지.”

    “그냥 평범하게 살긴 했는데, 조금 특이한 일이 하나 있었거든.”

   

    서준이 어릴 적의 일이었다.

   

    흐릿한 기억에 의하자면 그의 가정은 화목했다.

   

    부모님은 사이가 좋았고, 아들인 그를 끔찍이 아꼈다.

   

    최소한 서준은 그리 생각했다.

   

    “근데 엄마가 바람이 났어. 그러더니 갑자기 집을 나가버리더라고.”

   

    충격을 받은 아빠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서준을 학대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당신의 몸조차 챙기지 못하면서 서준의 몸만큼은 살뜰히 챙겼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는데…, 어느 날 엄마가 돌아왔어.”

   

    그녀는 울면서 아빠에게 싹싹 빌었다.

   

    자신이 잘못했다고. 우리 다시 시작하자고.

   

    당시의 아빠가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빠는 엄마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는 오히려 전보다도 엄마를 사랑으로 대했다.

   

    그렇게 다시금 화목한 가정이 돌아오는 듯했다.

   

    “며칠 정도 지났던가? 한 달은 안 됐던 거 같은데. 아무튼 그 즈음에 여자 하나가 찾아왔어.”

   

    늦은 밤 무렵이었다.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던 서준은 초인종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살며시 나가 현관문 쪽을 바라보니 아빠가 누군지 모를 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의 모습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가슴이 크고, 얼굴이 예쁘장해 티비에서나 볼 법한 그런 여자.

   

    그런 사람을 실제로 보니 꽤 신기했었다. 

   

    그래서 가만히 두 사람이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엄마가 나오더라고. 그 여자도 엄마를 보고 아는 척을 했어.”

   

    그냥 엄마 지인이었나 보다.

   

    그리 생각한 서준은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차라리 그랬으면 조금 나았을까?

   

    막 서준이 몸을 돌리려는 찰나, 엄마가 숨기고 있던 식칼을 꺼내들고, 아무것도 모른 채 대화를 나누던 아빠의 등을 찔렀다.

   

    “뭐…?”

   

    춘봉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아, 아니야. 계속 얘기해.”

    “그게 끝인데? 그 뒤로는 별거 없어.”

   

    아빠가 쓰러지고, 소리 내어 웃은 여자가 몸을 덜덜 떠는 엄마에게 무어라 말을 하더니 같이 집을 나갔다.

   

    이후로 경찰이 오고, 보육원에 가고, 그 뒤로는 그냥저냥 평범하게 산 게 끝이다.

   

    “아직도 뭐였는지는 잘 모르겠네. 왜 나는 그냥 뒀는지도 모르겠고, 아빠를 죽여서 무슨 이득이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고.”

    “아, 아니….”

   

    데굴데굴 눈을 굴리던 춘봉이 조심스레 다가와 서준을 꼭 끌어안았다.

   

    “그…, 괜찮아?”

    “괜찮다니까? 그게 언젯적 일인데.”

   

    서준이 낄낄 웃자 춘봉이 울음을 참는 듯 목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뭐가?”

    “그때 내가 곁에 있었다면…, 그런 여자는 단칼에 죽여버렸을 텐데.”

    “아, 그건 괜찮아. 죽였거든.”

   

    스물넷 무렵.

   

    그러니까 무림에 떨어지기 얼마 전.

   

    길을 가다 우연히 그 여자를 발견했다.

   

    서준은 홀린 듯 그 여자의 뒤를 미행했고, 인적이 드물어지자 돌멩이 하나를 들고 달려들어 여자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한 열 번쯤 찍으니까 죽더라.”

   

    그 뒤로 적당히 숨어살다 언제쯤 경찰이 찾아올까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무림이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긴 한다. 

   

    엄마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이제 더 신경 쓰고 싶진 않았다.

   

    애초에 그 인간을 다시 마주쳤을 때 자신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잘했어.”

    “그렇지?”

    “응. 그 씹어죽일 년.”

   

    역시 무림. 확실히 현대와는 감수성이 다르다.

   

    시원하게 한숨을 내쉰 서준이 여전히 그를 꼭 끌어안고 있는 춘봉이를 감싸안은 채 뒤로 몸을 뉘였다.

   

    따끈따끈한 것이 피로가 싹 풀린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잠은 싹 달아난 상태라, 이대로 눈을 감고 있어도 잠에 들 것 같지는 않았다.

   

    “금 씨, 우리 산책이나 할까?”

    “…어디로?”

    “그냥. 아무데나.”

    “…웬일로 멀쩡한 대답이네.”

    “좋다는 거지?”

   

    몸을 일으킨 서준이 옷차림을 점검했다.

   

    전에 입던 무복은 어디 가고 얇은 옷이 입혀져 있었다.

   

    ‘이건 상관없고.’

   

    옆에 놓여진 검을 뽑았다.

   

    반토막이 난 검.

   

    혀를 찬 서준이 검을 다시 검집에 넣은 뒤 허리춤에 매었다.

   

    “가자.”

   

   

    *

   

   

    “근데 춘봉아.”

    “응?”

   

    맞잡은 쬐깐한 손이 꼼질꼼질 움직인다.

   

    서준이 그녀를 내려다보자 동그랗게 뜬 눈이 그를 올려다본다.

   

    그게 괜히 웃겨서 픽 웃음을 흘리자 춘봉이의 작은 손에 꾹 힘이 들어갔다.

   

    “생각해보니까 아까 내 얘기랑 가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거랑은 별 상관 없는 거 아니냐?”

    “왜 없어. 당연히 있지.”

    “그래?”

   

    시선을 하늘로 돌려 멍하니 달을 바라보니 눈이 부시다.

   

    둥글게 부푼 반달.

   

    아무래도 며칠 뒤면 달이 가득 찰 것 같았다.

   

    “가만. 나 근데 얼마나 누워있었냐?”

    “하루도 안 됐어. 진짜 몸 괜찮은 거 맞지?”

    “괜찮대도.”

   

    하품을 하며 멍하니 걸음을 옮기길 잠시, 손을 잡아당기는 힘에 발걸음을 멈춰세웠다.

   

    “왜?”

    “진짜 괜찮아?”

    “아니, 금 씨. 진짜 괜찮다니까?”

    “아니야. 안 괜찮은 거 같아.”

    “뭣.”

   

    머리를 긁적이자 춘봉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 오늘 너무 조용해. 이상하다고.”

    “맨날 지랄 좀 하지 말라 하면서.”

    “그건…, 그냥 말이 그런 거지.”

   

    우물쭈물 망설이던 춘봉이 눈을 꼭 감고 고개를 내밀었다.

   

    “자, 자!”

    “으잉? 뭔데. 뽀뽀 해달라고?”

    “아, 아니이…!? 볼 만지게 해줄 테니까 기운 차리라고!”

    “아하.”

   

    이 기특한 녀석.

   

    살이 조금 빠졌다지만 여전히 통통한 볼살을 만지작거리자 마음에 평온이 찾아오는 것이 느껴진다.

   

    “호오…. 이게 열반인가.”

    “…뭐라는 거야.”

   

    삐죽 입술을 내민 춘봉이가 살짝 눈을 뜨고 서준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안 그래.”

    “응? 갑자기 뭐가.”

    “내가 오빠를 배신하는 일은 없을 거야. 절대. 우리 아버지 명예도 걸 수 있어.”

    

    아버지의 명예?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 것 같았다.

   

    “알아, 인마.”

    “…그럼 됐고.”

   

    아무튼 춘봉이가 기특하니까 됐다.

   

   

    *

   

    

    다음날 아침.

   

    “이서준 부활…!”

   

    벌떡 몸을 일으킨 서준이 기지개를 켰다.

   

    “으믐…. 아침부터 시끄럽게….”

    “아이구 우리 춘봉이 깼어?”

    “더 잘 거야…. 깨우지 마….”

    “알았어. 더 자.”

   

    그렇게 춘봉이를 재우고 멍하니 앉아있으니 인기척이 느껴졌다.

   

    뭐지? 

   

    습관처럼 검을 챙긴 채 기다리자, 곧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도 되겠나?”

   

    묘하게 들어본 듯하면서도 들어본 적 없는 듯한 목소리다.

   

    나이 좀 있는 남자 목소린데, 누구지?

   

    고개를 갸웃거린 서준이 말했다.

   

    “안 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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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ial Arts Ain’t That Big of a Deal

Martial Arts Ain’t That Big of a Deal

무공 뭐 별거 없더라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fell into a phony martial world. But they say martial arts are so hard? Hmm… is that all there is to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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