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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6

       휴일 첫날의 이른 오전. 아직 안개가 채 가시지 않은 산책로를 따라 길을 나섰다. 쌀쌀한 공기가 아주 약간 남아있던 노곤함을 마저 날려버렸다.

         

       이윽고 요람 본관의 정문 부근에 도달하니, 철문 옆의 거대한 장식 아래 서 있는 누군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현아, 여기!”

         

       예나 역시 나를 알아보고는 자리에서 폴짝대며 손을 흔들었다. 언제나의 교복 대신 수수한 사복 차림이었지만, 그 허름함이 되려 그녀가 가진 타고난 쾌활함을 돋보이게 해주는 것만 같다.

         

         

       “오래 기다린 거야?”

         

       “히히, 아니야. 나도 방금 왔어! 그보다 얼른 가자…!”

         

       예나가 옆에 나란히 서며 걸음을 재촉했다.

         

       오늘은 지난번 예나와 했던 약속을 들어주는 날이다. 정문을 나서 통행로를 따라 걸어가니, 갈수록 주변을 지나다니는 이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여전히 옆을 지나가는 이들의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지기는 했다. 하지만 나도 이제는 알려질 질대로 알려진 몸이다.

         

       가면이 아니라 머리가 세 개가 달려 있었더라도, 매일 같은 자리에서 강의를 듣고 교정에 모습을 보이면 당연히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문득 눈에 띄는 생김에 한 번씩 눈길을 줄 뿐, 예전처럼 무언가를 파고드는 듯한 불쾌하고 집요한 시선은 확실히 덜해진 게 느껴진다.

         

       그보다는, 예나 역시 나만큼의 시선을 받고 있다는 게 묘하다. 예나가 1학년의 인기인이기는 했지만, 그들의 눈길에는 선망이 아니라 어쩐지 측은히 여기는 동정심이 깃들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혹시 나랑 다녀서 그런 건지…

         

         

       “…흥.”

         

       예나도 그런 시선들을 느꼈는지, 어쩐지 맘에 들지 않는 듯 가볍게 볼을 부풀렸다.

         

         

       ***

         

         

       이윽고 대로변과 골목을 따라 상점들이 줄지어 서 있는 상업지구에 도착했다. 광장 중앙의 거대한 석조분수대가 물줄기를 사방으로 뿜어냈다. 그 위에서는 거대한 바람개비가 계절풍을 따라 사방으로 쉴 틈 없이 돌아갔다.

         

       건물들은 온통 붉은 벽돌과 흰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흡사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좁은 골목의 위로는 형형색색의 장식과 깃발들이 바람이 나부꼈다.

         

       요람 부지는 소도시에 필적할 정도로 거대하다고 한다. 거기에 어지간한 편의시설은 다 갖추어져 있었기에, 학생들은 필요한 일들을 굳이 수도까지 가지 않고 내부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우와아아…!”

         

       흡사 축제의 현장 같은 그 분위기에, 예나의 눈이 일순 휘둥그레 뜨였다. 그 반짝이는 눈빛에는 설레임이 가득했다.

         

       곧 예나는 단 일 초도 낭비하기 싫은 사람처럼 바쁘게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옷가게에 들러 이런저런 옷들을 잔뜩 입어보고는, 어차피 입을 시간도 없다며 한숨을 쉬며 힘없이 내려놓았다.

         

       책방에서는 읽고 싶던 책이 있다며 두어 권의 책을 계산했다. 왜인지 제목은 끝까지 보여주지 않았다.

         

       꽃집에서는 삭막한 기숙사의 풍경을 바꾸겠다며 작고 통통한 선인장 화분 하나를 포장했다.

         

       그런 예나의 얼굴에는 내내 생글거리는 웃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 오전에 약속을 잡았지만, 우리는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카페에 앉아 다리쉬임을 할 수 있었다.

         

         

       “히…피곤하지…? 생각해보니까 나만 너무 신났던 거 같은데…”

         

       신나게 돌아다니던 예나는 그제야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폈다. 흡사 위험을 경계하는 토끼 같기도 하다.

         

         

       “짐도 다 들어주고…괜히 고생만 끼쳤네…”

         

       “괜찮아. 별로 무겁지도 않고. 그런데 그렇게 좋아?”

       

       “히히, 응…”

         

       예나가 조금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살면서 꼭 해보고 싶었던 것들이거든…그냥 평범하게 학교도 다니고…이렇게 남, 아니, 친구랑도 놀고…”

         

       그녀의 목소리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행복으로 가득했다.

         

         

       “그, 너는…어땠어…?”

         

       “나? 나도 괜찮았는데.”

         

       예나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마침 최근의 일들에 조금 정신적인 휴식이 필요하다고 느껴지던 차였기에, 나 역시도 오늘을 피로를 풀 좋은 기회로 생각했다.

         

         

       “…그게 전부?”

         

       “왜?”

         

       “…흥, 아니야. 그런데 그렇게 높은 순위를 받고 싶어 했던 게, 연민하 선배님을 멘토로 지명하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맞아. 잘도 눈치챘네…”

         

       “…나 바보 아니거든?”

         

       예나가 볼을 살짝 부풀리며 불만이 있다는 시늉을 했다.

         

         

       “그…잘은 모르지만, 복잡한 사정이 있는 거지…? 네 후원자 가문이랑…그, 백서연 선배님 가문이랑, 그리고 연민하 선배님 가문이랑…”

       

       “맞기는 한데, 실은 나도 잘 몰라. 그냥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어.”

       

       “그렇구나…그런데 정말로 괜찮은 거 맞아…? 지난번에도…”

         

       “괜찮다니까.”

         

       “정말…? 혹시 선배님이 몰래 괴롭힌다거나 그런 거는 아니지이…?”

         

       예나가 걱정스런 말투로 재차 물어왔다. 맹하고 순진한 듯하면서도 의외로 예리한 부분을 가끔 찌른다. 단지 괴롭힘의 주체가 누군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정말 아니니까 그만 걱정해도 돼. 그보다 네 쪽은?”

         

       “나? 나도 괜찮은 거 같아…! 선배님도 잘해주시구…히히…걱정했는데 진짜 다행이야…”

         

       예나가 헤시시 웃었다. 그녀는 자신과 같은 변방 출신의 2학년 여선배에게 거의 반강제로 간택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성격도 친절하고, 비슷한 출신이라 그런지 이런저런 점들을 친절하게 알려줘 몹시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그 순한 성격 탓에 혹시 고생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을 놓아도 될 듯하다.

         

         

       “그, 정말로 괜찮은 거 맞지이…? 아니면 나도 그쪽으로 갈까…? 아직 연민하 선배님은 좀 무섭긴 한데, 그래도 너 혼자 있는 것보단…”

         

       “정말로 괜찮아. 나중에 혹시라도 괴롭힘당하면, 그때는 그룹 옮겨버리면 되지, 뭐.”

         

       나는 에둘러 거절의 뜻을 밝혔다. 예나와 함께 있으면 오히려 내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도 있다.

         

       그리고 지난번에 살벌한 눈빛을 잠깐 받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파들파들 떨어댔는데, 예나가 그런 연민하를 내내 옆에서 견뎌낼 수 있을 거 같지는 않다…

         

         

       “어?”

         

       카페의 통창으로 붉은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문득 바깥을 확인하니, 어느새 해가 서편으로 반절쯤 넘어가며 노을을 사방으로 뿌려대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이제 슬슬 들어가야 할 거 같은데? 내일 오전에 특별 수업 준비하려면…”

         

       “벌써? 히잉, 싫다…왜 1학년만…”

         

       예나가 눈썹을 추욱 늘어뜨리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에 또 나올까?”

         

       “어? 정말? 정말루우?”

       

       다시 기분이 좋아졌는지, 예나가 깡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히히, 정말로? 약속했다아…?”

       

       우리는 다시 요람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가까운 방향인 카페의 후문을 나서던 중, 문득 들려오는 종소리에 예나가 정문 쪽을 쳐다봤다.

         

         

       “어? 저기…백서연 선배님 아니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홀린 듯이 고개를 돌렸다.

         

         

       “아이, 하지 말라니까아…!”

         

       “또 부끄러워한다…그러지 말구…”

         

       “꺅! 진짜!”

         

       그곳에는, 두 명의 여학생과 환한 미소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카페로 들어온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

         

       물에 젖은 종이처럼 머리가 멍했다. 모처럼 잘 보낸 휴일이었는데 마지막에 엉망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긴 머리카락이 노을빛을 받아 곱게 찰랑였지만, 그 아름다움은 되려 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 뿐이었다.

         

         

       “…얼른 가자.”

         

       “어? 어! 응…”

         

       혹시나 마주칠까, 나는 즉시 몸을 돌려 카페를 빠져나왔다. 예나가 잰 발로 나를 따라나섰다.

         

       지금만은 얼굴에 가면이 덮여 있다는 사실이 몹시 다행스러웠다.

         

       그렇지 않으면, 잔뜩 일그러져 있을 게 뻔한 내 표정을 모든 이가 보게 되었을 테니.

         

       나는 예나를 먼저 데려다주고 다시 기숙사로 향하는 오솔길을 걸었다.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지만 맘처럼 잘되지 않았다. 오늘따라 돌아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한때는 저 사람이 남들과 더 어울리기를 바랬다. 그녀의 진가를 다른 사람들도 알아차려 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지금이라도 그런 내 소원이 이뤄진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까. 속마음이야 어쩔지 몰라도, 어쨌든 지금의 그녀는 다른 이들과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다만 이제는, 그곳에 내 자리가 없다는 점이 쓸쓸하고 고통스러울 뿐이다.

         

         

       ***

         

         

       “말도 마. 글쎄 우진이 그놈이 연민하를 멘토로 지정하고 싶다고 하잖아! 그래서 내가 절대로 안 된다고 뜯어말렸지. 결국 멘토도 내가 하게 됐어. 하아…그놈은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머리를 땋아 묶고 안경을 쓴 여학생, 최이레가 돌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괜찮은데…그냥 내버려 두지 그랬어…”

         

       그녀의 맞은편에서, 밤하늘처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기른 어떤 여학생이 곤란한 듯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그래? 너랑 내 사이가 있는데. 그리고 크게 보면 도산테크와 BS중공업의 관계이기도 하고. 진작에 개 잡듯이 패서 버릇을 고쳤어야 했는데…”

         

       되려 이레가 강경한 태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 가문이 소유한 기업은 십수 년이 넘게 긴밀한 협력 관계를 이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철없는 동생의 돌발행동으로, 그녀는 한동안 심한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백서연이 유하게 나와줘서 다행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협업하는 여러 프로젝트가 그대로 엎어졌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정말 괜찮다니까. 참, 괜히 미안하네…”

         

       서연의 얼굴에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어휴, 됐어. 그보다 네 멘티는 누구라고 했지?”

         

       “예서랑 여울이. 둘 다 너무 귀엽고 착해. 말도 잘 듣고. 사실 예서는 너무 열정이 넘쳐…”

         

       “걔는 작년 교류회 때부터 그랬잖아. 너한테 계속 달라붙고. 여자라서 다행이지…남자였으면…어우.”

         

       서연이 살짝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자, 이레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얼굴에 가득 머금었다.

         

         

       “그래도 잘됐네. 어쨌든 이번 기수의 최중요 인재들은 다 우리 쪽으로 확보한 거잖아. 그렇지?”

         

       그러고는 곧 안색을 바꿔, 이 자리에 없는 누군가를 대상으로 조소를 내뱉었다.

         

         

       “연민하 그년은 결국 그 미친놈이랑 확정했더라? 이건 뭐, 끼리끼리 노는 것도 아니고. 나는 무슨 결투를 한다길래 멘토 지명이랑 관련된 건 줄 알았어. 근데 지가 이겨놓고도 계속 그룹 유지하는 거 보니까 그건 아닌 거 같던데. 대체 뭔 꿍꿍이인지…”

         

       “아이,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그보다…”

         

       카페에 자리 잡은 세 명의 여학생은 주제를 바꿔가며 한참을 수다를 떨어댔다.

         

       그녀들은 요람 2학년의 가장 강력한 세 축이었다. 또한 이름값 높은 기업들을 소유하고 있는 명문가의 영애들이기도 했다.

         

       한결같이 고운 미색은 지나가는 이들의 눈길을 한 번씩 잡아끌었지만, 그녀들에게 감히 말을 걸 배짱을 가진 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서연. 그래서 학생회는 정말 안 들어올 거야? 2학년 대표로 연설까지 했으면서?”

         

       “자꾸 그럴 거야? 나 진짜 바쁘다구…”

         

       이레의 계속되는 권유에, 서연이 웃는 낯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휴, 재미없는 얘기는 이제 좀 그만해. 그보다 서연이. 약혼자는 대체 언제 소개해 줄 건데? 우리 사이에 자꾸 이렇게 꼭꼭 숨길 거야? 응?”

         

       청량한 외모에 눈물점이 인상 깊은 여학생, 권유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음흉한 미소가 가득했다.

         

         

       “비밀이라고 했잖아…나중에 알려준다니까…!”

         

       서연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야. 그게 벌써 1년 전이야! 나중이 대체 언젠데? 진짜 나 궁금해서 죽을 거 같아…”

         

       “그래도 안 돼. 절대 안 돼.”

         

       오늘도 여전히 강경한 거부에, 권유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번에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이레가 눈빛을 반짝였다.

         

         

       “좋아. 그건 참아볼게. 그러면 어디까지 갔는지만 말해줘. 키스? 아니면 설마…?”

         

       “꺅! 미쳤나 봐!”

         

       유리가 이레의 팔목을 찰싹-때리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질문을 들은 서연이 갑자기 소심하게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뽀송한 볼은 어느새 짙은 홍조로 가득 물들어있었다.

         

         

       “아직…볼뽀뽀밖에…”

         

       “미치겠네…”

         

       이레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도저히 그녀의 약혼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남자였으면 저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헤헤…덥다아…”

         

       서연이 시선을 돌리며 연신 손부채질을 해댔다.

         

       그런 그녀의 왼손 넷째 손가락에는, 낡고 볼품없어 보이는 어떤 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요람에서는 장신구의 착용이 금지였지만, 서연은 바깥에 나설 때면 항상 같은 두 개의 장신구를 착용했다. 하나는 가벼운 체인으로 된 목걸이. 또 하나는 지금 손가락에 끼우고 있는 반지.

         

       그녀 정도의 위치라면, 최고등급의 보석으로 세공한 반지를 열 손가락에 모두 끼워도 누구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

         

       하지만 서연은 약혼자와 처음으로 맞춘 증표라는 반지만을 내내 간직했으니, 그런 검소함은 또다른 칭송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아, 그래도 진짜 궁금해…대체 얼마나 잘난 사람이길래…”

         

       “그러니까…얘를 함락시킨 남자가 대체 누굴까…”

         

       “꺅! 함, 함락이라니…!”

         

       서연이 잔뜩 빨개진 얼굴로 부끄러운 듯 고개를 저어댔다.

         

         

       “우리도 만나면 첫눈에 반해버리는 거 아니야?”

       

       “충분히 그럴 수도…미안…미리 사과할게…”

       

       “뭐? 절대 안 돼…! 너네 그러기만 해봐! 진짜 절교야…!”

       

       서연이 발을 동동 구르며 잔뜩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다른 두 명이 입을 가리며 즐겁다는 듯 웃어댔다. 공기는 온통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꽈악

         

       그러나 아무도 보지 못하는 테이블 아래, 내려놨던 서연의 왼손은 핏방울이 맺힐 정도로 세게 쥐어져 있었다.

         

       그녀는 오늘도 연기를 하고 있었다.

         

       한때 누군가 바랬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

         

         

       넓은 기숙사에는 적막만이 가득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던 서연이 문득 바닥을 보고 눈썹을 살포시 찌푸렸다.

         

       그곳에는 땅콩이가 벗어 던진 옷과 양말이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다. 요즘의 그 아이는 유난히 외출이 잦다. 가끔은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후우…”

       

       나중에 한마디를 할까 하다가도, 곧 관두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땅콩이가 언제는 자신의 말을 들었던 적이 있던가.

         

       그녀는 그저 작은 옷을 곱게 개어 선반에 올려놓은 뒤 침실로 향했다.

         

       장식도 없이 삭막한 침실에는 침대와 철제 책상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책상 앞에 앉은 서연이 아래쪽의 서랍을 열더니, 문득 무언가에 시선을 고정하고 한동안 응시했다.

         

         

       “…”

         

       그곳에 있는 건 작은 보석함 하나, 그리고 반쯤 불에 타버린 누군가의 초상화였다.

         

       병들고 연약했던 한때이지만, 당시의 소녀는 지금보다 몇 배는 행복해 보이는 얼굴로 활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서연은 손가락에서 조심스레 반지를 뺐다. 그리고 혹여 흠집이라도 날까 조심히 보석함의 쿠션에 거치했다.

         

       이어 목걸이의 버클을 분리해 자신의 목에서 빼내자, 이윽고 옷 속에 감춰져 보이지 않았던 무언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체인의 끝에 걸려있는 건, 꼭 그을린 흔적 같은 게 남아있는 낡고 볼품없는 반지였다.

         

       한편으로는 내내 손가락에 끼워져있던 반지와 같은 생김이기도 했다.

         

       서연은 목걸이를 보석함에 넣기를 주저하며 양손으로 꼭 쥐어 감쌌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빛 한점도 들어오지 않는 그늘뿐이었다. 그 무표정한 창백함은 흡사 시체와도 비견될 정도였다.

         

       친구들과 수줍게 웃고 떠들던 방금의 미소는 작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

         

       반지를 손에 꽉 쥔 채, 오늘도 그녀는 곱씹는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 중 가장 크고, 치명적이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또한 소망했다.

         

       머지않아 다가올, 모든 고통을 끝낼 수 있는 그 날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PIA1646738811262 님 4코인 후원감사합니다 좋은하루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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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recting the Villainess of the Academy

Correcting the Villainess of the Academy

아카데미 악당영애 교정하기
Score 3.8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 reunited with the girl who left me when I lost every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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