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46

       좋아. 그렇다면 계획을 세워보자.

        

       사람의 기억력이 아무리 좋더라도 게임의 모든 설정을 전부 외우고 살 수는 없다. 아무리 씹덕이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작품의 대사 스크립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이건 좋아하는 게임의 설정을 직접 번역하지는 않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냥 외국어 배우기 귀찮다는 이유로 설정집을 읽어보지 않는 사람들도 많은데, 굳이 대사를 모조리 외우는 불필요한 짓을 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나도 그런 사람이었다. 아무리 게임 공략을 쓰기 위해서 몇 번씩 깨고, 개인적으로 좋아해서 또 몇 번씩 깨고, 원어판과 한국어판을 비교한 다음 마음에 들지 않는 번역이나 어투를 지적하며 유통사를 고로시했을 정도로 게임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 대사를 외우지는 못했다.

        

       하지만 원래 게임이라는 건 그런 식으로 ‘공부하듯 외우는 것’이 아니다.

        

       텍스트 게임이 아닌 이상 게임 대부분은 2차원이건 3차원이건 캐릭터를 움직일 수 있는 배경을 제시하고, 정말 심각할 정도로 공간지각능력에 문제가 있거나, 아니면 게임사에서 레벨 디자인을 발로 해서 텍스처가 지나치게 복붙이라 도저히 알아볼 힌트가 없지 않은 이상은, 몇 번이고 그 맵을 돌아다니다 보면 어디에 뭐가 있고 어떤 이벤트가 있는지 대충은 떠오른다.

        

       적어도 나는 게임을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생각하면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지 떠올릴 수 있었다.

        

       그나마 이 게임 시리즈가 한 세계관만을 쭉 이어 내려오며 모든 배경과 설정을 공유하지 않았던 것이 도움이 되었다.

        

       이 스팀펑크 풍의 세계관은 14편부터 사용되고 있는 세계관이다. 그리고 내가 플레이해보지 못한 발매 예정작을 제외한다면 14, 15, 16편이 나왔고, 그러니 내가 생각하면 될 세계관도 세 편만 떠올리면 그만이었다.

        

       플레이타임은 길다. 하지만 그 긴 플레이타임은 거의 맵을 탐색하고 캐릭터 레벨링을 하는 시간, 그리고 긴 대사 스크립트를 읽는 시간 때문이다. 공략에서 실질적으로 기억해야 할 부분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내가 제도를 돌아다녀 본 바, 이 세계 중 도시의 생김새는 게임에서 나왔던 부분에 한해서 거의 완전히 똑같다. 물론 가도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긴 했다. 아무래도 그 기나긴 가도를 실제 거리만큼 구현하는 것은 대기업도 아닌 밀레니엄 사에는 지나치게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아니지, 애초에 AAA급 게임이라도 그렇게까지는 안 한다. 어떤 게임은 이집트 전체나 그리스 지방 전체를 구현했다고 하지만 막상 가보면 도시는 백수십 미터 크기고 맵은 끝에서 끝까지 십수 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으니까. 그리고 유저가 플레이하기에도 맵이 실제 크기 수준이라면 플레이하는 내내 지루할 수 있고.

        

       뭐, 사실 지역을 그런 크기로 구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긴 했지만.

        

       아무튼, 그러므로 내가 이쪽 세상으로 넘어와 상황이 안정되자마자 노트에 적어두었던 공략 내용 중 ‘가도’에 해당하는 부분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 한해서는 그냥 서브 퀘스트 목록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뭐, 가도라고 해도 중요한 지역이 나온다면 거긴 또 제대로 구현되었을지 모르니까.

        

       “그렇다면 다음은…….”

        

       나는 노트를 넘겨보다가 한 부분을 손으로 짚었다.

        

       “던전.”

        

       그렇다.

        

       RPG의 꽃이 퀘스트라면, 그 기초는 바로 ‘던전’이다. 게임의 주인공 파티는 그 던전의 몬스터를 잡아 성장하고 보상을 받아 가며 강해진다. 이건 아예 전투 자체가 한 에피소드를 차지할 수 있는 SRPG가 아닌 이상은 벗어나기 힘든 틀이다.

        

       배경을 탁 트인 공간으로 해도, 나무가 빽빽한 숲이나 건물이 가득한 도심, 혹은 우주 전함 안으로 하더라도, 결국 길이 있고, 장애물이 있고, 그 사이에 몬스터가 오간다는 점에서 ‘던전’의 틀을 벗어날 수는 없다. 벗어나 봐야 ‘필드’고, 그 필드도 어떤 의미에서는 탁 트인 던전 같은 곳이니까.

        

       그렇다면, 이 배경의 던전은 어떨까.

        

       엄밀히 따지면 가도도 던전의 일종이라고 봐야겠지만, 가도야 스케일을 1대1로 유지할 수 없으니 그 한계가 명확할 뿐이다. 폐성의 지하 감옥이나 하수시설 같은 곳은 충분히 그 크기가 1대1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법한 곳도 많았다.

        

       특히, 이 게임은 언제나 후반부가 가면 현실과 초상 세계가 마구 뒤얽힌 환상 속 같은 배경의 매우 복잡한 던전이 등장한다. 굉장히 넓고 방대한 던전은 그 자체로 공략하는 재미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런 던전이라면, 게임에서도 1대1 스케일로 구현되지 않았을까?

        

       뭐, 그렇다고 백 퍼센트 확신하기는 어렵다. 아무리 그래도 도시 하수구에 퇴치해야 할 기괴하게 생긴 짐승들이 산더미라고 생각하는 것도 어색하긴 마찬가지였으니까.

        

       “……확인해볼까.”

        

       본격적인 던전이 나오는 건 각 시리즈의 2장 이후다. 세계관의 두 번째 작품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한 세계관 내의 각 작품의 2장쯤을 말하는 거다. 서장과 1장은 보통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기 위한 튜토리얼 같은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던전’이라고 불릴법한 곳은 아직 꽤 많이 남아있었다.

        

       제도 하수도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

        

       비상식적일 정도로 아침이 빠른 어느 두 사람 때문에, 나는 오늘 새벽 일찍 일어났다.

        

       그렇다고 앨리스도 있는데 늦잠을 자는 것은 캐릭터성에 매우 좋지 않았으므로, 아침부터 입에 맞지도 않는 에스프레소를 들이키고 하루를 시작했다.

        

       덕분에 일요일 하루는 매~우 길 예정이었고, 앨리스와 함께 있는 시간을 따져보더라도 내가 어느 한 곳을 탐색해볼 시간은 충분했다.

        

       ……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다.

        

       내가 뭔가를 챙기고 있으면, 앨리스가 그렇게 말을 걸어온다.

        

       나와 앨리스가 언제나 붙어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두 사람은…… 음,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꽤 친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서로서로 그리워한다거나, 뭐 그런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따지자면 자매와 친구 그 중간 어디쯤 존재하는 막연한 사이였다.

        

       문제는, 공부는 이미 시간을 돌리기 전에 한 번 끝내버린 나와는 다르게, 언제나 상황과 기억이 함께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앨리스는 언제나 그 향상심마저 초심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다.

        

       백조는 해수면 위에 우아하게 떠 있지만, 실제로는 그 다리를 추하게 버둥거리며 우아한 자세를 유지하려고 애쓴다고 했던가.

        

       사실 백조는 그냥 물 위에 대충 떠 있어도 될 정도로 큰 부력을 얻을 수 있는 신체 구조로 되어 있고, 다리가 길어서 살랑살랑 저어주기만 해도 앞으로 쑥쑥 가는 생물이긴 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내가 보기에 앨리스의 실력은 언제나 최상위였지만 그런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앨리스는 언제나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훈련했다. 레오나 클레어와는 다른 의미로.

        

       그리고 그런 앨리스에게 황금 같은 주말은 말 그대로 ‘황금’이었다. 시간은 돈 주고도 사지 못하는 법이다. 그 황금 같은 시간에 공부와 훈련을 한다면 실력 향상에 얼마든지 도움이 될 테니까.

        

       ……그리고, 그런 앨리스가 보기에 가장 좋은 공부, 훈련 동료는 바로 나였다.

        

       내가 방에서 가방을 챙기고 있으면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앨리스가 책을 한 아름 안은 채 방 안으로 들어오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본다.

        

       “어딜 가려고 그렇게 준비하는 거야?”

        

       “아, 그것이—”

        

       “……혹시, 아버지 때문이야?”

        

       “…….”

        

       그렇다. 나는 이미 아침에 앨리스를 만나서 내가 피곤한 이유를 황제한테 죄다 뒤집어씌워 버렸다.

        

       나중에 레오와 클레어한테 그 말을 들키더라도 ‘황제 폐하의 큰 그림이시다’라고 하면 다들 대충 이해하고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실제로 클레어도 그렇게 넘어가지 않았던가.

        

       사실 이번만큼은 그냥 내가 할 말을 잃었을 뿐이었지만, 아무래도 앨리스는 조금 다르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나도 갈래.”

        

       나는 나도 모르게 이마를 치고 말았다.

        

       “……응?”

        

       “아.”

        

       다시.

        

       *

        

       간신히 이마를 치는 것만은 참았다. 그래도 입 밖으로 ‘아니, 왜?’ 하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그래도 그것도 나름대로 참을 수 있었다.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대형 사고를 참아낼 수 있다니, 사실 나는 꽤 대단한 능력이 하나 정도 더 있는 거 아닐까?

        

       “……그런 표정으로 봐도 상관없어.”

        

       그런 표정이 어떤 표정인데요?

        

       물론 대놓고 그렇게 물을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내 표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읽어대는 앨리스였으니까.

        

       표정을 읽는다고 해서 언제나 내 마음을 투명한 물속을 들여다보듯 보는 건 아니었다. 사람이 찡그린 표정을 보고 아프다고 생각할 수도, 공포에 질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 아니겠는가.

        

       “황녀님께서 가실만한 곳이 아닙니다.”

        

       “너는 황녀 아니고?”

        

       “……저와 황녀님은 다릅니다.”

        

       내가 말하자, 앨리스의 한쪽 눈썹이 슬쩍 위로 올라갔다. 내 말이 대놓고 언짢다는 표정이다.

        

       “황녀님은, 장차 이 나라의 황제가 되실 분입니다.”

        

       “아버지가 이 나라의 황제로서 가지 못할만한 곳이 있다고 생각해?”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 다시 생각해보니 황제는 자기가 서 있는 곳이 황궁이건 하수구이건 별로 신경 안 쓸 것 같기는 했다. 자기한테 도움이 되고, 권력을 휘두르는 데 도움이 된다면 전혀 신경 쓰지 않겠지.

        

       해야 할 일이 도주라면 얼마든지 할 인간이긴 했다. 그리고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고.

        

       “그리고.”

        

       앨리스는 손가락으로 나를 척 가리키며 말했다.

        

       “내 생각에 이 제국에서 가장 컨트롤하기 어려운 존재가 너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해주지도 않고, 그러면서도 내가 황제가 되기를 바라고 있고. 솔직히 내가 황제가 된 뒤에 뭘 바라고 있는지 모르겠으니 너를 제대로 감시하고 있을 필요가 있지 않겠어?”

        

       “…….”

        

       아니, 틀린 말이 하나도 없기는 한데.

        

       그렇긴 했다. 나는 이 세계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신비로운 존재였으니까. 그리고 그 신비로움은 내가 노리고 만들어낸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고슴도치 등에 달린 수많은 가시 같은 것들이긴 했다. ‘쟤는 건드리면 절대로 안 된다’라는 경고같이.

        

       문제는…… 그 경고는 다른 사람 중 그 누구도 진의를 알 수 없기에 먹히는 거다.

        

       나는 그저 순수하게 앨리스가 모든 열등감을 떨쳐내고 당당하게 황위에 올라 선정을 펼치는 것을 보고 싶다. 왜냐하면, 앨리스니까.

        

       앨리스가 적법한 후계자라느니, 황제의 피가 제대로 섞인 유일한 자식이라느니 하는 것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앨리스가 지금의 모습, 그리고 지금의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면, 나는 설정이 좀 달라지더라도 앨리스가 황제가 되기를 바랐을 거다.

        

       왜냐하면, 게임에서는 그렇게 되니까.

        

       16편 끄트머리에서 앨리스는 황제가 된다. 앨리스는 클레어가 자기 목숨을 걸고 살리는 캐릭터였기에 아직은 ‘사망 가능 캐릭터’는 아니었다. 사실 죽었다고 나온 히로인들도 후속작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살아날 수 있긴 했지만. 여기에는 내가 이쪽으로 오고 나서 얻은 몇 가지 단서가 있는데…… 일단 이건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기로 하고.

        

       원래 황제였던 자는 세상을 전란에 몰아넣었다가 주인공들에게 격퇴당하게 된다.

        

       ……물론, 그 뒤로 예정된 작품이 둘씩이나 더 있었으니 황제가 죽었다는 것은 위장이거나, 아니면 황제를 누군가가 다시 살려내거나 하겠지.

        

       “……알겠습니다.”

        

       결국, 나는 앨리스에게 그렇게 말했다.

        

       뭐, 하수구는 이쪽 세상에서도…… 아니, 이쪽 세상이기에 더 기피되는 곳이다. 아마 입구까지만 가도 앨리스는 기겁하며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을까? 실제로도 게임에서 엄청나게 싫어했었고.

        

       “……표정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뭐, 좋아.”

        

       적어도 앨리스가 이번에 본 내 표정이 뭔지는 알 것 같았다.

        

       바로 ‘귀찮음’이겠지.

       

    다음화 보기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