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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6

       난데없이 각성한 카렌이 다크서클은 줄었지만, 눈물자국으로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요나. 역시 당신은 성직자가 되어야 합니다.”

       

       “싫은데요.”

       

       전도. 곤란.

       

       황혼을 삼키는 자에게 욕 박을 때와 마찬가지로 망설임 없이 튀어나오는 거절.

       

       카렌의 신앙으로 굳건하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그러지 말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죠. 저 같은 이단심문관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도 싫어요. 복잡한 교리를 지키며 사는 것도 귀찮고, 다른 사람 도우며 살 만큼 착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이제와서 견습 사제부터 시작하라니…절대 안 돼요. 그 시간에 해야 할 일이 있단 말이에요.”

       

       완벽한 철부지의 발언. 하지만 전부 진심이다. 신이 실존하고, 종교가 당연하다는 듯이 함께하는 판 대륙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지구의 무교 출신인 내게는 사제는 썩 매력적인 직업이 아니기에.

       

       무엇보다 사랑의 여신과 가까운 직업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녀를 아끼는 것과는 별개로 꺼림칙한 것도 사실이거든.

       

       생각해 보라. 어느 날 소설을 썼는데, 그 캐릭터 중 하나가 당신 머리채를 잡고 책 속으로 끌고 간 것이다.

       

       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일인가. 안 그래도 작가 중에는 탈모가 많단 말이다. 물론 난 풍성했지만!

       

       내 설명을 들은 카렌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손을 꼬옥 잡았다.

       

       경건하게 기도하던 자세 그대로 이렇게 간절하게 매달려 오니 나도 모르게 엄한 생각이 들 정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자니, 카렌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애초에 교리란 여신께서 내려주신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한 길잡이 같은 것입니다. 이미 여신의 뜻을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는 요나 당신에게는 필요 없는 허례허식입니다.”

       

       “엣.”

       

       “굳이 다른 사람을 도울 필요도, 착하게 살 필요도 없습니다. 자애는 사랑의 한 형태이지만, 자애만이 사랑인 것은 아니니까요. 배급을 받아보셨다니 잘 아시죠? 항상 배급은 하는 분들만 한다는 걸. 신전에서도 자애에 뜻을 두고 계신 분들만 배급 일에 나서기 때문입니다.”

       

       “좌천당해서가 아니었군요…?”

       

       “견습 사제부터 다시 시작할 필요도 없습니다. 제 추천장이 있으면 기본적인 교육만 받고 바로 정식 사제가 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시려는 건지는 몰라도 사제라는 직함이 손해가 되진 않을 겁니다.”

       

       “사제직이 무슨 자격증도 아니고….”

       

       자격증은 아니지만 맞는 말이긴 하다. 이 세계에서 사제는 기본적인 인성 테스트를 통과했으며, 나름의 교육도 받았다는 보증 같은 거니까.

       

       하지만 이 모든 메리트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여신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나중이면 모를까. 아직은 때가 아니다.

       

       결국 이번에도 엘리와 리디아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손이 잡혀있는 상태라 조금 전처럼 누구 뒤로 숨기도 힘들었으니까.

       

       “…읏.”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굳어있던 엘리가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렸다. 반면 리디아는.

       

       “귀족…복수…황혼을 삼키는 자…뒤틀림. 여신…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혼자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 중얼거리는 탓에 무어라 재촉하기 힘들었다.

       

       갑자기 왜 이런담? 이유는 모르겠는데 리디아도 고장 나버렸다.

       

       내가 속으로 한숨을 쉬는 사이. 성큼성큼 다가온 엘리가 카렌의 손을 붙잡아 떨어뜨렸다.

       

       “그만. 요나가 싫다고 하잖아.”

       

       “하지만 방금 보시지 않았습니까. 이분은 사제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나한테 보이는 건 다 큰 여자가 어린 남자애 하나 붙잡고 싫다는 걸 강제하는 것밖에 없는걸.”

       

       “이런….”

       

       그제야 조금 진정했는지 손을 놓아주는 카렌. 즉시 엘리의 뒤에 샤샥 숨어서 고개만 내밀었다.

       

       “제안은 고맙지만 저는 해야 할 일이 있어요.”

       

       “…그렇습니까. 혹시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당연하죠. 우선 제가 엘리랑 리디아 님에게 빚진 게 있어서 그것부터 갚아야 하거든요?”

       

       “돈이라면 제가 대납하겠습니다.”

       

       “아뇨. 제가 직접 갚아야 의미가 있어요. 엘리 같은 경우에는 돈으로 갚을 수 없는 종류의 빚이고요.”

       

       “대체 어떤 빚이길래 그러십니까.”

       

       의아해하는 카렌. 엘리도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무언가 눈치챈 것처럼 귀와 꼬리를 빳빳이 세웠다.

       

       …무슨 생각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 뭔가 있어 보이는 반응은 도움이 된다. 써먹어야지.

       

       카렌의 눈은 어디까지나 감정을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얼마나 교묘한 거짓말을 하느냐보다 얼마나 적합한 감정을 품느냐가 중요할 터.

       

       슬쩍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잡았다. 떠올리는 것은 평소에 자주 나누던 농담. 그리고 약간의 진심.

       

       이 세상에서 처음 만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향한 안도. 내가 가장 보잘것없을 때 받은 선의. 이 모든 것에서 비롯되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입을 열었다.

       

       “사실…제가 한창 힘들 때 엘리에게 큰 도움을 받았거든요? 지금도 엘리의 집에 싸게 얹혀살면서 밥도 얻어먹고, 이런저런 편의도 받고 있고, 심지어는 리디아 님에게 의뢰를 넣어 저를 모험가로 가르치시기까지 하고….”

       

       “리디아?! 너 그걸 요나한테 말한 거야?”

       

       “신전…갈등…기사…맹세는 절대적…심지어 자발적….”

       

       물론 여전히 리디아는 맛이 간 상태라 엘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둘을 스윽 훑어본 카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분이시군요.”

       

       “맞아요. 그래서 제가 곰곰이 생각해 봤죠.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지. 그랬더니 엘리가 뭐라고 했냐면요….”

       

       슬쩍 말을 흐리고는 엘리를 쳐다보았다. 마치 정말 말해도 되냐고 눈치를 보는 것처럼.

       

       물론, 아무런 언질을 받지 못한 엘리는 멀뚱멀뚱 이쪽을 마주 볼 뿐이었지만 말이다.

       

       손을 입을 가리고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였다.

       

       “나중에 커서 몸으로 갚게 할 테니까 걱정 말라고 하더라고요. 저도 뭐? 그 정도면 괜찮겠다 싶어 오케이 했구요.”

       

       “…예?”

       

       “내가…?”

       

       자기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는 카렌과 진심으로 당황한 엘리.

       

       엘리가 무어라 해명하기 전에 빠르게 덧붙였다.

       

       “미안해요. 이미 저는 엘리의 것이라 여신님의 품에 귀의할 수 없답니다.”

       

       “……!”

       

       카렌이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천천히 엘리를 바라보았다.

       

       “뭐, 뭐야! 그런 거 아닙니다! 야 요나야! 너 왜 갑자기 이상한 말 하고 그래! 오해하시잖아!”

       

       정처 없이 흔들리는 노란 눈동자와 축 늘어진 꼬리.

       

       내겐 카렌과 같은 가호가 없지만, 그럼에도 엘리가 지금 무슨 감정을 느끼는 건지는 알 수 있었다.

       

       당황. 그리고 불안.

       

       나쁜 일을 하다 들킨 사람의 전형적인 반응이다.

       

       카렌의 표정이 다양한 방식으로 일그러지더니, 나를 슬쩍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뱉었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큰 마음의 빚이 있어 지금은 거기에 집중하고 싶다는 거죠?”

       

       “네!”

       

       “그럼 지금은 물러나겠습니다만…제 제안은 언제나 유효하다는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카렌이 품에서 작은 하트모양 세공품을 꺼냈다. 은색 광이 번쩍번쩍한 것이 꽤 비싸 보이는 물건.

       

       “이걸 가지고 언제든 신전에 제 이름을 대시면 마땅히 누려야 할 대우를 누리실 수 있을 겁니다.”

       

       “고마워요! 쓸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중히 간직할게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착잡한 표정의 카렌이 지금 상황을 이해해 보겠답시고 머리를 쥐어싸맨 이안을 불렀다.

       

       “이안. 임무는 끝났으니 이대로 복귀한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더 지체할 수는 없다.”

       

       “하, 하지만….”

       

       “번복은 없다. 가자.”

       

       “…네.”

       

       마지못해 카렌을 따라나서던 이안이 한차례 이쪽을 돌아보더니 고개를 꾸벅인다.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로 사라져 인파 사이에 섞이는 둘.

       

       그래. 엘리가 순식간에 반반한 고아를 낚아채서 가스라이팅하며 키우는 쓰레기가 됐지만!

       

       심지어 나는 거기에 제대로 당해 엘리에게 푹 빠져있는 불쌍한 피해자가 됐지만!

       

       아무튼 끈질길 것 같았던 전도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내가 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사제의 자질 비슷한 걸 본 것 같긴 한데….

       

       세상일이라는 게 재능만으로 어떻게든 되는 건 아니잖은가. 나름의 노력이 수반되어야 결과가 나온다.

       

       사제의 경우에는 신앙이 그러하다. 그리고 신앙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진심에서 나오는 것.

       

       자질이고 뭐고 내가 아직 진심으로 여신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자 한발 물러선 것이리라.

       

       물론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겠지. 무슨 깨달음을 얻었는지는 몰라도, 카렌이 갑자기 각성하지 않았나.

       

       직접 경험한 게 있고, 뭔가 본 게 있으니까 꽤 집요하게 달라붙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면…노선을 바꿔 바로 신전으로 데려가는 게 아니라 조금씩 마음을 돌려 포섭하려 든다거나.

       

       뭐어. 설령 그렇다 해도 그건 그때의 일! 지금은 아무튼 귀찮은 일에서 해방된 걸 순수하게 즐기면 된다!

       

       “잘됐네요 엘리! 저를 신전으로 떠나보내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죠?”

       

       “…내 사회적 평판을 대가로 바친 것 치고는 얻은 게 없는 것 같은데.”

       

       “에이! 얻은 게 없다뇨! 바로 저 요나를 얻었잖아요? 이 정도면 남는 장사죠!”

       

       “강매였잖아…!”

       

       엘리가 살짝 울먹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요나 팔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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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6

EP.46





       난데없이 각성한 카렌이 다크서클은 줄었지만, 눈물자국으로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요나. 역시 당신은 성직자가 되어야 합니다.”


       


       “싫은데요.”


       


       전도. 곤란.


       


       황혼을 삼키는 자에게 욕 박을 때와 마찬가지로 망설임 없이 튀어나오는 거절.


       


       카렌의 신앙으로 굳건하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그러지 말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죠. 저 같은 이단심문관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도 싫어요. 복잡한 교리를 지키며 사는 것도 귀찮고, 다른 사람 도우며 살 만큼 착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이제와서 견습 사제부터 시작하라니…절대 안 돼요. 그 시간에 해야 할 일이 있단 말이에요.”


       


       완벽한 철부지의 발언. 하지만 전부 진심이다. 신이 실존하고, 종교가 당연하다는 듯이 함께하는 판 대륙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지구의 무교 출신인 내게는 사제는 썩 매력적인 직업이 아니기에.


       


       무엇보다 사랑의 여신과 가까운 직업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녀를 아끼는 것과는 별개로 꺼림칙한 것도 사실이거든.


       


       생각해 보라. 어느 날 소설을 썼는데, 그 캐릭터 중 하나가 당신 머리채를 잡고 책 속으로 끌고 간 것이다.


       


       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일인가. 안 그래도 작가 중에는 탈모가 많단 말이다. 물론 난 풍성했지만!


       


       내 설명을 들은 카렌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손을 꼬옥 잡았다.


       


       경건하게 기도하던 자세 그대로 이렇게 간절하게 매달려 오니 나도 모르게 엄한 생각이 들 정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자니, 카렌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애초에 교리란 여신께서 내려주신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한 길잡이 같은 것입니다. 이미 여신의 뜻을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는 요나 당신에게는 필요 없는 허례허식입니다.”


       


       “엣.”


       


       “굳이 다른 사람을 도울 필요도, 착하게 살 필요도 없습니다. 자애는 사랑의 한 형태이지만, 자애만이 사랑인 것은 아니니까요. 배급을 받아보셨다니 잘 아시죠? 항상 배급은 하는 분들만 한다는 걸. 신전에서도 자애에 뜻을 두고 계신 분들만 배급 일에 나서기 때문입니다.”


       


       “좌천당해서가 아니었군요…?”


       


       “견습 사제부터 다시 시작할 필요도 없습니다. 제 추천장이 있으면 기본적인 교육만 받고 바로 정식 사제가 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시려는 건지는 몰라도 사제라는 직함이 손해가 되진 않을 겁니다.”


       


       “사제직이 무슨 자격증도 아니고….”


       


       자격증은 아니지만 맞는 말이긴 하다. 이 세계에서 사제는 기본적인 인성 테스트를 통과했으며, 나름의 교육도 받았다는 보증 같은 거니까.


       


       하지만 이 모든 메리트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여신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나중이면 모를까. 아직은 때가 아니다.


       


       결국 이번에도 엘리와 리디아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손이 잡혀있는 상태라 조금 전처럼 누구 뒤로 숨기도 힘들었으니까.


       


       “…읏.”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굳어있던 엘리가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렸다. 반면 리디아는.


       


       “귀족…복수…황혼을 삼키는 자…뒤틀림. 여신…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혼자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 중얼거리는 탓에 무어라 재촉하기 힘들었다.


       


       갑자기 왜 이런담? 이유는 모르겠는데 리디아도 고장 나버렸다.


       


       내가 속으로 한숨을 쉬는 사이. 성큼성큼 다가온 엘리가 카렌의 손을 붙잡아 떨어뜨렸다.


       


       “그만. 요나가 싫다고 하잖아.”


       


       “하지만 방금 보시지 않았습니까. 이분은 사제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나한테 보이는 건 다 큰 여자가 어린 남자애 하나 붙잡고 싫다는 걸 강제하는 것밖에 없는걸.”


       


       “이런….”


       


       그제야 조금 진정했는지 손을 놓아주는 카렌. 즉시 엘리의 뒤에 샤샥 숨어서 고개만 내밀었다.


       


       “제안은 고맙지만 저는 해야 할 일이 있어요.”


       


       “…그렇습니까. 혹시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당연하죠. 우선 제가 엘리랑 리디아 님에게 빚진 게 있어서 그것부터 갚아야 하거든요?”


       


       “돈이라면 제가 대납하겠습니다.”


       


       “아뇨. 제가 직접 갚아야 의미가 있어요. 엘리 같은 경우에는 돈으로 갚을 수 없는 종류의 빚이고요.”


       


       “대체 어떤 빚이길래 그러십니까.”


       


       의아해하는 카렌. 엘리도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무언가 눈치챈 것처럼 귀와 꼬리를 빳빳이 세웠다.


       


       …무슨 생각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 뭔가 있어 보이는 반응은 도움이 된다. 써먹어야지.


       


       카렌의 눈은 어디까지나 감정을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얼마나 교묘한 거짓말을 하느냐보다 얼마나 적합한 감정을 품느냐가 중요할 터.


       


       슬쩍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잡았다. 떠올리는 것은 평소에 자주 나누던 농담. 그리고 약간의 진심.


       


       이 세상에서 처음 만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향한 안도. 내가 가장 보잘것없을 때 받은 선의. 이 모든 것에서 비롯되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입을 열었다.


       


       “사실…제가 한창 힘들 때 엘리에게 큰 도움을 받았거든요? 지금도 엘리의 집에 싸게 얹혀살면서 밥도 얻어먹고, 이런저런 편의도 받고 있고, 심지어는 리디아 님에게 의뢰를 넣어 저를 모험가로 가르치시기까지 하고….”


       


       “리디아?! 너 그걸 요나한테 말한 거야?”


       


       “신전…갈등…기사…맹세는 절대적…심지어 자발적….”


       


       물론 여전히 리디아는 맛이 간 상태라 엘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둘을 스윽 훑어본 카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분이시군요.”


       


       “맞아요. 그래서 제가 곰곰이 생각해 봤죠.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지. 그랬더니 엘리가 뭐라고 했냐면요….”


       


       슬쩍 말을 흐리고는 엘리를 쳐다보았다. 마치 정말 말해도 되냐고 눈치를 보는 것처럼.


       


       물론, 아무런 언질을 받지 못한 엘리는 멀뚱멀뚱 이쪽을 마주 볼 뿐이었지만 말이다.


       


       손을 입을 가리고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였다.


       


       “나중에 커서 몸으로 갚게 할 테니까 걱정 말라고 하더라고요. 저도 뭐? 그 정도면 괜찮겠다 싶어 오케이 했구요.”


       


       “…예?”


       


       “내가…?”


       


       자기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는 카렌과 진심으로 당황한 엘리.


       


       엘리가 무어라 해명하기 전에 빠르게 덧붙였다.


       


       “미안해요. 이미 저는 엘리의 것이라 여신님의 품에 귀의할 수 없답니다.”


       


       “……!”


       


       카렌이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천천히 엘리를 바라보았다.


       


       “뭐, 뭐야! 그런 거 아닙니다! 야 요나야! 너 왜 갑자기 이상한 말 하고 그래! 오해하시잖아!”


       


       정처 없이 흔들리는 노란 눈동자와 축 늘어진 꼬리.


       


       내겐 카렌과 같은 가호가 없지만, 그럼에도 엘리가 지금 무슨 감정을 느끼는 건지는 알 수 있었다.


       


       당황. 그리고 불안.


       


       나쁜 일을 하다 들킨 사람의 전형적인 반응이다.


       


       카렌의 표정이 다양한 방식으로 일그러지더니, 나를 슬쩍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뱉었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큰 마음의 빚이 있어 지금은 거기에 집중하고 싶다는 거죠?”


       


       “네!”


       


       “그럼 지금은 물러나겠습니다만…제 제안은 언제나 유효하다는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카렌이 품에서 작은 하트모양 세공품을 꺼냈다. 은색 광이 번쩍번쩍한 것이 꽤 비싸 보이는 물건.


       


       “이걸 가지고 언제든 신전에 제 이름을 대시면 마땅히 누려야 할 대우를 누리실 수 있을 겁니다.”


       


       “고마워요! 쓸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중히 간직할게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착잡한 표정의 카렌이 지금 상황을 이해해 보겠답시고 머리를 쥐어싸맨 이안을 불렀다.


       


       “이안. 임무는 끝났으니 이대로 복귀한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더 지체할 수는 없다.”


       


       “하, 하지만….”


       


       “번복은 없다. 가자.”


       


       “…네.”


       


       마지못해 카렌을 따라나서던 이안이 한차례 이쪽을 돌아보더니 고개를 꾸벅인다.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로 사라져 인파 사이에 섞이는 둘.


       


       그래. 엘리가 순식간에 반반한 고아를 낚아채서 가스라이팅하며 키우는 쓰레기가 됐지만!


       


       심지어 나는 거기에 제대로 당해 엘리에게 푹 빠져있는 불쌍한 피해자가 됐지만!


       


       아무튼 끈질길 것 같았던 전도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내가 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사제의 자질 비슷한 걸 본 것 같긴 한데….


       


       세상일이라는 게 재능만으로 어떻게든 되는 건 아니잖은가. 나름의 노력이 수반되어야 결과가 나온다.


       


       사제의 경우에는 신앙이 그러하다. 그리고 신앙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진심에서 나오는 것.


       


       자질이고 뭐고 내가 아직 진심으로 여신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자 한발 물러선 것이리라.


       


       물론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겠지. 무슨 깨달음을 얻었는지는 몰라도, 카렌이 갑자기 각성하지 않았나.


       


       직접 경험한 게 있고, 뭔가 본 게 있으니까 꽤 집요하게 달라붙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면…노선을 바꿔 바로 신전으로 데려가는 게 아니라 조금씩 마음을 돌려 포섭하려 든다거나.


       


       뭐어. 설령 그렇다 해도 그건 그때의 일! 지금은 아무튼 귀찮은 일에서 해방된 걸 순수하게 즐기면 된다!


       


       “잘됐네요 엘리! 저를 신전으로 떠나보내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죠?”


       


       “…내 사회적 평판을 대가로 바친 것 치고는 얻은 게 없는 것 같은데.”


       


       “에이! 얻은 게 없다뇨! 바로 저 요나를 얻었잖아요? 이 정도면 남는 장사죠!”


       


       “강매였잖아…!”


       


       엘리가 살짝 울먹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요나 팔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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