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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6

       탑주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인물에 의해 세워진 건축물.

        수백 년이 흘렀음에도 아직 그 끝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마탑에서 80층이 갖는 의미는 사뭇 남다르다.

        상층에 발을 들인 마법사는 스스로의 마법을 핏줄에 녹여 새로운 일족에 물려줄 수 있는 경지에 오르게 된다.

       

        ‘요람’에서 태어난 순혈 마법사들은 자신들의 선조가 통과한 모든 시련을 구태여 다시 치를 필요가 없다.

        짧게는 수 년, 길게는 수십 년을 바쳐야 하는 등반의 의무가 없다는 것은 두 가지 길이 열려있음을 의미한다.

       

        구름보다 높은 산 정상에서 다른 이들을 내려다 보거나.

        아니면 두 다리 대신 날개를 달고 아직 아무도 닿지 못한 탑의 끝을 향해 날아가거나.

       

        비나의 압도적인 재능은 후자를 선택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성인이 되기도 전에 다도해의 모든 도서를 독파한 비상한 머리.

        그리고 신성학파의 순혈 마법사들조차 질투심을 느낄 정도로 정순한 마력.

       

        태어난 순간부터 청혼이 쏟아질 정도로 마탑의 최상층에 도달해 새로운 탑주가 될 지도 모른다는 세간의 기대를 받았다.

        니플헤이르의 가주가 새로운 칠현자 직을 맡게 되자 그녀의 주가는 더더욱 하늘로 뛰었다.

       

        현 시점에서 가장 고결한 원소학파의 보석은 지금.

        차가운 얼음 바닥 위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정좌하고 있었다.

       

        『크리스티나에게 들었어요. 요즘 신나게 사고를 치고 다니는 모양이던데요.』

        “…….”

       

        87층의 극지(極地).

        층 전체가 눈과 얼음으로 덮인 이곳은 니플헤이르의 본산이자 그녀의 고향이었다.

        마치 작은 나라의 대전(大殿)이라 해도 손색 없을 만큼 화려한 알현실에서 가주인 밀로네와 독대하고 있었다.

       

        세대 차이가 아득히 나는 가문의 선조였으나 어머니와 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두 사람의 외모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밀로네 프레이야는 수십 년 전, 스스로를 얼음 속에 가두며 ‘동면’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비나를 하층으로 내려보낸 이유는 세상을 보는 식견을 넓히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서였어요. 그런데 갈수록 생활부의 재원을 부수고 다닌다는 신고가 들어오더니 어제는 부상자까지…….』

        “……으득.”

        『어딜 어른 앞에서 이를 꽉 깨무나요? 주먹에 힘도 푸세요.』

       

        평소처럼 불만을 표하자 얼음 속에 잠들어 있는 칠현자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껏 1층에서 그간 벌여 온 기행은 그렇다 쳐도 사제폭탄(얼음물)을 만든 혐의는 용서받기 어려웠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치안대에서까지 부상자가 나와 니플헤이르에서도 그녀에게 경고만 주고 끝낼 수 없었다.

       

        비나는 억울했다.

        나쁜 건 메테오를 얼음마법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세상이지 자신이 아니었다.

       

        『단순히 사고만 치고 다녔으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말괄량이처럼 외간남자에게 마법이나 뿌리고 다니다니! 제 때는 마법을 쓰는 중에 남자만 들어와도 화들짝 놀라서는…….』

        “사감과는 딱히 그런 관계가…….”

        『또또 말 끊는다, 그 남자에게 아주 나쁜 것만 배워 왔군요. 게다가 혼나는 중에 뭘 보고 있는 건가요? 그게 위치노트인가 뭔가 하는 거죠?』

       

        말 많은 할머니처럼 잔소리가 이어지자 비나의 입이 점점 삐죽 튀어 나왔다.

        하지만 여기서 그녀에게 대들 수는 없었다.

        만약 밀로네의 입에서 클락을 더 이상 만나지 말라거나, 그에게 준 마법을 회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곧장 글레시아의 마법사들이 하층으로 내려갈 것이었다.

       

        하염없이 인고의 시간을 견디고 있던 와중, 마침내 밀로네의 처분이 내려졌다.

       

        『한달 간 근신이에요. 그리고 하층으로 돌아가는대로 ‘극채색’의 의장을 맡으세요.』

        “마족 전담기구 말인가요?”

        『운드라의 소가주가 행방이 묘연하니 누군가 조직을 이끌어야해요. 조사위원회에 참석했던 사람 중 비나가 가장 적임이에요.』

        “…….”

       

        하기 싫었지만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밀로네는 저번 명계의 문 사건의 뒤처리에 이상하리만치 진심이었다.

        극지에 머무르는 하인들이 몰래 얘기한 바에 따르면 밤 중에 찾아온 누군가에 의해 반쯤 협박을 받았다는 것 같았다.

       

        칠현자인 그녀를 협박할 만한 인물이 탑 안에 있기나 한지 의문이었다.

        자세히 보니 얼음 표면에 나 있는 금이 미세한 전류가 흐른 흔적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클락 이야기는 나오지 않은 것에 안도한 비나는 자신의 방으로 가 곧장 침대에 몸을 날렸다.

       

        그런데 평소처럼 위치노트로 갤러리에 접속하자, 눈앞에 어떤 창이 떠 있었다.

       

        ====

        관리자

        [약관 개정안에 대한 공지입니다]

       

        갤러리의 대대적인 개편과 함께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할 예정입니다

        해당 시스템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유저 분들의 동의가 필요하니 다들 한번씩 체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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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 꼼꼼이 읽고 체크해주세요

        ====

       

        “?”

       

        보아하니 주딱이 갤러리에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려는 모양이었다.

        체크박스가 표시되어 있는 항목 중 하나를 누른 순간 엄청난 양의 텍스트가 끝도 없이 쏟아졌다.

       

        그런 항목이 수십 개나 연달아 있었기에 비나는 읽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곧장 동의를 눌렀다.

        다른 유저들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다.

       

        ====

        [이걸 하나하나 다 읽으라고?]

       

        어림도 없지 바로 ‘전체동의’ 누름

       

        — ㄹㅇㅋㅋ

        — 1초 컷~

        — 다 읽기 쉽지 않음

        — 아 왜 내가 갤러리에서까지 뇌 넣고 살아야 되냐고 ㅋㅋㅋㅋ

        ====

        ====

        [이거 선택 항목 뭔가 좀 쎄하지 않음?]

       

        특히 ‘해주 및 부당해약’ <- 이거 말인데

        만약 저주 같은 거 걸려도 신성학파나 교단에 의뢰 못하고 해주학파 같은데서만 풀 수 있게 해놓은 거 같음

       

        내가 신성학파라서 아쉬운 소리 하는 건 아니고

       

        — 네 다음 신성학파~

        — 응 그럴 줄 알고 해주학파 친구 만들어놨어~

         ㄴ 해주학파는 친구가 없어요

        — 하나라도 동의 안하면 신기능 이용 못한다는데 뭐 어떡함

         ㄴ ㄹㅇ 대가리 깨져도 무조건 해야지 ㅋㅋ

        ====

        ====

        [나 약관 동의했는데 좆된 거 같음]

       

        보아하니 계약의 일종인 거 같던데

        멋모르고 전체동의 누른 순간 정령들이 갑자기 혼비백산해서 달아나더라

       

        내일 20층 가서 마법 시연해야 하는데 이거 어떡함?

        이런 적 처음인데 얘네 하루 정도 지나면 다시 돌아오나?

       

        — 응 정령들이 너 버렸어~

        — 경쟁자 컷!

        — 탑주한테 쫄았네 ㅋㅋㅋ

        — 나도 정령사인데 그래도 정령문 자체는 남아있는 걸로 봐서 돌아오긴 할 거임

         ㄴ 갑자기 관상어들 살고 있는 어항에 상어 풀어논 격이라 그럼

         ㄴ 키운댔잖아! 키운댔잖아!!!

        ====

       

        여러 반응이 오가는 가운데 비나 역시 이상함을 느꼈다.

        확실히 마법적인 계약, 다만 강제력 자체는 크지 않다.

        주된 내용은 갤러리를 이용할 때 위치노트를 통해 마나를 일부 지불한다는 것.

        다만 상시적인 것은 아니고 주딱이 말한 ‘신기능’을 쓰게 될 때 뿐이었다.

       

        남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마력의 순도를 지닌 비나였기에 이쯤은 전혀 부담되지 않았다.

        허나 그것과는 별개로 계약을 채결할 때 느꼈던 계약자의 신체에 ‘간섭하는 방식’이 어딘가 낯익었다.

        어딘가 집요하고 끈적거리는, 하지만 중독적인 쾌감을 이끌어내는 감각.

       

        “킁킁.”

       

        조금 더 조사해보려 했으나 부계정을 써도 계약에 두 번 동의하는 건 불가능했다.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지만 위치노트에서는 마분지 냄새 뿐이었다.

        괜히 클락의 어깨에 몸을 기댄 채 헐떡이던 기억만 떠올라 이불을 한 번 뻥! 하고 걷어찼다.

        어쨌거나 근신 중에 심심하지는 않을 듯했다.

       

       

       

        *

       

        “와, 완성……! 드디어 잘 수 있어…….”

        “그래? 어디보자.”

       

        이게 되네.

        나는 녹초가 된 이자젤이 건넨 위치노트를 받아 공지를 작성했다.

        유저들이 약관에 동의하기 시작하자 이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확실히 내가 주문한 대로 구현되어 잘 돌아가는 듯했다.

       

        ====

        [System :  ‘그 버튼’ 기능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

       

        “기본적으로는 대상자에게 저주를 내리는 형태인데 그 원천은 ‘버튼’을 누른 사람들의 마나와 포인트에요. 본인이 설정한 값에 따라 변동되게 만드느라 진짜진짜지인짜 힘들었거든요.”

        “저주? 너 그런 것도 할 줄 알았어?”

        “아뇨? 외부에서 끌어온 소스는 가지고 계신 ‘검’에 내장된 소환학파의 계약방식 정도? 그 외에는 거의 전부 클락님의 마법을 기반으로 해요. 아주 재능이 충만하시던데요.”

       

        그럴 리가.

        야근을 너무해서 머리가 이상해졌나보군.

       

        어쨌거나 만드는 데 성공했으니 테스트는 해봐야지.

        나는 접속 중인 유저들 대부분이 약관에 동의한 것을 확인하고 다시 한 번 공지를 작성했다.

       

        ====

        관리자

        [갤러리에 포인트를 이용한 새로운 기능이 추가됩니다]

       

        게시글 작성에서 (버튼)을 이용해 유저들과 다양한 상호작용을 하실 수 있습니다!

       

        (버튼)의 제작과 (버튼)을 누르는 데는 양쪽 모두 포인트가 소모되며 어떤 효과인지에 따라 수치가 달라집니다!

       

        즐거운 갤질 되세요!

        그럼 뿅!

       

        — 좆됐다 주딱 공지에 느낌표 씀

         ㄴ 왜 그럼 안 돼?

         ㄴ 저 새끼가 즐거워하는 건 분탕질 할때 뿐임

         ㄴ 당분간 갤 끊어야겠다 ㅂㅂ

        ====

       

        눈치 빠른 한 녀석이 쓴 댓글을 나는 곧바로 삭제했다.

        뒤이어 들이닥칠 폭풍에 한 명이라도 더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며 일어나자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있던 이자젤이 고개를 들었다.

        좁은 방에서 홀로 지내야 하는 그녀 역시 이제는 슬슬 갤러리에 정을 붙이기 시작한 참이었다.

       

        “저기…… 근데 이거 괜찮은 거겠죠?”

        “나름 독창성도 있고 마법적인 완성도는 뛰어나니까 통과할 것 같은데? 지금 가서 확인해 보려고.”

        “그, 그거 말고요! 갤러리가 망가지면 어떻게 해요…….”

       

        이자젤의 손가락이 한 게시글을 가리켰다.

        벌써 포인트를 잔뜩 모아놓은 고닉들이 축제를 벌이는 중이었다.

       

        ====

        [이 버튼을 누른 일수 만큼 무고한 파딱의 구내식당 반찬으로 코다리조림이 나옵니다]

       

        대신 갤에서 퍼리충 하나가 소멸합니다

       

        (버튼) – 3000P

       

        어케하실?

       

        — 재봉틀 가져와라

        — 바로 누름

        — 응 소멸 안 해도 누를 거야~

        — 나 파딱인데 버튼 눌렀다

        ====

       

        “괜찮아.”

        “정말요?”

        “아마?”

        “…….”

       

        뒤늦게 자신이 뭘 만들어 버렸는지 깨달은 이자젤의 표정을 보고 나는 빠르게 마력 승강기에 몸을 실었다.

        정령의 회랑을 한 번에 통과하지 못하면 탑 전체에 생각보다 큰 혼란이 찾아올 것만 같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늦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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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이세계 마탑의 갤주가 되었다
Score 3.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10 years since transfer to another world

What I do inside the Ivory Tower of Truth isn’t much different from what I did on Earth.

====

[If you missed today’s attendance for the ‘Principles and Understanding of Dimensional Glass’ course, you’ll get a penalty] If you want to kill the professor who suddenly changed the classroom with a phase transition 2 minutes before the start of class, go ahead. Hah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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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why does everyone think I’m the Tower 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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