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화. 대규모 합병
“저기, 음. 케넬름? 인제 그만 떨어져 주지 않을…래?”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한창 회식 중이던 와중에 알람이 미친 듯이 울리길래 잠깐 넘어온 것인데.
케넬름이 눈물을 글썽거리더니 내 품에 와락 안겼다고?
커다랗고 말랑한 질량의 무언가가, 실로 폭력적인 중량의 무언가가 뭉개진다! 뭉개진다고!
‘동해물과백두산이마르고닳도록하느님이보우하사우리나라만세.’
눈을 감고 필사적으로 명경지수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여기서 남아의 기상을 굳건하게 만들면 대참사였다.
“아, 으힛. 죄, 죄송합니다!”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진 케넬름이 재빨리 멀어졌다. 저 멀리 떨어진 리아는 뭔가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데모닉 보고 싶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 난 좋긴 했는데. 그래서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누가 설명을 좀….
곧 리아의 설명을 통해 전후 사정을 알게 되었다.
“…차원의 틈이 한번 무너질 뻔했다고?”
“네. 지금은 안정된 것 같아요.”
“그거 지금 괜찮은 거 맞지…?”
간담이 서늘해진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차원의 틈이 무너질 뻔했다니?
지상과 심연이 충돌하면서 유례없는 대재앙이 일어날 뻔한 것 아닌가.
“아니, 잠깐만. 그러면 거기서 작업하던 발가르는? …설마 죽은 건 아니지?”
“멀쩡하게 잘 살아있어요. 차원의 틈을 안정시키는 데 위대하신 분께서 주신 용이 아주 큰 역할을 했다니까요?”
“…내가 준 용이?”
그 조그마한 새끼 용이 어떻게 그런 역할을 했지?
거울을 바라보자 의문은 곧 풀렸다.
작고 귀여운 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누가 봐도 늠름한 성룡이 발가르와 투닥거리고 있다.
“저 용이 내가 준 용이라고? 사이즈가 너무 다른데?”
터질 듯 붉어진 볼에 연신 손부채를 하던 케넬름이 대답했다.
“아, 크흠. 흠! 아마도 차원의 틈에서 일시적으로 빠르게 성장을 한 것 같습니다.”
“성장…?”
케넬름의 설명은 이러했다.
차원의 틈은 어마어마한 압력이 가득한 공간이다. 일반적인 생명체가 들어간다면 단숨에 쥐포가 될 정도로.
그런데 용이라는 종족은 개사기를 넘어서 그냥 치트에 가까운 것들이라, 압력에 짓눌려 근육과 혈관이 찢어지는 것보다 더 빠르게 재생한다는 것이다.
“…그게 말이 되는 거야?”
“그러니까 용이죠. 종족 자체가 그냥 부조리, 그 자체예요.”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불합리함이다.
아무튼.
“그걸로 성장한다고?”
“네. 그런데 이건 꼼수에 가까운 수단이라서. 위대하신 분이 따로 별빛으로 형태를 고정해주시거나 하지 않으면 아마 금방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것 같은ㅡ”
“그러면 내가 고정시켜줄까?”
별 생각 없이 손끝에 별빛을 모았다.
리아와 케넬름이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아니요!!” “안 돼요!!!”
“어, 어어. 그렇게까지 안 될 일이야 이게?”
살짝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었다. 리아와 케넬름이 나한테 소리를 높이는 건 정말 드문 일인데, 이게 그 정도의 일이라고?
리아가 답답하다는 가슴을 두드렸다.
“당연하죠. 위대하신 분께서 발가르한테 새끼 용을 맡기신 이유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거라고요!”
“음음. 실로 그렇습니다.”
“거기에! 지금 발가르가 새끼 용을 키우면서 뭔가 간질간질한 감정을 깨닫고 있는데, 단번에 성룡이 된다니요. 이건 언어도단이라고 생각해요! 저 둘은! 발가르가 아버지의 역할을, 새끼 용의 자식의 역할을 하면서 성장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그렇구나… . 알겠어.”
“그 과정에서 피어나는 미묘한 부끄러움, 감정, 시선! 발가르는 순수하게 아버지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지만, 새끼 용은 점차 성장하면서 발가르를 아버지가 아닌 한 명의 남성으로 바라보는 그 미묘한 맛이 일품ㅡ”
어쩐지 리아의 기세가 유독 남달랐다. 이렇게 열정적인 모습이라니.
이거 어디서 본 모습인데…. 기시감이 느껴진다.
‘아. 생각났다.’
군대 시절, 하트 시그널을 보면서 자기가 지지하던 커플을 열렬히 부르짖던 선임의 모습과 비슷했다.
‘리아…. 우결충이었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발가르와 새끼 용이 혈연관계로 묶인 가족은 아니지만, 발가르는 진심으로 아버지의 역할을 다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설마 나중에 자기가 애지중지 키운 새끼 용이랑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기야 하겠어?
난 발가르를 믿었다.
“아니 그보다. 차원의 틈이 한번 무너졌다면서. 상황이나 한번 보자.”
거울을 가져와 차원의 틈을 전체적으로 빠르게 훑었다.
처참한 모습이다. 무너진 공간의 곳곳을 바위 고목과 골조가 얼기설기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라니.
보자마자 견적이 나왔다.
“망했네….”
플랜 B.
개처럼 멸망!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남았어?”
“…잠깐만요. 다시 계산하는 중이에요. …아! 나왔어요. 원래 붕괴 예정일까지 12일이 남았었는데, 지금은… 5일 남았어요.”
“하아.”
알딸딸하던 술기운이 날아갔다.
고작 5일…. 5일 안에 다시 골조를 만들고, 설치한다고 하면.
‘무리야. 시간이 너무 부족해.’
차라리 지금 설치된 바위 거목과 골조를 보강한다면 어떨까?
“지금 설치된 것들을 그대로 쓸 수는 없어? 아니면 저 위에 추가적인 골조를 설치한다고 하면?”
“힘들 것 같습니다. 차원이 한번 붕괴했던 탓에 극도로 불안정해졌습니다. 추가적인 작업 또한… 힘들 것 같습니다.”
“씨이….”
욕이 다 나오네.
나는 도대체 무슨 팔자를 타고났길래 하는 일마다 이렇게 대차게 꼬이는 거야?
“차원이 갑자기 무너진 이유는? 설마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너진 건 아니지?”
케넬름이 커다란 거울을 만들어 내 쪽으로 향했다.
새끼용, 성장, 차원의 붕괴… 그리고 이를 붙잡던 발가르의 실수.
“아….”
작게 탄식했다.
최후의 순간, 발가르는 자신도 모르게 쏟아지는 흙덩이를 향해 손을 뻗고 말았다. 이에 따라 차원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게 된 것이고.
“…이건 어쩔 수 없네.”
발가르의 실수도 아니고, 새끼 용의 잘못도 아니다.
더럽게 운이 없었을 뿐이다.
꾸욱.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후의 계획은, 플랜 C.
내 만기 적금을 희생하는 계획이다.
* * * * *
《후우….》
마왕 성으로 돌아온 발가르의 한숨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발가르의 등을 쿡쿡 찌르며 놀자고 보채던 새끼 용이 머뭇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ㅡ삐이?”
《…아니다. 네가 뭔가 잘못한 것이 아니다.》
어버이에게 차원 붕괴에 대해 말씀드릴 생각에 눈앞이 깜깜했다.
발가르는 새끼 용의 뿔 사이를 쓰다듬었다.
새끼 용이 갸르르르ㅡ 만족스러운 울음을 흘렸다.
균열을 넘어 마왕성으로 돌아오자, 커다랗게 자라났던 용은 금방 원래의 작고 귀여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성숙했던 정신 또한 유아의 것으로 돌아왔다.
‘이름이라.’
잠시 고민하던 발가르는 새끼 용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 이름 말이다. 내가 뭐, 깊게 고민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주 짧게 생각을 해서 네 녀석의 이름을 한번 만들어 봤다.》
“삐? 삐이이이ㅡ!”
이름? 와! 내 이름!
새끼 용이 두 팔을 번쩍 들고 폴짝폴짝 뛰었다. 머리보다 짧은 팔은 정수리에 닿지도 않았다.
《네 이름은…. 네페로스티. 네페로스티라고 부를 것이다. 로티… 라고 부르면 되겠군.》
미래의 도마뱀의 이름에서 살짝 바꾼 것이다. 그대로 쓰지 말라고 했지, 참고하지 말라는 말은 안 했으니까.
“삐이이이! 삐익! 삐이이이!”
네페로스티! 야호! 내 이름은 이제부터 네페로스티야! 애칭은 로티! 내 애칭은 로티!!!
새끼 용은 펄쩍펄쩍 뛰어다니다가 꼬리를 씰룩씰룩 흔들기 시작했다.
발가르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녀석을 보고 있자면 자신의 걱정이 너무나 별 볼 일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쿠웅ㅡ.
마왕성 일대를 짓누르는 막대한 시선.
발가르가 어깨를 떨었다. 오신다, 어버이께서.
움켜쥔 주먹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핏방울이 맺혔다. 덜덜 떨리는 이빨이 발가르의 감정을 드러냈다.
삐이이이ㅡ…
로티가 다가와 발가르의 손을 쓰다듬었다.
《후. 그래, 고맙다.》
로티를 살짝 쓰다듬은 발가르는 당당히 고개를 들어 어버이를 마주했다.
부족함과 한순간의 실수로 주어진 임무에 실패했으나, 최선을 다해 이를 수습했다. 발가르는 당당히 어버이께 이를 고하기로 마음먹었다.
《…ㅡ어버이시여. 부덕하고 부족한 저의 실수와 어리석음으로 인해ㅡ》
《잘했다.》
《예?》
《잘했다고 하였다. 실수를 저질렀으나, 최선을 다해 이를 수습하려 한 것. 새끼 용의 선물을 지키고자 한 것. 잘했다고 칭찬을 하는 것이다.》
발가르가 멍청하게 하늘을 올려봤다.
칭찬?
실패한 것에 그치지 않고 모든 것을 망칠 뻔했는데?
《어, 어찌. 허나 저는, 맡겨주신 임무를 실패…….》
《되었다. 내가 너를 탓하지 않으니, 너 또한 스스로를 질책하지 말라.》
아.
이 얼마나 자비로운 결정이신가.
고개를 숙인 발가르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새끼 용이 발가르의 손을 더욱더 세게 붙잡았다.
그러더니, 눈빛을 단단히 굳히고는 짤막한 두 발로 발가르의 앞에 우뚝 서는 것 아닌가.
삐이이이이ㅡ!
야, 너 뭐야! 뭔데 우리 아빠 괴롭혀!!
날개를 최대한 크게 펼쳐서 덩치를 크게 보이려 안간힘을 썼다. 형용할 수 없는 존재의 시선에 새끼 용의 몸이 덜덜 떨렸지만, 새끼 용은 물러서지 않았다.
새끼 용의 작고 영특한 머리는 다음과 같은 논리 회로를 산출했다.
우리 아빠를 무릎 꿇렸다 -> 저 녀석은 나쁜 놈이다! -> 내가 혼내준다!
《이, 이 녀석! 로티! 뭐하는 짓이냐!》
당황한 발가르가 로티를 허리춤에 끼웠다. 로티가 바둥거리며 꼬리를 휘둘렀지만 발가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삐이이익! 삐이! 삐이이이ㅡ!
아빠 나 좀 놔봐! 내가 저거 혼내줄게! 야, 야! 너 뭔데 우리 아빠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너 뭐 돼?
발가르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로티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겠는데, 그것도 상황과 상대를 보면서 해야지!
당황한 발가르는 아무 말이나 뱉었다.
《로, 로티! 저분은 너의 그, 그러니까 할아버님이시다!》
《…아.》
……삐?
로티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할아버지라고? 아빠의 아빠?
그러면… 아빠의 아빠가 아빠를 혼내는 건 괜찮은 건가? 어, 그런데 너무 심하게 혼내는 거 아닌가?
삐? 삐이?
로티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사이 발가르는 어버이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어버이시여. 제, 제가 당황한 나머지 말실수를.》
《……허허. 아, 아니다….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
어버이께서 발가르를 탄생시키셨고, 발가르는 양녀 비슷한 느낌으로 로티를 키우고 있다.
순리대로 따지자면 어버이께서는 로티의 할아버지가 맞았다.
《내, 내가 할아버지……. 아직 여자친구도 없는데 손녀가…….》
신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구시렁거렸다.
속이 좁은 신이었다.
《아! 어버이시여, 그나저나 이제 차후의 대책을 논하셔야 하는 것이 아닌지….》
발가르는 생산적인 주제를 꺼냈다.
심연과 지상의 충돌은 막았지만, 이는 임시방편.
시간이 흐르면 결국 차원은 붕괴할 것이다.
심연을 다스리는 발가르에게 이는 무척 중대한 문제였다.
《걱정하지 말거라. 마련해둔 최후의 방책이 있으니.》
《아! 역시 어버이십니다!》
어버이께서는 다 계획이 있으시구나!
우주를 다스리는 만물의 지배자! 어버이 앞에 서면 모두 우둔한 자가 되어버린다!
《그러니…..발가르 칸 가르데나. 너는 지상으로 나올 준비를 하거라.》
《예?》
갑자기 지상을?
앞뒤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발가르가 되물었다.
《내 최후의 계획은…. 지상과 심연을 하나로 합치는 것이다.》
《…??》
어버이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면 발가르는 헛소리라 말했을 것이다.
지상과 심연이 무슨 슬라임도 아니고, 합친다고 합쳐지는 종류의 물건이던가?
《그러니 너는 지상의 대표자들과 만날 준비를 하거라. 그간 쌓인 오해들을 해소할 필요가 있으니.》
《…??? 아, 알겠… 습니다?》
뭔가… 뭔가 일어나고 있다.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으음!! 발가르와 로티가 이어진다면 이것은 근친인가 아닌가…!! 실로 심오한 주제군요…!!
가족이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혈연? 정? 함께 한 시간과 추억? 각자의 기준이 다르기에 무어라 정의할 수는 없겠지요… 이걸 독자님들의 해석에 맡기는 것도 재밌을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