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화. 대규모 합병 ( 2 )
합병.
어떤 거대한 두 조직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경우에는 지상과 심연을 합병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이제 남은 건 정말 플랜 C뿐이야.’
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플랜 A도 실패했다. 잘 진행 중이던 플랜 B는 얄궂은 운명의 장난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이제 나에게 남은 계획은 단 하나, 플랜 C.
부들부들.
주먹이 떨린다.
두려움에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
“…케넬름.”
“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야.”
“말씀하시지요. 듣고 있습니다.”
“…지상과 심연을 하나로 합치겠어.”
“……네?”
케넬름이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아득히 인지를 벗어난 발언이었으니 이해한다.
“심연과 지상을 하나로 합치겠다고. 이제는 정말 그것밖에 방법이 없어.”
“에…? 그, 그게 가능… 한 건가요?”
“지상과 심연을… 하나로?”
“가능은 하겠지. 애초부터 지상과 심연은 하나의 차원이었어. 내가 박살을 내면서 심연이 밑으로 떨어진 거지.”
그래.
또 과거의 내가 한 짓이다.
“이론상 가능은 할 것 같습니다…. 다, 다만 그 과정에서….”
케넬름이 말을 흐리며 내 눈치를 봤다.
무려 두 차원을 하나로 합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힘은 감히 예측하기 힘들 정도.
“지상을 심연으로 내릴 수는 없어. 심연은 너무 낮은 곳에 있는 차원이니까. 지상도 심연처럼 오염되겠지.”
“그렇다면… 심연을 지상으로 올리실 계획이군요.”
“그래. 거기에 필요한 힘은…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믿는 구석은 있다.
얼마 전 만기 해지 된 나의 적금.
나의 한 달 월급은 290만 원.
그중 200만 원을 4년 동안 적금으로 넣었다.
‘이자를 빼고 계산해도, 어림잡아 9천만 원의 거액.’
거의 1억 원의 총알이 내 손에 있는 셈이다.
과연 세상에서 두려운 것이 무엇일까.
“내가 이 돈으로 할 수 없는 일은… 이 세상에 없어.”
1억을 들고 있는 나는 신이고 무적이다.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리아와 케넬름에게 지시했다.
“심연을 지상이 있는 곳까지 끌어올릴 거야. 시기는 3일 이후로 하자.”
무려 지상과 심연이 하나가 되는 일이다.
삐걱거리는 일을 막기 위해서 3일 동안 해결해야 하는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지상과 심연은 서로 쌓인 오해의 골이 상당히 깊다.
다짜고짜 둘을 합치면 수많은 다툼이 일어날 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
이를 미리 조정할 필요가 있다.
우선 심연의 지배자, 발가르에게 지상으로 올라갈 준비를 시켰다.
《발가르 칸 가르데나. 지상으로 향할 준비를 하거라! 지상과 심연은 하나로 거듭날 것이니!》
《지, 지상… 말씀이십니까? 하나로? …? 어, 아, 알겠습니다??》
발가르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상과 심연을 합친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은 기색이 역력하다.
이해는 한다.
나도 설마 이런 방법까지 쓰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나의 신도들이여. 믿음으로 행하는 자들이여. 크나큰 격변을 준비하여라. 곧 세상이 흔들리고, 천지가 뒤바뀔 것이니!》
– “예, 예? 하, 하나 된 분이시여…?”
–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잃어버린 땅, 심연이 지상으로 올라오리라. 오래전 길 잃었던 대륙이 고향으로 돌아올지니! 그대들은 준비하라, 잃어버린 땅을 맞이하라!》
– “…???”
– “심연이 지상으로 올라오는…? 에? 예에?!”
지상의 반응도 내가 상상한 대로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신가ㅡ 하는 눈빛.
내가 신이 아니었다면 아마 미치광이 취급을 받지 않았을까.
“…진심이시군요.”
그제야 내가 진심이라는 것을 눈치챈 케넬름이 뜨악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광인을 보는 눈빛이다.
광인 짓을 하면 실제 광인이지만.
이를 멋지게 성공하면 영웅이 되는 법.
나는 신세계의 영웅이 될 것이다.
“난 항상 진심이었어.”
난 이 세상에 언제나 진심이었다.
언제나.
지상에 살아가는 무수한 생명들이 아름다웠기에.
그들이 뿜어내는 눈부신 삶의 불꽃에, 열정과 슬픔에 홀려버렸다.
1억이라는 거액이…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아, 아깝지 않은 수준으로…….
아깝지 않은….
시발, 내 1억.
‘설마 1억을 전부 쓰게 되지는 않겠지?’
차라리 피를 토하고 며칠 근육통으로 앓아누울래.
* * * * *
요 며칠, 지상 곳곳에서 심상치 않은 징조들이 일어났다.
멀쩡하던 하늘에 균열이 가기도 했고, 알 수 없는 이유로 마을 하나가 사라지기도 했다.
심심치 않게 지진이 일어나는가 하면, 마수 떼가 대규모 이동을 하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발견되었으니.
그야말로 뒤숭숭한 분위기가 온 대륙을 휩쓸고 있었다.
세상이 망할 징조라는 둥, 노하신 신께서 지상을 정화하실 계획이라는 둥.
온갖 괴담과 소문이 팽배하게 떠돌아다녔다.
《심연이 지상으로 올라오리라! 잃어버린 땅이 지상으로 돌아올 것이니. 준비하라, 나의 신도들이여. 대격변을 맞이하라.》
와중 하나 된 분께서 천둥 같은 목소리로 아뢰시기를.
심연이 지상으로 올라오리라.
잃어버린 땅이 돌아오리라.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심연이 지상으로 올라온다고?”
“대륙은 이제 망했어! 우리는 악마들의 공격으로 모두 죽고 말 거야!”
“아니, 아무리 그래도 하나 된 분께서 우리를 악마들한테 죽이시려고 심연을 지상에 올리실까?”
“…심연을 개척하면 내 땅으로 인정해주려나?”
혼란에 빠지는 사람, 절망에 빠지는 사람, 희망을 갖는 사람, 기회를 보는 사람.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심연에 관해 이야기하기 바빴다.
다투고, 토론하다가 결론은 항상 똑같았다.
“높으신 분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각국의 수뇌부 또한 한바탕 뒤집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다른 이들과 똑같은 입장이었다. 뭔가 언질을 들은 것은 전혀 없었다.
심지어 만신전도 별반 다른 처지가 아니었다.
아.
조금 다른 정보를 듣기는 했다.
“…마왕과의 회의를 준비하라고 하셨다고?”
안토니오 대사제가 반쯤 썩은 얼굴로 되물었다.
제발 꿈이기를 바라는 표정이었다.
누구랑 회의를 하라고?
마왕?
뭐지? 신께서 피와 살육의 회의를 말씀하시는 건가?
마왕의 사지를 찢어서 사방에 뿌리라는 말씀이신가?
케니스가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네에…. 꿈에서, 케넬름 성녀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셨어요…. 내일 동틀 정오에 마왕이 지상으로 올 것이라고….”
“…….”
“그러니까 최대한 많은 지상의 대표자들을 만신전으로 모으… 라고 하신….”
말을 하던 케넬름은 안토니오의 눈치를 살폈다.
안토니오의 얼굴이 순식간에 폭삭 늙어버렸다.
내일? 내일 정오?
지금 막 한낮이 되었으니, 이제 겨우 24시간 남은 셈이다.
“……내일 정오……. 내일 정오까지……. 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신께서 늙은 종에게 최후의 시험을 내리시는구나!
내일 정오까지 제국의 황제부터 변방 왕국의 왕까지 만신전으로 데려오라고?
아하!
늙고 비루한 종이 쓸모 없어지셨음을 이리 돌려서 말씀하시는 건가?
차라리 빈 찬합을 주실 것이지.
신이시여, 이렇게 모질게 구실 필요는 없으셨습니다!
“허허허허허허허ㅡ. 이 또한 하나 된 분의 시련이겠지요……. 허허허허.”
“그, 저도 최대한 노력해서 도와드릴게요. 제가 직접 다니면서 만신전으로 모셔 오면 좀 괜찮을 거예요.”
케니스는 진심으로 안토니오를 위로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이건 너무 가혹하고 불가능한 시련이었으니까.
“허허.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이거야 원. 데모닉 팔라딘과 한스 팔라딘에게도 말을 좀 전해 주십시오. 내일, 내일 정오까지…. 저는 쉴 틈이 없겠군요.”
신께서는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주시지 아니하는 법.
안토니오는 늙은 몸이지만 최선을 다하고자 마음먹었다.
마왕과 회의를 하는 건 상상만 해도 어지러웠지만, 일단 각 국의 권력자들을 모으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그때.
거대한 무언가가 만신전을 스치듯 날아가며 땅 그림자를 드리웠다.
《──────!!!》
세상에 둘도 없이 흉포한 괴성.
케니스와 안토니오가 동시에 반응했다.
“이건…!” “용!”
부리나케 밖으로 튀어나온 케니스와 안토니오는 입을 쩍 벌렸다.
《듣거라! 이 우매하고 하찮은 것들아! 하나 된 분께서 나를 보내시며 너희들을 도우라 말씀하셨으니!! 평생의 영광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몇 번이고 봤던 푸른 비늘의 용이 고고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하나 된 분께서 몸소 거두셨다는 서리고룡이 분명했다.
다만….
“너 딱 걸렸다, 이 용가리 새끼!”
《너는 새끼를 쳤으면 좀 얌전해질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
쿠웅! 콰과광! 콰릉!
이미 더 빠르게 달려온 프리가가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며 서리고룡과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녀의 도끼에 새겨진 용 사냥꾼의 그림이 유독 즐거워 보이는 것은 우연일까.
“공녀님! 멈추세요!”
“용이시여, 부디 싸움을 그만둬 주십시오!”
케니스와 안토니오는 구경꾼을 물리치고 둘의 싸움을 말렸다.
그 짧은 사이에 얼마나 치열하게 다퉜는지, 용은 날개가 살짝 찢어졌고, 프리가는 한쪽 팔이 덜렁거렸다.
“크흐. 아쉽네. 슬슬 재밌어지던 때였는데.”
《새끼를 낳더니 느려졌구나. 크하하.》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둘을 보며 케니스가 머리를 감쌌다.
서로 앙숙이어서 싸우는 것이 맞기는 하는지, 이쯤 되면 그냥 싸움 자체를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덜컹!
“여보! 프리가! 용이랑 싸웠다면서!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케니스! 용, 용이 나타났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뒤늦게 나타난 이스칼과 한스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덜렁거리는 문짝에 안토니오가 눈을 찌푸렸다.
《다 모인 것이냐? 아마 이야기는 대충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상과 심연에 대한 것 말이다.》
서리고룡이 입을 열었다.
심연과 지상의 대통합.
이에 관해 만신전도 자세히 아는 것이 없기에 한껏 귀를 집중했다.
“용이시여. 혹여 아시는 것이 있다면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그저 하나 된 분께 너희들을 도우라는 명을 받았을 뿐.》
그리 말한 서리고룡은 제 등을 보여줬다.
안락하고 푹신하게 생긴 안장 수십 개가 서리 고룡의 등에 장착되어 있었다.
“아.”
역시 신께서는 감당 못할 시련을 내리시지 않는구나!
큰 깨달음을 얻은 안토니오가 기도하며 회개의 시간을 보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자, 길 안내를 할 인간은 내 등에 타도록 해라. 평생의 영광으로 알고 대대손손 자랑하여라. 무려 용의 등에 타는 것이니!》
서리고룡 이베르가 으쓱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반응은 영 시큰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거 엄청 골치 아픈 일 아닌가?’
‘날아다니는 용의 등에 타서, 그것도 하루 만에 대륙의 권력자들을 데려오라고?’
굉장히 피곤하고 힘든 일이 될 것이라는 걸 모두가 눈치챘기 때문!
“참나. 별것도 아닌 걸로 유세 떨기는.”
이미 몇 번이고 용의 등에 타본 프리가는 흥미를 잃고 집으로 돌아갔다.
“어, 저, 저는 애들 밥 줄 시간이라서….”
이제는 유부남이 되어 장거리 출장이 곤란한 이스칼도 도망쳤다.
남은 것은 케니스와 한스, 안토니오.
안토니오는 재빨리 허리를 두들기며 크게 기침했다.
“콜록 콜록! 크흠, 커흑! 아이고, 허리야…. 무릎도 쑤시고…. 나이를 먹어서 몸이 예전 같지 않군요…. 콜록콜록!”
오늘 새벽에도 워밍업으로 데드 리프트 150kg을 조진 안토니오였지만, 아무튼 늙고 병들었다고 주장했다.
자연스레 남은 후보는 케니스와 한스.
한 명은 용사, 한 명은 팔라딘.
눈치를 보던 한스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용과 함께 다녀오겠습니다.”
“아니에요. 우리 같이 가요!”
케니스는 한스와 손깍지를 끼었다. 이건 자연스럽게 데이트할 수 있는 기회였다.
데모닉의 감시에서 벗어날 기회!
한스의 인중이 헤벌쭉 늘어났다.
“헤, 헤헤. 그럴까?”
《정해졌으면 어서 타라. 시간이 없다!》
이베르의 재촉에 케니스와 한스는 안장의 가장 앞에 올라탔다.
가죽끈으로 허리를 단단히 고정했다.
《잘 고정해라. 느릿하게 날아가지 않을 것이다.》
“네. 잘 묶었어요. 우선… 동쪽으로 출발하죠.”
《좋다.》
이베르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올랐다.
용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모인 사람들이 환호하며 손뼉을 쳤다.
“와아아아아! 용사님이 용을 타고 계신다!!”
“폭염용왕흑살제 한스 님께서 날 봐주셨어!!”
“한스님이 날 흑염과 죽음의 세계로 인도해주실 거야!!”
한스와 케니스는 익숙하게 손을 흔들며 대중들에게 인사했다.
구름과 눈을 마주칠 정도의 고도까지 올라오자, 이베르가 미리 경고했다.
《목 안 꺾이도록 조심해라. 하나 된 분의 은총 덕분에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날 것이다. 부디 죽지 말아라.》
“네, 준비했어요.”
“어서 출발하시죠.”
끼이이익, 철컥.
안장에서 사람을 완벽하게 감싸는 형태의 막이 올라와 한스와 케니스를 감쌌다.
외부의 바람이 들어올 걱정도 사라졌는데, 용은 몇 번이고 신신당부하며 경고했다.
《출발하겠다.》
펄럭, 펄럭ㅡ
이베르는 날개를 크게 흔들더니.
콰────앙!
“크으으으으?!”
“꺄ㅡㅡㅡㅡ!!”
소리보다 빠르게 날기 시작했다.
케니스와 한스는 음속을 초월한 비행을 최초로 경험한 인간이 되었다.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손녀가 될 것인지, 며느리가 될 것인지…!! 그것은 정말 재밌는 상상이 될 것 같군요…!! 손녀이자 며느리… 이거 완전 콩가루 집안이 아닌가 싶지만… 크흠!
에… 그리고 케넬름은 처녀입니다!!! 처녀!! 처녀라구요!! 묘사한 지 너무 오래되기는 했지만… 케넬름은 처녀수태를 한 성녀입니다!!! 처녀!! 처녀입니다!!! 처녀임(중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