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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63

    <463 – 인격컨셉 가동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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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능독점론]

    -목요일 5교시 17시~21시

    -교수 : 스텐드 밀

    -행정학부, 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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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요일은 시험이 하나밖에 없다.

    그만큼 멍을 때릴 시간도 많다는 뜻이다.

     

    “오크노디. 아침 먹자! 선배들이 다람쥐 굴을 털고 남은 도토리를 식당에 팔아서 오늘은 도토리메뉴가 잔뜩 생겼어!”

    “나중에…”

     

    뭐였을까, 디스트로이어 교수님의 그 고백은.

    다시 생각해도 혼란스럽다.

    교수님이 날 좋아한다니…

    정확히는 날 좋아한다기보다는 피폐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좋아하는 거지만.

    왜 그런 이상한 취향이 생긴 걸까?

     

    “어이 쥐방울. 점심 먹으러 안 가냐? 특선메뉴로 도토리전에 도토리막국수, 도토리수제비가 나온다던데. 너 그런 희귀요리 좋아하지 않냐?”

    “나중에요…”

     

    아침 내내 시작한 고민이 점심까지 이어지고 나서야 답이 보였다.

    하비.

    디스트로이어 교수님의 소꿉친구이자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 여자.

    그런 인연은 쉽게 잊을 수 없겠지.

    하물며 자신의 실수로 비극적인 끝맺음을 내린 인연이라면 더욱 잊을 수 없다.

    디스트로이어 교수님에게는 한평생 동안 잊을 수 없는 낙인처럼 가슴 깊이 남아있으리라.

     

    ‘하비를 구하지 못했던 과거가 디스트로이어 교수님의 취향을 왜곡시킨 거야. 그게 틀림없어!’

     

    하비의 불행했던 최후를 구해내지 못했던 자신이 그녀만큼 피폐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구해낸다.

    그런 요식행위로서 하비를 향한 죄책감을 간편하게 갚을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에게는 불행한 여자를 구할 능력도 지원세력도 충분히 있으니까.

     

    ‘배경을 알고 나면 불쌍하기는 한데…’

     

    그렇다고 덥썩 고백을 받을 수도 없어서 문제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디스트로이어 교수님이잖아.

    안데르센 대공자와 같은 강의를 듣는 것만큼 꺼림칙한 일이다.

    전대용사는 일종의 기믹이 있다.

    뭘 해도 실패하는 사람.

    언제나 한 발 늦는 사람.

    엮이면 정말로 비극의 히로인이 되기 딱 좋다.

    어떤 신들린 억까를 당해 봉변을 겪을지 고인물인 나조차도 감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용사클래스의 주요인물과 엮이는 것이니 발생할 미지의 이벤트의 위험강도도 상상 그 이상이겠지.

     

    ‘교수님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고백은 죽고 싶어서 작정한 것이 아니고서야 받을 수 없어!’

     

    그래도 몇 년 뒤라면 다를지도 모른다.

    내 성장이 일정선을 넘어선다면.

    용사클래스의 위기도 극복할 수 있다면.

    이런 신규이벤트, 오히려 내 쪽에서 적극적으로 고백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탐이 난다.

    싱이 아니었다면 이런 이벤트가 있었을 거라는 상상도 매력도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아주 꽁꽁 감추어졌던 이벤트인데 어찌 욕심이 안 생기겠는가.

     

    ‘하아. 근데 교수님을 어떻게 설득하지?’

     

    싱처럼 졸업과제에 써먹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은데 그때까지 고백은 안 받자니 이게 또 어렵다.

    교수님 저 사랑하지 마요! 이럴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가뜩이나 나를 하비에게 대입해서 과몰입하고 있는 디스트로이어 교수님인데 고백을 거절했다고 ‘피폐하고 사랑스러운 오크노디한테 차였다=하비의 구원에 실패했다’라고 인식하면 어떡해?

    덜컥 자살해버릴지도 모르는걸!

    어쩔 수 없지…

    4학년이 될 때까지 내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랑고백은 못 받아도 시간을 벌기 위해 타협안을 꺼내들었다.

    디스트로이어 교수님이 자살하지 않을 정도로만 어리광을 받아주자.

     

    ‘하비는 어떤 사람일까.’

     

    하비와 교수님이 이어졌다면 어떤 대화를 나눌까.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은? 취미는?

    식사는? 걸음걸이는?

    교수님은 어떤 하비를 보고 싶을까.

    웃는 하비? 슬픈 하비?

    위로하는 하비? 매도하는 하비?

    수많은 실패와 억까로 단련된 미세조정이 더해진다.

     

    고인물의 데이터뱅크 검색완료.

    인격프로세서 작성완료.

    <컨셉 : 하비> 가동 개시!

     

    “오크노디. 아침 점심을 다 걸렀다는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근데 저녁은 같이 먹을 사람이 따로 있으니 너무 섭섭해 하지 말아요, 지젤!”

    “…오크노디?”

     

    하비스러운 눈웃음과 여유로운 미소에 지젤이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흐음… 시운전은 시작했는데 반응이 애매하네.

    조금 더 테스트해볼까?

     

    “저, 지금부터 아버님의 거래상대와 식사를 하러 갈 거거든요.”

    “파파가 아닌 아버님…? 꼬마숙녀가 오늘따라 묘하게 낯설게 느껴지는군요.”

    “거리감을 느끼는 건 10점이에요.”

    “…제게 달리 바라는 바라도 있습니까?”

    “후훗. 글쎄요? 딱히 바라는 건 없을지도 모르죠. 아침이랑 점심에 식사권유를 했던 도로시랑 손오천아저씨한테는 미안하다고 전해주세요.”

     

    제 입으로 말하기는 건 쉽지만 그래서는 재미없다는 것처럼 묘한 뉘앙스를 뿌리고 톡톡 튀는 총총걸음 대신 조신한 종종걸음으로 멀어진다.

    어딘지 모르게 넋 나간 기색의 지젤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확신했다.

     

    ‘시운전은 성공적이야!’

     

    기간으로만 따지자면 이번 회차에서 가장 오래 나를 지켜봤던 인물인 지젤아저씨가 낯설다고 느낄 정도로 극적인 변화를 이루었다.

    다른 호흡, 다른 시야, 다른 사고방식.

    변경한 컨셉이 같은 외모를 지녔음에도 명백한 이질감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지금의 나라면 분명 통할 것이다.

    디스트로이어 교수님에게 보다 하비에 가까운 대체제로서.

     

    ‘사랑을 줄 수는 없어도 하비를 보여주면 교수님의 감정은 충족시킬 수 있잖아?’

     

    나 좀 천재인 듯!

     

    [예의바른 거절로 지젤을 감동시켰습니다. 장난꾸러기의 어른스러운 변신에 감동을 받은 걸까요? 이 행동은 착한아이 부문에서 높이 평가합니다.]

    [착한아이 경험치+1]

     

    보아라.

    기능경험치 보상도 내 연기력에 감동했는지 착한아이 인증서까지 뿌려주지 않는가!

    기세등등하게 디스트로이어 교수님의 집무실에 들이닥치려는데 모자가 구깃구깃 정수리를 조였다.

     

    [소악마도 너보다 사악하진 않겠다. 정신 안 차려? 세상에 사랑고백을 거절하겠다고 남의 집착을 더 심하게 만드는 사람이 어딨어?]

    “치. 그럼 어쩌자고요? 정말로 고백을 받아줄 수도 없잖아요. 모르는 척을 했다가 정말로 고백을 받으면 그땐 빼도 박도 못하는걸요. 앨리스 선배는 그럼 뭐 다른 좋은 방법 떠오르는 거 있어요?”

    [그런 건 없지만…]

    “그럼 제 방식대로 할 거니까 방해하지 마요!”

     

    거침없이 이어지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앨리스 선배가 반색하고 기뻐했다.

     

    [잘 생각했어. 애먼 교수 괴롭히지말고 시험 준비나 하러 돌아가자.]

    “그게 아니라요. 맨손으로 교수님을 찾아가는 건 실례잖아요?”

    […또 무슨 사악한 꿍꿍이를 꾸미려고?]

     

    사악한 꿍꿍이라니.

    되게 실례되는 소리를 하시네.

     

    “착한아이는 선물을 들고 다녀야죠!”

    [무슨 선물?]

    “제가 하비처럼 불쌍해 보일 선물이 있으면 교수님이 더 크게 기뻐하며 몰입하지 않을까요?”

     

    또 다시 구깃구깃 마구 머리를 조이기 시작하는 모자를 휙 벗었다.

     

    “흥. 암만 그래봤자 제 마음은 이미 굳었어요. 선물을 구하러 갈 거예요.”

     

    모자가 얌전해졌다.

    내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깨닫고 선배가 포기했다.

     

    [어디로 가게?]

    “조나한테로!”

    […뭘 구하러?]

     

    뭘 구하긴.

    재단집사한테 구할 거야 뻔하지.

     

    “아버님의 지령이요!”

     

    앨리스 선배의 텔레파시가 뚝 끊겼다.

    너무 놀란 나머지 할 말을 잃은 사람처럼.

     

    “착한아이는 아버님의 심부름도 잘 들어주기 마련이잖아요? 선물도 하는 겸 효도도 하는 나. 정말 하비스럽지 않아요? 후후.”

     

    선배는 한참이 지나서야 짧은 소감을 토로했다.

     

    [디스트로이어 교수가 불쌍해…]

     

     

    * * *

     

     

    조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가씨?”

    “아버님에게 지령을 하나 받아주세요!”

    “…세상에 자진해서 지령을 받는 장학생은 없습니다. 지령은 심심하다고 덥썩덥썩 받아도 좋은 선물이나 장난감이 아닙니다.”

    “아버님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래요. 제 불타는 효심을 몰라주시는 건가요?”

    “아가씨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알겠군요.”

     

    부우, 하고 입에 불만스레 바람을 불어넣는 오크노디의 모습은 평상시의 장난스러운 태도 그대로였다.

    말투가 조금 이상하고 행동도 묘하게 다른 누군가를 따라하는 것처럼 이질감이 느껴지지만 저맘때의 아이들은 원래 다 그렇다.

    존경할만한 어른.

    동경하는 유명인.

    아이가 누군가를 모방하는 일이야 흔하지 않은가.

    그게 하필이면 효녀를 목표로 하고 지령을 당겨서 받는 미친 짓이 되었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지.

     

    ‘…알고 요청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시기적으로 나쁜 시도는 아니군요.’

     

    조나는 알고 있다.

    오크노디의 행동이 이사장의 심기를 얼마나 거스르고 자극하고 있을지.

    아카데미에서 보내는 시간만큼 재단의 명예는 급속도로 실추된다.

    재단의 명예 따위는 개나 주라는 것처럼 제 아비를 욕보이는 행동을 거듭하며 자신을 지킬 방패막이를 하나씩 늘려나간다.

    거침없는 행동이 선을 넘는 순간, 강력한 제재가 돌아오겠지만 이번 지령을 요청하는 행위는 이사장에게 굴복하는 순종적인 행위가 된다.

    재단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은 본의가 아니었다고, 그 마음을 알아달라고 요청하는 셈이다.

     

    “며칠만 말미를 주십시오. 아가씨께서 만족감이 들 정도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지령을 받아오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후후. 고마워요, 조나. 조나의 상냥함에는 언제나 신세를 지고 있어요. 조나는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100점 만점에 100점짜리 집사예요.”

    “…”

     

    도대체 누구를 모방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어른스럽고 의젓한 아가씨가 마냥 싫지도 않았던 것도 아가씨의 장난을 돕는 이유 중 하나이리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기능창도 인정한 착한아이 하비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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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아카데미 흑막의 딸이 되었다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From the side, she looks pitiful and worn out, but in reality, she’s living her joyful survival story in the world of games.

But how can someone’s name be Okno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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