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5화. 다섯 신, 다섯 종족, 인간
아주 먼 신화의 시대.
강대한 다섯 종족이 어우러지던 시절이 있었다.
숲의 엘프, 바다의 인어, 늪지대의 밤의 일족, 평야에는 오크와 수인.
종족마다 빼어난 능력을 앞세워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인간이라는 종족도 있었지만, 그 세력은 미약했다.
수많은 약소 종족 중 하나일 뿐. 딱히 눈여겨볼 만한 종족은 아니었다.
빼어난 능력도 없고, 날카로운 이빨이나 두꺼운 가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두었다면 금방 멸망했을 약해빠진 종족, 그것이 인간이었다.
이들을 이끄는 붉은 머리의 수장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붉은 머리의 인간은 홀로 수많은 괴수와 용을 때려잡은, 걸어 다니는 죽음이라 불린 흉흉한 존재였다.
홀로 인간이라는 종을 지켰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시대.
하나하나가 자연재해에 가까운 용, 걸음마다 지진을 일으키는 거인들, 입으로 독을 내뿜는 거대뱀, 바다 깊은 곳에 숨어있는 미지의 괴수, 날개를 펼치면 하늘을 뒤덮는 괴조까지.
끔찍한 괴수들로 가득했다.
강대한 다섯 종족도 서로 똘똘 뭉쳐야 간신히 영역을 꾸릴 수 있을 정도로.
달리 말한다면, 이런 괴물들 틈 바구니에서 홀로 인간이라는 약소 종족을 이끌고 버틴 붉은 머리의 여인이 얼마나 강했는지 보여주는 예시일 것이다.
아무튼.
강대한 다섯 종족에 비하면 개인의 무력에 기대어 살아가던 인간이라는 약소 종족이 과연 어떻게 현시대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는가?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죠.”
운이 좋았다.
혹은 기연을 만났다.
“덕분에 인간이라는 종에게도 살아갈 무기가 생겼으니까요.”
케넬름은 담담하게 그날을 회상했다.
하늘이 조각나고, 대지가 무너지고, 수많은 생명체가 멸종했으며, 모든 것이 심연으로 추락하던 그날.
산을 오르던 소녀는 거대한 ‘무언가’를 만났다.
저 아득한 우주의 건너편에서 작은 별에 도착한 ‘무언가’를.
“아니. 그걸 만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케넬름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만났다.’ 같은 상냥한 행위가 아니었다.
“…저는 그날, 하나 된 분에게 ‘관찰’되고 있다는 걸 느꼈죠. 첫 만남에서요.”
“관찰…이요?”
리아가 되물었다.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케넬름은 조금 더 쉽게 풀어서 설명했다.
“저의 성격, 말버릇, 식습관, 언행, 행실, 근육, 혈관, 영혼, 과거와 미래, 죄악, 선행…. 하나 된 분께서는 저를 마주한 그 순간, 저의 모든 것을 말 그대로 ‘관찰’하셨다는 뜻입니다.”
“히익…. 조금 무서운데요.”
리아가 작게 몸을 떨었다.
케넬름도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굉장히 불쾌한 감각이었으니.
어린 시절 혈기 왕성하던 자신은 더욱 불쾌함에 몸서리쳤다.
“그래서 달려들어서 있는 힘껏 때렸답니다.”
“네?”
“때렸다고요. 하나 된 분을, 있는 힘껏.”
…리아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 것인지 잠시 의심했다.
때렸다고? 그게… 맞나?
“그…, 때려요? 막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무너지고 있는 와중에 때리셨다고요?”
“네. 때렸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불에 날아드는 나방, 바다로 뛰어드는 물방울…. 그 이하의 짓이었지만요.”
당당히 자신을 때리려는 모습이 썩 흥미로웠던 것일까. 작게라도 타격을 입혔음이 재밌었던 것일까.
하나 된 분은 과거의 케넬름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셨다.
그리고 즉시 자기 몸을 갈기갈기 찢으셨다. 이 이상으로 차원이 붕괴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뭐…. 그다음부터는 리아도 아는 내용이죠? 다섯 신을 모시게 된 인간과 다섯 종족. 다섯 신의 기나긴 침묵… 인간과 다섯 종족의 분열, 갈등, 인간을 피해 대륙으로 흩어진 다섯 종족….”
“네. 알고 있어요.”
“리아의 호기심이 조금 풀렸으면 좋겠네요.”
“네에….”
리아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아주 먼 과거, 케넬름과 하나 된 분의 첫 만남이 궁금했던 것은 맞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리아의 상상보다 조금 더 거친 만남이라고 할까.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막 뭔가 달콤하고 극적인 만남은 아니었구나.’
무너져가는 세계에서 만난, 이름 없는 신과 성녀.
따지고 보면 이보다 극적인 그림이 있을 수 있을까.
문제는 세상을 무너뜨린 당사자가 신이라는 것이고, 성녀는 신을 때리려 했다는 것이겠지만.
‘하나 된 분께서도 과거의 행실을 수습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시고.’
실수는 누구나 저지른다.
중요한 것은 실수를 대하는 태도였다.
그저 모르는 체하고 지나갈 것인지, 이를 책임지기 위해 노력할 것인지.
리아가 생각하기에 하나 된 분은 스스로의 실수를 수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보다 리아. 이리 와봐요.”
리아는 상념을 멈추고 케넬름에게 다가갔다.
거울을 유심히 바라보던 케닐름의 표정은 심각했다.
“이것 좀 보세요.”
거울은 하나 된 분이 보는 화면을 비추고 있었다.
“아. 그러니까 이건… 퀘스트? 내용을 보고 계시네요.”
잊힌 다섯 종족을 찾아내는 퀘스트다. 하나 된 분께서 잊힌 다섯 종족을 찾는다고 부단히도 노력했던 것을 리아도 알고 있었다.
“다섯 종족을 전부 찾으신 거 아니었나요?”
리아가 손가락을 접으며 천천히 헤아렸다.
엘프, 밤의 일족, 수인, 인어, 오크….
전부 찾은 거 아니었나?
“맞아요. 전부 찾으셨죠. 그런데 지금 왜 이게 완료가 되지 않았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나 된 분께서는 ‘게임’이라는 것의 형태로 이쪽 세상에 관여하신다.
‘게임’의 형태를 유지하고, 운영하고, 진행하는 주체는 바로 영혼의 바다.
하나 된 분의 힘을 저장하고 있는 거대한 저장고이자, 수많은 영혼이 녹아있는 집합체.
케넬름이 떨떠름한 눈으로 영혼의 바다를 바라봤다.
제법 오랜 시간을 알고 지냈지만, 영혼의 바다가 도대체 무슨 의도를 가졌는지는 알기 어려웠다.
“정말이지. 영혼의 바다가 무슨 꿍꿍이인지 알기 어렵네요. 예전에는 저한테 수영복이랑 무슨 하얀 드레스를 입으라고 하더니.”
“수영복이요? 왜요?”
“저도 모릅니다. 제가 수영복을 입으면 하나 된 분께서 더 많은 ‘제물’을 바치실 거라고 하던데요.”
그때는 하나 된 분께서 신이라는 자각도 없던, 아주 초창기의 시절이었다.
물론 케넬름은 코웃음 치며 거절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세상 어떤 사람이, 그것도 하나 된 분께 보이는 자기 모습은 가상의 여자일 텐데.
“고작 수영복이랑 드레스 차림에 돈을 쓴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케넬름은 알 수 없는 이야기다.
어느 세상에는 가상의 미소녀를 데려오기 위해, 수십만 원을 태우는 숭고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자신들이 모시는 신 또한, 위대한 순교자들의 일원 중 하나였음을.
아마 케넬름과 리아는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다섯 종족을 이미 전부 찾았음에도, 여전히 뭔가를 유도하고 싶어 하는 모양이네요. 영혼의 바다는….”
심연과 지상과 부딪히기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3일.
여유가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수준이다.
이런 와중 영혼의 바다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하나 된 분의 행동을 유도하고 있는 것일까.
“영혼의 바다도 결국 하나 된 분의 피조물. 그분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겠지만….”
상대의 꿍꿍이를 알 수 없는 것은 조금 찝찝하다고 할까.
“일단은 지켜보도록 하죠. 당장 해가 될 것 같지는 않네요.”
* * * * *
“흐음.”
잊힌 다섯 종족.
엘프와 수인, 인어, 오크, 밤의 일족.
이렇게 총 다섯으로 이루어진 종족을 일컫는다.
언젠가 이 게임을 하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타난 퀘스트는 다섯 종족을 찾는 것이었고, 나는 최선을 다해 이를 수행했다.
“그런데 아직도 뭔가 남았단 말이지.”
뭐가 남았을까.
당장 생각나는 것은 뭔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는 것.
화면을 바닷가로 옮겼다. 해안가를 따라 설치된 텐트가 바글바글하게 붙어있었다.
저주가 풀린 인어와 인어의 남편들이 사는 천막촌이다.
언제부터인가 인어와 결혼한 녀석들은 다른 곳으로 이사 가지 않고, 임시로 설치한 천막에 눌러 앉아버리기 시작했다.
그 수가 자연스럽게 늘어나며 해안가를 따라 인어 천막촌이 탄생한 것이다.
“인어를 성지에 데려온 적은 없었지.”
흉측한 외관의 어인은 하나도 없고, 모두 아리따운 외모를 뽐내는 인어들뿐이다.
그 많던 어인들의 저주가 모조리 풀린 것이다.
나는 소름끼치는 사실에 도달하고 말았다.
‘여기 있는 인어들은 대충 2, 300명 정도. 이 많은 인어들의 저주가 전부 풀렸다는 건… 어인의 얼굴을 보고 씹가능이라고 외친 새끼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뜻이잖아…?’
실로 두려운 인간의 가능성….
세상에 비늘박이가 이렇게나 많았다니.
“미친놈들.”
따지고 보면 퍼리충도 있고, 오크랑 결혼한 여자들도 있으니.
어인 정도면 이세계 평균인 걸까 싶다.
“…미친 가능충들.”
이딴 게 인간의 가능성?
작게 중얼거리며 혼자 돌아다니는 인어를 찾아냈다. ‘그대여, 내가 부른다 ’를 이용해 인어를 성지로 불러냈다.
– 화아아악!
– “끼이이이?! 끼이, 끼이이이이에ㅡ!!”
짧은 섬광이 퍼지더니 성지의 하늘에 인어가 나타났다.
퀘스트창에 변화는 없었다. 인어를 성지로 데려오는 조건은 아니었던 걸까.
깜짝 놀란 인어를 다시 바다로 돌려보냈다.
‘하긴. 성지로 데려오는 게 조건이었으면 인어는 애초부터 카운트하지 않았겠지.’
다섯 종족을 전부 찾기는 찾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뭘까.
퀘스트는 왜 여전히 진행 중일까.
“우으으으음….”
머리를 잡고 고민하다가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힌트가 너무 적었다. 이대로 고민해봤자 그럴듯한 망상일 뿐이다.
“에휴 모르겠다.”
답이 안 나오는 것에 대해 고민해봤자 시간 낭비, 심력 낭비다.
이럴 시간에 심연이랑 지상을 어떻게 합칠지 고민하는 편이 훨씬 생산적이다.
“음. 지상이 심연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면 이미 늦으니까…. 심연을 끌어올린다고 하면 내 힘을 버틸만한 대처도….”
이것저것 떠오르는 것은 많다. 그만큼 준비해야 할 것도 많았다.
“하아아암…. 어우, 왜 이렇게 졸리냐….”
눈이 계속 감긴다. 세상에 이렇게 졸릴 수가 없다.
하품을 쩍쩍하다가 결국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가물가물 흐려지는 의식 속.
‘…그래서 퀘스트는 도대체 왜 완료가 안 된 건데?’
의식이 끊어지기 시작한다.
잠들기 직전의 의식이 깃털처럼 흔들리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신비가 도래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누구야?’
《하나가 된다는 것은, 과거로의 회귀. 그대는 마땅히 새로운 시대의 나팔을 부소서.》
‘뭐? 나팔? 회귀? 회귀?!! 나 설마 회귀하는 거야?!’
갑자기 회귀한다고?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을 찾기 위해 눈을 뜨려 했지만, 정신이 깨어있는 것과 반대로 몸은 수면 상태였다.
‘야아!! 회귀는 안 돼!!! 안 된다고!!!’
《…그저 비유한 것이옵니다.》
‘어휴. 다행이다.’
여기서 갑자기 회귀하게 되면 큰일 날 것 같았는데.
정말 다행이다.
‘그나저나 아까 뭐라고 했지? 뭐라고?’
《하나가 되는 것은, 신비의 재림이옵니다. 암흑의 시대가 저물고, 이제 그대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을지니.》
‘…?’
《부디 그대의 종을 부리소서. 새 시대를 위한 종을 부리소서.》
……???
도대체 뭐라는 거야?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오 감사합니다…!! 세상에 좋은 말은 쓰고 괴로운 법이라고 하지요…!! 저 글쟁이… 조목조목 옳은 말일수록… 아프고 괴롭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명백한 저의 실수였기에… 오히려 지적해주신 독자님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저 글쟁이…!! 눈도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잉잉ㅠㅠ 아프다…) 정말루요…!! 저느은… 완전 멀쩡합니다!!!
애정이 있어야 잔소리를 하는 법…!!
전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