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7화. 다섯 신, 다섯 종족, 인간 ( 3 )
영혼의 바다가 나에게 ‘가장 가까우면서도 헌신적인 종’이라는 말을 하고 사라진 지 하루가 지났다.
심연과 지상이 부딪히기까지 남은 시간은 이틀.
나는 여전히 영혼의 바다가 말하는 ‘종’이 누구인지 감도 못 잡고 있었다.
‘그래도 몇 가지 확실해진 것들은 있어.’
심연과 지상을 합칠 때, 영혼의 바다가 나를 도울 것이라는 사실은 확실했다.
매우 좋은 소식이었다.
만기 적금을 조금이라도 아낄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거기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고 했지.’
이건 아무래도 비유적인 표현이 아닐까 싶다.
심연과 지상이 합쳐지면 새로운 시대에 버금가는 대격변이 시작될 테니까.
슥, 스윽ㅡ
출근 버스 안에서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게임에 접속하여 드워프들에게 무기를 만들게 시키고, 광산에서 광물을 캐낸다.
– 뚱! 땅! 뚱! 땅!
짧은 다리로 열심히 일하는 드워프들.
일꾼 1호와 일꾼 2호, 일꾼 3호를 필두로 망치와 곡괭이를 부지런히 휘두른다.
‘얘네들은 월요병 같은 것도 없나…? 솔직히 엄청 부려 먹는데 되게 열심히 일하네.’
지난번에 골조를 만들 때도 그렇고, 무리하게 광산을 개발할 때도 그렇고.
드워프들은 일개미와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될 정도다.
‘…어? 잠깐만.’
나와 가깝고, 가장 헌신적인 종.
종, 시종… 즉, 일꾼.
드워프들은 헌신적이다. 종일 노동을 시켜도 군말 없이 묵묵하게 해냈다.
거기에 나와 아주 가깝다. 그럴 수밖에.
내가 이 게임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함께 한 녀석들이니까.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와. 이거 설마…. 지상이랑 심연이 합쳐지면, 드워프들을 지상으로 방출하라는 뜻이었어?’
머리가 띵하다.
엘프도 지상으로 내보냈고, 밤의 일족도 지상으로 보냈다.
수인이랑 오크는 애초부터 성지로 데려온 적이 없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마지막 남은 드워프까지 지상으로 돌려보내라고?
“하.”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드워프가 아닌 건 아닐까? 내가 잘못 해석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정말 드워프를? 도대체 왜?
버스에서 하차한 다음 사무실에 도착했다.
컴퓨터가 켜지는 동안 머리를 싸매고 고민에 빠졌다.
‘솔직히 보내주기 싫은데….’
드워프를 지상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이유.
그것을 알아야 결정하기 쉬울 것 같다.
영혼의 바다는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 그때 물어보면 해결될 것이다.
만약 드워프가 아니라고 하면 좋은 거고.
맞다고 하면…. 모르겠다. 좀 복잡한 심경이다.
‘일단 드워프들의 의사가 중요하겠지.’
내가 보내 준다고 해도 가기 싫다고 하면 방법이 없으니까.
현재 시간은 8시 20분. 일찍 출근하는 게 습관이 된 덕분에 사무실에 사람은 없었다.
덕분에 눈치 볼 필요 없이 핸드폰을 꺼내 게임을 실행했다.
성지에는 열심히 일하는 드워프들이 바글바글 가득하다.
골조 작업을 하며 드워프들의 숫자가 크게 늘어난 덕분이다.
“후우….”
한숨이 나온다.
보내주기 싫은 마음이 크다. 오랫동안 함께 한 만큼 쌓인 정은 생각보다 컸다.
‘사무실에 아무도 없는 거 맞지?’
아무도 없는 것을 두 번 세 번 확인했다.
아무도 없다는 확신이 들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별빛을 끌어냈다.
“크흠, 흠! 《아, 아아ㅡ. 됐다.》
위엄있는 신의 목소리, On.
한번 생각을 해보자.
어떻게 해야 드워프들의 진심을, 정말 지상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인지 알 수 있을까.
내가 직접 드워프들에게 물어볼 수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정말 드워프들의 진심일까?
내 앞에서 당당하게 “거, 맨날 초원에 있는 것도 질렸는데 지상에 좀 보내주쇼!”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게 가능할 리 없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뿐.
‘지상 체험을 보내주는 거지.’
소수의 드워프들을 대륙 곳곳으로 보내고 반응을 지켜보는 것이다.
심연과 지상이 부딪히기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2일이기에, 넉넉하게 시간을 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지상에 대한 드워프들의 반응을 확인할 수는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스윽ㅡ
신중하게 드워프들을 선정했다.
일꾼 1, 2, 3호를 포함한 50명의 대륙 찍먹단이 완성됐다.
– “…으잉? 하나 된 분이시여…?”
다닥다닥 모인 드워프들이 화면을 올려다본다.
《…나의 일꾼들이여. 그대들은 이제 이 땅을 떠나 지상으로 잠시 외유하게 될 것이다.》
– “외유? 지상으로?”
– “지상이라니. 허어. 이렇게 갑자기 말씀이십니까?”
드워프들이 술렁인다.
갑작스러운 소식인 만큼 제법 당황한 듯 보였다. 웅성거리고, 속닥이고,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한다.
– “이 녀석들아! 진정해라! 하나 된 분의 앞이다! 떠들지 마라!”
나름 맏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일꾼 1호가 드워프들을 능숙하게 진정시켰다.
‘따로 떨어트리면 큰일 나겠는데…?’
대륙 여기저기 흩어지도록 하려 했던 계획을 수정했다.
드워프들은 지상에 가본 적이 없다. 지상으로 가출했던 일꾼 1호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이 상황에서 무턱대고 뿔뿔이 흩어놓는다면 지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감이 생길 가능성이 컸다.
‘일꾼 1호를 리더로 삼아서…. 조금이라도 익숙하게 지상을 구경할 만한 곳이 어디 있지?’
한 군데 있다.
일꾼 1호가 발견된 성도의 대장간.
“좋아. 여기로 보내자.”
츠파아아앗ㅡ!
눈 부신 빛과 함께 50명의 드워프가 사라졌다.
성도에 위치한 커다란 대장간 앞, 드워프 50명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 우당탕!
– “아아악! 비켜! 내, 내 위에서 내려와!”
– “아이구 허리야! 으으으, 드워프 죽는다!”
무사히 도착했다.
난데없는 소란에 대장간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산처럼 쌓여있는 드워프를 보더니 완전히 넋이 나가버렸다.
– “허…. 다, 다섯 신 맙소사! 도대체 이게 무슨…?”
– “끄으응! 어, 어어! 막내! 너, 막내 아니냐!”
– “스승님들…?”
예전에 성지에서 인턴으로 일했던 노인 대장장이를 알아본 드워프들이 반갑게 인사했다.
노인 대장장이는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구경꾼들을 물리고는 드워프들을 대장간 안으로 데려갔다.
“이 정도면 됐겠지?”
지상 찍먹단을 무사히 보낸 뒤, 의자에 몸을 깊게 파묻었다.
눈을 감았다. 심연, 지상, 영혼의 바다, 드워프, 새로운 시대….
온갖 것들이 머리를 떠돌기 시작한다.
‘…도대체 왜 하필이면 드워프들을 지상으로….’
지상에는 이미 다섯 종족이 있다. 거기에 인간들도 있으니 총 여섯의 종족이 있는 셈이다.
지금도 충분히 많은데, 여기에 굳이 드워프까지 보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걸까.
‘곧 알게 되겠지.’
인턴 대장장이가 말했던 다섯 신.
그리고 지상으로 돌아온 다섯 종족.
다섯이라는 숫자가 겹치는 것이 우연일까.
어쩐지 단순히 우연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 *
“스승님들. 이게 정말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성도의 명장, 애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가게 앞이 시끄럽길래 싸움이라도 났나 싶었는데, 이게 웬걸.
성지에 계셔야 할 스승님들이 산처럼 쌓여서 가게 앞을 막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일단 급한 마음에 구경꾼을 물리고 스승님들을 대장간으로 모셔 오기는 했는데.
“사부님! 저는 만신전에 다녀오겠습니다!”
눈치 빠른 제자 한 놈이 만신전으로 달려갔다. 성지에 있어야 할 드워프가 지상에 나타났으니, 이 사실을 알리러 간 것이다.
“여기가 지상이라고? 흐음. 생각보다 막 성지랑 엄청 다르지는 않네? 킁킁. 공기가 좀 꿉꿉하구먼.”
“이야아. 이게 막내 대장간이라는 거지? 쓰읍.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데?”
“호오. 저 안쪽에서 쇳내가 엄청난데? 대장간 규모가 꽤 큰 모양이야.”
“아, 그, 저쪽은 제자들이 작업하는 곳입니다.”
타고난 대장장이인 드워프답게, 그들은 눈을 빛내며 애덤의 대장간 곳곳을 돌아다녔다.
스승님들의 실력을 알고 있는 애덤은 괜히 긴장하며 뒤를 따라다녔다. 숙제를 검사받는 아이가 된 심정이다.
“불도 꽤 뜨겁게 잘 관리하고 있고. 오오. 대장간 규모가 제법 크구나!”
타캉ㅡ! 카앙! 카강!
수십 개의 모루 앞에서 망치를 내려치는 애덤의 제자들.
그들을 피나는 노력과 끈질긴 연습 끝에, 철괴를 두들겨 실처럼 얇게 뽑을 수 있는 대장장이였다.
“호오. 철괴에서 이렇게 얇은 실을 뽑아내다니. 기초는 할 줄 아는 녀석이구나.”
“으헉?! 누, 누구십니까? 드, 드워프?!”
세듀스 팔락이 애덤의 제자 한 명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참견했다. 자세는 나쁘지 않은데, 쓸모없이 힘을 너무 많이 주고 있는 것이 거슬렸다.
“자, 애송이. 잘 봐라. 망치질은 말이다, 무조건 강하게 한다고 능사가 아니야.”
제자한테서 망치를 빼앗은 세듀스 팔락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차지했다. 제자는 어어ㅡ하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타탕! 카앙! 카앙! 카강ㅡ!
망치가 그림 같은 궤적을 그린다. 그리고 철괴를 두드린다.
맑고 청량한 소리가 종소리처럼 아름답게 울렸다.
이 안에 있는 대장장이 중에서 세듀스 팔락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쇠를 두들기는 호흡, 박자, 타점, 강약 조절.
망치의 궤적과 근육의 꿈틀거림.
모든 것이 한 폭의 그림처럼 완벽했다.
타캉! 카앙ㅡ! 카강!
망치를 두들기는 세듀스 팔락은 잔뜩 신이 났다. 성지에 있을 적에는 머릿속으로 생각만 해야 했던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드워프는 신의 일꾼.
일꾼은 마땅히 허락받은 일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치밀어오르는 대장장이의 욕심을 억누르고, 신의 일꾼으로서 봉사하는 기쁨만을 누리며 충실히 살고자 했는데.
“흐하하하하하하ㅡ!!”
카앙!
신이 난다.
머릿속에서 터져 오르는 오만 가지 신기한 것들을 만들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타캉! 카앙! 카강ㅡ!
무아지경으로 망치를 두들기던 세듀스 팔락이 팔을 멈췄다.
아직 열기를 머금은 철괴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세듀스 팔락의 들뜬 근육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스승님?”
애덤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하하! 흐하하하하하!! 막내야!”
세듀스 팔락은 활짝 웃고 있었다. 아이처럼 순수하게.
“너무 재밌구나!! 재밌어!!”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ㅇㅁㅇ…?! 2, 2000화요…?! 그렇게 쓰면 작가 죽어버려욧…!! 망가진다구욧…!! 히이이이익!!! 살려주새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