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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69

        

       공백 카드.

       비어있는 카드.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카드.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이 도리어 의미가 되는 그런 카드.

         

       빈 카드라고도 불리는 이 카드의 의미는 불확실성, 금지, 비밀.

         

       진성은 빈 카드를 보고 무언가 잠시 고민하더니, 카드를 전부 회수한 뒤 가지런히 놓았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툭툭 쳐서 살짝씩 어긋나게 만든 다음, 오른손을 천천히 들었다.

         

       오른손을 든 진성은 검지만을 들어 올리고는 눈을 감았고, 감각을 서서히 끌어올렸다.

         

       눈을 감자 보이는 것은 어둠.

       다만 완전한 어둠이 아닌,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빛이 있는 밝은 어둠이다.

         

       진성은 그 밝은 어둠의 안에서 천천히 유영하듯 움직였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육지의 위가 아니라 바다의 안이라도 되는 것처럼.

       공기가 아닌 물에 둘러싸여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빛은 수면 위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빛이요,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은 물이 움직임을 방해하여 느릿하게 움직이는 까닭이니.

         

       숨을 가만히 멈추면 물속에서 숨을 참는 것과 같은 느낌을 느낄 것이요, 끌어올린 집중력과 또렷한 상상이 더해진다면 코에서 물비린내조차 나는 듯하다.

       혓바닥은 밖에 나가고 싶어 안달이라도 난 듯 꿈틀꿈틀 움직이나 입술은 나가서는 안 된다는 듯 꾹 다문 채 문을 걸어 잠갔고, 치아는 치아끼리 딱 달라붙어 빗장을 건다. 목구멍에서 흘러나오려는 숨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채 무너진 동굴 안에서 회오리치며 맴돌다가 갈 곳이 없어 목구멍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하며 서서히 쇠약해지고, 뚫린 콧구멍은 물을 들이마실 수 없다는 듯 좁아지고 또 좁아진다.

         

       그리하여 그는 육지에 있음에도 물속에 있는 것처럼 손가락을 움직였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물의 흐름을 느끼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그렇게 진성의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그와 함께 손가락 끝에 집중된 감각이 주위의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흐름.

       흐름이 느껴진다.

       누군가가 숨결을 불어 넣듯이, 혹은 장난스러운 바람이 저 멀리에서 숨결을 아주 약하게 불고, 그 숨결이 충분한 시간을 거쳐 아주 얕게 손가락에 도달하는 것처럼 그렇게 아주 얕고 희미한 흐름이 느껴진다.

       그리고 움직임에 따라 손가락이 변화하는 것이 느껴진다.

       가는 길목에 먼지라도 있는 것처럼 손가락에 들러붙는 듯한 느낌이 들고, 무언가 스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영혼을 빚어서 머리카락의 형상을 만들고 그것을 손으로 쓸고 지나간다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혹은 선녀의 날개옷을 더더욱 투명하고 얇게 만들어 손가락에 스치고 지나가게 만들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환상 같은, 착각 같은 감각.

       그러한 아주 미약하고 간지러운 감각이 진성의 손가락 끝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느껴지는 또 다른 것.

       몸속의 뜨거움과 호응하고, 몸속의 차가움과 호응하는 그것.

         

       혈액의 뜨거움과 닮아 허공에 자기 피가 흩뿌려지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혈관이 저 멀리 나아갔다가 연결이 뚝 끊겨버리고, 연결될 날만을 기다리며 먼 곳에서 천천히 식어가는 것을 본 것처럼. 혹은 그 잔향이라도 맡기라도 한 것처럼 아주 희미하기 짝이 없는 열기.

         

       냉기.

       이미 녹아내리고 퍼지며 차갑다고 할 수조차 없을 것만 같은, 아주 미약하기 짝이 없는 냉기가 저 멀리에서 느껴진다. 승천하기 직전의 영혼이 내뱉는 한숨처럼 미약한 냉기를 품었으되 한없이 산 자의 뜨거움에 비견될법한 약하디약한 냉기를 품고 있으니.

         

       진성은 그 두 가지 기운을 손가락에 걸고 천천히 검지를 휘저었다.

         

       천천히.

       원을 그린다.

         

       진성이 알고 있는 기를 다루는 법이나 기를 일시적으로 몸에 저장하는 방법대로 행동하지 않도록.

       외부에서 흐르는 기운이 그대로 순수성을 품을 수 있도록.

       그저 진성의 손가락의 흐름에 따라오고, 진성의 사념도 의지도 품지 않은 순결함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도록.

         

       진성은 아주 조심스럽게, 조심스럽게 기운을 천천히 움직였다.

       하늘하늘 움직이는 거미줄을 이리저리 휘저어서 옷감을 짜는 것처럼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진성은 손가락을 움직였고, 그렇게 몇 바퀴의 원을 돌린 뒤 충분히 기운이 자신을 따라온다고 느껴졌을 때.

         

       진성은 카드에 그 기운을 묻히기 시작했다.

       비틀린 한 층에는 냉기를.

       비틀린 한 층에는 열기를.

         

       그렇게 진성은 번갈아 가며 냉기와 열기를 카드에 묻혔고, 그렇게 바닥에 있는 카드까지 모두 꼼꼼하게 묻힌 후….

         

       “후우.”

         

       바람개비를 움직이기 위해 길게 숨을 내뱉는 것처럼 가볍게 숨을 불어넣었다.

         

       그렇게 진성의 숨결은 길고 가늘게 카드를 향해 움직였고, 숨은 마치 회오리를 만들기라도 하려는 듯 나선으로 움직이며 카드를 감쌌다. 위에서 아래로 나선을 그리며 내려갔고,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며 나선을 그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나선은 카드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각각 열기와 냉기를 코팅한 카드는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회전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차 속도를 내면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와아….”

         

       그 모습은 카드로 묘기를 부리는 것 같은 것이라.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감탄하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투욱.

         

       투욱.

         

       그렇게 회전하기 시작한 카드는 점차 속도를 더해갔고, 그 속도를 이기지 못한 카드들을 이리저리 뱉어내었다.

       어떤 것은 테이블 위로.

       어떤 것은 테이블의 바깥으로.

       어떤 것은 진성의 품 안으로.

         

       그렇게 이리저리 카드가 휘날리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공중에 흩날리기까지 하면서 펄럭이며 바닥에 내려앉게 만들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종국에는 단 하나의 카드만을 남긴 채 모든 카드가 흩어져버렸으니.

         

       진성은 검지로 마지막 남은 카드의 회전을 멈추고는 그것을 뒤집어보았다.

         

       “흐음.”

         

       그렇게 뒤집힌 카드에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빈 카드.

         

       공백의 카드가 다시 한번 진성을 반겨주었다.

         

       진성은 공백 카드를 그 자리에 그대로 놓고, 자신의 품 안으로 날아온 카드들을 뒤집어보았다.

         

       “동업자라….”

         

       그렇게 뒤집은 카드들은 가지각색.

       트럼프 카드부터 타로까지, 통일성이라고는 거의 없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카드들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의 품 안에 있는 모든 카드가 ‘동업자’나 ‘직장동료’ 등의 뜻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진성은 자신 쪽으로 날아온 카드를 보고는 무언가 감이 잡힌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확인한 카드들을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뒤 손을 뻗었다.

       이번에 뻗는 곳은 마녀들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간 카드들.

         

       가장 먼저 아그네스 쪽으로 날아간 카드들을 뒤집었다.

         

       그렇게 뒤집힌 카드들은 진성의 것과 마찬가지로 가지각색.

       이번에는 뜻조차도 제각기 다른, 통일성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특이한 것이 있었으니.

       아그네스 쪽으로 날아간 카드를 덮고 있던 카드였다.

         

       “펜타클 8이라….”

         

       다른 카드를 짓누르고 있던 카드에는 솔로몬의 인장이 8개가 그려져 있었다.

       그것도 그냥 그려진 것이 아니라, 뒤집힌 채로.

         

       그 뜻은….

         

       ‘무효.’

         

       아그네스에게 날아간 카드가 말하고 있었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아그네스 쪽으로 날아간 카드는, 무효라고.

         

       진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마녀 쪽으로 날아간 카드를 뒤집어보았다.

       그녀 쪽 역시 아그네스와 마찬가지로 여러 카드를 짓누르고 있는 하나의 카드가 있었다.

         

       다섯 개의 검.

       시퍼런 날이 서 있는 검 다섯 개가 정방향으로 있었다.

         

       그리고 이 카드 역시, 무효의 뜻을 품고 있었다.

         

       무효.

         

       즉, 대마녀와 관련이 없다는 뜻이다.

       또한 이 카드 아래에 있는 카드들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고.

         

       그리고 아나스타시아와 엘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들 역시 여러 카드 위에 한 장의 카드가 올려져 있는 형태였는데, 위에 올려져 있는 카드를 뒤집으면 여지없이 무효나, 무효와 비슷한 뜻을 가진 카드들이 그를 반겨주었다.

         

       ‘이 넷과는 관련이 없군.’

         

       그리고 그 말은….

         

       ‘노려지는 것은 나, 혹은 불특정 다수라는 이야기로다.’

         

       그를 향해 날아온 카드들을 보면 더 확실해진다.

         

       하나같이 동업자나 직장동료를 뜻하는 뜻이라니.

         

       그 말은 이 상황을 만든 것이 다른 주술사라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과연 어느 쪽일까?

         

       전자?

       혹은 후자?

         

       ‘불특정 다수를 노린 것이라면 주술 의식과 관련이 있는 것이요, 나를 노린 것이라면 이것은 곧 신호와 같은 것이라.’

         

       진성은 샘솟는 흥미에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보자. 어디 어떤 이가 이런 짓을 하였는고…?”

         

       진성은 천천히 두 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는 오른손의 위에 왼손 엄지를 올려놓은 뒤 주먹을 쥐었고, 왼손은 엄지를 오른손 안에 집어넣은 채 남은 네 손가락을 말아 주먹을 쥐었다. 마치 불교의 수인(手印) 중 하나인 지권인(智拳印)을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가슴께까지 들어 올린 다음 그는 그대로 팔을 움직여 수인의 형태를 뒤집어버렸다. 안쪽에 있던 손목이 바깥쪽으로 향했고, 팔에 힘이 확 들어가면서 부자연스러운 형상으로 변했다.

       그는 그 상태에서 손가락을 이리저리 뻗으며 기묘한 형태를 몇 번 만든 다음 그대로 형상을 무너뜨렸고, 그다음 잠시 눈을 감고 소리 없이 무언가를 읊조렸다.

         

       그리고는 양 손을 들어 올린 뒤 검지와 중지를 붙이고는….

         

       따악-!

         

       왼손과 오른손의 손가락을 부딪쳐 소리를 내었다.

         

       팔락.

         

       그리고 놀랍게도, 따악-하는 손가락끼리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두 장의 카드가 움직였다.

         

       한 장은 진성 쪽으로 향했던 카드.

       동업자를 뜻하는 카드 중 하나가 공중에서 몇 바퀴 회전하더니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남은 한 장은 바닥으로 떨어진 카드였다.

         

       메이저 아르카나 13번.

         

       죽음(Death).

         

       ‘이런.’

         

       이 두 장의 카드는 진성에게 말하고 있었다.

         

       지금 한국에, 주술사 한 명이 들어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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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주술사는 초월을 원한다
Status: Ongoing Author:
The shaman realized he had gained life once more. This time, he would live a life solely for transcendence, through shamanism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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