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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7

     

    내의원.

     

    황가 일족 치유를 담당하는 주치의 22인과 그 조수 치유사 약 400인으로 구성된 제국 최고 치유사들이 모인 장소다.

     

    강대국인 제국답게 내의원 치유사들의 수준은 종교와 치유술이 처음 발생한 법국만큼이나 높다.

     

    주치의들은 주군을 관리하는 일이 첫째지만, 주군의 이해관계에 따라 높은 귀족을 치유하는 일도 있다.

     

    파벌에 소속된 하위 치유사들은 실력을 높이기 위해서, 평소에는 조수 일과 일반 제국민 치유 업무를 병행한다.

     

    내의원이 황궁 부지와 제도 광장이 맞닿은 성벽에 위치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성벽을 기준으로 안쪽은 사무실, 바깥은 병자를 맞이하는 개방된 장소다.

     

    국민이 황제의 은덕을 입게 해, 충성심을 강화하려는 일종의 복지 정책이다.

     

    물론 돈은 내야 한다.

     

    그만큼 말단 치유사들은 과도한 업무량으로 갈려나간다.

     

     

    내의원 입성 5년 차인 클로에도 매일같이 갈려나가는 치유사 중 한 명이었다.

     

    “치유사님, 거 잘 좀 해 보쇼. 뭐 이렇게 오래 걸려? 내가 저기 서부 귀족이야 귀족. 남작이라니까?”

     

    “어읍, 잠, 잠시만요오….”

     

    클로에가 허둥지둥 신성력을 더 불어넣었다. 그 바람에 귀신같이 긴 그녀의 앞머리가 얼굴을 다 덮어버렸다.

     

    그녀에게 치유 받던 환자가 불평을 터뜨렸다. 심보 고약하게 생긴 중년 남자다.

     

    “아 거 참 답답하네. 내의원이라고 기대하고 왔더니 뭐 별거 없구만! 내 주치의에게 맡기는 게 낫겠어!”

     

    당연하지만 주치의가 있을 정도면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다.

     

    보통 이렇게 예의 없는 귀족은 매관매직한 남작이다. 졸부가 되어 돈으로 신분을 산 케이스다.

     

    그런 귀족들은 대개 태도가 거칠었다.

    물론 그 외에도 악성 환자는 차고 넘쳤다.

     

    “저, 저기.”

     

    “뭐요?”

     

    클로에가 쭈뼛거리며 성서를 덮었다.

     

    “치유는 끝났는데요오… 그으… 요즘 황실에 약이라는 게 있는데요오….”

     

    남자가 귀를 쫑긋거렸다.

     

    “약? 소문은 들었지. 아스피린인가 하는 게 전염병에 그리 효과가 좋다 하더만. 도무지 구할 방법이 없던데. 혹시 남은 거 있소?”

     

    “히엑, 아뇨!”

     

    “그럼 왜 바쁜 사람을 불러 세워?”

     

    “아스피린은 아닌데, 아닌데에….”

     

    클로에가 품에서 작은 천 꾸러미를 꺼냈다. 안에는 동글동글 말은 작은 경단이 몇 개 들어있었다.

     

    “뭐야, 이건?”

     

    “그으, 한 번 아픈 다음에 다시 병에 걸리는 걸 막아주는 물건인데… 아, 배탈은 날 수 있는데요오….”

     

    남자가 경단을 들어 킁킁 냄새를 맡았다.

     

    “으악, 뭐야 이게!”

     

    냅다 경단을 집어 던지는 남자였다.

     

    “썩은 빵이잖아!”

     

    클로에가 허둥거리며 경단을 줍고는 커다란 책을 내밀었다.

     

    “배, 배양이 제대로 안 돼서… 그래도 효과는 있는데에… 여기 고대 문헌에도 나와있거든요오…?”

     

    “이런 미친 여자를 봤나.”

     

    귀족 남자는 욕을 한바탕 내뱉고는 씩씩거리며 내의원을 나섰다.

     

    클로에는 표지가 다 벗겨져 알아볼 수 없는 고서를 품에 안고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어이, 클로에 치유사. 또 환자에게 이상한 실험 한 거 아니지?”

     

    지나가던 동료 치유사가 그녀를 나무랐다.

     

    클로에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 바람에 커튼처럼 얼굴을 덮은 긴 머리가 마구 흩날렸다.

     

    “원,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 그 ‘민간요법’인지 뭔지 쓰다가 걸리면 주교님께서 가만 안 둔다니까.”

     

    “네, 네에….”

     

    클로에는 제1 황녀 헤이케의 주치의인 알베리치 주교 산하의 치유사였다.

     

    헤이케의 파벌이 황실에서 강한 만큼 알베리치의 세력도 내의원에서 상당히 입김이 강하다.

     

    그는 법국 주교 출신의 정통파 치유사다. 항상 성서에 적힌 문장만을 지키라고 깐깐하게 강조하곤 했다.

     

    성서에서는 우리의 살과 피는 여신님이 내려주신 것이니, 부상으로 잃었을 때도 돌려받기 위해 기도부터 해야 한다 했다.

     

    고통에 눈이 멀어 믿음을 등한시하고 외도의 방법을 쓰면 부상이 커질 뿐이란다.

     

    하지만 클로에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민간요법으로도 치유할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기도가 먼저이지만, 치유사를 찾을 여건이 안 되는 일반인들에게 민간요법은 알게 모르게 퍼져있기도 했다.

     

    ‘가짜가 많긴 하지만….’

     

    클로에는 법국 건국 이전에 쓰여진 고서에서 진짜 민간요법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가지고 있는 곰팡이 핀 경단도 고서의 내용을 재현해본 물건이었다.

     

    ‘아스피린은 진짜야.’

     

    전염병을 약이라는 조그만 경단 하나로 호전한다는 건 단순한 소문이 아니었다.

     

    실제로 아스피린을 먹고 마스크를 썼던 월광궁의 기사들이 얼마나 쌩쌩한지 비무대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격했다.

     

    ‘고트베르크 선생님은 어떤 분일까.’

     

    내의원에 있어도 말단 치유사인 그녀는 하늘 같은 주치의에게 말을 걸 수조차 없다.

     

    종일 업무와 심부름을 하다 보면 먼발치에서 스치듯 볼 수 있는 게 전부였다.

     

    “다, 다음 환자부운….”

     

    “아이고, 치유사님.”

     

    한 노부부가 클로에를 찾아와서 반가운 태도를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오.”

     

    “허허, 또 찾아뵀습니다. 지난번에는 감사했어요. 덕분에 안사람 병세도 많이 나았죠. 역시 치유사님 실력이 최고셔요!”

     

    “그, 그냥 제 일만….”

     

    클로에가 칭찬에 쑥쓰러워하며 몸을 배배 꼬았다.

     

    일반인이 내의원을 이용하려면 몇 달 전부터 예약해 기다려야 한다.

     

    긴 기간 동안 자신을 기다려준 노인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던 클로에였다.

     

    그들을 위해 성심성의껏 주문을 시전한다.

     

    치유를 마치니 노부부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아이구, 항상 감사합니다요. 다음에는 넉 달 후에나 뵙겠군요. 물론 살아있다면 말이죠, 허허허! 혹시 지난번처럼 알려주실 민간요법은 없으신가요?”

     

    노인의 질문에 클로에가 눈을 번뜩 떴다.

     

    그녀가 얼굴을 팍 들이밀며 고서를 펼친다.

     

    “이, 있어요! 여기, 요즘 유행하는 전염병에는 닭 스프를 먹으라고 적혀 있어요. 아, 길거리에서 마스크 쓴 사람들 보신 적 있어요? 그게 그냥 패션이 아니거든요. 고트베르크 의사 선생님이라는 주치의께서 개발하셨는데, 전염병에 걸릴 확률을 낮춰줘요.”

     

    기다렸다는 듯 속사포로 말을 쏟아내는 클로에였다.

     

    그녀는 기세를 멈추지 않고 아까 넣어놨던 경단 보따리를 꺼내려 몸을 숙였다.

     

    “그, 그리고! 이거, 이걸 먹으면 다른 병에 안 걸린다고 고서에 쓰여있었거든요. 제가 먹어보니 배탈은 좀 났는데…!”

     

    싱글벙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든 클로에.

     

    어느새 그녀의 눈앞을 화려한 순백의 성의가 가로막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드니 근엄한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본다.

     

    “지금 내의원 치유사가 민간요법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는가?”

     

    “헉.”

     

    클로에는 큰일 났다고 직감하며 들고 있던 경단을 떨어트렸다.

     

    그녀의 앞에 서 있는 인물은 자신의 파벌 우두머리인 알베리치 주교였다.

     

    풍겨오는 썩은 내에 알베리치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래서 주기적으로 시찰을 나와야 해. 엉망진창이군. 해고다. 당장 치워.”

     

    “히에엑…! 잠, 잠시…!”

     

    클로에는 변명 한 마디 못 하고 다른 치유사들에게 팔을 잡혀 끌려나갔다.

     

     

     

    “흐어어엉, 허어엉.”

     

    클로에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짐이 담긴 박스를 들고 내의원을 나섰다.

     

    “예상보다 오래 버텼다. 진작 안 짤린 게 이상했지.”

    “저러니까 5년이나 말단이었던 거 아냐. 잘 됐어. 주교님 파벌에 자리 하나 비었으니 지원할까.”

     

    다른 치유사들이 놀려대는 소리도 귓가에 들어오지 않는다.

     

    클로에는 앞으로 환자들을 못 보게 되는 게 슬펐다.

     

    미래가 보장된 내의원에서 짤릴 정도면 폐급 중의 폐급이다. 그런 그녀에게 치유를 받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사정 급한 모험가들이나 받아들일까 말까.

     

    “민간요법이 뭐가 어때서….”

     

    치유술을 못 받는 사람들에게는 간절히 필요한데.

     

    클로에는 박스 안에 담긴 고서를 바라보았다.

     

    황실 도서관에서 빌려온 물건이다. 도서관에는 기이한 책이 잔뜩 있었다.

     

    사서가 워낙 일을 대충 하는지라 반납 기한이 한참 넘었는데도 연락이 없다.

     

    아님 사서도 나처럼 진작 짤렸을 지도.

    궁에서 퇴출당하면 어디로 가야 하나.

     

    클로에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길 때였다.

     

    저벅.

     

    또 눈앞에 사람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번엔 새하얀 외투였다.

     

    그러고 보니 고개 좀 들고 다니라고 엄마가 맨날 말했었는데. 부딪칠 뻔했어.

     

    “고개 좀 들고 다녀라. 거북목 되겠다.”

     

    조금은 경박한 말투에 클로에는 살짝 시선을 높여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헉.”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호위기사를 대동하고 멋들어지게 내의원을 활보하는 모습을 멀리서만 볼 수 있었던 높으신 분이 계셨다.

     

    “고, 고르바촙, 선생님…!”

     

    “누구야 그게.”

     

    초면에 실례를 저질렀다. 당황한 나머지 혀를 깨물었다.

     

    라스 고트베르크가 클로에의 짐에서 고서를 집어들었다.

     

    “분명 목록에는 있다고 적혀 있는데 찾을 수가 없어서 한참 고생했잖아. 어쩔 거야?”

     

    “어, 어읍, 죄송.”

     

    라스가 다음으로 클로에의 경단을 집어 들어 살펴본다.

     

    “페니실린이네?”

     

    “헉. 뭐, 뭔지 아세요?”

     

    “흠.”

     

    라스가 슥, 예고도 없이 클로에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클로에는 그의 얼굴을 보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숨과 함께 심장도 멈춘 듯했다.

     

    그가 클로에에게 제안했다.

     

    “너, 간호사 해라.”

     

     

     

    ***

     

     

     

    “너, 간호사 해라.”

     

    “어어업. 어버버법.”

     

    내 제안에 클로에가 다리의 힘이 풀려서는 바닥에서 경기를 일으켰다.

     

    정상화 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도서관 대여 목록에서 클로에라는 이름을 확인하고 찾아다녔다.

     

    황실에 클로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만 열른 명은 되겠다.

     

    주민등록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 하나하나 궁마다 명부를 뒤져야 해서 찾는데 고생했다.

     

     

    고서는 이 세상에 얼마 없는 민간요법에 관한 책이었다.

     

    암만 치유술에 전면 의존하는 게 상식이라도 퍼진 민간요법이 아예 없진 않다.

     

    문제는 개중 정확한 게 몇 개 없어서 오히려 의학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트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가령 체했을 때 손을 따면 나아진다든지 하는 잘못된 민간요법 말이다.

     

    체했을 땐 소화제를 먹어야 한다.

     

    의학적 사고방식을 키울 수 있는 민간요법이 효과가 없다 보니 다시 치유술에 의존하는 현상이 반복되는 게 현실이다.

     

    “가, 간호사아아악. …그, 그런데 간호사가 뭐, 뭔가요?”

     

    “쉽게 말해 내 직속 조수야.”

     

    “지, 직소오오옥.”

     

    클로에가 즉시 나를 향해 큰절을 했다.

     

    “재취, 재취잇! 재취업 시켜주신다며언…!”

     

    중간에 재채기를 한 건가?

     

    사람을 잘못 고른 것 같다.

     

    그녀는 민간요법 고서를 빌려다 푸른곰팡이의 배양까지 시도했다.

     

    최초의 항생제인 페니실린의 재료다.

     

    그런 점에서 고득점을 줘 간호사로 써볼까 했더니 정신없는 애였다.

     

    뭐, 지금 나이로 치면 나보다 누나겠지만.

     

    가르치면 쓸만할지도 모르지.

     

    “그럼 클로에, 교육부터 받자고.”

     

    “교육이요오.”

     

    “그래. 내가 없을 때 황녀님 피 뽑는 일부터 알려줄게.”

     

    클로에가 붕어처럼 입을 동그랗게 말았다.

     

    “…아셀라 황녀 전하요?”

     

    “어. 아셀라 황녀 전하.”

     

    “피를 뽑아요?”

     

    “뽑아야지. 쫘악.”

     

    아이고, 눈물 맺힐 정도로 기뻤나.

    내가 다 뿌듯해지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유니유니야님 후원 감사해요! 재밌는 글 열심히 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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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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