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47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메트로폴 호텔은 루즈 최고의 호텔이라는 찬사를 들을 만한 곳이었다.

       

       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위풍당당한 외관은 말할 것도 없고, 내부 시설이나 가구 등은 모두 최고급이었다. 제공되는 음식이나 서비스도 흠잡을 데 없었다.

       

       위치 역시 중심가에서 떨어져 있어서 휴식을 취하기도 좋았다. 투숙객을 위한 마차가 항상 대기하고 있어서 관광을 즐기기에도 나쁘지 않았다.

       

       이곳에 지내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다.

       

       테라스 너머로 펼쳐진 적갈색 지붕들도, 밤마다 거리를 밝히는 홍등가의 불빛도, 멀리서 들리는 뱃고동 소리도 어느덧 익숙해졌다.

       

       이제는 이곳이 마치 내 집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현실의 내 집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기분을 여기서 처음으로 맛봤다.

       

       샤워를 마친 후 목욕 가운을 걸치고 테라스에 나가 서면, 그 사이로 스며드는 아침 바람이 상쾌했다.

       다가오는 축제의 분위기를 느끼며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즐거웠다.

       하루를 마치고 돌아와 침대에 풀썩 뛰어드는 기분은 최고였다.

       

       침대에 엎드리면 내 손이 딱 닿는 위치에 읽을 만한 잡지들이 쌓여 있었다.

       그렇게 아무 잡지나 골라 읽다가 입이 심심해지면, 맨튤라의 칼날을 꺼내 과일바구니에서 과일을 찍어 가져와 먹었다.

       

       과일바구니에는 달지 않은 종류의 과일들을 가득 채워 두었다.

       호텔 측에 요청만 하면 과일은 얼마든지 구해다 주었다.

       

       옷장 안에는 아나이스가 얼마 전에 선물해 준 방향제를 넣어 두었다. 라일락 향이 나는 것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두니까 내 옷에서도 비슷한 향이 풍겼다.

       

       아나이스도 그걸 느꼈는지 그저께 대뜸 내 옷에 얼굴을 들이대고 냄새를 맡았다.

       곧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알고는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서 물러났지만.

       

       “다, 단장님이 갑자기 앞으로 나오시는 바람에…….”

       “제가요?”

       “그, 그럼……제가 그랬겠어요?”

       

       톡 쏘아붙이는 아나이스.

       이제는 그런 그녀의 말투에도 익숙해졌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애초에 웃는 남자는 그럴 수밖에 없지만.

       

       머리맡 모자걸이에는 엘라와 함께 싸워 얻은 첫 전리품을 걸어 두었다.

       바로 유령의 가면이었다.

       

       프로그램을 상담하러 내 방에 왔던 엘라는 저건 또 어디서 났냐며 질색했다. 시장에서 비슷한 걸 구했다고 적당히 둘러댔다.

       

       “저걸 굳이 왜 산 건데?”

       “후후, 사냥꾼들도 자기가 잡은 사슴 머리를 걸어 두잖아요.”

       “……악취미네.”

       

       동물을 좋아하는 그녀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탁자 위에는 유라크네가 매일 타두고 가는 차가 담긴 찻주전자를 놓아두었다. 그녀는 점심때 한 번, 저녁때 한 번 와서 나와 함께 차를 즐겼다.

       

       주 대화 소재는 그녀가 읽는 잡지와 내가 읽는 잡지에 겹치는 내용이었다. 어제는 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쌍둥이 남매는 그래서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매년 생일날 하루만 만난대요.”

       “마치 견우와 직녀 이야기 같군요.”

       “그게 뭐죠?”

       “제 고향에 있는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단장님 고향 얘기는 처음 들어요. 어딘데요?”

       “……아주 먼 곳입니다.”

       “설마…….”

       

       안색이 심각하게 굳어지는 그녀.

       

       나도 괜히 긴장했다.

       뭔가 알고 있는 건가?

       

       “어비스의 무한 심연……?”

       

       기우였다.

       

       단원 중 가장 친하다고 할 수 있는 그녀도 원더스타인이 사람 배에서 태어났다고는 믿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장식대 위에는 예전에 유튜브에서 보고 배운 방법으로 만든 수건 통닭을 얹어 두었다.

       엘라가 그걸 보고 탐을 냈기에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어느새 모두에게 퍼져나갔는지, 얼마 안 있어 호텔 휴게실에서 단원들이 모여 열심히 수건으로 통닭을 접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내가 생활하는 공간을 내 발로 직접 거닐고, 내 손으로 직접 가꾸고, 손님을 직접 맞이하는 경험은.

       

       이렇게 만들어진 내 공간을 돌아보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뿌듯했다.

       

       보육원 시절에 내 공간이라는 건 사치였다.

       혼자 나와 살면서도 마찬가지였다.

       휴지 걸이 하나의 위치를 바꾸는 일조차 남의 손을 빌려야 했다.

       

       가만히 앉아서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 부탁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하루에도 몇십 번은 부탁하고 사는 처지였다.

       

       자세 좀 바꿔주세요.

       불 좀 켜주세요.

       물 좀 따라주세요.

       턱 밑 좀 닦아주세요.

       

       그런 입장에서 정말로 필요한 것도 아닌 사소한 불만 거리를 고쳐달라고 요청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책상 뒤로 비쭉 튀어나와 있는 콘센트 선이라든가, 비대칭으로 걸려 한쪽이 축 늘어진 외투라든가.

       

       지금 와서야 그런 사소한 것들을 바꿔 나가는 게 삶에 큰 만족을 준다는 걸 깨달았다.

       

       서커스 단원들도 이 생활에 대해 나와 비슷한 소감인 것 같았다.

       

       다만 그들을 감동하게 만든 것은 넓은 욕조도, 일류 요리사가 만든 음식도, 24시간 대기 중인 안마 서비스도 아니었다.

       바로 직원들의 친절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괴물 단원들을 본 첫날부터 조금의 동요도 없이 지금까지 그들을 평범한 손님처럼 대했다.

       무섭게 생긴 것으로는 서커스단 최고인 우몬을 보고도 표정 한 번 변하지 않고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네는 것을 보고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엘라는 조금 자존심 상해했다.)

       

       과연 일류 호텔의 직원들답달까?

       

       지금까지 우리가 거쳐왔던 동네는 그렇지 않았다.

       숙소에서 받아주는 건 고사하고 마을에 들어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나마 출입을 허가받았을 때도 단원들은 마차나 철창 안에 들어가 있어야 했다.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말라는 경비 책임자의 말이 무색하게, 정작 마을 사람들은 우리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철창을 덮은 천을 들쳐 보거나, 마차 창문에 달라붙어 안을 들여다보려는 건 예사였다.

       

       작정하고 괴물 연기를 할 때도 마음이 편하지 못한 그들이었다.

       대놓고 우리에 갇힌 짐승 바라보듯 보는 시선이 얼마나 상처가 됐을까.

       

       나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저쪽 세상에서도 내가 가끔 밖에 나갈 일이 있으면 비슷한 시선을 받았다.

       

       어이구, 저렇게 어찌 산대?

       왜 그 뉴스에 나왔잖아. 그 사건. 몇십억을 받았대.

       저런 꼴로 돈 많으면 뭐해. 건강이 최고야.

       

       누가 건강 포기하는 대가로 돈을 받은 건가.

       괜히 입방아 떠는 사람들이 아니꼬웠다.

       

       단원들도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 대접에 익숙한 단원들이니 호텔 직원들의 미소에 껌뻑 죽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그것이 훈련받은 친절임을, 돈에 의한 것임을 알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친절한 그들이라고 해도 우리가 샤를로티아의 섭정 부인도 극찬했다던 유서 깊은 정원을 다 헤집어놓은 것을 봤을 때조차 미소를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폭발이 일어난 곳을 중심으로 반경 수 m의 땅이 뒤집어 엎어졌다.

       새까맣게 그을린 바닥에서 탄내가 진동했다.

       흙과 풀과 꽃이 두서없이 뒤섞여 있었다.

       

       그렇게 엉망이 된 곳 주변으로 단원들이 여기저기 너부러져 있었다.

       다들 폭발의 충격에 못 이겨 뒤로 넘어간 것이다.

       

       뿌옇게 피어오른 흙먼지가 가라앉았다.

       

       나는 주변을 둘러 단원들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크게 다친 사람은 없어 보였다.

       두개골이 굴러떨어진 스벤을 중상으로 치지 않는다면 말이다.

       

       가장 가까이 있던 엘라는 유라크네가 ‘마법의 올가미’를 이용해 당겨냈고, 그다음 가까이 있던 유라크네는 내 품으로 끌어당겨 보호했다.

       

       내 피부 경도는 3.0으로 ‘사슬 갑옷’에 해당했다.

       돌 파편 정도는 아프긴 하지만 충분히 받아낼 수 있었다.

       

       “단장님, 괜찮으세요?”

       “물론입니다. 설마 이 정도로 제가 다칠까 봐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웃어 보였다.

       그래도 유라크네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혹시 지금……?”

       “아, 웃고 있는 거 맞아요. 정말 괜찮습니다.”

       

       그제야 안심하고 마주 웃는 그녀.

       

       사실 거짓말이었다.

       뒤통수를 때리는 모래와 돌 파편은 억 소리 나올 정도로 아팠다.

       피부 강도가 강해도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상처가 나지 않을 뿐이었다.

       

       설마 앞으로도 계속 이래야 하는 건가?

       처맞으면서 웃어야 해?

       

       상처가 나지 않는다.

       아무리 맞아도 웃는다.

       

       때리는 상대 시선에는 무서워 보이긴 하겠다.

       

       나는 유라크네의 손에 쥔 밧줄을 바라봤다.

       

       현재 우리 서커스단에서 줄타기 곡예를 집중적으로 훈련하고 있는 건 그녀였다.

       그래서 유령에게서 뺏은 마법의 올가미를 그녀에게 주었다.

       

       어차피 주머니에 들어가는 물건도 아니고 나보다 그녀가 쓰는 게 나아 보였기 때문이다.

       

       마법의 올가미는 밧줄을 던져서 올가미에 무언가를 묶기만 한다면, 그때부터는 마우스로 드래그하는 것처럼 밧줄을 자유자재로 부려 올가미에 묶인 물체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반대로 밧줄을 붙잡은 쪽에서 움직이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이 경우는 연습이 많이 필요했다.

       올가미에 묶은 물체가 단단한 지지대여야 하는 건 물론이고, 올가미를 움직여 그 역작용으로 밧줄을 붙잡은 사람이 움직이는 구조라, XYZ축 반전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아직 그녀는 밧줄을 타고 움직이는 건 힘들지만, 올가미로 붙잡은 물체를 빼내는 것은 제법 능숙하게 해냈다.

       

       방금도 불꽃이 튀어 오르는 순간 유라크네가 올가미를 던져 엘라의 발목을 낚아채 폭발에서 떨어트려 놓았다. 그녀의 재빠른 대응이 없었다면, 하마터면 침실에 걸린 유령의 가면을 엘라에게 선물해야 할 뻔했다.

       

       “에구구.”

       

       수풀에서 일어서는 엘라.

       옷에 그을음을 잔뜩 뒤집어썼지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 그을음도 화약을 만드는 과정에서 묻은 것 같았다.

       

       

       *단원 퀘스트-불조심!

       : 엘라는 화약 실험을 하고 싶어 합니다./단원들은 부단장의 실험이 위험해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달성조건

       : 엘라의 실험을 마무리할 것./단원 모두가 화상을 입지 않을 것.

       

       성공 시 보상

       : [데볼루트 +5]/[데볼루트 +10]

       

       실패 시 페널티

       : 없음.

       

       [‘단원 퀘스트-불조심!’을 완료했습니다.]

       

       

       처음으로 단원들 사이의 의견이 ‘충돌’해서 생긴 퀘스트.

       다행히 둘의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고 끝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환상 마법사, 마야 렌데린.

       

       그녀가 서커스단을 찾아왔을 때, 엘라는 기쁨을 참느라 애썼다.

         

       광장에서 일어난 유채꽃밭 소동은 그녀도 들어 알고 있었다.

       그 정도 실력을 지닌 마법사가 서커스단에 합류하는 것은 큰 이득이었다.

         

       그것도 지난 2주간 소품, 의상, 배경 등을 제작하느라 쓰러지기 직전까지 간 엘라는 그녀의 합류가 더욱 반가웠다.

       

       그러나 반가움은 얼마 가지 못했다.

         

       마야와 엘라.

       둘의 상성이 너무 나빴다.

       

       감정 표현에 있어서, 인간관계에 있어서, 일하는 태도에 있어서 모든 면에서 둘은 정반대였다.

       

       엘라는 기쁜 것도 화내는 것도 솔직하게 드러내는 편이었고, 마야는 아무리 격한 말이 오가도 표정이 변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엘라는 모두와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지만, 마야는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데 익숙했다.

       엘라는 연습할 때, 열정과 번뜩임을 중요시했고, 마야는 논리와 설계를 우선 따졌다.

       

       둘이 만난 지 고작 사흘째였지만, 둘은 모든 부분에서 번번이 충돌했다.

       

       단원들 대부분은 둘이 싸울 때 굳이 끼어들려고 하지 않았다.

       

       애초에 둘 다 10대 소녀였다.

       이건 또래들의 싸움인 것이다.

       

       오늘 일어난 사건의 발단도 둘의 말다툼이 원인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2021년 8월 17일
    남겨진국밥 님, 3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연참해달라고 후원까지 해주셨는데..휴재를 해버렸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ㅠㅠ..
    다음화 보기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